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341 - Chapter 350

420 Chapters

340화. 끝을 맡기는 법

339화 이후. 도현은 그날의 방식을 바로 반복하지 않았다. 휴대폰도. 서재도. 시간을 확인하지 못하게 하는 흐름도.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좋았다. 좋았던 걸 바로 규칙으로 만들지 않는 것. 한 번의 강한 경험을 다음 날의 기본값으로 만들지 않는 것. 며칠 뒤. 도현이 먼저 물었다. “오늘도 맡깁니까?” 나는 소파에 기대 있다가 그를 봤다. “주인님이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있습니다.” “뭔데?”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웃었다. “요즘 그 대답 좋아하네.” “당신이 맡기겠다고 하면.” 도현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정합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좋아요.” 그의 눈빛이 바로 달라졌다. “그럼 먼저.” “네.” “오늘 싫은 것.” “눈 가리는 거 싫어요.” “네.” “묶는 것도 싫고.” “네.” “통증은 약하게.” “좋습니다.” “손목은.” 나는 잠깐 고민했다. “괜찮아요.” “강도.” “높게.” 도현이 나를 한동안 봤다. “오늘 피곤하지 않습니까?” “조금.” “그런데 높게?” “응.” “왜?”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생각 안 하고 싶어서.” 도현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 “회사 때문에?” “조금.” “화가 납니까?” “아니.” “슬픕니까?” “아니요.” “그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머리가 시끄러워요.” 도현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걸 없애려고 저한테 맡기는 겁니까?” 나는 잠시 멈췄다. 질문이 생각보다 정확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오늘은 강도를 낮춥니다.” 나는 바로 눈썹을 올렸다. “왜?” “당신이 감정을 피하기 위해 높은 강도를 고르는 거면.” 도현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그대로 받아주고 싶지 않습니다.” “주인님이 정한다며.” “그래서 정하는 겁니다.” 말문이 막혔다. 맞았다. 주도권을 넘긴다는 건. 내가 높은 강도를 말했다고 무조건 거기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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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화. 내가 정한 자리

340화 다음 날.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날처럼 목적지를 없애지도 않았고. 갑자기 끝내지도 않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평소처럼 저녁을 먹었다. 나는 괜히 한 번씩 그를 봤다. 도현은 모르는 척했다. 결국 내가 먼저 물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어요?” 도현이 물컵을 내려놓았다. “왜 그렇게 기대합니까?” “기대하는 거 아닌데.” “그 얼굴은 기대하는 얼굴입니다.” “뭔 얼굴.” “제가 뭔가 할 거라고 기다리는 얼굴.” 정확해서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럼 있어요?”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나를 보다가 말했다. “있습니다.” 심장이 아주 조금 빨라졌다. “뭔데요?” “오늘도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또.” “싫습니까?” “아니.” 나는 웃었다. “그냥 궁금해서.” “궁금한 건 그대로 두십시오.” 요즘 도현이 제일 잘하는 말이었다. 모르는 걸 그대로 두는 것. 다음을 먼저 알려고 하지 않는 것. 나는 일부러 더 묻지 않았다. 저녁을 정리하고. 샤워를 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도현은 침실에 없었다. 거실에도. 서재에도. 잠시 뒤 작은 방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문 쪽으로 갔다. 도현이 안에서 의자 하나를 꺼내고 있었다. “뭐 해요?” “자리 바꿉니다.” “왜?” “오늘 제가 정한 자리에서 하고 싶어서.” 나는 방 안을 봤다. 평소 거의 쓰지 않는 작은 방. 책장 하나. 창문. 낮은 조명. 침대도 없었다. “여기서?” “네.” “왜 여기예요?” 도현은 의자를 방 한가운데 놓았다. “오늘은 침실이 싫습니다.” “이유?” “없습니다.” 나는 웃었다. “요즘 이유 없는 거 좋아하네.” “모든 선택에 의미를 붙이면 피곤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도현은 의자를 등받이가 창문 쪽을 향하게 놓았다. 그리고 나를 봤다. “범위부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피곤합니까?” “많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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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화. 오늘은 내가 고른 옷

도현은 내가 어디에 있을지를 정했던 밤을 다시 반복하지 않았다. 의자도. 작은 방도. 같은 방식의 지시도 없었다. 대신 사흘 뒤.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자 침실 침대 위에 옷 한 벌이 놓여 있었다. 검은 원피스. 내 옷이었다. 새로 산 것도 아니고. 예전에 몇 번 입었던 것. 그 옆에는 얇은 검은 스타킹과 구두까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한참 바라보다가 거실로 나왔다. “도현 씨.” 도현은 소파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네.” “침대 위에 저거 뭐예요?” 그가 너무 태연하게 대답했다. “오늘 입었으면 하는 옷입니다.” 나는 눈썹을 올렸다. “오늘 어디 가요?” “안 갑니다.” “…집에서?” “네.” 웃음이 났다. “집에서 원피스에 구두까지?” 도현이 노트북을 닫았다. 그제야 나를 제대로 봤다. “싫습니까?”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오늘 뭘 하려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최근의 방식이라면. 이게 시작이었다. “먼저 범위 확인할 거죠?” “물론입니다.” “그럼.” 나는 그의 앞에 앉았다. “들어볼게요.” 도현은 천천히 물었다. “오늘 피곤합니까?” “보통.” “몸 상태.” “괜찮아요.” “통증.” “약하게.” “결박.” 잠시 고민했다. “오늘은 싫어요.” “네.” “손목은 가능.” “좋습니다.” “시야 제한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강도.” “높게.” 도현의 시선이 잠시 내 얼굴에 머물렀다. “감정 때문에 높은 걸 원하는 겁니까?” “아니.” “확실합니까?” “네.” “그럼.” 그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오늘은 제가 당신이 입을 것부터 정하고 싶습니다.” 나는 침실 쪽을 한번 봤다. “왜?” “제가 보고 싶어서.” 너무 간단했다. “그게 다?” “네.” “무슨 의미 없어?” “없습니다.” “회사랑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아닙니다.” “무슨 기억도?” “아닙니다.” 도현의 눈빛이 아주 조금 짙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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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화. 고개를 들고 있어

도현은 내가 입을 옷까지 직접 골랐던 밤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흰색 원피스도. 구두도. 그대로 옷장에 돌아갔다. 다음 날은 평범했고. 그다음 날도 별일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방심했다. 금요일 밤. 샤워를 마치고 침실로 들어갔을 때 도현은 창가에 서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침대 끝에 앉으며 물었다. “오늘은 없어요?” 도현이 돌아봤다. “있습니다.” “뭔데요?” “오늘은.” 그가 천천히 가까이 왔다. “당신이 저를 얼마나 오래 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눈썹을 올렸다. “그게 끝?” “아직은.” 또. 그 말. 나는 웃었다. “요즘 주인님 진짜 설명 안 해주네.” “당신이 맡겼으니까.” “그래도 범위는.” “지금 확인합니다.” 도현은 내 앞에 서지 않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물었다. “피곤합니까?” “조금.” “몸 상태.” “괜찮아요.” “통증.” “약하게.” “결박.” “오늘은 싫어요.” “시야 제한.” “싫어요.” “손목.” 나는 잠시 생각했다. “가능.” “강도.” “높게.” 도현의 시선이 잠시 내 얼굴에 머물렀다. “감정 피하려는 건 아닙니까?” “아니.” “확실합니까?” “네.” “좋습니다.” 그는 거기까지 확인한 뒤. 정말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앉아 그를 봤다. 도현이 낮게 말했다. “일어나십시오.” 나는 일어났다. “여기.” 침대와 창문 사이. 그가 가리킨 자리에 섰다. “고개 들어.” 나는 자연스럽게 턱을 조금 들었다. “더.” 조금 더. 도현이 내 앞에 섰다. 거리는 가까웠지만 닿지는 않았다. “저를 보십시오.” 나는 눈을 맞췄다. “계속.” “뭘요?” “보고 있으십시오.” 나는 웃었다. “이게 오늘 플이에요?” 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 “지금부터는 질문 줄이십시오.” 목소리가 낮았다.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도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봤다. 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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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화. 허락한 침묵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날처럼 시선을 오래 붙잡지도 않았고. 내가 손을 올리는 순간을 자기 타이밍으로 정하지도 않았다. 퇴근해서 집에 들어온 뒤. 그는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식탁을 정리하고, 소파에 앉았다. 나는 괜히 한 번씩 그를 봤다. 도현은 정말 모르는 척했다. 결국 내가 먼저 물었다. “오늘은 없어요?” 그가 책에서 눈을 들었다. “왜요?” “그냥.” “어제 했는데 오늘도 해야 합니까?” “그건 아닌데.” “그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이 나를 잠시 보더니 책을 덮었다. “기대했습니까?” “…조금.” “왜?” 나는 잠깐 생각했다. “요즘 주인님이 먼저 정하는 게 좋아서.”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그럼 오늘도 맡깁니까?” “네.” “확실합니까?” “응.” 도현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오늘은 다른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뭔데요?” “말을 줄입니다.” 나는 눈썹을 올렸다. “또 침묵?” “전에 했던 방식과는 다릅니다.” “어떻게?” 도현이 나를 봤다. “오늘은 제가 명령을 적게 합니다.” “그럼 뭐가 세요?” “당신이 먼저 채우지 않는 것.” 나는 잠깐 이해하지 못했다. 도현이 천천히 설명했다.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순간마다.” “응.” “당신이 알아서 다음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아.” “제가 침묵한다고.”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허락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 말이 생각보다 강하게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먼저 범위.” “네.” “피곤합니까?” “보통.” “통증.” “약하게.” “손목.” “가능.” “결박.” “싫어요.” “시야 제한.” “싫어요.” “강도.” 나는 잠시 생각했다. “높게.” 도현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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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화. 늦은 저녁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시간이 밤 아홉 시가 넘었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도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셔츠 소매를 걷은 채 태블릿을 보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오자 바로 화면을 껐다. “안 잤어요?” “기다렸습니다.” “왜?” “같이 먹으려고.” 식탁 위에는 아직 덮개가 씌워진 냄비가 있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 시간까지?” “당신 오늘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잖습니까.” 나는 신발을 벗다 멈췄다. “어떻게 알아요?” “오후 회의 때 커피만 두 잔 마셨다고 했습니다.” “그걸 기억했어?” “네.” 도현은 더 이상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일정을 줄이라거나. 내일부터는 식사 시간을 확보하라거나. 누구에게 맡기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식탁으로 가서 국을 데웠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 “잔소리 안 해요?” “하고 싶습니다.” “근데?” “오늘 하루 굶은 걸 가지고 당신 생활 전체를 제가 고칠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숟가락을 들다 웃었다. “이제 진짜 많이 참네.” 도현이 나를 봤다. “참는 게 아니라 구분하는 겁니다.” “뭘?” “걱정하는 것과 관리하는 것.” 그 말은 짧았지만 정확했다. 나는 더 묻지 않고 국을 먹었다. 따뜻했다. 생각보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한 그릇을 다 비우자 도현이 물었다. “더?” “조금.” 말없이 다시 떠줬다. 그런 저녁이었다. 아무 사건도 없고. 아무 규칙도 없는. 그냥 늦게 돌아온 사람과 기다린 사람의 식사. 샤워를 마치고 침실에 들어왔을 때. 처음 이상한 걸 발견했다. 침대 위에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검은색도. 금속도 아니었다. 평범한 나무 상자. 나는 문에 기대 도현을 봤다. “이건 뭐예요?” 그는 재킷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 쓰려고 가져왔습니다.” “뭔데?” 도현이 내 쪽으로 왔다.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여러 개의 얇은 천 조각이 있었다. 색도 길이도 달랐다. 검은색. 회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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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화. 서재의 빈 벽

다음 날 아침. 도현은 출근 준비를 하다가 서재 앞에서 한참 멈춰 있었다. 나는 커피를 들고 지나가다 물었다. “뭐 봐요?” “벽.” “벽을 왜 그렇게 진지하게 봐.” 도현은 대답하지 않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 벽은 비어 있었다. 예전 같으면 책장이나 화면부터 채웠을 공간. 그가 갑자기 말했다. “그림 하나 걸고 싶습니다.” “그림?” “건축 스케치.” 나는 조금 놀랐다. “직접 그릴 거예요?” 도현이 나를 봤다. “제가?” “건축 좋아했잖아요.” “좋아한다고 그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 배우면 되지.” 나는 별생각 없이 말했는데. 도현은 의외로 오래 조용했다. “왜요?” “그 생각을 안 해봤습니다.” “뭘?” “배우는 것.” 나는 컵을 내려놓았다. “회사랑 상관없는 거라서?” “아마.” 도현은 늘 잘하는 일을 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결과가 예상되는 것. 책임질 수 있는 것. 초보가 되는 선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는 웃었다. “못 그리면 어때요.” “별로일 것 같습니다.” “뭐가?” “제가 못하는 걸 보는 게.” “그럼 더 해봐야겠네.” 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결론이 그렇게 납니까?” “의장님이 못하는 것도 하나 있어야 인간적이지.” “한서윤.” 나는 웃으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날 저녁. 집에 들어온 도현의 손에는 얇고 긴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뭐예요?” “연필.” “설마.” 도현은 쇼핑백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스케치북까지 있었다. 나는 바로 웃었다. “진짜 샀네.” “일단 해보려고 합니다.” “건축 스케치?” “네.” “누가 가르쳐줘요?” “초보자 강의를 신청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도현 씨가 강의를?” “왜 그렇게 놀랍습니까?” “항상 가르치는 쪽이잖아요.” 도현이 잠깐 멈췄다. “그래서.” “응?” “한번 배우는 쪽에 있어보려고 합니다.” 그날 밤. 도현은 서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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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화. 초보자의 첫 수업

도현의 첫 건축 스케치 수업은 토요일 오전이었다. 온라인 강의가 아니라 오프라인.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전날 밤이었다. “직접 가요?” 내가 묻자 도현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사람들이 알아보면?” “모자를 쓰면 됩니다.” “그게 해결책이야?” “마스크도.” 나는 웃었다. “의장님이 숨어서 그림 배우러 가는 거네.” 도현이 나를 봤다. “그 표현은 마음에 안 듭니다.” “왜.” “숨는 게 아니라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겁니다.” “알았어요.” 토요일 아침. 도현은 정말 평범하게 입었다. 검은 니트. 청바지. 모자. 회사에서 보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현관 앞에서 한참 보다가 말했다. “진짜 학생 같아.” “비웃습니까?” “아니.” “그 얼굴은 비웃는 얼굴입니다.” “귀여워서.” 도현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그 말은 하지 마십시오.” “또 왜.” “안 어울립니다.” 나는 결국 웃었다. “잘 다녀와요.” “같이 안 갑니까?” 이번엔 내가 멈췄다. “같이 가도 돼요?” “당신이 원하면.” “수업인데?” “참관은 안 됩니다.” “그럼?” “근처에서 기다리거나.” 도현이 잠시 생각했다. “각자 있다가 끝나고 만나도 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겠다.” 수업은 두 시간이었다. 나는 근처 카페에서 작업을 했다. 처음 한 시간은 괜찮았다. 그다음부터는 괜히 궁금했다. 도현이 뭘 그리고 있을지. 잘하고 있을지. 표정은 어떤지. 휴대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놨다. 수업 중일 텐데. 굳이 연락할 필요는 없었다. 두 시간이 지나자 메시지가 왔다. [끝났습니다.] 짧았다. 나는 바로 답했다. [카페.] 십 분 뒤. 도현이 들어왔다.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표정이 묘했다. “왜 그래요?” “무엇이?” “기분 안 좋아 보여.” “아닙니다.” “그럼?” 도현이 맞은편에 앉았다.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뭐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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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화. 틀린 선을 남겨두는 밤

도현은 다음 날도 스케치북을 펼쳤다.이번에는 내가 먼저 보지 않았다.서재 문은 열려 있었고.안에서는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났다.한참 뒤 도현이 먼저 나를 불렀다.“서윤.”나는 거실에서 고개를 들었다.“왜요?”“잠깐 와보십시오.”서재로 들어가자 책상 위에 어제와 비슷한 건물 그림이 있었다.그런데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틀린 선이 훨씬 많았다.창문 하나는 위치가 어긋났고.기둥은 처음 그은 선보다 옆으로 다시 잡혀 있었다.평소의 도현이라면 중간중간 지웠을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나는 한참 보고 말했다.“오늘은 더 엉망인데.”도현의 표정이 굳었다.“칭찬을 기대한 건 아닙니다만.”“아니.”나는 웃었다.“좋다는 뜻.”“이게?”“응.”“왜?”나는 종이를 가리켰다.“안 지웠잖아요.”도현은 스케치를 내려다봤다.“연습 중입니다.”“뭐를?”“틀린 선을 두는 것.”“그림보다 그게 더 어렵죠?”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런데 대답이 없다는 것 자체가 답 같았다.나는 책상 모서리에 기대었다.“회사에서는 못 하잖아요.”“무엇을?”“틀린 걸 그냥 두는 거.”“그건 경우가 다릅니다.”“알아요.”“회사는 오류가 사람한테 영향을 줍니다.”“응.”“그림은.”도현이 연필을 내려놓았다.“종이 한 장이니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연습하기 좋네.”도현이 나를 봤다.“무엇을?”“모든 실수를 즉시 없애지 않아도 되는 거.”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러다 스케치북을 덮지 않고 그대로 뒀다.“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왜?”“더 하면 고칠 것 같아서.”나는 웃었다.“진짜 도현 씨답다.”“무슨 뜻입니까?”“멈춰야 안 고칠 수 있다는 게.”그의 눈썹이 올라갔다.“비웃습니까?”“아니.”“그 얼굴은.”“좋아서.”나는 서재를 나왔다.뒤에서 도현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그날 저녁.회사 메신저가 한 번 울렸다.나는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들었다.카렐이었다.[내일 오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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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화. 초대받지 않은 저녁

회의가 끝난 건 예상보다 빨랐다.오후 네 시 반.원래라면 남은 시간을 다른 일정으로 채웠겠지만,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한예린이 먼저 물었다.“오늘 일찍 가?”“응.”“무슨 일 있어?”“없어.”“그런데?”나는 가방을 들었다.“없으니까 가려고.”한예린이 잠깐 나를 봤다.“그 말 좀 낯설다.”“나도.”엘리베이터에 타면서 웃었다.비어 있는 시간을 발견하면 채우던 버릇.이제는 가끔 그대로 두려고 했다.그런데 건물 밖으로 나오자 휴대폰이 울렸다.도현.[오늘 저녁 일정 있습니까.]나는 바로 답했다.[없어요.]잠시 뒤.[그럼 7시까지 와주십시오.]주소 하나가 따라왔다.처음 보는 곳이었다.나는 화면을 한참 봤다.[뭐 하는데요?]답은 짧았다.[저녁.]그뿐.나는 웃었다.요즘 도현은 점점 설명을 줄였다.그렇다고 무조건 비밀스럽게 굴지는 않았다.내가 정말 알고 싶다고 하면 말했고.싫다고 하면 취소했다.그런데 오늘은.굳이 먼저 캐묻고 싶지 않았다.나는 주소를 저장했다.도착한 곳은 작은 레스토랑이었다.호텔도 아니고.유명한 곳도 아니었다.조용한 골목 안쪽.예약제인지 테이블도 몇 개 없었다.도현은 이미 와 있었다.정장 대신 짙은 셔츠.재킷은 의자 뒤에 걸려 있었다.나는 맞은편에 앉았다.“갑자기 왜 여기?”“먹고 싶어서.”“뭘?”도현이 메뉴판을 넘겼다.“여기 파스타.”나는 어이없어서 웃었다.“그게 다?”“네.”“나한테 7시까지 오라고 해놓고?”“싫었습니까?”“아니.”“그럼 됐습니다.”정말 별 이유가 없었다.기념일도.계약도.축하할 일도 없었다.그냥 도현이 먹고 싶은 게 있었고.나와 같이 먹고 싶어서 불렀다.나는 메뉴판을 보다가 물었다.“오늘은 내가 골라도 돼요?”도현이 나를 봤다.“당연합니다.”“혹시 또 주인님이 메뉴까지 정하나 해서.”그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오늘은 아닙니다.”“오늘은?”“네.”그 한마디가 괜히 신경 쓰였다.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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