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321 - Chapter 330

420 Chapters

320화. 상자에 넣지 않은 밤

그날 밤이 지나고.나는 아침에 상자를 열었다.도현이 물었다.“무엇을 찾습니까?”“어제 기억.”“물건이 있습니까?”나는 웃었다.“없네.”이름 한 번.목소리.기다림.그건 상자에 넣을 수 없었다.“기록할까?”“어디에?”“종이에 써서.”도현은 잠시 생각했다.“원하면.”나는 종이를 꺼내려다 멈췄다.“아니.”“왜?”“그냥 안 남길래.”도현이 나를 봤다.“좋았던 밤인데?”“응.”“잊을 수도 있습니다.”“그래도.”나는 상자 뚜껑을 닫았다.“잊으면 잊는 거죠.”도현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아쉽지 않습니까?”“조금.”“그런데?”“모든 좋은 걸 다 기록하면.”나는 생각하다 말했다.“기억하는 게 숙제 될 것 같아서.”도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그날 상자에는 아무것도 추가되지 않았다.오히려 그게 마음에 들었다.우리가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반드시 증거가 남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사진도.카드도.기념품도.필요하지 않았다.기억은 변할 수도 있었다.언젠가 세세한 부분은 잊힐 것이다.무슨 옷을 입었는지.몇 시였는지.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그래도 괜찮았다.모든 순간이 영구 보존될 필요는 없었다.점심 무렵 도현이 물었다.“그럼 어제 일은 상자에 아무것도 안 들어갑니까?”“네.”“정말?”“아쉬워요?”“조금.”“그럼 도현 씨는 넣고 싶은 거 있어요?”그가 잠시 고민했다.그러다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왜?”“당신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어떤 거?”“그냥 있었던 밤으로 두는 것.”나는 웃었다.“좋네.”상자는 점점 채워졌지만.모든 변화가 상자에 들어가지는 않았다.일부는 물건이 됐고.일부는 사진이 됐고.일부는 그냥 지나갔다.그리고 지나간 것 역시.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우리 관계에는 기록되지 않은 날이 훨씬 더 많았다.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았던 저녁.말없이 같은 소파에 앉아 있던 시간.서로 이름 한 번 부르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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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화. 묻지 말고 맡겨

며칠 동안 도현은 이상하게 조용했다.회사 일 때문은 아니었다.집에서도 평소처럼 밥을 먹고, 책을 보고, 내 얘기를 들었다.그런데 밤이 되면 한 번씩 나를 오래 봤다.뭔가 말하려다가 접는 얼굴.결국 내가 먼저 물었다.“왜요?”도현이 책을 덮었다.“하나 바꾸고 싶은 게 있습니다.”“뭔데요?”그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제가 원하는 걸 매번 당신에게 먼저 묻는 방식.”나는 눈썹을 올렸다.“그게 왜요?”“필요한 순간도 있습니다.”“응.”“하지만 요즘은 제가 뭘 원하는지 말하기 전에 당신에게 계속 선택지를 넘기고 있습니다.”나는 조용히 들었다.“손목 괜찮습니까.”“응.”“목소리는 어떻습니까.”“응.”“어디까지 원합니까.”“응.”도현이 내 눈을 봤다.“그런 확인이 필요할 때는 계속 할 겁니다.”“그럼 뭐가 달라져요?”“시작.”짧은 대답이었다.“오늘은 제가 먼저 정하고 싶습니다.”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뭘요?”“전부는 아닙니다.”도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당신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응.”“제가 뭘 할지 하나하나 미리 묻지 않고.”“응.”“제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이끌고 싶습니다.”그 말이 생각보다 묵직하게 들렸다.요즘 우리는 너무 잘 물었다.너무 잘 확인했고.너무 잘 멈췄다.그게 나쁜 건 아니었다.오히려 필요했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도현이 매번 내게 선택지를 돌려주는 일이 많아졌다.내가 원하는 걸 묻고.내가 범위를 정하고.내가 다음 행동까지 말해줘야 하는 날도 있었다.나는 웃었다.“주인님답지 않았죠?”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조금.”“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어요?”“네.”“그래서?”그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오늘은 주도권을 주십시오.”심장이 조금 빨라졌다.“그냥?”“아닙니다.”“그럼?”“먼저 범위는 정합니다.”역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도현은 바로 물었다.“싫은 것부터.”나는 생각했다.“안대 싫어요.”“네.”“묶어서 저온초 하는것도 오늘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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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화. 선택하지 않는 밤

어젯밤 이후. 도현은 정말 달라졌다. 무턱대고 강해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내가 허용한 범위를 먼저 확인한 뒤에는. 그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걸 더 분명하게 선택했다. 예전처럼 매 순간. “어떻게 할까요.” “어디까지 원합니까.” “다음은?” 하고 되묻지 않았다. 그게 생각보다 컸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모든 걸 설계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싫은 걸 말하는 건 필요했다. 멈추고 싶은 순간을 말하는 것도. 하지만 좋아하는 걸 매번 세세하게 정하고. 다음 행동까지 내가 골라주면. 도현은 주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요청을 수행하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날 밤. 나는 먼저 물었다. “오늘도?” 도현이 소파에서 나를 봤다.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어제처럼.” 그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주도권?” “네..”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도 맡기고 싶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먼저.”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놨다. “싫은 것만 말하십시오.” “싫은 것?” “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어제와 같은 걸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은 손목 괜찮아요.” 도현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네.” “알겠습니다.” “안대와 묶는거 오늘은 괜찮은데.” 내가 잠시 멈췄다. “완전히 가리는 건 싫어요.” 도현은 바로 이해했다. “시야를 제한하는 정도?” “응.” “통증은?” “좋아요” “좋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봤다. “오늘은 내가 뭘 원하냐고 계속 묻지 마요.” 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 부분은 어제 들었습니다.” “확인.” “필요할 때만 하겠습니다.” “응.” “색깔은 그대로.” “네.” “말은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알아요.” 도현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 순간부터. 나는 일부러 머릿속을 비우려고 했다. 오늘 뭘 할까. 얼마나 강할까. 어떤 방식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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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화. 오늘은 주인님이 정해

도현이 먼저 말했다.“오늘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나는 침대 끝에 앉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뭘 할지도?”“네.”“정말?”“당신이 먼저 허용 범위를 정하면.”그 말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졌다.요즘 도현은 내가 주도권을 맡기면 예전처럼 매 순간 선택지를 돌려주지 않았다.대신 처음에 더 꼼꼼하게 확인했다.하지 않을 것.할 수 있는 것.오늘의 몸 상태.멈추는 신호.그다음은 자신이 정했다.“싫은 것부터.”나는 잠시 생각했다.“통증은 약하게.”“네.”“묶는 건.”조금 망설였다.“오늘은 괜찮아요.”도현의 시선이 달라졌다.“어디까지?”“오늘은 어디든 근데 스스로 풀 수 있는 방식“네.”“빨강은 즉시 종료.”“네.”“노랑은 강도 낮춤.”“응.”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제가 주도합니다. 괜찮습니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주인님.”그 순간부터 도현의 말이 짧아졌다.“일어나.”나는 일어났다.“이리와 .”한 걸음.“멈춰.”그는 내가 움직임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그리고 손을 내밀었다.“손.”나는 손을 올렸다.도현은 바로 잡지 않았다.손바닥을 펴게 하고.손가락을 한번 확인하고.손목에 무리가 없는지 천천히 움직여봤다.그런 다음 준비해둔 부드러운 스트랩을 보여줬다.“이건?”내가 물었다.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나는 바로 웃었다.“아, 묻지 말랬지.”“말하는 걸 금지한 건 아닙니다.”“그럼?”“제가 뭘 할지 미리 확인하려 하지 말라는 겁니다.”“알겠어요.”그는 스트랩을 아주 느슨하게 연결했다.손을 완전히 고정한 게 아니었다.조금 움직이면 빠질 정도.“확인.”나는 손을 움직여봤다.“괜찮아요.”“좋아.”목소리가 한 단계 낮아졌다.그는 나를 침대 가까이 세웠다.“내가 풀라고 하기 전까지 손으로 먼저 잡지 마십시오.”“네.”“불편하면?”“말해요.”“좋아.”도현은 나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이번에는 기다림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내가 모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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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화. 세 개의 선택지만

다음 밤.도현은 예상과 전혀 다른 걸 꺼냈다.세 장의 작은 카드.아무 글자도 없었다.“이게 뭐예요?”“오늘 당신이 고를 건 세 가지뿐입니다.”“뭔데요?”도현은 카드를 뒤집지 않았다.“첫째, 시작할지 말지.”“네.”“둘째, 오늘 강도를 낮음·중간·높음 중 하나.”“네.”“셋째.”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중간에 멈출지 말지.”나는 잠시 카드를 봤다.“그 뒤는?”“제가 정합니다.”“진짜?”“네.”“카드에는 아무것도 없는데.”“상징입니다.”나는 웃었다.“요즘 주인님 이런 거 좋아하네.”“당신이 선택을 많이 해야 편해지는 사람이라.”그가 카드를 손끝으로 밀었다.“오늘은 선택 개수를 줄여보려고 합니다.”나는 첫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아무것도 없었다.“시작.”두 번째.“높음.”도현의 시선이 바로 올라왔다.“확실합니까?”“네.”“오늘 컨디션은?”“괜찮아요.”“통증 범위는?”“중간.”“좋습니다.”그는 카드를 치웠다.“이제부터는 제가 합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도현은 도구를 거의 쓰지 않았다.대신 자세와 거리.목소리.속도.그 세 가지를 계속 바꿨다.“거기 가만히 있어 .”“멈춰.”“가까이.”“고개들어 나봐 .”짧은 지시가 이어졌다.나는 한 번씩 일부러 느리게 움직였다.도현이 알아차렸다.“시험합니까?”나는 웃었다.“조금.”“하지 마십시오.”“왜요?”“오늘은 제가 리드하는 날입니다.”목소리가 낮아졌다.“제가 얼마나 강하게 말해야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날이 아닙니다.”말문이 막혔다.맞았다.나도 모르게 또 도현을 시험하고 있었다.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그 이후에는 장난치지 않았다.도현은 내가 진짜 긴장하는 순간과.장난치는 순간을 구분하려 했다.한 번은 손이 허리에 닿자 내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그는 즉시 멈췄다.“노랑?”“아니요.”“확실해?”“네.”“그럼 왜?”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좋아서.”도현의 눈빛이 한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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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화. 의장실의 문이 닫힌 뒤

회사는 평범했다.오전 회의.점심 미팅.오후 검토.그런데 저녁 여섯 시가 넘어가자 본사 층이 빠르게 비었다.나는 마지막 자료를 전달하러 도현의 의장실에 들어갔다.“여기.”도현이 자료를 받았다.“끝났습니까?”“네.”“오늘 바로 집에 갑니까?”“그럴 건데.”도현은 시계를 봤다.“십 분만.”“왜?”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문을 잠근 건 아니었다.그저 닫았다.“회사에서는 안 하기로 했잖아요.”나는 바로 말했다.도현이 멈췄다.“플레이를 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그럼?”“앉으십시오.”나는 의아했지만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도현은 책상 의자가 아니라 내 앞에 섰다.“오늘 집에 가면.”“네.”“제가 정합니다.”심장이 아주 조금 빨라졌다.“지금부터?”“아닙니다.”“그럼 왜 여기서 말해요?”“미리 알고 있는 상태에서도 맡길 수 있는지 보고 싶어서.”나는 그를 올려다봤다.“뭘 할지는?”“말하지 않습니다.”“강도?”“당신이 정합니다.”“높음.”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도현의 눈빛이 짙어졌다.“확실합니까?”“네.”“오늘 피곤하지 않습니까?”“괜찮아요.”“좋습니다.”그는 그대로 한 걸음 물러났다.“이제 업무 끝.”“그게 다?”“네.”“여기서 아무것도 안 해요?”“안 합니다.”나는 웃었다.“괜히 긴장했네.”도현은 아주 태연했다.“그 긴장을 집까지 가져가십시오.”나는 그대로 굳었다.도현이 먼저 문을 열었다.“갑시다.”“주인님.”그가 돌아봤다.“네.”“일부러죠?”“무엇을?”“이러는 거.”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네.” 차 안에서도 아무것도 없었다.도현은 회사 얘기만 했다.카렐 보고서.다음 주 일정.새로운 인력 배치.나는 괜히 더 신경 쓰였다.집에 도착했다.현관문이 닫혔다.도현은 재킷을 벗었다.나는 기다렸다.그가 물었다.“왜 거기 서 있습니까?”“주인님이 정한다며.”“그렇습니다.”“그럼.”“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나는 어이가 없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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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화. 카렐의 휴가

카렐이 갑자기 휴가 신청서를 냈다.일주일.나는 화면을 한참 봤다.“무슨 일 있어요?”카렐이 담담하게 말했다.“없습니다.”“그런데 일주일?”“신혼여행 이후 제대로 쉰 적이 없습니다.”“아.”그제야 생각났다.결혼한 뒤 카렐은 오히려 더 바쁘게 일했다.새로운 물류 조정.도시 간 인력 통합.파리 일정.내가 물었다.“신부랑 가요?”카렐의 눈썹이 올라갔다.“그건 휴가 승인에 필요한 정보입니까?”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아니.”“그럼 비공개로 하겠습니다.”“알겠어요.”신청서에 승인 버튼을 눌렀다.카렐이 조금 놀랐다.“질문 더 안 하십니까?”“왜?”“평소에는 업무 인수인계 계획부터 묻습니다.”나는 화면을 봤다.이미 인수인계 문서가 첨부돼 있었다.“있잖아요.”“네.”“그럼 됐죠.”카렐이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그가 나가고.한예린이 들어왔다.“카렐 일주일 쉬어?”“응.”“세상 좋아졌네.”나는 웃었다.“내가 그렇게 못 쉬게 했어?”“직접은 아닌데.”“그럼?”“총괄이 일하니까 다들 따라 일했지.”그 말에 조금 찔렸다.회사가 확장을 멈추고.성장 목표를 낮추고.퇴사율도 줄었지만.리더가 쉬지 않으면 아래도 진짜 쉬기 어려웠다.그날 나는 내 일정도 다시 봤다.다음 달.비어 있는 이틀.예전 같으면 회의를 넣었을 자리.이번에는 그대로 뒀다.도현에게 말하자 그가 물었다.“어디 갈 겁니까?”“안 정했어요.”“저와?”나는 웃었다.“벌써?”도현이 잠시 멈췄다.“또 제 습관이 나왔군요.”“응.”“그럼.”그가 고쳐 말했다.“당신이 정하면 알려주십시오.”“도현 씨랑 갈 수도 있고.”“네.”“혼자 있을 수도 있고.”“네.”이번에는 표정이 아주 조금만 굳었다.나는 바로 알아챘다.“불편하죠?”“조금.”“그래도?”“휴가를 제 감정에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도현은 이제 그 말을 힘들지 않게 했다.완전히 편한 건 아니어도.행동으로 바꾸지 않았다.카렐의 일주일 휴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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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화. 등 뒤의 명령

그날은 도현이 처음부터 말했다.“오늘은 뒤를 보지 마십시오.”나는 바로 눈썹을 올렸다.“안대 안 쓰고?”“네.”“그럼 그냥 뒤돌지 말라는 거?”“맞습니다.”“왜?”도현의 입가가 조금 움직였다.“묻지 말라고 했습니다.”나는 웃었다.“알았어요.”범위 확인은 이미 끝냈다.통증 약하게.결박 없음.눈 가림 없음.손목 강하게 잡는 건 가능.도현 주도.강도는 높음.나는 창가 쪽을 바라보고 섰다.뒤에서 도현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전부 볼 수 있는데.일부러 뒤만 보지 않는 것.그게 묘하게 달랐다.발소리가 가까워졌다.그리고 멈췄다.아무 접촉도 없었다.“주인님.”“네.”“진짜 뒤 보면 안 돼요?”“보고 싶습니까?”“조금.”“아직은 안 됩니다.”목소리가 낮았다.나는 앞을 봤다.잠시 뒤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예고 없이.하지만 허용한 범위 안에서.힘은 분명했다.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보려 했다.“앞.”그 한마디에 다시 멈췄다.“색깔.”“초록.”“좋아.”손목을 잡은 채 몸을 끌지 않았다.대신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놓게 했다.그다음은 어깨.등.허리.접촉 위치가 바뀔 때마다 나는 뒤를 보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뭡니까?”도현이 물었다.“뒤 보는 거.”낮은 웃음.“그럴 줄 알았습니다.”“언제 봐도 돼요?”“제가 말할 때.”“주인님.”“네.”“좀 치사해.”“오늘 주도권은 제게 있습니다.”나는 웃었다.그 뒤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도현은 힘을 높였다가 줄였다.가까이 섰다가 떨어졌다.어느 순간에는 내 손을 다시 잡아 뒤로 가져갔지만 묶지 않았다.자기 손으로만 잡았다.“이 정도?”“네.”“더?”나는 잠시 생각했다.“조금.”힘이 더 들어갔다.그러다 내가 손가락을 긴장시키자 바로 줄었다.“노랑?”“아니요.”“확실해?”“네.”도현은 다시 이어갔다.한참 뒤.드디어 말했다.“돌아보십시오.”나는 거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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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화. 아무것도 고르지 않는 저녁

금요일.도현이 말했다.“오늘 저녁부터는 아무것도 고르지 마십시오.”나는 식탁 앞에서 멈췄다.“플레이 말고 저녁부터?”“네.”“메뉴도?”“제가 정합니다.”“옷도?”“외출할 거라면.”“뭐야.”나는 웃었다.“하루 체험?”“오늘 밤까지.”“싫으면?”“즉시 끝냅니다.”“왜 해보고 싶어요?”“당신이 회사에서 하루 종일 고르는 사람이니까.”도현은 아주 평범하게 말했다.“가끔은 선택을 쉬어도 되는지 궁금했습니다.”생각보다 마음이 움직였다.“좋아요.”“진짜?”“응.”그날 저녁 메뉴부터 도현이 정했다.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국물 요리.음료.디저트.집에서 볼 영화.처음에는 편했다.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자 입이 근질거렸다.“영화 다른 거 볼까?”도현이 나를 봤다.“선택하고 싶습니까?”나는 멈췄다.“아.”“원하면 지금 끝내도 됩니다.”“아니.”나는 다시 기대었다.“계속.”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영화가 끝난 뒤.분위기가 바뀌었다.“지금부터는.”그가 낮게 말했다.“저녁과는 다릅니다.”나는 바로 알아들었다.“범위 확인?”“네.”그건 선택하지 않는 밤이라도 생략하지 않았다.오히려 더 확실했다.싫은 것.가능한 것.컨디션.강도.나는 높은 쪽을 골랐다.그게 오늘 내가 하는 마지막 선택이었다.도현이 말했다.“좋습니다.”그 뒤에는 정말 내가 고를 일이 거의 없었다.어디에 있을지.언제 가까이 올지.언제 멈출지.도현이 정했다.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소파에서 일어나고.침실로 이동하고.그 앞에서 멈췄다.도현은 나를 계속 몰아붙이지 않았다.오히려 중간에 예상보다 긴 휴식을 넣었다.“왜 쉬어요?”“제가 정했습니다.”“아.”나는 웃었다.“진짜 아무것도 못 고르네.”“싫습니까?”“아니.”“그럼 쉬십시오.”그 말까지 명령처럼 들렸다.나는 침대에 기대었다.도현은 물을 건넸다.몇 분 뒤.다시 시작한 흐름은 처음보다 훨씬 강했다.몸을 억지로 움직이지 않고.자세와 거리.목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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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화. 한예린의 제안

한예린이 갑자기 유럽 재무·거버넌스 구조를 분리하자고 제안했다.“총괄 산하에 있긴 하지만, 승인 체계를 더 독립적으로.”나는 자료를 읽었다.“왜?”“지금은 네가 너무 많이 보고 있어.”“카렐한테도 많이 넘겼는데.”“운영은.”한예린이 손가락으로 표를 짚었다.“재무 쪽은 아직 네 승인 비중이 높아.”틀린 말이 아니었다.회사를 확장하지 않기로 한 뒤.오히려 내부 구조를 더 깊게 보게 됐다.도시를 늘리는 대신.있는 다섯 도시를 더 안정적으로 만드는 과정.그런데 나는 여전히 여러 승인선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내 거 줄이자고?”“응.”“예린 씨 권한 늘리고?”“응.”나는 웃었다.“자기 권한 달라고 직접 말하네.”한예린도 웃었다.“줘도 감당할 수 있으니까.”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좋아요.”“바로?”“한 달 시험.”“왜 한 달?”나는 멈췄다.또 기간을 정하려 했다.한예린이 웃었다.“습관 나왔지?”“…응.”결국 기간도 고정하지 않았다.실무 전환 후 문제가 생기면 조정하기로 했다.도현에게 말하자 그가 물었다.“불안합니까?”“조금.”“왜?”“내가 안 보면 사고 날까 봐.”도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그 사고가.”“응.”“당신이 봐야만 막을 수 있는 사고인지 모르겠습니다.”나는 웃었다.“모르겠다고?”“네.”“근데 맞는 말 같아.”이렇게 하나씩.나는 회사에서도 주도권을 놓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다만.집에서와는 달랐다.회사에서는 주도권을 넘긴다고 책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그래서 더 어려웠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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