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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화. 보고하지 않은 저녁

오후 네 시. 파리 쪽에서 두 번째 진행 보고가 올라왔다. 새 외주 업체가 첫 현장 일정까지 문제없이 맞췄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파일을 열어 끝까지 읽었다. 특이사항 없음. 비용 초과 없음. 일정 지연 없음. 그게 전부였다. 예전 같으면 담당 팀장에게 한 번쯤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현장 반응은?’ ‘다른 후보와 비교하면?’ ‘다음 일정도 같은 업체로 갈 건가요?’ 그런데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파일을 닫았다. 한예린이 맞은편에서 물었다. “끝?” “응.” “아무 말도 안 해?” “뭘.” “네가 처음에 다른 업체가 낫다고 했잖아.” “그랬지.” “지금은 잘하고 있고.” “응.” “그럼 인정한다든지.” 나는 잠깐 생각했다. “굳이?” 한예린의 눈썹이 올라갔다. “웬일.” “내가 선택 안 한 업체가 잘한다고 매번 내가 인정 도장 찍어줘야 해?” “그건 아니지.” “그 사람들이 이미 결과 내고 있는데.”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냥 잘 돌아가면 됐지.” 한예린이 나를 한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제일 낫겠다.” “뭐가?” “이제 모든 결과를 네 판단이랑 비교하지 않는 거.” 나는 바로 반박하려다가 멈췄다. 완전히 안 하는 건 아니었다. 파일을 처음 열었을 때도. 속으로는 분명 생각했다. ‘내가 고른 업체였으면 어땠을까.’ 그런데 거기까지만 했다. 비교할 수는 있었다. 다만. 그 비교를 다시 팀의 결정 위에 올릴 필요는 없었다. 그때 카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총괄님.” “왜?” 그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바르샤바 쪽 운영안입니다.” “결재?” “아닙니다.” 나는 화면을 봤다. “그럼 왜 나한테 줘.” 카렐이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 “참고용입니다.” “참고?” “결정은 현지 책임자가 합니다.” 나는 다시 화면을 봤다. 자료 상단에도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참고 공유 / 승인 불필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런 표시까지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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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화. 오늘은 끝까지 맡겨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부터 평소와 달랐다.도현은 먼저 들어와 있었고.거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텔레비전도.음악도 없었다.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그를 봤다.“오늘 일찍 왔네요.”“네.”도현은 소파에 앉아 있지 않았다.식탁 옆에 기대 서 있었다.검은 셔츠.소매는 손목까지 내려와 있었고.평소 집에서처럼 편하게 풀어진 모습도 아니었다.나는 구두를 벗다 말고 물었다.“왜 그렇게 봐요?”도현이 천천히 내 쪽으로 왔다.“오늘은.”목소리가 낮았다.“제가 조금 세게 하고 싶습니다.”손이 멈췄다.요즘 도현은 자기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이렇게 먼저.명확하게 강도를 말하는 날은 많지 않았다.나는 그를 올려다봤다.“어느 정도?”“평소보다 확실하게.”“아프게?”“통증은 중간 이상 안 갑니다.”“묶어요?”“네.”이번에는 대답이 빨랐다.나는 잠시 생각했다.“손목?”“손목만.”“발목은 싫어요.”“안 합니다.”“목도.”“건드리지 않습니다.”“눈은?”도현은 잠시 나를 봤다.“가리고 싶습니다.”나는 숨을 한번 천천히 들이마셨다.“괜찮아요.”“확실합니까?”“네.”“중간에 바꾸고 싶으면.”“말할게요.”“색깔.”“초록.”그제야 도현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좋아.”그리고.“구두 다시 신으십시오.”나는 눈썹을 올렸다.“왜?”“제가 아직 벗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심장이 바로 뛰었다.조금 전까지 벗으려던 구두.나는 말없이 다시 발을 넣었다.도현은 그 모습을 끝까지 봤다.“일어나십시오.”나는 섰다.“가방은 그대로 두고.”“네.”“저 보십시오.”시선을 맞췄다.도현이 가까이 왔다.이번에는 바로 손을 대지 않았다.몇 초 동안.정말 보기만 했다.“오늘 회사에서 힘들었습니까?”“보통.”“피곤합니까?”“조금.”“그래도 계속 가능합니까?”“네.”“좋습니다.”그는 더 이상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손이 내 허리에 닿았다.처음부터 힘이 확실했다.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셔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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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화. 비 오는 밤의 규칙

비가 왔다.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퇴근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유리창 밖으로 번지는 빛을 보다가.나는 노트북을 닫았다.한예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진짜 바로 가.”“왜.”“비도 오고.”“그게 무슨 상관이야.”“이럴 때 또 회사에 남아 있으면 집 가기 더 싫어져.”나는 웃었다.“오늘은 안 남아.”카렐도 이미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나는 괜히 물었다.“다 했어?”그가 고개를 들었다.“네.”“진짜?”“왜 또 확인하십니까.”“그냥.”“오늘 제 승인 건 없습니다.”“알아.”“그럼 가셔도 됩니다.”이제는 카렐까지 나를 내보냈다.나는 가방을 들었다.“다들 왜 이래.”한예린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네가 집에 가야 우리도 마음 편하니까.”“무슨 논리야.”“총괄이 남아 있으면 괜히 다들 늦게까지 있어야 할 것 같잖아.”그 말에는 반박하기 어려웠다.나는 결국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집에 도착했을 때.바지가 조금 젖어 있었다.우산을 썼는데도 바람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현관문을 열자 도현이 바로 나왔다.“많이 젖었습니까?”“조금.”“코트.”나는 벗어 건넸다.그는 바로 욕실 근처 건조대에 걸었다.“수건 가져다줄까요?”“됐어요.”“머리 젖었습니다.”“이 정도는.”도현이 내 앞에 섰다.“가만히.”나는 웃었다.“왜.”그가 수건을 가져와 머리끝을 먼저 눌렀다.세게 문지르지 않고.물기만 천천히 닦았다.“이렇게까지?”“감기 걸리면 제가 귀찮습니다.”“내가 아픈데 왜 도현 씨가 귀찮아.”“간호해야 하니까.”“진짜 낭만 없어.”도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그래도 합니다.”나는 웃었다.그가 머리를 닦는 동안.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따뜻했다.저녁은 뜨거운 국물이었다.나는 한입 먹고 바로 말했다.“좋다.”도현이 물었다.“맛이?”“응.”“다행입니다.”“도현 씨가 끓였어요?”“배달.”나는 바로 웃었다.“역시.”“왜 웃습니까.”“아까 분위기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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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화. 문턱을 넘기 전

도현이 집에 들어온 건 밤 아홉 시가 가까워서였다.나는 침실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현관문이 닫히고.재킷을 벗는 소리.잠시 뒤 침실 문이 열렸다.“아직 일합니까?”“끝났어요.”나는 화면을 닫았다.도현은 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흰 셔츠.검은 슬랙스.넥타이는 이미 풀어 한쪽 손에 들고 있었다.그런데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나는 고개를 기울였다.“왜 거기 있어요?”대답 대신.도현이 나를 한참 바라봤다.그 시선 때문에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도현 씨.”“일어나십시오.”목소리가 낮았다.나는 바로 알았다.노트북을 옆으로 밀고 일어났다.“주인님?”“네.”그는 여전히 문밖이었다.“여기로.”나는 침실 문 쪽으로 갔다.그런데 문턱 바로 앞에서.“멈추십시오.”한 걸음을 남겨두고 멈췄다.도현은 복도 쪽.나는 침실 안.문턱 하나가 우리 사이에 놓였다.“왜요?”도현이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의자 위에 툭 내려놨다.“오늘은 먼저 나오지 마십시오.”“방에서?”“네.”“주인님이 들어올 거예요?”“그것도 제가 정합니다.”나는 피식 웃었다.“또 기다리게 하려고?”도현의 눈빛이 조금 짙어졌다.“웃지 마십시오.”그 한마디에.웃음이 바로 멈췄다.강하게 말한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목소리 하나가 더 선명했다.나는 입술을 다물었다.도현이 아주 천천히 한 걸음 가까이 왔다.하지만.문턱은 넘지 않았다.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려 했다.“손.”멈췄다.“내리십시오.”천천히 내렸다.“제가 먼저 닿을 때까지.”“네.”도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그냥 나를 봤다.시선이 얼굴에서.어깨.허리.다시 얼굴로 올라왔다.옷을 벗기지도 않았는데.괜히 피부까지 드러난 기분이 들었다.“왜 그렇게 봐요.”“보고 싶어서.”“뭘.”도현이 낮게 말했다.“제가 못 들어오게 하면.”잠깐.“당신이 얼마나 먼저 오고 싶어지는지.”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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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화. 잠그지 않은 서랍

도현은 출근하기 전부터 서랍 하나를 열어둔 채였다.나는 침실에서 나오다가 그걸 보고 멈췄다.“안 닫아요?”“일부러.”“왜?”도현은 넥타이를 매며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오늘 저녁에 쓸 겁니다.”나는 자연스럽게 열린 서랍 쪽을 봤다.안에는 익숙한 것들도 있었고.처음 보는 것도 있었다.검은 장갑.넓은 가죽 커프.그리고 길이가 다른 얇은 스트랩 두 개.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뭐 꺼낼 건데요?”“아직 안 정했습니다.”“진짜?”“네.”“그럼 왜 열어놨어.”도현이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봤다.“당신이 하루 종일 생각하게 하고 싶어서.”순간 말문이 막혔다.“그게 목적?”“조금.”“주인님 진짜 요즘.”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출근하십시오.”그 한마디를 남기고 먼저 나갔다.나는 열린 서랍을 한 번 더 보고.결국 그대로 닫지 않았다.*문제는.정말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다는 거였다.회의 도중에도.메일을 읽다가도.문득 아침의 열린 서랍이 떠올랐다.무엇을 쓸지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그 말이 더 문제였다.정해진 게 없으니까.상상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한예린이 내 이름을 두 번 불렀다.“서윤아.”“응.”“들었어?”“들었지.”“내가 방금 뭐라고 했는데.”나는 잠깐 멈췄다.한예린이 바로 웃었다.“오늘 왜 이래.”“아무것도 아니야.”“도현 씨?”나는 바로 노트북을 다시 봤다.“회의나 해.”“맞네.”카렐이 화면을 넘기며 말했다.“다음 안건입니다.”나는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아침부터 머릿속 한쪽에 남아 있던 서랍은.회의가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자.거실은 조용했다.도현은 서재에 있었다.나는 일부러 바로 침실로 가지 않았다.가방을 내려놓고.물부터 마셨다.옷도 갈아입었다.평소처럼 행동하려고 했는데.결국 십 분도 못 버텼다.“도현 씨.”서재 문을 열었다.그는 책상 앞에서 자료를 보고 있었다.“네.”“서랍.”도현이 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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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화. 다시 걸린 바다

차명희의 두 번째 전시는 첫 번째보다 훨씬 작았다.호텔 갤러리도.재단 행사도 아니었다.도심 외곽의 작은 전시 공간.작품도 열두 점뿐이었다.나는 초대장을 받아들고 한참 들여다봤다.“이번에는 진짜 조용하게 하시나 봐요.”도현이 옆에서 넥타이를 매며 말했다.“본인이 그렇게 원했습니다.”“사람도 많이 안 부르고?”“가족이랑 가까운 지인 정도.”나는 초대장 뒷면을 봤다.전시 제목은.《돌아오는 물결》첫 번째 전시 때보다 제목도 훨씬 단순했다.“준호 씨도 와요?”내가 묻자.도현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나는 바로 웃었다.“왜.”“아무것도 아닙니다.”“표정 봤는데.”“오시겠죠.”“싫어요?”도현은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봤다.“싫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그럼?”“아직 조금 어색합니다.”솔직했다.“엄마 친구잖아요.”“압니다.”“오래된.”“그것도.”“그럼 됐네.”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당신은 왜 그렇게 쉽게 말합니까.”“내 엄마 아니니까.”그가 바로 나를 봤다.나는 웃었다.“농담.”“별로입니다.”“알았어요.”나는 재킷을 챙겼다.“그래도 오늘은 아무 말 하지 마요.”“제가 무슨 말을 합니까.”“준호 씨한테.”“안 합니다.”“엄마한테도.”“안 한다고 했습니다.”“표정도.”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표정까지 관리하라고?”“조금.”“그건 노력하겠습니다.”그 정도면 됐다.*전시장에 도착하자.명희는 입구 가까이에 서 있었다.정장도.화려한 드레스도 아니었다.짙은 청색 원피스에 얇은 회색 재킷.머리도 평소보다 자연스럽게 풀어져 있었다.나는 먼저 다가갔다.“어머니.”명희가 웃었다.“왔구나.”“축하드려요.”“고맙다.”도현도 옆에서 짧게 말했다.“축하드립니다.”명희는 아들을 보더니 눈썹을 올렸다.“이번에는 평가 안 할 거지?”도현이 바로 대답했다.“지난번에도 안 했습니다.”“표정으로 했어.”나는 웃음을 참았다.명희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얘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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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화. 그림자만 남은 방

도현의 바다 그림은 다음 날에도 완성되지 않았다.정확히는.완성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퇴근하고 서재에 들어가 보니 스케치북은 어제 그 자리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고.수평선도.의자 두 개도.더해진 게 없었다.나는 문틀에 기대 물었다.“오늘은 안 그렸어요?”도현이 노트북에서 눈을 들었다.“네.”“바다 어렵죠?”“많이.”“그래서 포기?”“아닙니다.”“그럼?”그는 화면을 닫았다.“오늘은 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예전이라면 끝내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려서라도 연필을 들었을 사람.그런데 이제는 꽤 아무렇지 않았다.나는 그림 속 두 번째 의자를 가리켰다.“내 자리 그대로 있네.”“어제 앉는다면서요.”“응.”“그럼 두십시오.”“도현 씨는?”“제 자리도 있습니다.”나는 웃었다.“그럼 둘이 앉았네.”도현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녁 먹읍시다.”*회사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오히려 그게 조금 낯설었다.새 승인 구조도 문제없이 굴러갔고.파리 업체도 제 역할을 했다.카렐에게 따로 확인할 일도 없었다.오후 다섯 시쯤 한예린이 내 자리로 와서 물었다.“오늘 뭐 남았어?”“없어.”“그럼 가.”“진짜 다들 왜 나만 보면 퇴근하래.”“네가 남으면 주변이 불편해져.”“내가 뭐 했다고.”“총괄이 여섯 시 넘어서 앉아 있으면 밑에서는 괜히 눈치 보지.”나는 모니터를 한번 봤다.정말 남은 건 없었다.“알았어.”한예린이 눈을 크게 떴다.“오늘은 빨리 듣네.”“사람이 배워.”“드디어.”나는 가방을 들며 그녀를 노려봤다.“그 말 취소해.”“싫어.”그대로 헤어졌다.*집에 돌아온 뒤.저녁을 먹고.샤워까지 마쳤다.나는 편한 잠옷을 입고 거실로 나왔다.도현은 소파에 앉아 있지 않았다.창가 쪽 스탠드 앞에서 뭔가 만지고 있었다.“뭐 해요?”그가 조명을 조금 돌렸다.원래 벽을 향하던 빛이 방향을 바꿨다.방 한쪽이 밝아지고.반대쪽은 훨씬 어두워졌다.“전구 나갔어요?”“아닙니다.”“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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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화. 승인란이 사라진 자리

월요일 오전.내 책상 위에 올라온 첫 보고서는 예상보다 얇았다.한예린이 직접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시스템 알림 하나.[유럽 지역 운영비 승인 체계 개편 완료]나는 파일을 열었다.도시별 책임 범위.예외 조항.법무 검토 기준.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예전에는 분명 내 이름이 있던 칸이 사라져 있었다.아예.공란도 아니었다.칸 자체가 없어졌다.나는 화면을 한참 봤다.그때 한예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봤어?”“응.”“어때.”“진짜 없앴네.”“네가 승인했잖아.”“알아.”“근데 왜 놀라.”나는 화면을 가리켰다.“보통은 이름만 빼는 줄 알았지.”“칸을 남겨두면 나중에 또 넣고 싶어질까 봐.”나는 바로 그녀를 봤다.“누가 그렇게까지 했어?”“카렐.”“역시.”한예린이 웃었다.“왜 그렇게 싫은 얼굴이야.”“싫은 게 아니라.”나는 다시 화면을 봤다.이제 내 이름을 다시 넣으려면.단순 수정이 아니라.승인 구조 자체를 다시 바꿔야 했다.카렐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였다.“쟤 꽤 독하네.”“좋은 쪽으로.”“나 못 건드리게 구조까지 잠가놨잖아.”한예린이 의자에 앉았다.“그게 권한 넘긴 거지.”“알아.”“근데?”나는 입술을 한번 눌렀다.“기분이 묘해.”“허전해서?”“조금.”“불안?”“그것도 조금.”한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 있지.”“반대 안 해?”“왜.”“보통은 네가 이런 거 좋아하잖아.”“좋아하지.”“그런데?”“좋은 변화라고 불안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나는 그녀를 잠깐 봤다.그 말은 의외로 편했다.잘하고 있다고.곧바로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나는 파일을 닫았다.“됐어.”“뭐가.”“그냥 이대로 가.”“다시 넣고 싶으면?”“말은 해볼게.”“그리고?”나는 웃었다.“네가 막아.”“좋아.”*오후 회의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내 일이 줄었다.예전 같으면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건들.이제는 담당 도시에서 결과만 공유했다.프라하.리스본.뮌헨.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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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화. 소리가 먼저 닿는 밤

도현이 꺼내온 건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검은 손잡이 끝에.부드러운 스웨이드 끈이 여러 갈래로 달려 있었다.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채 그걸 한참 봤다.“이거 뭐예요?”“플로거.”“주인님 이런 것도 샀어요?”“오늘 도착했습니다.”도현은 손잡이를 한번 돌려봤다.생각보다 묵직해 보였지만.끝에 달린 끈은 손가락으로 만지자 부드럽게 휘었다.나는 하나를 집어봤다.“생각보다 안 딱딱하네.”“그래서 골랐습니다.”“써봤어요?”“아직.”“그럼 나한테 처음?”도현이 나를 봤다.“아닙니다.”그는 갑자기 자기 손바닥을 폈다.그리고.플로거를 아주 가볍게 한번 내려쳤다.탁.소리는 생각보다 선명했다.나는 눈을 크게 떴다.“본인한테 먼저 해보는 거야?”“어느 정도 힘인지 알아야 하니까.”한 번 더.이번에는 조금 세게.탁.도현이 손을 한번 폈다 쥐었다.“어때요?”내가 물었다.“소리보다 약합니다.”“진짜?”“네.”그가 내게 손바닥을 보여줬다.살짝 붉어졌을 뿐이었다.“오늘 이걸 하고 싶어요?”“네.”대답이 빨랐다.“많이?”도현이 잠시 나를 봤다.“생각보다.”그 목소리 때문에.물건보다 사람이 더 신경 쓰였다.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어디까지?”“등과 허벅지 바깥쪽.”“세게는?”“처음에는 약하게.”“그다음은?”“당신 반응 보고 올립니다.”“나는.”잠깐 생각했다.“중간보다 조금 높은 정도까지 괜찮아요.”“피부 직접?”나는 고개를 저었다.“처음이니까 옷 위로.”도현이 바로 끄덕였다.“좋습니다.”“손목 묶어요?”“오늘은 안 묶습니다.”“눈은?”“가리지 않습니다.”“왜?”도현이 플로거를 한번 손안에서 정리했다.“당신이 제가 뭘 하는지 전부 보고 있는 상태에서 하고 싶습니다.”심장이 조금 빨라졌다.“진짜 오늘은 이것만?”“아닙니다.”“그럼?”그가 아주 조금 웃었다.“하다 보면 제가 또 하고 싶은 게 생기겠죠.”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요즘은 계획도 안 세우네.”“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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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화. 한 번 더, 다른 방식으로

저녁을 먹고 난 뒤에도 도현은 평소보다 말이 적었다.나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도현은 맞은편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겉으로는 평범했다.그런데 자꾸 시선이 느껴졌다.한 번.두 번.세 번째쯤 됐을 때.나는 결국 화면을 내렸다.“왜 자꾸 봐요?”도현은 책갈피를 끼웠다.“보고 싶어서.”“그 말 요즘 너무 자주 써.”“싫습니까?”“아니.”나는 웃었다.“근데 오늘은 뭔가 있어 보여.”그는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책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내 앞까지 왔다.“있습니다.”“뭔데?”도현은 잠깐 나를 봤다.“어제 쓴 걸.”“플로거?”“네.”“또?”나는 눈썹을 올렸다.“어제 또 똑같이 안 한다며.”“똑같이 안 합니다.”그 대답이 빨랐다.“그럼?”도현은 서랍 쪽으로 갔다.이번에는 플로거만 꺼내지 않았다.작은 검은 패드 하나.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얇고.부드러운 가죽으로 감싸진 패들이었다.나는 바로 물었다.“이건 처음 보는데.”“오늘 써보려고 샀습니다.”“또 새 거?”“네.”“이름은?”“패들.”나는 받아서 손바닥 위에 올려봤다.생각보다 가벼웠다.한쪽 면은 매끈했고.다른 쪽은 조금 더 부드러운 소재.“이것도 때리는 거?”“네.”“플로거랑 뭐가 달라요?”도현이 내 손에서 패들을 가져갔다.“닿는 면적.”“응.”“소리.”“응.”“느낌.”그는 자기 팔 안쪽에 아주 가볍게 한 번 쳤다.탁.어제와는 달랐다.플로거가 공기를 가르고 흩어지는 느낌이었다면.패들은 소리가 더 짧고.접촉이 한 번에 모였다.나는 바로 눈썹을 올렸다.“이게 더 아플 것 같은데.”“힘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릅니다.”“오늘 세게?”도현은 나를 봤다.“처음부터는 아닙니다.”“최대는?”“당신이 괜찮다고 한 범위 안.”나는 잠시 생각했다.“중간 정도.”“어제보다 낮게?”“응.”“좋습니다.”그는 패들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오늘은.”“또 있어?”“한 가지 더.”“뭔데.”도현은 이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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