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현이 새 스케치북을 산 건 이틀 뒤였다.서윤은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식탁 위의 종이봉투를 발견했다.“이거 뭐야?”주방에서 물을 따르던 도현이 돌아봤다.“열어보십시오.”서윤이 봉투를 열었다.검은 표지의 스케치북.두껍지도, 크지도 않았다.여행 가방에 넣기 좋은 크기였다.옆에는 연필 세 자루와 작은 지우개가 들어 있었다.“벌써 샀어?”“준비물이라면서요.”“여행 아직 한 달 가까이 남았는데.”“미리 준비하면 안 됩니까?”서윤은 스케치북을 꺼냈다.표지를 넘기려다 멈췄다.첫 장은 아직 보지 않았다.“진짜 아무것도 안 그렸죠?”“네.”“첫 장 비어 있어?”“확인해보십시오.”서윤이 천천히 펼쳤다.새하얀 종이.아무것도 없었다.“좋아.”“뭐가 그렇게 좋습니까?”“내가 첫 장 정한다고 했잖아.”“그래서 비워뒀습니다.”서윤은 스케치북을 덮었다.“여행 갈 때까지 절대 그리면 안 돼.”“한 달 동안요?”“응.”“그럼 왜 지금 사라고 했습니까?”“기다리라고.”도현이 헛웃음을 흘렸다.“사진도 기다리고, 여행지도 기다리고, 이것도 기다립니까?”“응.”“제가 기다리는 게 많네요.”서윤이 그의 앞에 섰다.“싫어?”“아니요.”“그럼 됐어.”“대신 조건 하나.”“또?”도현이 스케치북을 가져가 서윤의 손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첫 장은 당신이 정하고.”“응.”“두 번째 장은 제가 정하겠습니다.”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뭘 그릴지도?”“네.”“나한테 안 알려주고?”“그게 공평하지 않습니까?”잠깐 고민하던 서윤이 손을 내밀었다.“좋아.”도현이 그 손을 잡았다.“약속.”저녁을 먹은 뒤에도 스케치북은 식탁 한쪽에 그대로 있었다.서윤은 자꾸 그쪽을 봤다.“도현 씨.”“네.”“첫 장 뭐 그릴지 궁금하지?”“궁금합니다.”“힌트 줄까?”“이번에는 받겠습니다.”서윤이 조금 놀랐다.“왜 갑자기?”“계속 기다리기만 하면 재미없으니까요.”“그래?”서윤은 턱을 괴었다.“사람은 아니야.”
Última atualização : 2026-10-11 Ler ma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