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51 - Chapter 60

420 Chapters

51화. 야근의 대가

[일단 내려와요.][오늘은 제가 정할게요.]메시지를 보내고 노트북을 닫으려던 순간이었다.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해외 브랜드 계약서 수정본 긴급 전달.]첨부 파일을 열자 한숨부터 나왔다.수정 조항이 예상보다 많았다.물류 조건부터 손해배상 범위까지 다시 확인해야 했다.나는 곧바로 도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취소.]답장은 바로 왔다.[데이트를?][아니요. 시간만.][얼마나 걸립니까?][두 시간쯤.]잠시 뒤.[알겠습니다.]이렇게 쉽게 끝?조금 이상해서 다시 보냈다.[먼저 가도 돼요.][싫습니다.]피식 웃음이 나왔다.[그럼 알아서 기다려요.][그럴 생각입니다.]한 시간이 지나자 사무실에는 나와 팀장만 남았다.“한 대리.”“네.”“저 먼저 갑니다.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말고.”“네.”팀장까지 나가자 사무실이 조용해졌다.그제야 배가 고팠다.휴대전화를 확인하니 도현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저녁 먹었습니까?]나는 멈칫했다.예전처럼 카드 사용 내역을 확인한 게 아니었다.그냥 물었다.[아직요.]곧바로 답이 왔다.[뭐 먹고 싶습니까?]나는 한참 고민하다 적었다.[샌드위치.]20분쯤 뒤 1층으로 내려가자 도현이 종이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직접 샀어요?”“네.”“대표님이?”“샌드위치 사는 데 직급이 필요합니까?”봉투 안에는 샌드위치와 우유가 들어 있었다.“커피 아니고 우유?”“빈속이니까.”나는 그를 바라봤다.“이건 간섭 아니에요?”도현이 잠시 생각했다.“추천.”“제가 커피 사 달라고 하면요?”“사 드립니다.”“좋아요. 통과.”내가 웃자 도현도 작게 웃었다.“얼마나 더 걸립니까?”“한 시간?”“기다리겠습니다.”“여기서?”“아래 카페에 있죠.”나는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진짜 아무 말도 안 하고 기다릴 거예요?”“당신 일이니까.”그 대답이 묘하게 좋았다.밤 아홉 시가 조금 넘어 일을 끝냈다.건물 밖으로 나오자 도현이 차에 기대 서 있었다.“끝났습니까?”“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Read more

52화. 대표의 과거

다음 날 오전, 해외 브랜드 측에서 화상회의 일정이 잡혔다.새 프로젝트의 첫 협의였다.회의실에 들어가자 도현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회사에서는 대표와 실무 담당자.어젯밤과는 전혀 다른 거리였다.“한서윤 대리.”“네, 대표님.”“자료 준비됐습니까?”“네.”화면이 켜지고 해외 브랜드 담당자들이 접속했다.처음 20분은 순조로웠다.문제는 유통 수수료였다.상대 측이 기존 제안보다 높은 비율을 요구했다.임원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이 정도면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나는 고개를 저었다.“장기적으로 손실이 커집니다.”“계약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습니다.”“그래도 이 조건으로는 안 됩니다.”맞은편의 도현을 바라봤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말 내가 판단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상대 측에 새로운 안을 제시했다.“수수료를 올리는 대신 단독 유통이 아니라 공동 브랜드 방식으로 변경하는 건 어떻습니까?”화면 너머가 조용해졌다.“공동 브랜드요?”“네. 국내 시장에 맞춘 별도 제품군을 만드는 겁니다. 초기 비용은 늘어나지만 양쪽 모두 장기적인 이익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다.나는 준비해 둔 시장 자료를 보여 주며 하나씩 설명했다.결국 상대 측 책임자가 말했다.“검토해 보겠습니다.”화상회의가 종료됐다.숨을 내쉬는 순간 도현이 입을 열었다.“왜 사전에 보고하지 않았습니까?”목소리는 완전히 업무적이었다.“어제 검토하다 생각한 안입니다.”“대표에게 보고하지 않고 협상 자리에서 바로 제안한 겁니까?”회의실 분위기가 순간 굳었다.나는 물러서지 않았다.“실무 책임자로서 가능한 범위라고 판단했습니다.”도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만약 내가 반대했다면?”“근거를 물었겠죠.”“그래도 반대했다면?”“설득했을 거고요.”잠시 침묵.도현이 서류를 덮었다.“좋습니다. 공동 브랜드안으로 검토하십시오.”회의가 끝나자 임원들이 먼저 빠져나갔다.나도 자료를 챙기는데 도현이 말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Read more

53화. 혼자 만나지 않는 이유

루카 마이어와의 미팅은 예상보다 빨리 잡혔다.다음 날 오후.해외 브랜드 측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루카 마이어 자문 담당자가 실무 책임자와 별도 사전 미팅을 요청했습니다.]**메일을 읽고 있는데 도현에게 메시지가 왔다.[봤습니까?][네.][어떻게 할 겁니까?]나는 잠시 고민했다.[만나야죠. 제 일이니까.]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몇 분 뒤.[알겠습니다.]딱 한마디였다.오히려 이상했다.분명 신경 쓰일 텐데.*루카가 지정한 장소는 회사 근처 호텔 라운지였다.약속 시간을 확인하다가 나는 프로젝트 팀의 민석 과장에게 말했다.“과장님, 오늘 미팅 같이 가실 수 있어요?”“루카 마이어요?”“네.”“개별 미팅 아니었어요?”“그렇긴 한데.”나는 노트북을 닫았다.“굳이 혼자 갈 이유는 없는 것 같아서요.”업무 미팅이다.상대가 도현의 오랜 친구였든, 사이가 틀어진 사람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자문 담당자를 만나는 자리였다.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루카는 우리를 보자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혼자 올 줄 알았습니다.”내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실무 미팅이라 팀원과 같이 왔습니다.”“차도현이 걱정했습니까?”“제가 정했어요.”루카가 잠시 나를 바라보다 웃었다.“역시 들은 것과 다르군요.”“뭘 들으셨는데요?”“차도현의 연인.”그는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그런데 지금 보니 그보다 실무 책임자라는 말이 먼저겠군요.”“오늘은 그렇습니다.”본론으로 들어가자 미팅은 의외로 평범했다.루카는 공동 브랜드 방식에 관심을 보였지만 생산 권한과 상표 사용 범위를 명확하게 나누길 원했다.나는 미리 준비한 수정안을 보여 줬다.한참 자료를 확인하던 그가 물었다.“이 조건, 차도현도 압니까?”“최종안은 아직요.”“대표 허락도 없이 가져온 겁니까?”“검토안입니다. 허락받을 단계가 아니니까요.”루카가 웃었다.“그 사람 입장에서는 꽤 피곤하겠군요.”“왜요?”“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Read more

54화. 첫 번째 출장

공동 브랜드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오전 회의에서 팀장이 화면에 일정을 띄웠다.“생산 시설 실사는 현지에서 직접 진행합니다.”나는 아래쪽에 적힌 도시명을 확인했다.**독일 뮌헨.**“출장 기간은요?”“일주일.”순간 시선이 저절로 도현 쪽으로 향했다.그 역시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실무팀만 갑니다.”담당 임원이 덧붙였다.“한서윤 대리가 책임자로 가고, 민석 과장 포함 세 명이 동행합니다.”“알겠습니다.”나는 최대한 평범하게 대답했다.도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게 조금 이상했다.*퇴근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연락이 없었다.결국 내가 먼저 대표실로 올라갔다.문을 닫자 도현이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무슨 일입니까?”“출장.”“네.”“그게 끝이에요?”도현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무슨 말을 원합니까?”“모르겠어요.”나는 소파에 앉았다.“일주일이나 외국 가는데 너무 태연하잖아요.”도현이 펜을 내려놓았다.“태연해 보였습니까?”“네.”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까지 왔다.“가지 말라고 할까요?”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그건 싫어요.”“그러니까 말하지 않은 겁니다.”“그래도 아쉽다거나.”“아쉽습니다.”“걱정된다거나.”“걱정됩니다.”“보고 싶을 것 같다거나.”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그건 이미 확실합니다.”나는 그를 올려다봤다.“그런데 왜 회의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회의였으니까.”단순한 대답이었다.“당신이 실무 책임자로 가는 출장인데 내가 표정으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그 말에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많이 발전했네요.”“누구 덕분에.”도현이 내 옆에 앉았다.“사실은 회의 끝난 뒤 일정표를 세 번 봤습니다.”“왜요?”“일주일이 정말 일주일인지 확인하려고.”웃음이 터졌다.“혹시 숫자가 줄어들까 봐요?”“희망은 했습니다.”*출장 전날.나는 도현의 집 거실 바닥에 캐리어를 펼쳐 놓고 짐을 챙겼다.“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Read more

55화. 멀리서 지키는 거리

뮌헨에 도착한 첫날부터 정신이 없었다.공장 일정 확인에 현지 법인 회의, 샘플 검수까지.호텔에 돌아왔을 때는 침대에 쓰러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휴대전화를 확인했다.도현에게 온 메시지는 하나였다.[도착 확인했습니다. 오늘 일정 끝나면 쉬십시오.]나는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끝?공항에서는 그렇게 보내기 싫어하더니.막상 독일까지 오니까 너무 얌전했다.결국 내가 먼저 영상 통화를 걸었다.몇 번 울리지 않아 도현이 받았다.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아직 안 잤어요?”“당신도 안 자고 있군요.”“여기는 밤이니까요.”나는 화면 뒤쪽을 확인했다.“도현 씨, 회사예요?”“네.”“한국은 새벽이잖아요.”잠시 침묵.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설마 저 기다린 거예요?”“조금.”“조금?”“많이.”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렸다.“그런데 왜 연락 안 했어요?”“바쁠 테니까.”“그래도 메시지 정도는 해도 되잖아요.”도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어느 정도가 좋습니까?”“그런 것까지 정해야 돼요?”“괜히 신경 쓰이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나는 베개를 끌어안았다.“밥 먹었냐고 물어봐도 되고.”“네.”“힘드냐고 물어봐도 되고.”“네.”“보고 싶다고 해도 돼요.”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그건 자주 할 것 같은데.”웃음이 터졌다.“해요.”도현의 입가도 조금 올라갔다.“그럼 지금부터.”“뭔데요?”“보고 싶습니다.”생각보다 바로 들어온 말에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저도요.”“얼마나?”“그건 비밀.”“먼저 말하라고 해 놓고?”“시차 때문에 봐줘요.”도현이 낮게 웃었다.*다음 날 공장 실사에서 문제가 생겼다.계약서에 적힌 설비와 실제 생산 라인의 일부 장비가 달랐다.현지 담당자는 문제없다는 입장이었다.“동일한 생산 기준을 충족합니다.”루카 역시 일정표를 확인하며 말했다.“이 정도 변경이면 진행해도 됩니다.”나는 샘플 검사 결과를 다시 봤다.미세하지만 수치 차이가 있었다.“안 됩니다.”루카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Read more

56화. 돌아온 사람

출장 마지막 날.공동 브랜드 계약이 최종 승인됐다.생산 일정까지 확정되고 나서야 정말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루카가 말했다.“이번 계약은 한서윤 씨가 아니었으면 더 오래 걸렸을 겁니다.”“팀 전체가 한 일이에요.”“그런 대답까지 차도현과는 다르군요.”나는 웃었다.“비교하지 마세요.”“이제 안 하려고 합니다.”루카는 잠시 창밖을 보다가 덧붙였다.“다음에는 계약 상대방으로 만납시다. 차도현의 연인이 아니라.”“처음부터 그랬는데요.”루카가 웃음을 터뜨렸다.“그 말도 마음에 드는군요.”*한국에 도착한 시각은 밤 열한 시가 넘어서였다.긴 비행 탓에 몸은 무거웠지만 입국장으로 나오는 발걸음은 이상하게 빨라졌다.문이 열렸다.사람들 사이에서 도현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기사도, 비서도 없었다.혼자였다.그리고 나를 발견한 순간.늘 무표정하던 얼굴이 확실하게 풀렸다.나는 캐리어를 끌고 곧장 그에게 갔다.“진짜 왔네요.”“오겠다고 했습니다.”“대표님이 직접?”도현이 내 캐리어 손잡이를 받아 들었다.“오늘은 대표로 온 게 아닙니다.”“그럼요?”“당신 보고 싶어서 온 사람.”그 한마디에 일주일 동안 눌러 두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왔다.나는 먼저 그의 품으로 들어갔다.도현의 몸이 잠깐 굳었다.곧 팔이 내 등을 감쌌다.“서윤 씨.”“왜요?”“사람들이 봅니다.”“보라고 해요.”그가 낮게 웃었다.“출장 전과 많이 달라졌군요.”“일주일이나 참았으니까.”“나도.”도현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많이 보고 싶었습니다.”그제야 알았다.돌아왔다는 게 실감 났다.*차에 타고도 손을 놓지 않았다.도현이 내 손가락 사이로 손을 끼웠다.“계약 체결 축하합니다.”“끝?”“수고했습니다.”“그것도 끝?”도현이 나를 바라봤다.“원하는 게 있습니까?”“있어요.”“말해 보십시오.”나는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집에 가요.”“어디로?”“도현 씨 집.”그의 눈빛이 조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Read more

57화. 바뀐 규칙

다음 날 아침.눈을 떴을 때 도현은 아직 자고 있었다.드문 일이었다.평소라면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일어나 있을 사람이었다.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거실로 나왔다.출장 동안 밀린 메일을 확인하고 보고서를 정리했다.한 시간쯤 지났을까.“언제 일어났습니까?”뒤를 돌아보니 도현이 셔츠 단추를 채우며 나오고 있었다.“한 시간 전.”“왜 안 깨웠습니까?”“잘 자던데요.”나는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그리고 저는 할 일이 있었고.”도현이 맞은편에 앉았다.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어젯밤은 꽤 즐거워 보였습니다.”손이 멈췄다.“누가요?”“한서윤 씨가.”“도현 씨도 싫어하진 않았잖아요.”“싫어하지 않은 정도는 아닙니다.”너무 태연한 대답에 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도현이 낮게 웃었다.“그런데 생각한 게 있어요.”“뭡니까?”나는 노트북을 닫았다.“우리 방식.”도현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계속 제가 맡거나, 도현 씨가 맡는 식으로 정해 둘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그날 원하는 사람이 먼저 말하자는 겁니까?”“네.”나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어제는 제가 먼저 하고 싶었고.”“오늘은?”“아직 모르죠.”도현이 웃었다.“마음에 드는데요.”“의외네요.”“왜?”“도현 씨는 자기가 주도하는 걸 더 좋아하잖아요.”“좋아합니다.”부정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당신이 어제처럼 하는 것도 좋았습니다.”얼굴이 뜨거워졌다.“아침부터 그런 말 하지 마요.”“먼저 꺼낸 사람이 누군데.”나는 괜히 물을 마셨다.“그럼 정해진 순서는 없는 걸로.”“좋습니다.”“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말하기.”“그리고 상대가 싫으면 그날은 끝.”“그건 당연하고.”도현이 나를 바라봤다.“화났을 때는 하지 맙시다.”“왜요?”“싸운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풀기 시작하면 복잡해질 것 같으니까.”그건 나도 동의했다.“좋아요.”길게 적을 것도 없었다.누가 주도하느냐보다 그날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가 중요했다.그 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Read more

59화. 대표의 휴가

출시 다음 날.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이상한 걸 느꼈다.대표실이 비어 있었다.오전 임원 회의도 취소.외부 미팅도 전부 다음 주로 미뤄져 있었다.“대표님 어디 가셨어요?”내 질문에 비서실 직원이 대답했다.“오늘 휴가십니다.”“휴가요?”“네.”차도현이?어제까지 생산 현장에서 밤을 새우던 사람이 아무 말도 없이 휴가를 냈다.회사 사람들도 신기한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하지만 내게는 다른 게 걸렸다.도현은 어제도 피곤해 보였다.점심시간이 되자 결국 메시지를 보냈다.[어디예요?]한참 뒤 답장이 왔다.[집입니다.][왜 갑자기 휴가 냈어요?]이번에는 답이 없었다.[아파요?]읽음 표시만 뜨고 답장은 오지 않았다.나는 휴대전화를 노려봤다.분명 뭔가 있었다.퇴근하자마자 도현의 집으로 갔다.비밀번호를 누르기 전 메시지부터 보냈다.[저 왔어요.]잠시 뒤 문이 열렸다.도현은 셔츠 차림이었다.그런데 얼굴이 평소와 달랐다.“괜찮아요?”“괜찮습니다.”목소리부터 잠겨 있었다.나는 곧장 손을 그의 이마에 댔다.뜨거웠다.“이게 괜찮은 거예요?”“자면 나을 겁니다.”체온계를 가져와 확인했다.39도.숫자를 본 순간 어이가 없었다.“도현 씨.”“네.”“이게 조금 아픈 거예요?”그가 대답하지 않았다.출시 준비 때문에 며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출장에서 돌아온 나를 기다리면서도 계속 일했고, 출시 연기 뒤에는 생산 현장까지 내려와 밤을 새웠다.몸이 버틸 리 없었다.“병원은요?”“안 갔습니다.”“왜요?”“귀찮아서.”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환자가 되니까 갑자기 애가 되네요.”도현이 힘없이 웃었다.“그 정도는 아닙니다.”“일단 병원부터 가요.”진료를 받고 돌아온 뒤 약을 챙겼다.도현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부터 찾았다.나는 먼저 노트북을 가져갔다.“뭐 하는 겁니까?”“압수.”“확인할 게 있습니다.”“오늘 휴가잖아요.”“메일 하나만.”“안 돼요.”도현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지금 명령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Read more

58화. 출시 전날

공동 브랜드 출시를 사흘 앞두고 회사 전체가 정신없이 돌아갔다.광고 촬영은 끝났고 온라인 행사는 최종 리허설만 남아 있었다.독일과 한국 양쪽의 홍보 일정까지 맞물리면서 회의실은 하루 종일 비어 있을 틈이 없었다.문제는 오후에 터졌다.“한 대리님.”생산 담당자가 급하게 나를 찾았다.“첫 생산분에서 문제가 발견됐습니다.”나는 곧바로 검수실로 내려갔다.테이블 위에 정상 제품과 불량 제품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차이는 작았다.로고 색상이 기준보다 미세하게 어두웠다.“수량은요?”“전체의 약 3퍼센트입니다.”적지 않았다.하지만 이미 출고 일정은 잡혀 있었다.*긴급회의가 열렸다.“일반 소비자는 알아보기 힘든 수준입니다.”한 임원이 말했다.“3퍼센트 때문에 출시를 미루면 손실이 더 큽니다.”다른 임원도 동의했다.“유통사와 광고 일정까지 전부 다시 잡아야 합니다.”나는 불량 제품을 내려다봤다.눈으로 얼핏 보면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정상 제품 옆에 두면 분명히 달랐다.“한서윤 대리.”도현이 나를 불렀다.“실무 책임자 의견은?”시선이 한꺼번에 내게 쏠렸다.“불량분은 전량 회수해야 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출시는요?”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사흘 연기하는 게 맞습니다.”“한 대리.”임원 한 명이 목소리를 높였다.“사흘이 얼마나 큰 손실인지 압니까?”“압니다.”“그런데도요?”“소비자가 모른다는 이유로 우리가 아는 불량을 내보내면 다음에도 같은 판단을 하게 됩니다.”“현실적인 판단을 해야죠.”“그래서 3퍼센트만 회수하자는 겁니다.”나는 준비해 온 수치를 화면에 띄웠다.“전체 폐기가 아닙니다. 생산 라인을 다시 돌리면 사흘 안에 교체 가능합니다.”도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러다 물었다.“결정에 책임질 수 있습니까?”솔직히 무서웠다.출시 연기에 따른 비용은 숫자 몇 줄로 넘길 수준이 아니었다.그래도 대답했다.“네.”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출시를 사흘 연기합니다.”*회의실을 나오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Read more

60화. 열세 번째 선택

도현이 완전히 회복한 뒤 처음 맞는 주말이었다.아침부터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전화도 없고, 노트북도 열지 않았다.“오늘 일정 없어요?”“없습니다.”“진짜?”“네.”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봤다.“차도현 대표가 주말을 통째로 비웠다고요?”“지난주에 휴가까지 이틀 썼는데 이제 와서 놀랍습니까?”“그건 아파서였잖아요.”도현이 자동차 열쇠를 내게 내밀었다.“오늘은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을 정하십시오.”“제가요?”“네.”“후회하지 마요.”“벌써 불안하군요.”*내가 고른 곳은 바다였다.회사도 아니고.호텔도 아니고.도현의 집도 아닌 곳.그냥 아무 목적 없이 함께 걷고 싶었다.두 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해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나는 신발부터 벗었다.도현은 그런 나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뭐 해요?”“들어가려고요.”“물이 차갑습니다.”“알아요.”“감기 걸립니다.”“안 걸려요.”내가 손을 내밀었다.“같이 가요.”도현은 젖은 모래를 내려다봤다.“싫어요?”“좋아하지는 않습니다.”“그럼 여기 있어요.”혼자 파도 쪽으로 두 걸음 갔을 때 뒤에서 손이 잡혔다.돌아보자 도현이 신발을 벗고 있었다.“싫다면서.”“당신 혼자 가는 건 더 싫습니다.”“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우리는 손을 잡고 물가를 걸었다.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도현은 조금씩 피했다.나는 일부러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결국 바짓단이 젖었다.도현이 나를 바라봤다.“일부러 그랬죠?”“네.”“좋습니까?”“아주.”그가 내 손을 놓는 대신 더 단단히 잡았다.*한참 걷다가 방파제 끝에 나란히 앉았다.바람이 꽤 세게 불었다.나는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출장 중 발견하고 사 둔 것이었다.“손 줘 봐요.”“왜?”“일단 줘요.”도현이 손을 내밀었다.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심플한 은색 팔찌가 들어 있었다.도현이 나를 바라봤다.“내 겁니까?”“네.”“갑자기?”“선물하는 데 이유가 꼭 있어야 해요?”나는 팔찌를 꺼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Read more
PREV
1
...
45678
...
42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