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모리슨 가문의 잃어버린 상속녀: Chapter 11 - Chapter 20

75 Chapters

제11장

리나의 시점제이드는 여전히 지시를 기다리며 내 곁에 서 있었다.주변 로비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행사를 정리하는 직원들, 카메라 장비를 챙기는 취재진, 특유의 따뜻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언론 홍보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헨리 오빠, 그리고 어떤 공간에 있든 특유의 정교하고 완벽한 일 처리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클레어까지. 그 모든 풍경은 불과 30초 전과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 모든 장면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그 사람, 어디 있지?" 내가 물었다."메인 로비 입구입니다." 제이드가 답했다. "보안팀이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아주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를 때 나오는 그 특유의 침묵. 제이드가 이처럼 말을 아낀다는 건 다음에 이어질 내용에 상당한 주의가 필요함을 의미했다. "목소리가 아주 큽니다.""얼마나?""상당히요." 그녀가 말했다. "자신의 계약을 파기한 책임자를 만나겠다고 요구하는 중입니다. 대략 20분 전부터 같은 말을 반복하며 갈수록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보안팀이 입구에서 막아서고는 있지만, 제 발로 돌아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혼자 왔어?""네, 대표님. 변호사나 동행인은 없습니다.""위협적인 언행도 있었나?""직접적인 위협은 없었습니다." 제이드가 말했다. "분통을 터뜨리며 항의하는 수준입니다. 아직 법적으로 문제 삼을 만한 선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가 다시 말을 멈추었다. "대표님이 여기 계시다는 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담당자를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을 뿐, 그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그 사실을 가만히 반추해 보았다.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계약서 맨 위에 내 가문의 이름이 박힌 모리슨 코퍼레이션 본사 로비에 서서, 이 일을 저지른 책임자를 당장 내놓으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으면서도, 그 책임자가 자신이 임신한 채 빗속으로 쫓아냈던 바로 그 여자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로비 건너편에 서 있는 데미안 오빠를 바라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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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리나의 시점잠시 후 그가 겨우 입을 뗐다.당연한 결과였다.에이든 노먼은 단 한 번도 말문이 막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언제나 언어를 무기로 삼던 자였다. 가슴을 후벼 파고 들어와 며칠이고 맴도는 날카롭고 거친 말들, 뱉은 지 6개월이 지난 뒤에도 새벽 3시에 퍼뜩 잠에서 깨어나 환청처럼 들려오게 만드는 그런 말들 말이다. 그가 쏟아낸 말들은 지난 6년 동안 빼낼 수도 없는 가시가 되어 내 몸 구석구석에 박혀 있었다. 그의 목소리 톤 하나만으로 다음에 어떤 폭언이 쏟아질지 파악하고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는 법을 배워온 6년이었다.테이블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천천히. 그리고 아주 다분히 의도적으로. 데미안 오빠가 회의실에 앉을 때처럼, 마치 그 의자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제작되었고, 자신의 등장 시점이 가장 완벽한 타임라인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그저 자신이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는 존재라는 듯이.테이블 위에 양손을 얌전히 겹쳐 놓았다.에이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4분 40초 남았어."그가 눈을 껌벅였다. "뭐라고?""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4분 40초라고." 내가 말했다. "지금처럼 허비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효율적으로 쓰는 게 좋을 텐데."그는 늘 그렇듯 분통부터 터뜨리기 시작했다."지금 내 회사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나 해?" 그가 테이블 가까이 바짝 다가서며 의자 등받이를 부서질 듯 틀어쥐었다. "계약들이 순식간에 공중분해되고 있어. 고객사들은 전화를 안 받고, 수년간 같이 일해온 비즈니스 파트너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렸다고!"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논리를 쌓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고성을 질러대기 위해서였다. 마치 목소리가 커질수록 자신의 주장이 더 진실에 가까워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내가 답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질문을 해."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그가 입을 턱 다물었다."답을 들으러 왔다며." 내가 말했다. "그렇다는 건 질문이 있다는 뜻이겠지. 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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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리나의 시점요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나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휴대전화 화면을 통해서.눈을 뜬 지 겨우 4분 남짓. 아직 침대에 누워 전날의 일들이 다 정돈되지 않은 그 모호한 의식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알림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처럼 알림음들이 끊임없이 겹쳐 들렸고, 이전 알림을 채 확인하기도 전에 또 다른 알림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무음으로 전환한 뒤, 무언가 커다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한 사람 특유의 침묵 속에서, 어떤 일인지 확인하기 직전의 그 마지막 짧은 유예를 즐기며 화면을 가만히 노려보았다.4분 만에 쌓인 알림만 무려 47개.몸을 일으켜 앉았다.내가 어둠 속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휴대전화 속 에이든의 메시지를 노려보고 있던 자정 무렵에 올라온 첫 헤드라인. 그건 내가 평소 존경하던 한 경제지의 기사였다. 평소 개인적인 스캔들 따위는 다루지 않고,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을 자부심으로 삼던 바로 그 매체였다.**[모리슨 코퍼레이션의 신임 CEO: 에이든 노먼이 버린 여자]**아침이 되자, 다른 모든 언론사가 그 기사를 사방으로 퍼 나르기 시작했다.가운 차림으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스크롤을 내리며 기사들을 읽었다. 뭐라고 바로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하고 불안정한 감정이 속에서 휘몰아쳤다.기사 내용은 전부 사실이었다.바로 그 점이 나를 더 섬뜩하게 만들었다. 자극적으로 부풀려지지도, 날조되지도 않았으며, 진실을 밝히기보다 조회수를 노리고 꾸며낸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저 철저한 사실의 나열이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취재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날짜를 대조하고, 기록을 찾고, 우리를 알던 사람들을 취재해 엮어낸 전말. 그들이 완성해 낸 그림은 너무나 정교하고 지독할 만큼 사실이어서, 차라리 과장된 소문이었으면 반박이라도 해볼 텐데 그러지도 못해 오히려 마음이 더 어지러웠다.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창밖을 내다보았다.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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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리나의 시점시장 분석 보고서를 정독하고 있던 중, 헨리 오빠가 방문에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신발 신어라, 리나."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 일하는 중인데.""알아." 오빠는 문틀에 팔짱을 끼고 기대어 섰다. 이미 혼자 결정을 내려놓고 내가 순순히 자신을 따라오기만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특유의 표정을 지은 채였다. "그래도 신발 신어.""헨리 오빠…….""보고서는 다녀와서 읽어도 안 도망가." 오빠가 벽시계를 향해 고개를 짓짓해 보였다. "오늘 아침 6시 반부터 그러고 앉아 있었잖아. 벌써 오후 2시야."시계를 돌아보았다.정말 오후 2시였다."4시에 중요한 통화가 있어서 안 돼." 내가 말했다."제이드한테 일정 미루라고 했어."나는 멍하니 오빠를 쳐다보았다. "제이드한테 전화를 했다고?""응, 전화했지.""나한테 묻지도 않고 내 일정을 마음대로 취소한 거야?""어." 오빠가 단숨에 답했다. 조금의 미안 기색도 없이. 자기가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지극히 헨리 오빠다운 태도였다."헨리 오빠.""신발 신자, 리나."잠시 오빠를 지켜보았다.오빠의 눈빛은 내가 따라나설 때까지 하루 종일이라도 저 자리에 서 있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헨리 오빠에게 그건 협박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이었으며, 고집을 부려봤자 오빠를 이기는 데 드는 에너지가 신발을 집어 드는 것보다 훨씬 크리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결국 나는 신발을 신었다.모리슨 저택의 부지는 내가 첫날 밤 차 안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그동안 내가 본 것이라곤 내 방 창문 너머로 보이던 진입로와 분수대, 정갈하게 가꿔진 정원이 전부였다. 차를 타러 오갈 때 잠시 거쳐 가는 용도로만 그 공간을 이용했을 뿐, 한 자리에 진득하게 머물며 돌아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저택의 부지는 그 너머까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정성껏 가꾼 흔적이 역력한, 정돈된 채소밭을 지나자 안개가 자욱하게 낀 유리 온실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무성하고 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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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리나의 시점마커스가 찾아온 건 수요일이었다.그날 아침, 제이드가 내 일정을 정리해 보고하며 무심하게 건넨 한마디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사족을 붙이지 않고 깔끔하게, 아무런 사심 없이 정보만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전문적인 어조였다."10시, 모리슨 코퍼레이션 분기 실적 검토 회의입니다. 11시 반에는 서울 지사와의 통화가 예정되어 있고, 오후 2시 전략 회의에는 그레이 씨가 참석하실 예정입니다."*그레이 씨가 참석하실 예정입니다.*나는 평소처럼 노트에 그 문장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무심하게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며, 아침 내내 지극히 전문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했다.오후 전략 회의의 안건은 모리슨 코퍼레이션의 동남아시아 시장 확장 건이었다.식탁 위에 놓인 제안서는 지난 3개월 동안 공들여 준비한 결과물이었다. 부동산 매입, 호텔 제휴, 그리고 내가 합류하기 전부터 데미안 오빠가 임원진과 함께 준비해 온 단계별 시장 진입 전략이 담겨 있었다. 상세하고 치밀한 분석이 뒷받침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보고서였다.*거의* 완벽에 가까운.나는 지난 2주 동안 그 보고서를 유심히 검토해 왔다. 누군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데미안 오빠가 내게 맡긴 건 흥미롭긴 하지만 그리 시급하지 않은 국내 호텔 사업부 실적 분석이었으니까. 하지만 동남아시아 호텔 분야는 내가 개인적으로 공부하던 분야와 인접해 있었고, 제4절에 나온 숫자들이 처음 읽었을 때부터 유독 신경에 거슬렸다.이번에 나는 회의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지난 두 달 동안 가만히 앉아 상황을 파악하고, 관찰하고, 분위기를 읽던 그 벽가 자리가 아니었다. 서류 봉투를 열어두고 옆에 노트를 놓은 채, 회의탁에 직접 앉았다. 거친 대화를 앞두고 내면의 정적을 찾는 법을 나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을 충분히 다스려 비판적인 사고를 방해하지 않게 만드는 그런 정적이었다.오후 2시 정각, 마커스가 들어왔다.그는 늘 그렇듯 30초 안에 공간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해 내는 특유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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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리나의 시점옷을 세 번이나 갈아입었다.첫 번째 옷은 너무 격식이 차려져 있었다. 마치 이사회에 참석하러 가는 사람 같았는데, 그건 오늘의 목적과 맞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완전히 틀린 건 아닐지도 몰랐다. 오늘 자리는 어느 정도 비즈니스 미팅의 성격도 띠고 있었으니까. 어느 쪽 비중이 더 큰지 계속 헷갈렸고, 그 혼란스러움이 옷차림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두 번째 옷을 입어보았다.너무 캐주얼했다. 마치 '나 전혀 신경 안 썼어'라는 티를 내려 애쓰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 역시 나름대로 부자연스러운 가식이었다. 소피아가 이 모습을 봤다면 30초 만에 그 의도를 간파하고 지적했을 게 분명했다.세 번째는 소피아가 옷장에 아무런 말도 없이 넣어두었던 딥 그린 컬러의 랩 드레스였다. 소피아는 늘 그런 식이었다. 이미 혼자 결정을 내리고는, 내가 자신의 센스를 따라잡았을 때 바로 꺼내 입을 수 있도록 무심하게 준비해 두는 편이었다. 옷을 입고 거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건 그냥 커피를 마시러 가는 사람의 옷이야. CEO도 아니고, 시험대에 오른 여자도 아니고, 타인에게 어떤 인상을 남기려고 애쓰는 사람도 아닌.**그저 한 사람.*또 다시 옷을 갈아입고 싶은 충동이 들기 전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내가 도착했을 때, 그분은 이미 와 있었다.큰 길가에서 살짝 비껴난 곳에 위치한 작은 카페였다. 굳이 요란하게 홍보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그런 비밀스러운 장소. 어두운 목재 인테리어와 전면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 그리고 인위적인 향이 아닌 진짜 그윽한 커피 향이 감도는 공간이었다. 그분은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재킷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두고 셔츠 소매를 말아 올려둔 채 이미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있었다.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을 보자마자, 그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지난 10년 동안 여자가 들어온다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서는 남자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딱히 그걸 서운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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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리나의 시점금요일 아침, 아벨이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그것이야말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신호임을 나는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아벨은 흥미진진한 소식을 전할 때면 특유의 활기를 띤 채 들어오곤 했다. 정보 자체를 즐기고, 그걸 타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은 더더욱 즐기는 사람 특유의 추진력을 품고서. 하지만 신중함을 요하는 사안일 때면 그는 지극히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얼굴은 무표정하게, 서류 봉투는 꼭 닫은 채로.내가 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늠한 뒤에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지 결정하려는 듯이.나는 노트북을 닫았다."앉아." 내가 말했다.그가 자리에 앉았다.이어 서류 봉투를 열었다.에이든이 3주 전 흥신소 흥신업자, 즉 사립탐정을 고용했다는 내용이었다.탐정의 이름은 칼 리브스. 기업 및 개인 조사를 전문으로 하며, 비밀리에 효율적으로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고객들을 상대로 입지를 다져온 중간급 실력자였다. 아벨이 그가 에이든과 계약을 맺은 지 48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이 사실을 파악했다는 점은 두 가지를 시사했다. 아벨이 에이든의 동선을 얼마나 밀착 감시하고 있는지, 그리고 아벨 모리슨이 작정하고 누군가를 주시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그자가 알아낸 게 뭐야?" 내가 물었다."공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전부." 아벨이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저택 주소, 회사 임명 건, CEO 발표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언론 보도 내용, 오빠들의 이름과 대략적인 프로필."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임신 사실까지."나는 서류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임신 건은 언론 보도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잖아.""임신했다는 사실 자체만 알고 있었지." 아벨이 말했다. "하지만 리브스는 훨씬 더 구체적인 정보까지 알아냈어. 언론에 보도된 시점과 정황을 토대로 추정한 대략적인 임신 주수 같은 것들."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즉, 에이든이 드디어 날짜 계산을 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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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리나의 시점발단은 크래커였다.새벽 2시 47분, 나는 샤워 가운에 슬리퍼 차림으로 주방에 서서 상자째 크래커를 집어 먹고 있었다. 뱃속의 아이가 하필 새벽 2시 47분에 무언가를 먹어야겠다고 결심한 모양이었고, 도저히 누워있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고집으로 그 의사를 전해온 탓이었다.네 번째 크래커를 입에 넣었을 때, 주방 불이 켜졌다.나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아벨이 문가에 서 있었다. 회색 티셔츠에 트레이닝바지 차림, 평소의 흐트러짐 없는 머리 모양은 온데간데없었고, 한 손에 핸드폰을 든 채 텅 빈 주방을 예상했다가 상황을 재정비하는 사람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우리는 서로를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크래커라니." 그가 말했다."아이가 크래커를 원해서.""새벽 3시에?""얘는 정규 영업시간이라는 걸 안 지키거든." 내가 말했다. "전에도 말했잖아. 말해줘도 안 들어."그는 내 손에 들린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아무런 말도 없이 주방을 가로질러 냉장고를 열었고, 다음 순서에 대해 명확한 소신을 가지고 그걸 실행에 옮기는 사람 특유의 집중된 몸짓으로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앉아." 그가 말했다. "스크램블 에그 해줄게.""굳이 안 그래도…….""앉아, 리나."나는 자리에 앉았다.그는 달걀요리를 아주 훌륭하게 해냈다.뜻밖의 사실에 조금 놀랐다. 아벨이 요리를 못 할 거라 지레짐작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요리의 '요' 자도 꺼낸 적이 없었고, 실력을 보여준 적도 없으며, 그와 함께 산 몇 달 동안 커피 머신 위치를 아는 것 외에 주방과 어떤 접점이 있다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리슨가의 형제들에게는 모든 일에 전담 직원이 딸려 있었고, 나는 은연중에 아벨을 '일상적인 일들은 남들이 알아서 해주므로 굳이 직접 할 필요가 없는 부류의 사람'으로 분류해 두고 있었다.그는 치즈와 창가 화분에 심어진 허브를 꺾어 넣고 달걀을 부드럽게 볶아냈다. 로즈메리 아니면 타임인 듯했다. 단순히 장식용으로 가져다 놓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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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리나의 시점오세이 씨와의 8시 미팅을 앞두고 바쁘게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다. 내가 CEO로 승진했음에도 그는 일정이나 기대치를 단 1도 조정해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각하지 않으려 서두르던 나는 지난주 이사회 브리핑 때 입었던 재킷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옷을 걸쳐 입은 순간, 단추가 잠기지 않았다.도저히 잠길 리가 없었다. 단추가 뜯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옷감은,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단호한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이 옷은 아니다. 오늘은 더더욱 아니다.나는 거울 앞에 섰다.배는 아주 살짝 부풀어 올라 있었다. 사실 솔직해지자면 배가 나온 지는 좀 되었다. 혼자 있을 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고, 목욕할 때 만져보기도 했으며, 아침에 옷을 입기 전에도 매번 그 존재를 가만히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교묘하게 옷으로 가려왔다. 임신을 눈에 띄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편안하게 감싸주는 단정한 핏을 골라 입었다. 완전히 숨긴 것도, 그렇다고 당당히 드러낸 것도 아닌 미묘한 경계. 임신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된 순간부터, 이 사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결정하기 전까지 내가 줄곧 안주해 온 모호한 지대였다.하지만 오늘 그 재킷은 내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 모호한 경계의 시간은 끝났다고.나는 결국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8시 미팅에 참석했다.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직감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는 대화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대신 그저 임시방편으로 봉합해 왔을 뿐이며, 그 한계가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그날 오후, 데미안 오빠가 그 안건을 먼저 꺼냈다.회의 도중은 아니었다. 오후 3시쯤 오빠는 내 집무실 문가에 불쑥 나타났다. 문을 두드리는 대신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은 어느새 오빠만의 노크 방식이 되어 있었다. 모리슨가의 공통된 특징이라기보다는, 데미안 오빠만의 독특한 습관임을 나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임신 건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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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리나의 시점아침 식사 자리에서 데미안 오빠에게 메시지를 보여주었다.밤새 고민하거나 오빠에게 말할지 말지 망설이지 않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탁 건너편에 앉자마자 바네사의 메시지를 띄운 휴대폰을 슬그머니 오빠 쪽으로 밀어놓았다.오빠는 메시지를 한 번 훑어보았다.그리고 휴대폰을 다시 내 쪽으로 밀어냈다."무시해.""바네사는 오빠들에 대해 아는 게 있다고 했어." 내가 말했다. "오빠들 전부 다.""누군가에게 들었거나 혼자 짚어낸 게 전부일 거다." 오빠가 커피를 집어 들었다. "바네사 클라크는 몇 달 동안 에이든의 입지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는 거야. 새로운 패, 그리고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상황 속에 어떻게든 다시 끼어들 명분을 말이지." 오빠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여자가 쥐었다고 믿는 그 명분이 바로 너고.""만약 진짜로 뭐라도 쥐고 있으면 어떡해?" 내가 물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판의 내막에 훨씬 더 가까이 접근해 있던 거라면?"데미안 오빠는 대화 상대보다 늘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을 때 보이는 특유의 의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한 번의 대화에 어느 정도의 거리까지 보여줄지 가늠하는 듯했다."그렇다 해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채널을 통해 알아낼 거다." 오빠가 말했다. "우리가 내막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여자가 정한 조건과 시간에 맞춰 부르는 자리에 순순히 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오빠는 내 눈을 똑바로 건너다보았다. "판을 짜려는 상대에게 절대로 주도권을 넘겨주지 마라."나는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후회'라는 단어를 썼어.""너더러 그 단어에 얽매이길 바란 거겠지." 오빠가 말했다. "충분히 생각했으니, 이제 그만 신경 꺼."나는 휴대폰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그리고 아침 식사를 마쳤다.오전 9시 15분, 모리슨 코퍼레이션의 로비는 북적였다.옆에는 제이드가, 뒤에는 두 명의 경호팀원이 나를 호위한 채 정문을 통과했다. 여전히 어색하고 남들의 시선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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