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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손대지 마

“어때? 나랑 강지음.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연지는 쥐고 있던 서현의 옷깃을 내던지듯 놓아버리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서현을 지나쳤다. 서현은 그대로 지나쳐가는 연지의 손목을 잡아챘다. 잡히자마자 빼내려는 손목을 힘주어 붙잡자 연지의 손목이 비틀렸다. “아!” 연지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게 퍽 자존심이 상했는지, 연지는 파르르 떨며 악다구니를 썼다. “미쳤어?! 뭐 하는 거야!” 서현은 그녀의 손목을 그대로 내팽개쳤다. 연지는 서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손목을 살살 털었다. “어디서 무식하게 힘자랑이야.” 서현은 연지의 말에 픽 웃음이 터졌다. 무식하게 힘자랑하는 거 홍연지 본인 특기 아닌가. “고작 손목 좀 잡혔다고, 피해자 코스프레. 역시 너답다.” “뭐?” “네가 보는 세상이 그렇잖아. 다른 사람 상처는 그저 약점이고, 마치 그 약점이 제 힘인 양 휘두르는…연지야, 그것만큼 무식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서현의 희고 말간 피부 위에 얹힌 장미꽃잎 입술이 움직이는 내내, 연지의 표정은 한없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 그리고 강지음이랑 너랑 어울리냐고 물었지.” “니 대답 따위 바라고 물은 거 아니니까, 그 입 닥―.” “너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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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너 그럼 진짜 도망 못 가는데

“넌, 임마…돈도 많은 놈이 왜 이 허름한 집구석으로 저런 미인을 모시고 오냐.” 정우의 농담 섞인 핀잔이 시린 아침 공기와 함께 마당으로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오래된 시골집 마당에는 수돗가와 평상이 소담히 자리하고 있었다. 지붕 아래 작은 마루에는 지음과 정우가 자다 깬 얼굴로 나란히 앉아 새파란 아침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멀리서 파도 소리가 고요하게 들려왔다. 지음은 아직 잠들어있는 서현이 있는 방문을 한번 돌아보고는 픽 웃었다. “형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서현이, 진짜 이쁘지.” “하여튼 사람 염장을…어휴.” 정우가 연신 투덜거리며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그러자 지음이 얼른 담배를 홱 낚아챘다. “담배 피우지 마. 우리 갈 때까지 참아.” “…지랄. 내놔. 여기 내 집이야!” 정우가 담배를 되찾으려 손을 뻗었다. 지음은 잽싸게 팔을 쭉 뻗으며 몸을 기울였고, 그 바람에 정우의 몸이 힘없이 기우뚱했다. 결국 균형을 잡지 못한 정우가 지음의 품에 머리를 처박았다. 지음은 그런 정우를 한 팔로 감싸 안은 채 낄낄거리며 약을 올렸다. “우리 형 많이 늙었네. 몸이 왜 이렇게 맥아리가 없어.” “이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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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길원자-1

오전 내내 맑았던 하늘엔 어느덧 잿빛 구름이 가득 들어섰다. 무겁게 우르릉거리던 하늘에선 결국 굵은 물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한적한 도로는 겨울비를 잔뜩 머금었다. 정우의 차가 그 물기를 대차게 가르며 앞으로 뻗어나갔다. 세 사람이 함께 탄 차 안에는 빗소리와 와이퍼 유리창을 쓸어내는 마찰음만 가득했다. 드드득—드드득. 일정한 소리에 맞춰 혹은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들을 바라보며, 세 사람은 각자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침묵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정우의 차가 천천히 나무가 우거진 코너를 돌았고, 세 사람의 눈앞엔 산자락 아래 자리한 ‘하늘빛추모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낮은 돌담과 빛바랜 철문, 작은 소나무들이 반기는 곳이었다. 차는 천천히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이윽고 한산한 주차장에 멈춰 섰다. 여전히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내리기를 망설이던 중, 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산 꺼내 올게. 그리고 두 사람 먼저 들어가. 나는 아무래도 할머니 좋아하시던 막걸리 좀 사 와야겠다. 비까지 오고…마음에 걸리네.” 보조석에 앉아 있던 지음이 정우를 바라보았다. “형, 술 마실 생각하지도 마. 나 운전 못해.” “그냥 들고만 간다고, 들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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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길원자-2

로비를 지나 직원에게 안내받은 곳으로 향하는 서현의 손에는 막걸 리가 담긴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현의 걸음이 멈췄다. 꽃 브로치가 달린 유리문 안쪽에 한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앳된 얼굴의 소년이 글러브와 야구공을 쥔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빛바랜 사진이었지만, 사진 속 두 사람의 따뜻한 미소만큼은 아주, 아주 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사진 아래 적힌 이름. ‘길원자.’ 서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쏴아아― 거세게 몰아치는 빗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 소리는 어느 순간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10년 전. 원자와 처음 마주했던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저, 오빠…는…’ 병원복 차림의 서현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지음의 이름이 적힌 병실 문을 단단히 가로막고 서 있던 원자는 그런 서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복도를 한참 걸었다. 인적이 드문 휴게실에 들어서서야 원자는 밭은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그녀는 서현을 돌아보면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두 손으로 서현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그냥…그냥 가드라고. 다시는 오지 말고…멀리. 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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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엄마 왔네

작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젊은 직원은 능숙하게 유리문을 제거하고, 조심스레 유골함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서현은 본능처럼 지음의 손을 꼭 잡았다. 얕게 떨리던 지음의 손끝이 서현의 온기에 조금씩 고요해졌다. 관리인 역시 유골함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리고 지음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 지음과 서현, 정우도 함께 움직였다. 미리 안내받았던 자리에 도착할 즈음, 젊은 직원도 헐레벌떡 뒤따라와 사다리를 세웠다. 여전히 요란한 빗소리 속, 원자의 유골함은 새로운 보금자리로 무사히 옮겨졌다. 이어 젊은 직원이 유리문을 닫으려 하자, 관리인이 손을 들어 막았다. “잠시만요.” 관리인이 지음을 돌아봤다. “그, 아까 말씀 주신 거 지금 넣으시면 될 것 같네요.” “아, 네.” 지음은 정우를 바라봤고, 정우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관리인에게 건넸다. 관리인은 건네받은 물건을 확인하고는 젊은 직원에게 넘겼다. “아이고 할머님께서 그간 이러다 집이 무너지는 거 아닌가 하고 불안하셨을 텐데, 좋아하시겠네요. 손주분 선물 덕에 심심하시지도 않고.” 관리인이 씩 웃어 보이자 지음의 얼굴에도 이제야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다 됐습니다.” 젊은 직원이 사다리에서 내려왔고, 관리인은 가족끼리 마저 좋은 시간을 보내시라며 그와 함께 자리를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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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예쁜 것만 오면 좋겠는데

며칠을 먹먹한 구름이 하늘을 잿빛으로 물들이더니, 이윽고 새하얀 눈을 흩뿌려댔다. 제법 굵은 눈송이들은 금세 서로 엉겨 붙고 쌓여 세상을 환하게 만들었다. 강원도에서 돌아온 서현과 지음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권 팀장이 돌아온 출판사는 정신없이 바빴고, 지음은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눈이 가득 쌓인 출판사 마당으로 들어서던 서현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야를 빼곡히 채우는 흰 눈송이가 천천히 흩날렸다. 시린 코끝 위로 눈 한 송이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예쁘게도 온다. 이렇게 예쁜 것만 오면 좋겠는데.” 그때, 뒤에서 출판사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서현은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돌아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건 며칠 동안 출근하지 않던 건하였다. 건하의 시선이 어색하게 흔들렸다. 서현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네곤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현아.” 그런 그녀를 붙잡는 목소리에 신발에 매달린 뽀드득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서현은 천천히 돌아섰다. 눈발 사이로 마주한 건하의 모습은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네, 대표님.” 건하가 쓸쓸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서현은 무감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날은…내가…” “사과하지 마세요.” 냉기가 흐르는 서현의 목소리에 건하의 눈빛이 아스라이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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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특별편 10년 전 그날

—10년 전 그날. 여느 때처럼 서현의 부는 인사불성이 되어 서현의 모친을 찾아대다 쓰러져 잠들었다. 다만 다른 게 하나 있었다면……인간 같지도 않던 그 인간이 지 딸의 이름을 부르다 울며 잠들었다는 것이었다. 미진은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이 인간이 술에 취해 전 부인을 찾아대는 것까지 참을 수 있었던 건, 그것이 그리움이 아니라 증오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전 부인을 빼다 박은 제 자식을 죽도록 미워했고, 제 손으로 때려대기까지 했으니까. 그게 미진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런데…미안하다며 서현의 이름을 부르다 울며 잠드는 그 인간의 모습은, 미진에게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허탈감을 안겼다.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전부 거짓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미진은 그날 아침부터 절대 입에 대지 않던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이 지긋지긋 한 냄새가 나는 술을, 이 술을 제 손으로 입에 들이부을 줄이야. 그리고 지 애비처럼, 아니 지 애비보다도 더 나를 무시한 그 계집애가 여지없이 그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꼴에 남자를 만나는지, 어느 순간부터 얼굴에 생기를 달고 다니던 저 어린 계집은 여전히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널브러져 있는 저 인간이 언젠가 일어나 저 애의 눈앞에서 눈물이라도 흘릴까 봐. 그래서 이 집안의 모든 더러운 흔적이 결국 내 탓으로 남을까 봐. 또다시 나만 버려질까 봐…. ‘너도 네 애비도 내가 다 죽여 버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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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죄인

―10년 전의 그날을 지나, 현재. 눈발이 사라진 한밤중의 적막을 뒤섞인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갈랐다. 경찰차와 구급차가 긴급하게 출판사 앞을 가로 막고 서있었다. 그리고 어수선한 사람들 사이로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서현의 부친, 마종태였다. 노숙자와도 같은 몰골의 그는 그을린 듯한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경찰의 안내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경찰들에게 붙들린 채 걸어 나오던 미진이 종태의 뒤통수를 매섭게 노려보며 부들부들 악을 썼다. “빌어먹을 인간! 천하의 못된 인간! 네가 왜 나타나! 네가 왜!” “…….” “네가 오면 안 되지! 마종태, 당신이 오면 안 되지!” 묵묵히 경찰들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던 종태가 서서히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멈춰 선 채로 낮게 웅얼거렸다. “……안 되지. 안 되지.” “나만 죄인이야? 내가 죄인이냐고! 네 딸한테 진짜 죄인은 너야. 마종태 당신이라고!” 종태는 제 옆에 서 있던 경찰을 잠시 바라보았다. 경찰은 그의 뜻을 알아챈 듯 살짝 몸을 틀어주었다.그제야 돌아서서 미진을 바라본 종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짧은 대답 뒤, 종태의 목울대가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니까 그러면 안 되지. 걔를 평생 죄인 딸년으로 살게 했는데…당신 같은 여자한테 또 당하게 두면 안 되지.” 말을 마친 그의 시선이 미진의 등 뒤로 넘어갔다.&n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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