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실에 혼자 남아 일기장을 펼쳤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빌딩마다 켜진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고, 퇴근한 직원들의 자리는 고요했다. 윤슬기가 남긴 기록은 뒤로 갈수록 집요해졌다. 유진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먼저 말을 건 시각이 언제였는지, 손이 어디에 닿았는지까지 적혀 있었다. 별 의미 없이 흘려보낼 법한 몸짓 하나가 어떤 기대를 만들었고, 그 기대가 무너진 날에는 무슨 생각으로 밤을 지새웠는지도 빠짐없이 남아 있었다. 지나쳤던 이야기도 몇 번을 반복해서 읽으니 다르게 보였다. 유진이는 먼저 다가갔다. 상대가 용기를 내어 거리를 좁히면 한 걸음 물러났고, 포기하려는 순간에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충분한 기대를 심어준 뒤에야 가질 수 없는 이유를 알려줬다. 그 순서가 놀라울 만큼 일정했다. 나는 한 문장 위에 손가락을 멈췄다. ㅡ남자였으면 만나줬을 텐데. 아쉽네? “이 기지배가.” 가르쳐준 적 없었다. 아니, 제대로 들여다본 적조차 없는데, 유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나와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다. 다만, 과감한 만큼 너무 서툴렀다. 상대를 움직이려고 자기 몸까지 던질 필요가 없다. 원하는 말을 골라주고, 적절한 순간에 침묵하며,스스로 답을 찾아냈다고 믿게 만들면 그만이다. 그런데 유진이는 직접 손을
Última actualización : 2026-09-16 Leer má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