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특명! 흑막을 훈련시켜라》: Chapter 71 - Chapter 80

82 Chapters

이름을 돌려드립니다

“사람부터.”엘라의 보랏빛 검이 하얀 핵을 감싸고 있던 검은 연결 하나를 정확하게 내려쳤다.콰아아아앙―!“꺼냅시다.”폭발은 예상보다 거셌다. 단순히 마력으로 만들어진 사슬 하나를 끊었을 뿐인데 최초의 문 내부 전체가 크게 뒤틀렸고, 검은 중첩체를 이루던 수천 개의 목소리가 서로 다른 비명을 쏟아 냈다. 조금 전까지는 하나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정확히 겹쳐 있던 소리가 이제는 전혀 맞지 않았다. 누군가는 놓으라고 소리쳤고, 누군가는 붙잡으라고 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울었다. 그것만으로도 엘라는 자신들이 제대로 건드렸다는 걸 알았다.저건 하나가 아니다.하나라고 믿게 된 수많은 사람이다.그리고 그 중심에.이름을 빼앗긴 한 사람이 있다.미확인 의식 분리 가능 시간.6분 03초.중첩 명령식 안정률.91%.“단테.”“오른쪽.”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빛 검이 엘라의 오른쪽을 파고들던 검은 선 세 개를 한꺼번에 잘랐다. 엘라는 뒤를 돌아볼 필요조차 없었다. 단테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자신의 빈틈을 어떻게 막고 있는지 손을 잡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두 사람의 호흡은 익숙해져 있었다.반대편에서는 루시안과 리안이 움직였다. 둘은 닮은 검술을 쓰면서도 이제는 확실히 달랐다. 루시안의 검은 짧고 정확했고, 리안의 검은 훨씬 거칠었지만 위험을 먼저 감지하는 속도가 빨랐다. 같은 사람에서 시작했으나 다른 시간을 살아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검을 휘두르는 방식에서부터 드러났다.엘라는 그 모습을 잠깐 보고 웃었다.“좋네.”“뭐가.”단테가 물었다.“다 달라서.”단테의 검이 다시 검은 연결을 끊었다.“그래.”짧은 대답.하지만 이제는.그게 무슨 뜻인지 안다.다른 건.잘못된 게 아니다.“엘라!”에드윈의 외침과 동시에 금빛 마법진이 펼쳐졌다.엘라는 바로 몸을 낮췄다.머리 위로 검은 사슬 수십 개가 지나갔고, 에드윈의 금빛이 그것들을 한꺼번에 붙잡았다. 예전 같았으면 에드윈은 사슬이 어디로 움직일지 먼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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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돌려드립니다

최초의 문이 닫힌 뒤, 일행이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기까지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문 하나를 닫았다고 해서 그 안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동시에 정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새롭게 육체를 얻은 사람들은 아직 현재의 시간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고, 육체를 만들지 못한 채 영혼핵으로 보존된 이들은 카엘과 테오도르가 급하게 만든 임시 보존진 안으로 옮겨야 했다. 무엇보다 317년 만에 문지기 자리에서 풀려난 카엘은 끝까지 멀쩡한 척했지만 계단을 절반도 오르지 못한 채 벽을 짚었고, 결국 엘라에게 들켰다.“오빠.”“괜찮아.”엘라는 대답 대신 카엘의 팔을 잡았다. 손끝으로 확인한 마력 흐름은 엉망이었다. 영혼핵 자체는 안정되어 있었지만 317년 동안 최초의 문과 이어져 있던 흔적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탓에 몸이 현재의 시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이게 괜찮은 사람 상태예요?”“살아 있잖아.”“그 기준 쓰지 마요.”“왜?”“제가 싫어하니까.”카엘이 잠시 엘라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너 정말 그대로구나.”“전생 기억도 제대로 안 났는데 뭘 그대로예요.”“잔소리.”“오빠가 말을 안 듣잖아요.”“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엘라가 눈을 가늘게 뜨자 카엘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걷던 단테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엘라가 바로 돌아봤다.“단테.”“왜.”“방금 동의했죠?”“안 했다.”“고개 끄덕였잖아요.”“목이 뻐근했다.”“거짓말.”단테의 오른쪽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엘라가 멈췄다.단테도 멈췄다.“지금.”엘라가 손가락으로 그의 눈썹을 가리켰다.“움직였죠?”단테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안 움직였다.”“와.”루시안이 뒤에서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참는 게 너무 선명했다. 리안은 이제 상황을 거의 이해한 듯 단테의 눈썹과 엘라의 눈썹을 번갈아 살폈고, 테오도르는 괜히 천장을 바라봤다.엘라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제 버릇까지 배웠어요?”“교육 효과.”“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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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이 끝난 다음 날

엘라는 눈을 뜨자마자 한동안 천장만 바라봤다. 낯익은 북부 대공성의 객실 천장이었고,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무언가 빠진 것처럼 조용했다. 몸이 가벼워서도, 어제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도 아니었다. 열세 살 이후 아침마다 자신도 모르게 확인하던 것이 더는 없었다.오늘.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누가 다치는지.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그걸 알려 주는 목소리가.없었다.엘라는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는 예지 기록서였던 책이 놓여 있었다. 표지에 새겨져 있던 초승달과 별 문양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희미해졌고, 어제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처럼 안쪽의 페이지는 전부 비어 있었다.잠시 망설이던 엘라는 몸을 일으켜 책을 가져왔다.첫 장.빈 종이.두 번째 장.역시 빈 종이.세 번째.네 번째.다섯 번째.아무것도 없다.예전이었다면 불안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미래를 보는 일이 싫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으면서도, 정작 미래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기준으로 살아왔는지가 선명하게 느껴졌다.엘라는 빈 페이지 한가운데에 손끝을 올렸다.“진짜 끝났네.”대답은 없었다.그래서.엘라는 웃었다.“좋다.”그때였다.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엘라는 반사적으로 책을 덮었다.“누구세요?”“나.”낮고 익숙한 목소리.엘라의 심장이.쿵.그리고 거의 동시에 어젯밤 기억이 돌아왔다.좋아한다.많이.나와 결혼해 줄래.할게요.당신이랑 결혼할게요.엘라는 그대로 굳었다.“엘라?”문밖에서 단테가 다시 불렀다.엘라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아.”어제는 정신이 없었다. 최초의 문을 닫고, 수천 개의 영혼핵을 보존하고, 예언 체계를 끝내고, 세리아와 카시엘을 현재화하고, 아시온 문제까지 정리하느라 감각이 이상해져 있었다.그런 상태에서.고백하고.청혼받고.수락했다.심지어.입맞춤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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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이 끝난 다음 날

황궁으로 보고서를 보낸 지 정확히 스물세 분 뒤였다.북부 대공성 집무실 한가운데 설치된 황실 직통 마법진이 갑자기 새하얗게 폭발하듯 빛났다. 평소라면 황궁에서 북부까지 긴급 문서를 전송하는 데 아무리 빨라도 한 시간 가까이는 걸렸다. 마력 좌표를 맞추고, 수신자를 확인하고, 황실 인장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절차를 전부 무시한 듯 마법진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봉투 하나가 허공에서 툭 떨어졌다.그 순간 집무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봉투를 바라봤다.테오도르가 가장 먼저 미간을 좁혔다.“이 속도는 황실 긴급 전송인데.”엘라는 불길한 표정으로 봉투를 내려다봤다. “설마 전쟁이라도 난 건 아니겠죠?”“전쟁이 났으면 붉은 봉투입니다.”“그럼 저건요?”“황제 폐하의 친서입니다.”엘라가 입을 다물었다.봉투 앞면에는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문제는 평소 황실에서 사용하는 단정한 금빛 밀랍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밀랍이 얼마나 급하게 눌렸는지 황실 문장이 절반쯤 뭉개져 있었다.루시안이 엘라의 어깨 너머로 봉투를 들여다봤다.“엄청 급하게 보내셨나 본데요.”리안도 옆에서 물었다.“황제가 원래 저렇게 급해?”“아니.”테오도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러면.”리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엘라와 단테의 맞잡은 손으로 향했다.“저것 때문인가.”엘라는 천천히 손을 내려다봤다.그리고 놓으려 했다.단테가 안 놨다.“단테.”“왜.”“지금은 좀 놓죠.”“왜.”“왜긴 왜예요. 저 편지 내용이 뻔하잖아요.”“그러니까 더 잡아야지.”엘라가 그를 바라봤다.단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자세히 보니 아주 조금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혹시 즐기고 있어요?”“조금.”“황제 폐하가 화내는 걸?”“아니.”단테가 엘라를 내려다봤다.“네가 당황하는 걸.”엘라의 입이 벌어졌다.“와.”교육이.잘못됐다.분명 처음 북부에 왔을 때는 표정도 없고 말도 없고 사람을 얼려 죽일 것 같은 남자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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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아시온은 문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은 원을 가로지른 선은 분명 잉크로 그려진 문양이었는데, 방금 전부터 살아 있는 것처럼 아주 느리게 맥동하고 있었다. 한 번 빛날 때마다 손끝에서 시작된 불쾌한 감각이 손목과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그것은 마력에 닿았을 때의 통증과 달랐다. 마치 몸보다 훨씬 깊은 곳, 영혼에 새겨진 오래된 상처를 누군가 손가락으로 눌러 확인하는 듯한 감각이었다.관리자가 깨어납니다.휴고가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아시온.”대답이 없자 휴고의 표정이 굳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시온은 오래된 기록을 하나씩 분류하며 자신이 기억하는 내용과 다른 부분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고, 문서를 쥔 손은 눈에 보일 만큼 떨리고 있었다.“이 문서를 놓으십시오.”휴고가 손을 뻗는 순간 아시온이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만지지 마.”휴고의 손이 멈췄다.“왜입니까?”아시온은 대답하려 했지만 입술만 움직였다. 설명할 수가 없었다. 기억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기억이 너무 오래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몸은 먼저 알고 있었다. 심장이 빨라지고, 숨이 얕아지고, 무릎에 힘이 빠졌다. 아주 오래전 이름조차 없었던 어린 자신이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움직이지 않는다.질문하지 않는다.시키는 대로 한다.그리고.고개를 들지 않는다.아시온의 머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그 순간 휴고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아시온.”몸이 움찔했다.“정신 차리십시오.”아시온의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대로 굳었다.휴고가 낮게 물었다.“방금 무엇을 하려 했습니까?”“……모른다.”“고개를 숙였습니다.”“알아.”아시온은 이를 악물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내가 한 게 아니야.”휴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명령입니까?”“아마도.”아시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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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가면의 갈라진 틈 사이로 드러난 것은 예상했던 얼굴이 아니었다. 피부도, 입술도, 코도 없었다. 검은 명령문이 수천 겹으로 엉켜 만든 가면 안쪽에 희미한 흰빛 하나가 떠 있었고, 그 중심에서 사람의 눈 하나가 천천히 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사람처럼 초점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정확하게 엘라를 향한 눈이었다.엘라는 검을 내리지 않은 채 숨을 골랐다. 방금 전까지 그녀는 저것을 하나의 관리자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번호를 붙이고 이름과 관계와 선택을 빼앗은 최초의 가해자, 그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갈라진 가면 안쪽을 본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저 검은 덩어리는 사람 하나가 아니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목소리와 규칙, 반복된 명령이 겹쳐져 하나의 의지를 흉내 내고 있었다.그리고 그 중심에.누군가 갇혀 있었다.“단테.”엘라가 낮게 부르자 단테는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등을 지켰다.“말해.”“저 가면 자체가 사람이 아니에요. 안쪽에 있는 사람이랑 분리해야 해요.”에드윈도 이미 같은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미래를 보는 힘은 사라졌지만, 그의 마력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언이 끼어들지 않는 지금은 눈앞의 마력 구조를 더 차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에드윈이 손을 들어 검은 원을 따라 움직이는 마력선을 추적하더니 표정을 굳혔다.“엘라 말이 맞아. 하나의 영혼핵이 아니다.”테오도르가 즉시 물었다.“몇 명입니까?”“잠깐.”에드윈의 마력이 가면을 스쳤다. 검은 표면 위로 숫자가 떠올랐다.중첩 의식 분석.개체 수 산출 중.317.1,842.4,109.7,114.산출 실패.테오도르의 얼굴이 굳었다.“칠천 명 이상이라고요?”“최소한.”에드윈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그리고 저 숫자도 정확하지 않아. 너무 오래 겹쳐 있어서 어디까지가 하나의 의식이고 어디부터가 다른 의식인지 구분되지 않는다.”아시온이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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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없는 아침

유안이 자신의 이름을 고른 뒤, 북부 대공성은 잠들지 못했다. 최초의 문과 예언 체계는 완전히 사라졌고 집단 명령식 역시 붕괴했지만, 그 안에서 분리된 수많은 의식까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육체를 얻어 현재에 정착한 사람들은 그대로 남았고, 마지막 순간 명령식에서 빠져나온 이들 중 일부는 희미한 영혼핵의 형태로 지하 보관실과 복도를 가득 채웠다. 육체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안정된 이들은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은 누군가의 손바닥만 한 빛으로 떠다니거나 잠든 듯 움직이지 않았다.엘라는 한참 동안 그 광경을 바라봤다.숫자로 세면 많다.너무 많다.하지만 이제.숫자로만 보면 안 된다.“몇 명이에요?”테오도르가 기록 마법을 펼친 채 대답했다.“정확한 숫자는 아직 산출할 수 없습니다. 서로 뒤엉켜 있던 의식 중 완전히 분리된 것과 아직 안정화 중인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현재 독립된 영혼핵으로 확인되는 것만 천 개가 넘습니다.”엘라의 미간이 좁아졌다.“전부 육체를 만들 수는 없죠?”“현재 마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에드윈이 옆에서 덧붙였다.“그리고 가능하다고 해도 해서는 안 돼.”엘라가 그를 봤다.에드윈은 바닥 가까이 떠 있는 작은 빛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살고 싶은지부터 물어야 한다.”엘라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맞아요.”“누군가는 육체를 원할 거고, 누군가는 영혼 상태로 더 생각하고 싶을 수도 있어. 누군가는…….”에드윈이 잠시 말을 멈췄다.“이제 쉬고 싶을 수도 있고.”그 말을 듣는 순간 주변이 조금 조용해졌다.317년.혹은 그보다 훨씬 오래.이들은 명령 속에서 살아왔다.그러니 자유를 얻었다는 이유로 당장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하는 것 역시 또 다른 강요일 수 있었다.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아무것도 먼저 정하지 말죠.”테오도르가 물었다.“그렇다면 보존부터 해야 합니다.”“얼마나 가능해요?”카엘이 대답했다.“내가 하면.”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카엘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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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없는 아침

카엘이 엘라에게 붙잡힌 뒤 북부 대공성의 아침은 한동안 평화와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심각한 싸움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엘라는 눈밭 한가운데서 카엘의 외투 소매를 붙잡은 채 왜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그런 말을 가르쳤느냐고 따졌고, 카엘은 자신은 단지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고 억울해했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미래의 엘라는 말릴 생각도 없이 웃고 있었고, 단테는 아렌을 품에 안은 채 어느 쪽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끼어들었다가 자신까지 교육 대상이 될 가능성을 빠르게 계산한 얼굴이었다.“객관적인 사실이요? ‘네 엄마 아빠는 생각보다 느리다’가 객관적인 사실이에요?”“틀렸어?”“오빠.”“청혼했지, 승낙했지, 반지도 줬지. 그런데 날짜는 안 정했지. 어디가 틀렸는데?”엘라의 입이 다물렸다. 반박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카엘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기 소매를 빼내려 했으나 엘라가 더 단단히 붙잡았다.“그래도 아렌한테 그런 걸 가르치면 안 되죠.”“왜?”“애가 그대로 따라 하잖아요.”“똑똑하네.”“누구 조카인데.”카엘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내 조카.”엘라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갑자기 생긴 조카라며 눈물까지 글썽거리던 사람이 하루 만에 완벽한 외삼촌 행세를 하고 있었다.그때 아렌이 단테의 품에서 손을 번쩍 들었다.“나 또 배웠어.”엘라가 불길한 얼굴로 돌아봤다.“뭘?”“결혼은 날짜를 정해야 한다.”“…….”“그리고 외삼촌이 그랬어. 약혼은 결혼하기 전까지 마음 놓으면 안 된대.”이번에는 단테의 시선이 카엘에게 향했다.카엘이 아주 자연스럽게 눈을 피했다.단테가 아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 말은 맞군.”“단테까지 왜 그래요?”“날짜를 정하면 되잖아.”너무 간단하게 나온 말에 엘라가 오히려 멈칫했다. 단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마치 오늘 점심 메뉴를 정하듯 말했지만, 그의 시선은 엘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지금요?”“싫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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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심장에 남긴 것

황실 조사단이 임시 조사실로 사용하고 있는 서쪽 응접실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귀족 손님을 맞는 평범한 방이었지만, 지금은 탁자 세 개가 이어 붙여져 있었고 그 위에는 북부 지하에서 발견된 기록물과 황실 조사관들이 밤새 분류한 자료가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창가에는 증거 보존용 마법진이 겹겹이 펼쳐져 있었고, 방 중앙에는 열어 보는 것만으로도 별도의 기록을 남기도록 봉인된 검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엘라는 단테와 함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상자를 봤다. 단테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복도를 걸어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힘을 주어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손가락 사이를 자연스럽게 얽고 있었는데, 그 평범한 온기가 오히려 엘라를 안심시켰다.조사단 책임자 마리엘 로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대공 전하. 공녀.”“기록은.”단테가 바로 물었다.“어젯밤 아시온의 진술을 토대로 지하 실험실의 폐기 문서를 다시 분류하던 중 발견했습니다. 정확히는 한 장의 기록이 아니라 세 개의 서로 다른 자료가 연결된 것입니다.”마리엘은 단테의 표정을 한 번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첫 번째는 전대 대공의 개인 기록, 두 번째는 당시 가문 주치의의 시술 기록, 세 번째는 아르젠트 직계 혈통 의식의 마력식입니다. 각각 따로 보았을 때는 의미를 확정하기 어려웠지만, 시간과 대상이 일치합니다.”엘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제국력 798년.단테가 일곱 살이던 해.그해는 이미 너무 많은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린 단테가 버려진 가능성을 처음 관측했던 해이자, 미래의 엘라가 잠시 그 시대로 흘러들어 갔던 해였고, 아직 한 살이던 루시안의 기억까지 최초의 문에 얽혀 버린 해였다.그리고 이제.또 하나가 나온다.단테는 의자를 당기지 않았다.“읽어.”마리엘이 잠시 망설였다.“전하께서 직접 보시는 편이.”“읽어.”단호했지만 감정적인 명령은 아니었다. 마리엘은 고개를 숙인 뒤 첫 번째 문서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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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보다 먼저 정해야 할 것

두 번째 보고서가 황궁으로 전송된 뒤에도 북부 대공성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세계를 멸망시킬 예언과 최초의 문이 사라졌다고 해서 성 안에 쌓인 일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아진 만큼 해야 할 일은 더 늘었다. 육체를 얻은 이들의 방과 식사, 의복과 신분을 정리해야 했고, 아직 영혼핵으로 머무는 이들에게는 각자의 의사를 확인할 절차가 필요했다. 황실 조사단은 지하 실험실을 봉인한 채 밤낮없이 기록을 분류했고, 휴고는 갑자기 몇 배로 늘어난 성의 거주 인원을 감당하느라 기사단보다 하인들을 더 많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가장 먼저 한계에 도달한 곳은 주방이었다. “안 됩니다.” 주방장의 단호한 선언에 엘라는 빵을 집으려던 손을 멈췄다. “뭐가요?” “오늘부터 야식은 한 사람당 한 번입니다.” 엘라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늦은 저녁인데도 식당에는 사람이 많았다. 317년 만에 육체를 얻은 이들 중에는 배고픔이라는 감각 자체가 신기해서 하루 다섯 끼를 먹는 사람도 있었고, 리에나는 조린 사과 만들기에 성공한 뒤 자신감을 얻었는지 이번에는 사과 파이를 배우겠다며 주방 한쪽을 점령하고 있었다. 유안은 오늘 처음 마신 따뜻한 우유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두 손으로 잔을 감싸고 있었고, 카엘은 그런 유안을 감시한다는 핑계로 네 번째 쿠키를 집어 먹는 중이었다. 엘라가 물었다. “제가 두 번 먹었어요?” 주방장이 고개를 저었다. “공녀님 말고요.” 그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엘라도 따라 봤다. 아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작은 손에는 빵이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잼이 묻어 있었다. 아이는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아주 천천히 빵을 등 뒤로 숨겼다. “아렌.” “응.” “오늘 몇 번째야?” “뭐가?” “야식.” 아렌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한 번?” 주방장이 말했다. “네 번입니다.” “…….” “저녁 식사 후에만 네 번입니다.” 엘라가 이마를 짚었다. “아렌.” “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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