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특명! 흑막을 훈련시켜라》: Chapter 61 - Chapter 70

82 Chapters

최초의 관측자

제국력 798년.아르젠트 대공성.관측자 0.한 살의 루시안 아르젠트.루시안은 한동안 기록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한 살.자신에게는 당연히 기억이 없는 시절이었다. 단테가 일곱 살이던 해, 자신은 이미 태어나 같은 성 안에 있었고, 그곳에 현재에서 건너간 스무 살의 자신까지 존재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묘했는데 이제 기록서는 한 살의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미래 밖의 단테’를 관측했다고 말하고 있었다.“잠깐.”루시안이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셨다. 가슴에 남은 상처 때문인지, 방금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내가 뭘 봤다고?”기록서가 답했다.단테 아르젠트.“그건 알아.”루시안이 인상을 찌푸렸다.“형을 어떻게 봤는데.”미래가 아닌 단테 아르젠트를.“그러니까 그게 무슨—”“말 그대로일 거예요.”엘라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그녀는 기록서를 내려다보며 조금 전까지 이어진 내용을 머릿속에서 다시 맞추고 있었다. 단테의 아르젠트 혈통은 미래를 바꾸는 힘이 아니라 미래에서 벗어나는 힘이었다. 그래서 그가 예정된 선택을 거부할 때마다 그 미래는 사라지지 않고 몸 안에 축적되었다. 그리고 798년, 일곱 살의 단테가 처음으로 예정에 없던 선택을 했다.현재에서 온 루시안을.자신의 동생이라고 알아보고.아버지 앞을 막아선 것.최초 변칙 발생.대상 : 단테 아르젠트.발현 시점 : 제국력 798년.원인 : 보호 선택.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때였어요.”단테가 그녀를 바라봤다.“내가 루시안을 막아섰을 때.”“응. 그때 당신이 처음으로 예정된 미래에서 빠져나왔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변칙도 그 순간이었고.”테오도르가 곧바로 이해했다.“그렇다면 ‘미래 밖의 단테’란 그 변칙 직후의 대공 전하를 의미하는 겁니까?”“아마도.”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여전히 하나가 맞지 않았다.그 자리에 있었던 건 현재의 엘라와 루시안, 미래의 엘라, 어린 단테, 젊은 에드윈, 그리고 라제르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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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관측자

“왔네.”810년의 지하 실험실 너머, 검은 회로가 목까지 올라온 남자가 검을 들어 올렸다. 얼굴은 분명 루시안이었다. 지금 단테 옆에 서 있는 루시안과 같은 은빛 머리, 같은 회색빛 눈, 같은 이목구비. 하지만 표정만큼은 너무 달랐다.현재의 루시안은 형을 보면 아직도 복잡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미안함도 있고, 억울함도 있고, 다시 믿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런데 문 너머의 루시안에게는 그런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한 가지 목적만 남도록 깎여 나간 사람처럼, 검을 든 손도 시선도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형.”그가 웃었다.“이번에는 내가 먼저 죽일게.”단테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현재의 루시안이 바로 팔을 뻗어 막았다.“형, 잠깐.”“비켜.”“저거 나야.”“알아.”“그러니까 내가 먼저—”“너도 회복 안 됐다.”단테의 말에 현재의 루시안이 인상을 썼다.“형도 심장 한 번 멈췄거든?”뒤에서 엘라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미간을 짚었다.“둘 다 이런 데서만 형제애 과하게 쓰지 마요.”단테와 루시안이 동시에 그녀를 봤다.엘라는 기록서를 한 손에 든 채 마력진 가장자리까지 다가갔다. 문 너머 810년의 공기가 현재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피 냄새와 약 냄새, 검은 마력의 쓴 기운. 그리고 그 안에, 그녀가 이미 한 번 맡은 적 있는 불쾌한 금속 냄새까지 섞여 있었다.Zero 실험실.루시안이 일곱 해 동안 갇혀 있었던 시작점.“우선 이름부터 정리하죠.”엘라가 말했다.현재의 루시안이 어이없는 얼굴로 돌아봤다.“지금?”“같은 얼굴 셋 나오는데 호칭부터 안 정하면 대화가 안 돼요.”테오도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맞습니다.”루시안이 한숨을 쉬었다.“좋아. 나는 그냥 루시안.”엘라는 문 너머의 남자를 가리켰다.“저쪽은.”기록서가 먼저 답했다.L.A.-01.폐기 시간축 생존자.엘라가 인상을 찌푸렸다.“그건 사람 이름이 아니잖아.”검은 글씨가 나타났다.식별 번호다.“누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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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폐기 미래

마지막 폐기 미래의 현재 위치.분리된 영혼핵.대상.824년의 엘라 에스텔.기록서의 문장이 완전히 자리 잡는 순간, 현재의 엘라는 반사적으로 미래의 자신을 바라봤다.아렌을 안고 있던 스물여덟의 엘라는 조금 전부터 가슴을 움켜쥔 채 서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숨도 평소보다 얕았다. 영혼핵을 분리한 직후라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기록서가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그녀 안에.단테를 다시 죽일 수 있는.마지막 폐기 미래가 있다.“잠깐.”현재의 엘라가 한 걸음 다가갔다.“움직이지 마요.”미래의 엘라가 어이없는 얼굴로 그녀를 봤다.“나 환자야?”“지금은 비슷해요.”“멀쩡해.”“그 말 금지.”“너 진짜 많이 변했네.”“미래의 저한테만은 듣고 싶지 않은데.”평소 같으면 바로 받아쳤을 미래의 엘라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대신 가슴을 누른 손에 조금 더 힘을 줬다.그걸 본 현재의 엘라 표정이 곧바로 굳었다.“아파요?”잠시.“조금.”“조금이 어느 정도인데.”“숨 들이마실 때.”“그리고.”“심장 옆.”현재의 엘라가 즉시 테오도르를 돌아봤다.“확인해 줘.”테오도르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미래의 엘라 앞에 마력진을 펼치고, 분리된 영혼핵의 상태를 하나씩 읽었다. 처음에는 보랏빛. 그 안에 은빛. 그리고 더 깊은 곳.검은 선.너무 가늘어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흔적이 영혼핵 가장 안쪽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테오도르의 얼굴이 굳었다.“있습니다.”현재의 엘라가 물었다.“뭐가.”“기록서가 말한 폐기 미래로 보입니다.”미래의 엘라는 자기 가슴을 내려다봤다.“내 안에.”“예.”“언제부터.”테오도르는 대답하지 못했다.그 질문에는.미래의 엘라만 답할 수 있었다.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328번째.단테를 직접 죽였던 미래.지금까지는 거기까지만 기억했다. 단테를 살릴 방법이 없다고 믿었고, 아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단테의 심장을 찔렀다. 그리고 그 순간 이후의 기억은 이상할 정도로 끊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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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폐기 미래

리안 아르젠트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예지 기록서 위로 번진 검은 문장이 삐뚤게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라제르가 남긴 글씨는 언제나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었다. 자신이 이미 모든 결과를 알고 있다는 사람처럼, 상대가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결국 자기 계획 안으로 돌아오리라 믿는 사람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문장 끝이 번졌고, 검은 아르젠트 문양 한가운데로 생긴 금은 순식간에 가지를 뻗었다. 단테와 루시안, 그리고 새 이름을 얻은 리안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지만, 세 사람의 표정에는 같은 생각이 떠올라 있었다. 엘라가 가장 먼저 웃었다. “진짜 싫은가 보다.” 루시안도 기록서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러게요. 아까까지는 뭘 해도 기다렸다는 식이더니.” 리안은 자신의 가슴을 한번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현재에 정착하지 못해 흐려지던 몸이 이제는 선명했다. Zero의 잔재였던 검은 회로도 대부분 사라졌고, 그 중심에는 작지만 분명한 은빛 영혼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리안. 그가 직접 고른 이름. 현재에 존재하기 위해 누군가가 붙여 준 식별 번호가 아니라, 자기 입으로 처음 선택한 이름이었다. 그 순간부터 라제르가 흔들렸다. 엘라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겼다. “왜죠?” 기록서에 대고 묻자 검은 글씨가 잠시 나타나지 않았다. 엘라는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예전 같으면 답이 늦어질수록 조급해졌겠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침묵하는 쪽이 더 불안할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예상대로. 한참 뒤 글씨가 나타났다. 폐기 시간축은 폐기된 채로 남아야 한다. 엘라가 곧바로 물었다. “왜.” 그래야 기록이 닫힌다. “안 닫히면?” 다시 침묵. 단테가 낮게 말했다. “대답해.” 검은 문양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시간축이 늘어난다. 테오도르의 표정이 달라졌다. “늘어난다는 건 단순히 분기가 하나 더 생긴다는 의미입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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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잊지 마

해당 의식은 317년 동안.엘라 에스텔을 기다렸습니다.문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희미해서, 조금만 주변이 시끄러웠다면 놓쳤을 것 같은 소리였다. 그런데도 엘라는 그 한마디를 분명하게 들었다.“이번에는.”짧은 숨.“나를 잊지 마.”가슴 한가운데가 이상하게 당겼다.기억은 없다. 목소리도 처음 듣는다.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모른다. 그런데 몸 어딘가가 먼저 반응했다. 오래전 잃어버린 것을 갑자기 눈앞에서 마주친 사람처럼,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엘라가 무의식적으로 문 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자 단테의 손이 곧장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엘라.”낮은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엘라는 멈춰 서서 자기 발끝을 내려다봤다. 분명 자신이 움직였다. 누가 끌어당긴 것도 아니고, 마법에 정신을 빼앗긴 감각도 없었다. 그런데 왜 움직였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저도 모르겠어요.”단테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뭐가.”“왜 가려고 했는지.”“목소리가 익숙한가.”엘라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처음 들어요.”잠시 생각했다가 다시 덧붙였다.“적어도 기억상으로는.”미래의 엘라 역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녀는 아렌의 어깨를 감싸고 서 있다가 현재의 엘라를 바라봤다.“나도.”엘라가 그녀를 봤다.“당신도 알아요?”“아니.”미래의 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목소리는 처음이야.”“근데.”“이상하게.”미래의 엘라가 자기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나도 아파.”둘의 시선이 마주쳤다.현재의 엘라와 미래의 엘라가 같은 반응을 보인다.그렇다면 이건 824년 이후에 생긴 기억이 아니다. 둘이 갈라지기 전, 더 오래된 무언가일 가능성이 높다.에드윈이 기록서를 살폈다.“영혼 기억.”엘라가 돌아봤다.“그게 뭐예요.”“의식으로 기억하지 못해도 영혼핵에는 흔적이 남는 경우가 있다.”테오도르가 바로 이해했다.“유년기 이전의 기억이나, 강제로 제거된 기억 같은 것 말씀이십니까?”“그것도 포함된다.”엘라의 눈이 가늘어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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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잊지 마

“…카엘.”엘라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이름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방금 처음 떠올린 단어가 아니라,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겨우 되찾은 사람의 이름처럼 혀끝에 익숙하게 감겼다.문 너머가 조용해졌다.그리고 한참 뒤.“응.”낮고 떨리는 목소리.“내 이름.”잠시 숨이 이어졌다.“그거야.”엘라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름 하나를 되찾았을 뿐인데, 문 너머의 존재가 전보다 훨씬 선명해진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는 이름도 얼굴도 없는 의식이었는데, 이제는 카엘이라는 사람이 되었다.단테는 엘라가 흔들리는 걸 느끼고 손에 힘을 조금 더 줬다.엘라는 그 감각으로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카엘.”한 번 더 불렀다.이번에는 확인하듯.카엘이 대답했다.“응.”목소리가 조금 더 가까웠다.“기억났구나.”“조금.”엘라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근데 아직 얼굴은 제대로 안 보여요.”“괜찮아.”“뭐가 괜찮아요.”“이름만 기억해도.”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찔렀다.엘라는 바로 대꾸했다.“그런 말 하지 마요.”카엘이 잠시 침묵했다.“왜.”“이름만 기억하면 된다는 사람들치고 나중에 꼭 자기 희생하려고 하더라고.”루시안이 옆에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정확한데.”엘라는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들었어요.”“작게 말했는데.”“다 들려요.”카엘이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그것도 그대로네.”엘라의 눈빛이 흔들렸다.“제가 예전에도 이랬어요?”“더 심했지.”“제가?”“응.”“말도 안 돼.”단테가 낮게 말했다.“가능하다.”엘라가 홱 돌아봤다.“왜 그렇게 확신해요.”“지금도 심하니까.”미래의 엘라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긴장된 상황인데도 이상하게 그 짧은 대화가 숨통을 틔웠다.하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최초의 문 개방률.41%.테오도르가 바로 숫자를 확인했다.“속도는 아직 유지됩니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 상승 간격이 짧아졌습니다.”에드윈이 말했다.“라제르가 안쪽에서 밀고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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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체를 찾았습니다

“이제.”두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본체를 찾았구나.”같은 얼굴이었다. 에드윈과 닮은 이목구비도, 왼손을 뒤덮은 검은 화상 자국도, 사람의 시간을 너무 오래 벗어나 이제는 나이를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눈빛도 똑같았다. 목소리까지 정확하게 겹쳐서 어느 쪽이 먼저 말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하지만 엘라는 움직이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카엘에게서 분리되던 317개의 은빛 실이 여덟 갈래로 나뉘어 자신과 단테, 루시안, 리안, 에드윈, 세리아, 카시엘, 그리고 카엘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봉인 구조 전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 라제르에게 정신을 빼앗기면 카엘을 구하는 것도, 317개의 의식을 현재로 쏟아지지 않게 붙드는 것도 전부 실패한다.그래서 엘라는 두 라제르를 잠깐 바라본 뒤, 다시 카엘의 손을 꽉 잡았다.“일단 하던 거 계속해요.”두 라제르의 웃음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루시안이 엘라를 돌아봤다.“저거 안 궁금해요?”“엄청 궁금하죠.”“근데?”“지금 물어보면 좋아할 것 같아서.”엘라는 카엘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기록서에 떠오른 수치를 확인했다.봉인 구조 전환율.68%.“조금만 참아요. 저런 사람은 자기가 준비한 반전 바로 안 물어봐 주면 더 힘들어요.”리안이 두 라제르를 번갈아 봤다. 정말로 둘의 표정이 전보다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맞는 것 같은데.”“그렇죠?”“엘라.”단테가 낮게 불렀다.엘라는 바로 그를 봤다.“왜요.”“오른쪽.”짧은 말이었지만 충분했다.엘라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감각만 넓혔다. 오른쪽에 선 라제르의 발밑에서 검은 마력이 아주 가늘게 퍼지고 있었다. 공격이 아니다. 카엘에게 연결된 은빛 실 중 하나를 타고 317개의 의식 쪽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이었다.“아.”엘라가 웃었다.“말 걸어 놓고 딴짓.”검이 움직였다.콰직―!보랏빛 마력이 검은 선을 정확하게 끊었다. 오른쪽 라제르의 눈이 가늘어졌다.단테의 은빛 마력도 거의 동시에 왼쪽을 막았다. 다른 라제르 역시 반대편에서 같은 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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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체를 찾았습니다

“당신도.”엘라가 검을 내린 채 라제르를 똑바로 바라봤다.“누군가한테 이름을 빼앗겼구나.”수천 개의 검은 의식이 동시에 멈췄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간 전체를 뒤덮으며 금방이라도 엘라 일행을 집어삼킬 것처럼 밀려오던 죽은 라제르들이 하나같이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목이 잘린 채 남은 의식도, 심장을 꿰뚫린 흔적을 품은 의식도, 불길에 반쯤 무너진 형체도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그 모습이 오히려 대답이었다.라제르의 이름은 스스로 버린 것이 아니다.누군가에게.빼앗겼다.엘라는 그 사실을 확신하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라제르가 만들어 놓은 장치들은 하나같이 복잡했다. 시간을 뒤집고, 미래를 폐기하고, 사람의 몸을 갈아타고, 수백 년에 걸쳐 닫힌 인과를 만들어 냈다.그런데 시작은.어쩌면 아주 단순했을지도 모른다.한 사람.한 이름.그걸 빼앗긴 순간.“아니.”라제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낮았지만 전과 달랐다.“나는 이름을 버렸다.”엘라는 고개를 기울였다.“그래요?”“이름은 불필요하다.”“그것도 당신이 정한 거고?”라제르의 눈이 가늘어졌다.“그래.”“그럼 알려 줘요.”“무엇을.”“버린 이름.”침묵.엘라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본인이 버렸다며. 그럼 기억하고 있겠네.”“…”“뭐였어요?”라제르의 얼굴이 굳었다.루시안이 엘라의 의도를 알아채고 피식 웃었다.“대답 못 하네.”리안도 수천 개의 라제르를 경계하면서 말했다.“진짜 기억 못 하나 봐.”“닥쳐라.”라제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리안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가슴에 손을 올렸다.“싫어.”라제르의 검은 눈이 그에게 향했다.리안은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내 이름은 리안이고, 내가 말할지는 내가 정해.”그 한마디에 현재의 루시안이 아주 작게 웃었다.“잘 배웠네.”“누구한테.”“나.”“싫은데.”“나도.”엘라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입꼬리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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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놓아주는 날

에드윈이 천천히 손을 기록서 위에 올렸다.그 순간 기록서의 모든 페이지가 한꺼번에 멈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최초의 문과 186명의 현재 정착자, 아시온의 불사 구조 붕괴를 기록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던 글자들까지 마치 누군가 시간을 붙들어 놓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지하에 남아 있던 검은 마력도, 카엘의 몸을 둘러싼 은빛도, 엘라와 단테의 맞잡은 손끝에서 흐르던 보랏빛과 은빛도 그 순간만큼은 에드윈의 선택을 기다리는 듯했다.기록서 한가운데에는 단 하나의 문장만 남아 있었다.최초 예언자의 최종 승인을 기다립니다.그리고 그 아래.세리아의 보랏빛 글씨가 다시 나타났다.에드윈.이번에는 미래 놓을 수 있어?에드윈은 대답하지 않았다.손은 기록서 위에 올려져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금빛 눈은 세리아의 글씨에서 떨어질 줄 몰랐고, 조금씩 거칠어지는 숨만이 그가 얼마나 크게 흔들리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엘라는 재촉하지 않았다.지금만큼은.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317년 동안 에드윈은 잘못된 선택을 수도 없이 했다. 세리아를 살리고 싶다는 이유로 미래를 통제하려 했고, 카시엘을 죽였으며, 수많은 사람을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죄 때문에 심판했다. 라제르—이제는 아시온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자—가 그의 절박함을 이용했다는 사실도 드러났지만, 그렇다고 에드윈의 선택까지 아시온의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엘라가 이미 말해 주었다.좋은 선택도.나쁜 선택도.전부 당신 거라고.그러니 마지막도.에드윈이 골라야 한다.“엘라.”단테가 아주 낮게 불렀다.엘라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응.”“말 안 하나.”“이번에는요.”엘라는 기록서 앞에 선 에드윈을 바라봤다.“제가 답 안 알려 주려고요.”에드윈의 눈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분명 들었다.하지만 엘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대신 그의 선택을 기다렸다.한참 뒤.에드윈이 입을 열었다.“최초의 문을 닫으면.”목소리가 쉬어 있었다.“미래 관측 체계가 사라진다고 했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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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놓아주는 날

“당신이구나.”엘라는 갈라진 어둠 너머에서 뻗어 나온 검은 손을 검으로 막은 채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손끝만 드러났을 뿐인데도 조금 전까지 아시온을 짓누르던 공포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알 것 같았다. 마력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그런데 그 고요함 안에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종류의 질서가 배어 있었다. 이름보다 번호가 먼저이고, 선택보다 기능이 먼저이며, 살아 있는 존재를 목적을 위한 부품으로 나누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자의 흔적이었다.“우리 애들한테.”엘라의 검끝에서 보랏빛 마력이 천천히 번졌다.“자꾸 번호 붙인 사람.”검은 손이 멈췄다.그리고 어둠 속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우리.”엘라의 눈이 가늘어졌다.“네.”“네가 언제부터.”목소리는 낮고 감정이 없었다.“그것들을 소유했지?”엘라의 표정이 싸늘해졌다.“와.”루시안이 뒤에서 작게 중얼거렸다.“첫마디부터 틀렸네.”리안도 얼굴을 굳혔다. 조금 전 자신의 몸에서 마지막 Zero 회로를 깨뜨린 탓에 안색은 창백했지만, 검을 쥔 손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소유하는 거 아니잖아.”검은 손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리안은 한 발 앞으로 나왔다.“같이 있는 거지.”엘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잘 배웠네.”“교육 안 받았다니까.”“이 정도면 수료시켜 줄게요.”“싫어.”“역시 잘 배웠네.”단테가 엘라의 옆에서 은빛 검을 세웠다. 그는 어둠 너머를 보면서도 엘라의 위치를 놓치지 않았고, 반대편에서는 루시안이 아시온 앞을 막았다. 카엘 역시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엘라가 곧바로 손을 뻗어 제지했다.“오빠는 앉아 있어요.”“나도 싸울 수 있어.”“현재 정착률 21%였던 사람이 무슨.”“지금은 더 올랐을 수도 있잖아.”“확인하고 말해요.”카엘이 기록서를 봤다.카엘 현재 정착률.34%.카엘이 엘라를 봤다.“올랐는데.”“그래도 앉아.”“엘라.”“가족 말 좀 들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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