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三江), 그 등불 아래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98 챕터

제11화: 질투는 뚝배기를 얼게 만든다 1

​새벽녘 삼강 나루터를 자욱하게 덮고 있던 지독한 물안개가 서서히 흩어져 나갔다.​낙동강의 살얼음 동동 뜬 물결 위로 비스듬한 가을 햇살이 내리앉으며 차갑게 반짝였다.​유옥연은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무쇠솥 아래로 부지깽이를 젓는 손가락을 가만히 떨었다.​아궁이 안에서 피어오르는 노란 불길에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옥연의 가슴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불꽃의 열기가 아니었다.​불과 몇 시간 전, 짙은 안개 속에서 자신을 강하게 끌어안던 남자의 커다랗고 단단한 팔이 피부 위로 아리게 피어올랐다.​자신의 한쪽 귀를 제 가슴뼈 위로 바짝 파묻게 한 채, 눈을 가린 손가락 너머로 울려 퍼지던 낮은 음성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듣지 말거라. 보지도 말거라... 지금 여기는 너와 나 둘뿐이니라.'​그 한마디가 떠오를 때마다 옥연의 목덜미와 귓바퀴로 사정없이 피가 쏠려 내렸다.​옷감 너머에서 거세게 요동치던 사내의 심장 소리와, 뼛속까지 울리던 차가운 체온이 마치 지금도 곁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하아..."​옥연은 잘게 떨리는 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 끝으로 쓸어 닦았다.​수살귀의 환각 속에서 자신을 구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 그 직후부터 사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다.​남자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새벽녘 그의 품 안에서 느꼈던 숨 막히는 감정이 폭발하듯 터져 나올 것만 같했기 때문이었다.​옥연은 땋은 머리가 앞으로 쏠리지 않도록 머리 수건을 한 번 더 단단히 매어 묶었다.​그리고 무쇠 솥뚜껑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긴 나무 국자로 국물을 천천히 저었다.​구수하고 칼칼한 시래기 향이 흰 김과 함께 폭포처럼 뿜어져 나왔지만, 옥연의 시선은 부엌 문지방 너머를 향하지 못했다.​부엌 상마루 끝자락에는 한 사내가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기품 있는 짙은 남색 도포 자락을 넓게 늘어뜨린 남자의 모습은, 비현실적인 수려함을 뿜어내고 있었다.​도포 소매에 수놓아진 은실 물결 문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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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질투는 뚝배기를 얼게 만든다 2

문득 며칠 전, 늙은 사공 김 씨가 감사한 마음이라며 말없이 내려놓고 갔던 작은 쌀주머니가 떠올랐다.귀한 백미를 한 톨 한 톨 정성스레 씻어 이른 새벽부터 지어낸 밥은, 작은 시루솥 안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고슬고슬하게 익어 있었다.옥연은 묵직한 옹기 대접 세 개를 가지런히 늘어놓고, 주걱으로 윤기 흐르는 흰쌀밥을 아낌없이 담아냈다.이어 옆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던 무쇠솥의 뚜껑을 열었다.구수한 된장 향과 푹 삶아진 시래기 향이 뜨거운 김을 타고 부엌 가득 번져 나갔다.옥연은 국자를 깊숙이 넣어 시래기와 국물을 듬뿍 떠 밥 위에 자작하게 부었다. 진한 국물이 밥알 사이사이로 천천히 스며들자, 고소한 쌀 향과 칼칼한 시래기 향이 한데 어우러져 허기진 속을 절로 자극하는 냄새가 피어올랐다.마지막으로 잘 익은 시래기를 젓가락으로 보기 좋게 올려 담은 옥연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래기국밥 세 대접을 나무 쟁반에 조심스레 올려 평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어서 드십시오. 아침 강바람이 시려 몸이 많이 얼었을 터입니다."​옥연이 정성스레 국그릇을 평상 위에 올려놓자, 사공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단정함을 잃지 않은 옥연의 깨끗하고 고운 이목구비가 사공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이었다.​혈기 왕성한 젊은 사공 하나가 숟가락을 집어 들다 말고, 옥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야아, 이 삼강 나루터에 이런 고운 주모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사공이 국밥을 뜨다 말고 옥연을 향해 호의 어린 눈길을 보냈다.​"이리 고운 주모가 말아주는 국밥라면, 매일 강물을 건너와서라도 먹겠소."​다른 사공들도 숟가락질을 하며 거들기 시작했다.​"주모, 아침 일찍 일하느라 고생이 많소. 주모 얼굴을 보니 오늘 배질이 아주 잘될 것 같구만!"​"색시로 삼고 싶을 만큼 아주 미인이시라!"​장정들의 호탕하고 짓궂은 농담이 마당 위로 퍼져나갔다.​옥연은 손님들의 반응에 작은 보조개를 띄우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고마운 말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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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질투는 뚝배기를 얼게 만든다 3

​남자가 머슴 옷자락을 가볍게 털어내며 차가운 음성을 덧붙였다.​"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눈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미물들이 있구나. 사정이 그러하다면, 단 한 톨도 남김없이 싹 비우고 가거라."​"예, 예?!"​사공들은 남자가 뿜어내는 수호신의 위엄에 완전히 짓눌렸다. 그가 내뱉은 말이 앞뒤가 맞는지 따져 볼 겨를조차 없이, 기겁한 채 숟가락만 부지런히 움직였다.​그리고 뜨겁고 구수한 시래기국을 입안 가득 밀어 넣은 순간, 사공들의 눈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이... 이 맛은...!"​남자의 깊은 신력이 은은하게 스며든 국밥은, 얼어붙었던 장기를 단숨에 녹여주며 온몸으로 따스한 기운을 폭발적으로 불어넣고 있었다.​사공들은 머슴 사내의 기이한 위압감도 잊은 채, 대접에 코를 박고 국밥을 정신없이 마셔대기 시작했다.​"세상에... 이렇게 깊고 시원한 국밥은 생전 처음이오!"​"주모! 참말로 고맙소! 이 시린 날에 몸이 단숨에 녹아내리오!"​사공들은 대접 바닥이 하얗게 드러날 때까지 국물과 밥알을 싹싹 비워낸 뒤, 평상 위에 엽전 몇 푼을 정성스레 내려놓았다.​그리고 옥연과 상마루의 남향을 향해 몇 번이고 감격적인 고개를 숙인 뒤 마당을 나섰다.​사공들이 바친 순수하고 깊은 감사의 기운이 공기 중으로 피어오르며, 부엌 구석의 솥을 거쳐 남자의 가슴 한가운데로 폭풍처럼 쏠려 들어갔다.​지이잉!​남자의 가슴 안쪽에서 충만한 포만감과 함께 신력이 단단하게 차올랐다.​외부인 손님들이 대문 밖으로 사그라들자마자, 남자의 몸을 감싸고 있던 소박한 삼베 옷자락이 푸른빛 연기 속으로 스르르 감춰졌다.​단 한 숨의 시간 만에, 사내의 옷차림은 다시 기품 넘치고 수려한 짙은 남색 도포 자락으로 완벽하게 되돌아왔다.​도포 소매에 수놓아진 은실 물결 문양이 차오른 신력으로 인해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손님들은 만족스럽게 돌아갔고, 주막은 돈을 벌었으며, 신령은 완벽한 양식을 흡수해 낸 것이었다.​마당에 다시 조용한 정적이 찾아왔다.​옥연은 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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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서리 내리는 밤, 차가운 체온 1

칠흑 같은 어둠이 삼강 나루터 전체를 묵직하게 덮어 내린 한밤중이었다.낮 동안 소란스럽게 강바람을 가르던 풀벌레 소리마저 완전히 끊겨 버린 적막 속에서, 낙동강의 살얼음판 밑으로 강물이 스산하게 기어가는 소리만이 간신히 들려왔다.유옥연은 안방 윗목 바닥에 깔린 얇은 이불 위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달빛 한 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안방 내부였으나, 옥연의 감각은 이상할 정도로 명확하게 깨어나 있었다.지독한 몸살 기운을 씻어내 주었던 정순한 기운이 여전히 온몸의 혈관을 따라 잔잔하게 흐르고 있는 덕분이었다.옥연은 가만히 누운 채 손가락을 올려 문풍지 틈새를 바라보았다.창살 너머에서 에일 듯 차가운 밤바람과 함께, 깊은 물이끼 향이 은은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그것은 이 삼강주막의 수호신이자, 수백 년 동안 홀로 이 외딴 물길을 지켜온 사내의 체향이었다.옥연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정한 붉은 치맛자락을 다듬어 내렸다.그리고 발걸음을 죽인 채, 삐걱거리는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안방 문을 열었다.싸늘한 밤공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며 옥연의 뺨과 목덜미를 강렬하게 스쳤다.마당 위로는 하얀 서리가 칼날처럼 돋아나 차가운 별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옥연의 잔잔한 시선이 상마루 끝자락으로 향했다.그곳에는 짙은 남색 도포 자락을 넓게 늘어뜨린 남자가 홀로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남자는 어둠 속에서도 눈부실 만큼 창백하고 수려한 측면을 드러낸 채, 아득하게 뻗어 있는 낙동강 물길을 무심히 내다보고 있었다.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으나, 남자의 어깨를 넘기는 푸른빛 흑발 끝자락이 미세하게 나풀거리며 은은한 푸른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다.도포 소매에 은실로 수놓아진 물결 문양이 차가운 별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출렁였다.그것은 그림으로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비현실적이고 고독한 풍경이었다.옥연은 툇마루 바닥을 밟으며 남자 쪽으로 조용한 발걸음을 옮겼다.남자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찌그러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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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서리 내리는 밤, 차가운 체온 2

옥연은 남자의 측면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아리게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항상 오만하고 까탈스럽게 굴며 자신을 하인이라 부르던 사내였으나, 그 오만함 뒤에는 이 외딴 초가집에 갇혀 홀로 세월을 견뎌온 외로운 영혼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옥연은 나도 모르게 긴 소매 끝에 가려진 자신의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남자를 향했던 경계심과 어색함이 밤바람 속에서 안개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바로 그 순간이었다.슉.낙동강 건너편에서 불어온 살얼음판의 강바람이 마당 위를 사정없이 쓸고 지나갔다.에일 듯 차가운 밤 한기에 옥연의 가녀린 어깨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옥연은 치맛자락을 감싸 쥐며 작게 숨을 삼켰다.그 떨림을 놓치지 않은 남자의 세로 눈동자가 살그머니 틀어졌다.그가 상마루 위에서 천천히 자리를 옮겨, 옥연의 바로 옆자리로 다가왔다.그가 움직일 때마다 깊은 물길의 시원한 향기가 옥연의 온몸을 묵직하게 감싸 안았고.말없이 자신의 커다랗고 창백한 손을 뻗어, 옥연의 잘게 떨리는 마른 손을 가만히 덮어 쥐었다.지이잉!남자의 피부가 닿은 순간, 옥연의 온몸에 소름이 소용돌이쳐 올랐다.남자의 체온은 수호신령답게 얼음처럼 차가웠다.마치 한겨울 낙동강의 살얼음을 손바닥 위에 그대로 올린 듯한 기이한 냉기였다.옥연은 닿아온 사내의 차가움에 흠칫 놀라 손을 뒤로 빼내려 했다.그러나 남자는 옥연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남자의 창백하고 기다란 손가락이 옥연의 손가락 마디 사이로 단단하게 얽혀 들며, 옥연의 손을 놓칠세라 바짝 틀어쥐었다."도, 도련님..."옥연의 갈라진 음성이 밤의 공기 속에서 떨려 나왔다.그 순간, 얼음처럼 차갑던 남자의 손바닥 너머에서 깊고 정순한 푸른빛 신력이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남자의 차가운 기운이 옥연의 손목과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사내의 맑은 신력이 옥연의 체내를 부드럽게 감싸 다독이자, 한기로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옥연의 장기와 피부 위로 진한 온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사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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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눈동자에 스민 황금빛 기적 1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물길이 거칠게 부딪히는 삼강 나루터의 아침은 살을 에듯 매서운 강바람으로 시작되었다.​햇살이 비스듬히 떠오르며 짙은 물안개를 밀어내고 있었지만, 밤새 얼어붙은 서리들은 허물어져 가는 주막의 지붕 위에서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옥연은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타오르는 붉은 불씨를 가만히 다스렸다.​말린 짚단이 타들어가며 매캐하고 구수한 연기를 뿜어냈지만, 옥연의 온 신경은 아궁이의 열기가 아닌 자신의 오른손 끝에 머물러 있었다.​어젯밤 서리 내리던 마루 끝에서, 자신의 마른 손을 옭아매듯 쥐어오던 사내의 얼음 같은 체온이 여전히 피부 겉면에 맴도는 듯했다.​'휘(輝)...'​빛날 휘. 수백 년 동안 이 거친 물길을 다스려왔다는 신령의 진짜 이름이 머릿속에서 아득하게 맴돌았다.​그 고풍스럽고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깊게 박혀, 심장 안쪽에서부터 자꾸만 낯선 소란이 일어났다.​옥연은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애써 식히며, 무쇠 솥뚜껑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어제저녁 뱃사공들이 내고 간 동전 몇 푼으로 나루터 장터에서 어렵게 구해온 무 한 토막과 시래기가 솥 안에서 끓고 있었다.​긴 나무 국자로 맑은 국물을 천천히 젓자, 구수한 냄새가 흰 김을 타고 부엌 안을 가득 채웠다.​옥연은 땋은 머리가 앞으로 쏟아지지 않도록 수건을 단단히 고쳐 묶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아침부터 넋을 놓고 무엇을 태우는 것이냐."​부엌 상마루 쪽에서 들려온 차갑고 나직한 울림에 옥연의 어깨가 움찔하고 굳어졌다.​인간의 목구멍에서 나올 수 없는, 깊은 강물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듯한 뼛속까지 시린 음성이었다.​옥연은 급히 국자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상마루 기둥에는 기품 있는 짙은 남색 도포 자락을 넓게 늘어뜨린 휘가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어제 낮의 포만감 덕분인지 반투명하던 영체는 온데간데없이 완벽하게 굳건한 실체를 유지하고 있었다.​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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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눈동자에 스민 황금빛 기적 2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숨을 거둔 날의 참혹했던 기억이 옥연의 뇌리를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자신과 둘만 세상에 남겨졌던 자신의 과거가 저 여인의 모습 위로 고스란히 겹쳐졌다.​옥연은 망설임 없이 차가운 흙바닥에 주저앉아 여인의 마른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아주머니, 고개 드십시오. 안으로 드셔야 합니다."​옥연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빛났다.​"이대로 찬 바람을 맞으면 아이가 버티지 못합니다. 어서 방으로 가시지요."​옥연은 여인을 부축하여 안방 윗목으로 이끌고, 낡은 이불을 꺼내어 아이의 몸을 빈틈없이 감싸주었다.​그리고 서둘러 부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상마루 기둥에 서 있던 휘가 굳게 닫힌 붉은 입매를 삐딱하게 틀며 그 광경을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명줄이 끊어지고 있는 목숨이다."​그의 낮고 차가운 어조에는 어떠한 동요나 연민도 섞여 있지 않았다.​수백 년 동안 강물 위에서 스러져가는 인간의 목숨을 헤아릴 수 없이 지켜본 신령의 차가운 관조였다.​"이미 하늘이 거두기로 작정한 혼백을, 네가 끓인 보잘것없는 풀때기 몇 숟갈로 돌려세울 수 있을 것 같으냐."​옥연은 사내의 얼음 같은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궁이 앞 무쇠솥을 향해 다가갔다.​"명줄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겠지요."​옥연이 아궁이 안으로 말린 짚단을 거칠게 밀어 넣으며 단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아궁이의 붉은 불길이 옥연의 굳게 다문 뺨을 환하게 비추었다.​"하지만, 저렇게 죽어가는 아이의 마지막 입술을 적셔줄 따뜻한 국 한 그릇은 제가 정할 수 있습니다."​옥연의 꺾이지 않는 대답에 휘의 수려한 미간이 살그머니 틀어졌다.​그녀의 작은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처절한 연민과 맹렬한 의지가 휘의 가슴 안쪽을 낯설게 두드리고 있었다.​옥연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무쇠 국자를 꽉 쥐고 솥 안의 국물을 깊숙이 퍼 올렸다.​죽어가는 아이를 향한 옥연의 처절한 연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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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경성에서 온 초대장 1

​1936년 11월 말.​초겨울의 문턱으로 넘어가는 삼강 나루터의 아침은 잿빛 구름 아래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낙동강과 내성천이 엉키는 물길 가장자리로는 제법 두꺼운 살얼음이 톱니바퀴처럼 돋아나 있었다.​매서운 강바람이 허물어져 가는 초가지붕을 때릴 때마다, 마당에 쌓인 마른 짚단들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굴러다녔다.​유옥연은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가늘게 떨리는 손끝으로 무쇠 솥뚜껑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며칠 전, 사경을 헤매던 어린아이를 살려낸 이후로 이 낡은 무쇠솥은 미세하게 변해 있었다.​불씨를 깊게 지피지 않아도 솥단지 안에서는 늘 뭉근한 온기가 맴돌았고, 평범한 시래기를 끓여내도 사방 십 리 밖까지 아득하고 구수한 향이 퍼져나갔다.​그 영험한 향기 덕분인지, 최근 주막을 찾는 뱃사공과 나그네들의 발길이 눈에 띄게 잦아진 터였다.​옥연은 앞치마 대신 두른 낡은 치맛자락을 고쳐 매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입술 틈새로 하얀 입김이 부엌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아침부터 솥단지나 쓰다듬고, 참으로 할 일 없는 하인이로구나."​상마루 쪽에서 낮고 차가운 음성이 툭 떨어져 내렸다.​인간의 목구멍에서는 결코 낼 수 없는, 깊은 강물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듯한 뼛속까지 시린 목소리였다.​옥연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상마루 기둥에는 기품 있는 짙은 남색 도포 자락을 넓게 늘어뜨린 휘가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최근 손님들이 바치고 간 순수한 감사를 넉넉히 흡수한 덕분에, 그의 몸은 반투명한 영체에서 벗어나 완벽하고 단단한 실체로 굳어 있었다.​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위로, 세로로 길게 찢어진 차가운 청색 눈동자가 옥연을 내리꽂았다.​도포 소매에 은실로 수놓아진 물결 문양이 잿빛 아침 햇살을 받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늘 장사할 국물을 우려내려고 준비하는 중입니다."​옥연이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아궁이 안으로 말린 짚단을 밀어 넣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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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경성에서 온 초대장 2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감옥에서 죽자마자 집안의 재산을 가로챈 숙부 유 참판이, 빚 대신 자신을 늙은 부호의 후처로 팔아넘기려 했던 그 악독한 영감이 바로 경성의 최 참판이었다.​옥연의 호흡이 찰나의 순간 컥 하고 막혀 들었다.​"유 참판께서 친족의 보호 의무를 내세워 야반도주한 조카를 정당하게 되찾아 가겠다는, 읍내 경찰서에 정식으로 접수된 고발장이다."​오카다가 평상 위에 놓인 봉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물론 그 뒤에는 최 참판 어르신께서 우리 서장님께 찔러넣은 막대한 뒷... 흠흠! 고발장이 접수 됬으니 수사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오카다가 허리춤의 군도를 꽉 쥐며 옥연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네년은 이 시간부로 합법적인 연행 대상이다. 얌전히 끌려가 그 댁 영감의 첩실 노릇이나 할 준비를 해라."​왈패들이 몽둥이를 바닥에 끌며 옥연을 포위하듯 다가왔다.​옥연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며, 손끝에서부터 지독한 오한이 핏줄을 타고 거꾸로 솟구쳐 올랐다.​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려 단 한 마디의 반박도 튀어나오지 않는, 근원적이고 참혹한 공포였다.​바로 그 숨 막히는 찰나였다.​쿠웅!​주막 마당 전체의 지형이 아래로 푹 꺼져 내릴 듯한 압도적인 중력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내렸다.​"크헉...!"​다가오던 왈패 두 놈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철퇴에 맞은 것처럼 동시에 무릎이 꺾이며 흙바닥에 처박혔다.​"어디서 비린내 나는 혓바닥을 함부로 놀려대느냐."​뼛속을 썰어내는 듯한 차갑고 잔인한 음성이 공기를 찢고 터져 나왔다.​툇마루 기둥 뒤에서 머슴 옷을 입은 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그의 세로로 길게 찢어진 청색 눈동자가, 핏빛에 가까운 적색으로 사납게 끓어오르고 있었다.​"히, 히익...!"​오카다는 휘가 내뿜는 비현실적인 살기와 중압감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뒷걸음질을 쳤다.​지난번 주막에 난입했을 때 겪었던 그 끔찍한 기운이 몇 배는 더 증폭되어 온몸의 장기를 짓누르고 있었다.​휘가 기다란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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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오카다의 화공(火攻)과 결계의 틈 1

​오카다가 끔찍한 경고를 남기고 사라진 지 사흘째 되던 밤이었다.​달빛조차 두꺼운 먹구름 뒤로 자취를 감춘 칠흑 같은 어둠이 삼강 나루터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었다.​낙동강의 수면을 얼어붙게 만들던 매서운 강바람은 밤이 깊어질수록 더욱 건조하고 사납게 몰아쳤다.​바람이 허물어져 가는 초가지붕을 때릴 때마다, 마른 짚단들이 짐승의 울음 같은 스산한 소리를 토해냈다.​유옥연은 안방 윗목 바닥에 얇은 이불을 끌어안고 앉은 채,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몸을 웅크리게 만드는 지독한 추위 속에서도 옥연의 뺨과 목덜미는 미열을 품은 듯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네가 가고 싶다 한들, 내가 보내지 않을 것이다.'​사흘 전, 마당 한가운데서 자신의 손을 빈틈없이 얽어매던 사내의 차가운 체온이 피부 위로 생생하게 피어올랐다.​뼛속까지 꿰뚫어 보듯 깊게 내리꽂히던 그 금빛 눈동자와, 너는 내 것이라 선언하던 묵직한 음성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옥연은 터질 듯이 들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써 차가운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수백 년을 살아온 신령이 던진 그 오만하고도 맹목적인 구속은, 옥연이 평생 쌓아온 이성의 벽을 사정없이 허물어뜨리고 있었다.​"잠이 오지 않는구나..."​옥연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창살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때였다.​스윽, 스스슥.​창호지 틈새를 뚫고 들어오던 차가운 강바람 속에, 무언가 기분 나쁘고 이질적인 냄새가 훅 끼쳐 들어왔다.​단순한 마른 풀 냄새나 부엌 아궁이의 구수한 연기 향이 아니었다.​그것은 코를 찌르듯 매캐하고 독한, 무언가가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불길한 화기(火氣)의 냄새였다.​"이게 무슨 냄새지?"​옥연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빛났다.​그녀는 다급히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안방 문고리를 거칠게 잡아당겼다.​끼이익!​안방 문이 열리자마자, 옥연은 헉 하고 거친 숨을 삼키며 제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칠흑 같아야 할 마당 바깥쪽, 흙담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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