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삼강(三江), 그 등불 아래: Chapter 1 - Chapter 10

98 Chapters

제1화: 대문을 부수고 강림하신 까탈스러운 구원자

- 1936년 11월 (일제강점기 후반, 늦가을)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물길이 거칠게 엉켜 드는 삼강 나루터의 바람은 살을 에듯 차가웠다.​볕 한 점 내리쬐지 않는 스산한 먹구름 아래로, 강 건너편에서 불어오는 습한 강바람에 말라붙은 갈대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꺾여 나갔다.​유옥연은 피멍이 든 손가락 끝을 찌들어버린 붉은 치맛자락 속에 사정없이 문질러 넣었다.​짚신 나부랭이 사이로 스며드는 젖은 흙탕물에 발가락 마디마디가 감각을 잃고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여기가...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던 그곳인가."​옥연의 잔잔한 시선이 허물어져 가는 초가지붕 끝자락에 오래도록 머물렀다.​기둥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고, 흙벽은 곳곳이 터져 나가 집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몰골이었다.​경성에서 쫓기듯 밤길을 달려온 지 오늘로 딱 보름째였다.​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가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숨을 거두고, 가문이 풍비박산 난 뒤 남은 것은 어머니의 유품인 때 탄 집문서 한 장뿐이었다.​친척들의 차가운 외면과, 늙은 최 참판의 후처 자리로 팔아넘기려던 모진 손길을 피해 도망쳐 온 끝이 이 외딴 나루터의 폐가라니.​옥연은 품속 깊은 곳에 넣어둔 꼬질꼬질한 종이 조각을 부서뜨릴 듯 꽉 쥐었다.​"주막이라더니, 당장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겠구나."​나직하게 읊조린 목소리가 서리 품은 강바람 속으로 맥없이 지워졌다.​옥연은 떨리는 등을 똑바로 펴고, 비스듬히 기운 대문 틀을 지나 캄캄한 부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부엌 안은 바깥보다 훨씬 어둡고 스산했다.​바닥에는 말라붙은 흙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거미줄이 아궁이 위를 어지럽게 덮고 있었다.​옥연은 족두리 대신 두르고 있던 낡은 수건을 풀어서 머리를 단단히 고쳐 매었다.​슬퍼하거나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 여유 따위는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았다.​당장 오늘 밤의 추위를 버티지 못하면 얼어 죽거나, 저 아득한 강물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Read more

제2화: 은혜 갚는 신령은 대문짝을 고쳐라

​동녘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도 전에 차가운 서리가 마당 구석구석을 하얗게 덮어 나갔다.​강바람을 품은 새벽 공기가 찌그러진 부엌 창살 틈으로 스며들어 옥연의 뺨을 서늘하게 찔렀다.​옥연은 밤새 어깨에 얹혀 있던 차가운 무게감을 떠올리며 천천히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자신을 안고 쓰러졌던 남자는 새벽녘 푸른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그가 정말 신령인지, 아니면 환각을 본 것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하지만 마당 한가운데에 처참하게 박살 난 대문짝과 흙담장의 파편이 어젯밤의 일이 현실이었음을 똑똑히 말해주고 있었다.​옥연은 무릎을 펴고 일어나 낡은 짚신을 고쳐 신었다.​어깨와 목덜미에는 남자의 차가운 머리칼이 스쳤던 감각과 얼음 같은 체온이 여전히 아리게 남아 있었다.​"생각할 시간에 몸이라도 움직여야지."​옥연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부엌 구석에 놓인 낡은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마당으로 들어서자 살얼음이 박힌 흙바닥 위로 부서진 목재와 짚가루가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최 참판의 수하들이 날아간 담장 벽에는 짚단과 흙이 움푹 파여 있었다.​그 자리에 남아 있던 기분 나쁜 핏자국은 밤새 내린 서리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옥연은 빗자루를 틀어쥐고 부서진 대문나무 조각들을 한곳으로 끌어모으기 시작했다.​나무토막을 줍는 손끝이 추위에 붉게 마비되어 갔지만, 옥연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당장 대문이 없으면 밤사이에 짐승이나 나쁜 사람이 들어와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목수에게 맡겨 대문을 새로 짜려면 적어도 돈 한 냥은 족히 들어갈 터였다.​주머니 속에는 먼지 뿐.​옥연은 한숨을 삼키며 쪼그려 앉아 부서진 경첩을 짚어 들었다.​그때였다.​"미물아."​공기를 가르고 들려오는 서늘하고 나직한 음성에 옥연의 어깨가 굳어졌다.​인간의 목소리라기엔 지나치게 맑고, 깊은 강물 밑바닥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울림이었다.​옥연은 천천히 고개를 올려 대문 틀 옆을 바라보았다.​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비쳐드는 기둥 옆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Read more

제3화: 첫 번째 손님과 질투의 서막 1

​아침 서리가 걷힌 삼강 나루터 위로 세찬 강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마주치는 세 물길은 살얼음이 동동 뜬 채 거친 소리를 내며 뒤틀려 흘렀다.​유옥연은 부엌 바닥에 쪼그려 앉아 바구니에 남은 말린 배춧잎과 시래기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털어냈다.​경성에서 도망쳐 올 때 챙겨온 얼마 안 되는 건시래기와 찌그러진 무 한 토막이 부엌에 남아 있는 식재료의 전부였다.​옥연은 갈라진 손가락 끝으로 무에 묻은 흙을 구석구석 닦아냈다.​손바닥에 깊게 새겨진 옛 화상 자국과 칼자국 위로 차가운 흙물이 배어들었지만, 그녀의 손길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우물가에서 길어 온 살얼음 뜬 물에 시래기를 여러 번 헹구어내자, 흙먼지가 씻겨 내려가며 파릇한 빛깔이 드러났다.​옥연은 땋은 머리가 앞으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리 수건을 한 번 더 단단히 묶어 매었다.​무쇠솥 아래로 부지깽이를 깊숙이 밀어 넣자 노르스름한 불길이 아궁이 안을 환하게 밝혔다.​타오르는 짚단에서 피어오른 매캐한 연기가 부엌 천장을 감쌌지만, 옥연은 눈을 감지 않고 아궁이 불씨를 살폈다.​솥 안에서 물이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하자, 구수하고 쌉싸름한 시래기 향이 부엌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옥연은 잘 다듬은 시래기와 얇게 썬 무를 솥 안에 넣고, 집된장 한 숟갈을 정성스레 풀어 넣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둔탁한 무쇠 솥뚜껑 틈새로 흰 김이 폭포처럼 뿜어져 나왔다.​국물이 우러나며 부엌 안에 퍼지는 냄새는 보잘것없는 재료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깊고 차분했다.​옥연은 솥뚜껑을 열고 무쇠 국자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시래기국을 단정하게 떴다.​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맑고 건더기가 푸짐한 첫 번째 국사발을 작은 옹기에 정성껏 담아냈다.​옥연은 국사발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고 부엌 상마루 끝자락으로 걸어가 얌전히 내어 올렸다.​"드십시오. 오늘 지은 첫 국입니다."​상마루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던 남자가 힐끔 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Read more

제4화: 첫 번째 손님과 질투의 서막 2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노 사공의 영혼을 통째로 구원하는 맑고 경이로운 온기였다.​김 씨의 검게 탄 뺨 위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국그릇 안으로 들어갔다.​"살았다... 살았어..."​김 씨가 놋대접을 부여잡고 바닥에 고개를 숙이며 오열하기 시작했다.​"이 따뜻한 국 한 사발이... 이 늙은이를 살렸소...! 주모, 고맙소, 참말로 고맙소!"​노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순수한 감사의 기운이 공기 중으로 피어올랐다.​그 정순한 감사는 옥연이 정성껏 끓여낸 무쇠솥을 매개로 삼아 부엌 구석의 남자를 향해 폭풍처럼 쏠려 들어갔다.​지이잉!​부엌 전체의 공기가 산천을 흔들 듯 기괴한 울림을 냈다.​상마루에 서 있던 남자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노 사공의 진심 어린 감사가 솥을 거쳐 남자의 가슴 한가운데로 벼락처럼 꽂혀 들어왔다.​수백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차원이 다른 정순하고 경이로운 힘이 남자의 형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반투명하게 비쳐 보이던 남자의 모습이 한순간에 짙은 농도를 띠며 실체에 가깝게 변해갔다.​소매 자락에 수놓아진 은실 물결 문양이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을 발했다.​남자는 가슴 안쪽에서 차오르는 힘의 무게감에 절로 숨을 삼켰다.​"이... 무슨..."​단 한 사발의 국밥과 인간의 순수한 감사가 만들어낸 힘의 양은 어젯밤 제사를 통해 얻었던 기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충격적인 포만감 속에서 기력을 회복한 남자가 가슴을 편 바로 그 순간이었다.​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김 씨가 눈물을 닦으며 옥연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주모는 내 목숨을 건진 은인이오! 내 가진 것은 없으나 앞으로 이 나루터의 모든 뱃사공들에게 이 집 국밥을 먹으라 소문을 내겠소!"​옥연은 쑥스러운 듯 단정한 볼에 작은 보조개를 띄우며 웃어 보였다.​"별말씀을요, 어르신. 몸이 좀 따뜻해지셨다니 다행입니다."​김 씨는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남긴 뒤, 한결 가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Read more

제5화: 오카다 경부와 가짜 머슴 1

​붉은 노을빛이 낙동강 물결 위로 핏빛처럼 진하게 번져 나갔다.​산그늘이 기 길게 늘어지는 저녁 무렵이 되자, 삼강 나루터의 강바람은 낮보다 훨씬 매섭고 스산하게 불어왔다.​유옥연은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잔불씨를 가만히 다스렸다.​낮에 다녀간 늙은 사공 김 씨의 소문 덕분이었는지, 나루터 근처를 지나던 뱃사공 두 어사가 주막에 들러 시래기국을 사 먹고 돌아간 뒤였다.​바닥에 놓인 조그만 옹기 항아리 속에는 사공들이 내고 간 동전 몇 푼이 제법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옥연은 그 동전들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경성에서 도망쳐 왔을 때만 해도, 당장 오늘 밤을 버틸 수 있을지조차 아득했었다.​하지만 이 작고 낡은 주막에서 지어낸 뜨거운 국 한 사발이 스스로의 목숨을 이어나가게 해주고 있었다.​옥연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 끝으로 닦아내고 상마루 쪽을 바라보았다.​아까 옥연과 한탕 국사발 밀당을 벌였던 남자는, 식은 국을 사발째 비워낸 뒤 상마루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남색 도포 자락을 넓게 늘어뜨린 남자의 모습은 여전히 현실의 사람이라 믿기 힘들 만큼 기풍이 흘렀다.​낮에 사공의 감사를 흡수하여 신력을 회복한 덕분에, 그의 몸은 반투명하던 영체에서 벗어나 완벽한 실체로 굳어 있었다.​옥연은 남자의 단정하게 굳게 닫힌 붉은 입술과 짙은 속눈썹 그늘을 가만히 건너다보았다.​까탈스럽고 고고하게 굴면서도, 식어버린 국사발을 하나도 남김없이 싹 비워낸 모습이 은근히 기가 차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옥연은 툇마루 위로 올라가 남자가 남겨둔 빈 옹기 사발을 조용히 집어 들었다.​그때였다.​저 멀리 대문 밖에서 둔탁하고 기분 나쁜 구두지옥 소리가 서걱서걱 흙바닥을 짓밟으며 다가왔다.​일반적인 뱃사공들의 짚신 소리가 아니었다.​빈틈없이 다듬어진 가죽 구두가 마른 흙을 짓눌러 갈아버리는 묵직하고 섬뜩한 소리였다.​옥연의 손끝이 나직하게 떨리며 옹기 사발 테두리를 바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Read more

제6화: 오카다 경부와 가짜 머슴 2

옥연은 자신을 바짝 감싸 안은 남자의 커다란 손길과, 귓가를 스치는 차가운 숨결에 심장이 거세게 요동쳐 올랐다.​머슴이라니. 수백 년 된 신령님이 머슴을 자처하며 자신을 품에 안고 있는 이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상황에 옥연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오카다는 사내의 얼음 같은 눈빛과 황당한 소리에 눈을 가늘게 떴다.​"머슴? 이까짓 주막에 무슨 이런 머슴이 있어!"​"우리 주모가 워낙 마음이 여리고 순해서 말이다."​남자가 옥연의 어깨를 감싼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오카다를 향해 비꼬듯 중얼거렸다.​"너 같은 지저분한 똥파리가 꼬여도 제대로 내치질 못하거든. 그래서 내가 직접 파리를 잡으려 나온 것이다."​"이, 이 미친놈이!"​분노한 오카다가 허리춤의 군도를 반쯤 뽑아 올리려 했다.​그 순간, 남자의 차가운 청색 눈동자 안에서 붉은 불꽃이 소름 끼치게 번뜩였다.​쿠웅!​오카다가 서 있는 마당 바닥의 흙이 아래로 움푹 파여 내리며, 뼛속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중력이 오카다의 전신을 사정없이 내리눌렀다.​"크윽...!"​오카다의 무릎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며 바닥으로 꺾여 내릴 듯 비틀거렸다.​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기괴한 압박감에 오카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갔다.​군도를 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경련을 일으켰다.​남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옥연의 어깨를 감싼 손가락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가만히 다독이고 있을 뿐이었다.​"내 터 안에서 칼끝을 꺼내는 자는... 강물 밑바닥 귀신들의 밥으로 만들어 주겠다."​남자의 나직하고 서늘한 한마디에 오카다의 정수리로 소름이 소용돌이쳤다.​직감적인 공포였다.​이 사내의 말을 더 거역했다간, 정말로 이 자리에서 사지가 찢겨 강물 속으로 수장될 것이라는 근본적인 마물의 공포였다.​오카다는 겨우 짓눌린 숨을 토해내며 반쯤 뽑았던 군도를 칼집에 억지로 내리꽂았다.​"네... 네 연놈들의 수상쩍은 기운은 내가 조만간 읍내 교번소 순사들을 모조리 끌고 와서 파헤쳐 주겠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Read more

제7화: 차가운 도포 자락, 따뜻한 손끝 1

​스산한 밤바람이 삼강주막의 허물어져 가는 지붕 틈새를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낙동강 깊은 강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한기는 문창살을 뚫고 들어와 안방 구석구석을 시리게 물들였다.​유옥연은 부엌 마루 구석에 놓인 놋대접을 정성스레 닦아내다 말고, 가만히 손을 멈추었다.​머릿속이 둔탁한 돌에 맞은 것처럼 아득하게 어지러웠고, 시야가 자꾸만 아지랑이처럼 어지럽게 흔들렸다.​경성에서부터 보름이 넘도록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밤길을 달려온 여파였다.​거기에 살얼음 동동 뜬 우물물에 손을 담그며 일한 노고와, 최 참판 수하들 및 오카다 순사의 위협까지 겹치며 몸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었다.​옥연은 갈증에 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을 혀 끝으로 가만히 적셨다.​손가락 마디마디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더니, 이내 뼛속까지 소름이 돋는 지독한 오한이 덮쳐왔다.​"아직... 솥을 정리하지 못했는데..."​옥연은 땋은 머리가 풀어져 내리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부엌 기둥을 짚고 겨우 허리를 펴려 했다.​그러나 무릎에서 힘이 맥없이 풀려나가며, 그녀의 마른 몸이 차가운 흙바닥을 향해 꺾여 내렸다.​쿵.​몸이 바닥에 부딪히기도 전에, 스산한 밤공기를 찢고 푸른빛이 번개처럼 부엌 안을 가득 채웠다.​"옥연!"​날카로운 음성이 캄캄한 부엌 안을 사정없이 흔들었다.​상마루 구석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남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옥연의 코앞으로 실체화하여 나타났다.​바닥으로 떨어지던 옥연의 어깨를 커다랗고 창백한 손이 허공에서 사정없이 잡아채었다.​남자는 옥연의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에 그녀의 마른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아 올렸다.​남자의 남색 도포 자락이 옥연의 파리해진 뺨을 부드럽게 덮어 내렸다.​옥연은 의식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자신을 안아 든 사내의 몸에서 느껴지는 깊은 강물의 향을 감각했다."...누구 마음대로 정신을 놓느냐."남자의 나직한 음성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수백 년을 살아온 신령의 목소리가 흔들린 것은, 그 자신도 처음 겪는 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Read more

제8화: 차가운 도포 자락, 따뜻한 손끝 2

​단단하고 차가운 그의 손바닥이 옥연의 열나는 이마에 닿는 순간, 옥연의 입에서 가느다란 숨이 흘러나왔다.​"손이... 시원해요..."​옥연이 무의식중에 뺨을 남자의 손바닥에 바짝 밀착시켜 왔다.​차가운 얼음 같은 남자의 체온이 지독한 열기를 가라앉혀 주자, 옥연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남자의 손에 얼굴을 비벼댔다.​남자의 세로로 찢어진 청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대되었다.​자신의 손길에 이토록 무방비하게 얼굴을 묻고 안도하는 인간의 반응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남자의 길쭉한 손가락 끝이 옥연의 부드러운 뺨을 스쳤다.​그의 차가운 체온 너머로 옥연의 거친 호흡과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손바닥을 타고 고스란히 전달되었다.​그때, 도깨비들이 얼음물이 담긴 대놋대접과 젖은 무명천을 들고 쩔쩔매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주, 주령님! 물을 가져왔습니다!"​"거기 두고 나가거라."​남자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무심하게 쏘아붙였다.​도깨비들은 남자의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대접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비명을 지르며 벽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남자는 차가운 우물물에 무명천을 적셔 손으로 꼭 짜냈다.​수백 년 동안 강물의 물길을 통제하던 고귀한 신령의 손이, 한낱 인간의 이마에 얹을 물수건을 만지고 있었다.​남자는 젖은 수건을 옥연의 뜨거운 이마 위에 가만히 내얹었다.​수건이 닿자마자 치지직 소리가 날 것처럼 옥연의 몸에서는 지독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옥연은 괴로운 듯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며 남자의 소매 자락을 손가락으로 꽉 잡아채었다.​"가지 마세요... 혼자 두지 마세요..."​경성에서 부모를 잃고 홀로 도망쳐 오며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아이 같은 두려움이 열꽃과 함께 터져 나온 것이었다.​옥연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남자의 짙은 남색 도포 자락을 부서뜨릴 듯 틀어쥐었다.​남자는 소매를 빼내려 손에 힘을 주었다.​하지만 옥연이 옷자락을 품 안으로 바짝 끌어당기는 바람에, 남자의 상체가 옥연의 얼굴 위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Read more

제9화: 맹목적인 차단, 완벽한 통제 1

​동녘 하늘이 아직 푸르스름한 어둠에 갇혀 있던 새벽녘이었다.​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물길이 마주치는 삼강 나루터 위로 지독하게 짙은 물안개가 폭포처럼 밀려들었다.​손가락 하나를 내밀어도 마디가 보이지 않을 만큼 묵직한 안개는 젖은 흙바닥과 허물어져 가는 삼강주막의 지붕을 축축하게 적셨다.​살얼음이 동동 뜬 강물 밑바닥에서는 뼛속을 자르는 듯한 스산한 소리가 소용돌이치며 기어 올라왔다.​유옥연은 안방 툇마루 끝자락에 가만히 앉아 자신의 기다란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밤새 온몸을 깨부술 듯 덮쳐왔던 지독한 몸살 기운은 거짓말처럼 가라앉아 있었다.​이마와 뺨에 남아 있던 타오르는 열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마비되었던 손끝에는 다시 맑은 피가 도는 감각이 선명했다.​옥연은 윗목 바닥에 놓여 있던 차가운 대놋대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밤새 자신의 이마를 덮고 있던 얼음 같은 손바닥과, 귓가를 간지럽히던 낮은 숨결이 피부 위로 아리게 피어올랐다."...참."휘의 차갑던 손바닥과 금빛이 스며들던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옥연은 얼른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유옥연."​​옥연은 머리 수건을 한 번 더 단단히 매어 묶은 뒤, 그러곤 괜히 우물가에 놓인 찌그러진 물양동이를 서둘러 집어 들었다.​자신을 위해 밤새 기력을 쏟아부은 그 까탈스러운 신령에게 바칠 정갈한 첫 우물물을 길어 올려야 했다.​옥연은 조용한 걸음으로 대문 틀을 지나 마당 밖 나루터 길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바깥의 물안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짙고 축축했다.​발밑의 말라붙은 풀줄기마다 하얀 서리가 칼날처럼 돋아나 있었고, 강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짚신 틈새로 시린 한기가 파고들었다.​옥연은 우물가를 향해 몇 걸음 내딛다 말고 가만히 자리에 멈춰 섰다.​짙은 물안개 너머, 강가 쪽에서 희미하고 아득한 소리가 울려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옥연아..."​바람 소리도, 물결 소리도 아니었다.​세상을 떠나기 전, 경성에서 옥연의 머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Read more

제10화: 맹목적인 차단, 완벽한 통제 2

​옥연의 눈앞이 순간적으로 완벽한 어둠 속에 갇혔다.​눈을 가린 남자의 긴 손가락 사이로 물이끼 향과 깊은 강바닥의 향기가 쏟아져 들어왔다.​수살귀가 내지르던 어미의 기괴한 환청도, 강물이 출렁이던 스산한 소리도 모두 거짓말처럼 뚝 끊겨 버렸다.​남자는 옥연의 시청각을 자신의 온몸으로 완벽하게 밀봉하여 차단해 버린 것이었다.​"하... 아..."​옥연은 시야와 청각이 동시에 차단된 극도의 정적 속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자신을 안고 있는 사내의 온몸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무게감과, 귓가를 사정없이 울리는 단단한 심장 소리만이 세상의 전부처럼 다가왔다.​남자가 옥연의 눈을 가린 손가락에 살그머니 힘을 주며, 그녀의 귓가에 고풍스럽고 나직한 음성을 내리까시었다.​뼛속을 울리는 울림이었으나,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지독한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듣지 말거라."​남자의 차가운 숨결이 옥연의 귓바퀴를 쓸어내리며 깊게 스며들었다.​옥연의 심장이 옷감 너머에서 거세게 들썩였다.​"보지도 말거라."​남자가 옥연의 허리를 안은 팔을 더욱 바짝 틀어쥐며 그녀를 제 품 안으로 완벽히 통제해 넣었다.​옥연은 남자의 단단한 품속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가 뿜어내는 기운에 온전히 사로잡혔다.​남자는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옥연의 떨리는 속눈썹을 감각하며, 한마디 한마디를 옥연의 영혼에 새기듯 읊조렸다.​"지금 여기는 너와 나 둘 뿐이니라."​옥연의 숨통이 죄어왔다.​어미의 환청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이 남자의 목소리 하나로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그러니 내 말만 듣고 나만 보거라."​남자의 낮은 음성이 옥연의 가슴 한가운데로 벼락처럼 꽂혀 들어왔다.​그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혼자 살아온 신령이 한 인간에게 바치는 가장 맹목적이고 완벽한 구속이었다.​남자가 옥연의 이마 끝에 자신의 턱선을 살그머니 감싸 안으며 나직하게 덧붙였다.​"나 역시 너만을 느끼겠다."​그 한마디가 떨어진 순간, 옥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Read more
PREV
123456
...
1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