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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붉은 혼서: Chapter 101 - Chapter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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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백유진의 이름

이른 아침부터 대리시 바깥 심리청은 사람들 발에 밟힌 흙으로 눅눅했다.차 대금 기록을 옮겨 적던 서리들은 손을 호호 불었고, 뜰에서는 포졸이 증인들을 한 줄로 세우느라 목청을 높였다. 열린 문으로 찬바람이 들 때마다 탁자 위 문서 끝이 파르르 떨렸다.백유진은 호위도 시녀도 데려오지 않았다. 회색 겉옷을 벗어 무릎에 놓고 소의 맞은편에 앉았다.경연은 상석 옆에 서 있었다. 소의가 돌려보낸 검은 겉옷을 입고 있었다. 찢어졌던 안감은 그녀가 꿰맨 그대로였다. 소의의 시선이 바늘땀에 닿자 경연은 소매를 한 번 내렸다.“정안 부인이 숨을 거둔 다음 날, 세굽이차원에서 은자 팔백 냥이 빠져나갔습니다.”소의가 금전 기록을 돌려놓았다.“받는 사람은 백유진. 돈은 대장공주 별원으로 들어갔고요. 받으셨습니까?”“받지 않았습니다.”유진은 망설이지 않았다.“그렇다면 이름을 도둑맞으셨습니까?”“빌려주었습니다.”문밖에서 붓 긁는 소리가 멎었다. 받아쓰던 서리가 뒤늦게 손을 움직였다.유진은 계화사 여자들을 옮길 때 자기 이름으로 돈을 맡기고 찾았다고 했다. 새 방의 세, 떠나는 수레의 삯, 잡혀 온 아이의 약값까지 본래 이름으로 치를 수 없는 돈이 많았다. 그 장부와 인장은 장은이 맡았다.“한 번 맡긴 뒤에는 어디에 썼는지 묻지 않으셨습니까?” 소의가 물었다.“처음에는 물었습니다.”“언제부터 그만두셨지요?”유진의 손이 무릎 위 겉옷을 반듯하게 접었다.“그자가 가져오는 여자 수가 늘고, 돌아오는 돈도 늘었을 때입니다.”“돈이 돌아오면 살린 사람도 늘었다고 믿으셨군요.”“믿고 싶었습니다.”소의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아버지 진문재와 함께 일했던 여자였다. 거짓 사망 기록 하나로 매 맞던 아내를 빼내고, 죽은 남편의 성을 빌려 아이에게 밥을 먹인 사람이었다. 그 손으로 공주부의 돈도 옮겼다.“팔백 냥은 어디로 갔습니까?”“숨긴 사람들의 거처로 갔습니다.”“이름을 말씀하십시오.”“말할 수 없습니다.”“그러면 그 돈이 사람을 살렸다는 말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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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아이가 들은 싸움

정윤은 묵화소원 책상 아래에 두 발을 올리고 앉았다.문혜가 자세를 바로 하라 하면 곧장 내리던 발이었다. 오늘은 소의가 보아도 그대로 두었다. 벼루 옆에는 먹다 남은 대추 두 알이 있었고, 열린 창으로 참새가 내려올 때마다 하나씩 떼어 창틀에 놓았다.“그날 숙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니?”소의가 물었다.정윤은 붓에 먹을 묻혔다. 대답 대신 종이에 둥근 얼굴을 그렸다. 눈썹은 치켜 올라갔고 턱은 네모졌다. 그 옆에는 키가 작고 눈만 큰 사람도 그렸다.경연이 종이를 내려다보았다.“누구지?”“모르겠습니다.”“관모를 썼는데.”“대리시에는 관리가 많으니까요.”소의는 입술을 다물었다. 눈만 큰 사람의 뒤에는 붓이 세 자루나 꽂혀 있었다. 경연이 네모난 턱의 종이를 집으려 하자 정윤이 재빨리 눌렀다.“그건 제 그림입니다.”“심리 기록에 붙이겠다.”“닮지도 않았습니다.”“그러니 밖에 돌아다니게 둘 수 없다.”정윤이 처음으로 킥 웃었다. 소의는 차를 마시는 척 고개를 숙였다.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윤은 새 종이에 침상과 문을 그렸다. 작은 아이를 침상 밑에 눕히고, 문가에는 오른손을 감춘 회창을 세웠다. 붓끝이 종이를 콕콕 찔렀다.“숙부는 늘 소리를 지릅니까?” 소의가 물었다.“술을 마시면요.”“그날도 마셨고?”정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그림 속 회창에게 입을 크게 그렸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굵게 바꾸었다.“차밭 문서를 내놓으시오. 빚을 못 갚으면 그 아이부터 이 집에서 나가게 될 거요.”다시 정안의 가느다란 목소리를 흉내 냈다.“그 애를 내보내면 네 아들이 들어올 테고?”“내 아들이 원래 받아야 할 자리요.”정윤의 붓이 멎었다.“그 말을 그대로 기억하니?” 소의가 물었다.정윤은 입을 삐죽였다.“모릅니다. 숙부는 더 길게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형만 보고 살았다는 말도 하고, 자기는 손가락까지 잃었는데 받은 것이 없다고도 했습니다.”“그럼 네가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아이는 그림 속 자기 몸을 붓으로 가리켰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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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둘째 아들의 밥상

정원후부 서쪽 곁채에는 해가 늦게 들었다.백차당에서 아침상을 물릴 무렵에야 회창의 방으로 밥이 왔다. 식은 조밥 한 그릇, 무를 넣은 탕, 전날 제사에 올렸던 생선의 남은 살. 같은 집 아들이어도 적장자가 먹고 난 다음에 불이 올라오는 부엌이었다.회창은 이 집의 둘째였다.어릴 때는 형의 작아진 옷을 입었고, 혼인한 뒤에는 형이 쓰다 남긴 곁채에 들었다. 손가락 하나를 잃고 돌아온 날에도 어머니는 상처보다 군영에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 먼저 물었다. 그는 그 모든 일을 웃으며 넘겼고, 웃음값을 술과 도박판에서 치렀다.아내 유소란이 탕그릇을 그의 앞에 놓았다.소란은 화려한 장신구를 하지 않았다. 머리를 매끈히 올리고, 허리에는 열쇠와 작은 주머니만 찼다. 아들의 약 먹는 시각과 서쪽 곁채에 남은 쌀을 그 주머니 속 패쪽에 적어 다녔다.“정윤이 없어지면 우리 아이가 후사가 된다더군요.”회창의 숟가락이 그릇을 쳤다.딱.“누가 그런 말을 했소?”“부엌에도 돌고, 바느질방에도 돕니다.”“당신은 그걸 믿소?”“낭군이 믿게 만들고 계시지요.”회창이 상을 밀었다. 탕물이 출렁이며 손등에 튀었다.“내가 그 아이를 죽이기라도 했다는 거요?”소란은 대답하지 않고 탕그릇을 집었다. 아직 말하지 않은 사람이 끼니부터 거르는 버릇을 알았다. 작은 화로에 그릇을 올리고 숯을 헤집었다.“뜨거울 때 드십시오. 화는 그 뒤에도 낼 수 있습니다.”“당신 아들이 자리를 얻는다잖소.”“그 아이는 새벽마다 기침합니다. 후사 자리에 앉히면 폐가 나을까요?”회창의 입이 다물렸다.안쪽 방에서 마른기침이 두 번 들렸다. 소란은 문틈을 살핀 뒤에야 상으로 돌아왔다. 아이 앞에서는 부부가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는 약조를 혼인 첫해부터 지켜 왔다. 지키지 못한 약조보다 그것 하나가 더 질겼다.문틈으로 여섯 살 아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은 모습이 보였다. 약을 먹기 싫어 나무말을 베개 밑에 숨기는 중이었다. 회창은 큰방에서 소리가 나면 제사에도 늦던 사람이 먼저 뛰어갔다. 아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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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죽은 언니의 두 서찰

난정은 청묵재 뒷방 바닥에 날짜를 적은 패쪽을 늘어놓았다.정안이 죽기 스무 날 전에 회유에게 보낸 서찰. 아이를 내쫓지 말라는 글이었다. 죽기 닷새 전에 난정에게 보내려던 서찰. 차밭을 아이에게 주지 말라는 글이었다.두 글은 같은 달에 쓰였지만 길은 달랐다.회유의 것은 후부 안에서 바로 전해졌다. 난정의 것은 세굽이차원 토신당의 산지기에게 맡겨졌다가 후부 사람 손에 빼앗겼다. 네 해 뒤 절름발이 사내가 되돌려놓았고, 지난달 운주에서 연경으로 오는 표행에 실렸다.“그때 언니는 제가 어느 고을에 있는지도 몰랐을 겁니다.”난정이 말했다.“찾으려고만 했다면 찾았겠지.”조경년은 문 가까이에 서 있었다. 그는 밤새 수레를 타고 올라와 장화에 마른 진흙이 켜켜이 붙어 있었다. 난정이 차밭에서 가져온 찻잎 자루부터 보려 하자 그가 발끝으로 밀어 막았다.“지금은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당신이 언제부터 내 이야기를 골라 줬지?”“아씨가 피하는 이야기만 골라 드렸습니다.”경년은 정안의 장례에 난정이 오지 않았다는 말을 꺼냈다. 부고는 운주와 난정이 묵던 객점 두 곳에 보냈다. 답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차밭 지분부터 물었다고 사람들이 했습니다.”“사람들은 산 사람 밥을 안 먹어도 말은 배부르게 하지요.”“그래서 안 왔습니까?”난정이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내려놓았다.“가면 또 언니 동생이 되니까.”경년이 입을 다물었다.“언니는 죽어서도 불쌍하고 현명한 안주인이고, 나는 장례에 와서 혼수나 헤아리는 동생이 됐을 거예요. 내가 무엇을 말해도 사람들은 언니 얼굴부터 찾았을 테고.”“나도 그랬을 것 같습니까?”난정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경년의 손톱 가장자리에는 아직 차물이 배어 있었다. 네 해 전 정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그 손이 난정에게 부고를 한 번 더 보냈다. 난정은 봉서도 열지 않고 객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당신은 더했겠지.”“맞습니다.”경년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가 난정의 얼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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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새 안주인의 봉서

대리시 심리청에 정원후부 사람들이 한 줄로 앉았다.정 노부인은 지팡이를 무릎 사이에 세웠고, 회유는 그보다 반 걸음 아래에 앉았다. 난정과 정윤은 같은 상 끝을 두고도 서로 보지 않았다. 문혜는 오동나무함을 두 손으로 안은 채 맨 끝자리를 택했다.홍 유모는 문밖에 서 있었다.“안으로 드십시오.” 포졸이 말했다.“아직은 아닙니다.”유모는 문혜가 함을 여는 것만 보겠다고 했다.함 안에는 정윤이 그려 준 붓 세 자루 그림과 ‘다음 안주인에게’라고 적힌 봉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문혜는 그림을 먼저 꺼내 아이 앞에 놓았다. 정윤은 자기가 그린 것을 기억하면서도 모르는 물건처럼 바라보았다.“혼례 날 홍 유모에게 받았습니다.”문혜가 말했다.“혼자 열지 말고, 관청 사람과 집안이 함께 있을 때 열라 했습니다.”“왜 지금까지 숨겼소?” 회유가 물었다.문혜는 남편을 보지 않았다.“정안 부인의 유품이라는 말만 꺼내면 노야께서 방을 나가셨으니까요.”회유의 얼굴이 굳었다. 반박할 말은 없었다.문혜가 봉한 자리를 잘랐다. 바스락. 네 해 동안 접혀 있던 종이가 펴졌다.정안은 정윤을 후부에서 내보내지 말라고 했다. 차밭은 아이 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설씨 친정과 차밭 일꾼들이 함께 관리하게 하라고 했다. 수익은 후부의 빚, 일꾼의 품삯, 정윤의 양육비로 나누라는 말도 있었다.난정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언니가 공동 관리를 말했습니까?”“여기 적혀 있습니다.” 문혜가 답했다.“언니가 한 말을 묻는 겁니다.”“나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소의는 다향원 침상 아래에서 나온 친필 유언을 봉서 옆에 놓았다. 친필 유언에는 차밭을 아이에게 주지 말라는 말만 있었다. 노동자 공동 관리와 수익을 나누는 방식은 없었다.정 노부인의 지팡이 끝이 마룻바닥을 쿵 쳤다.“죽은 사람 뜻을 지켰다면 그걸로 됐다.”“누가 더한 뜻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정안 언니의 뜻이라 합니까?” 난정이 맞섰다.문혜는 봉서를 자기 앞으로 끌어오지 않았다. 칭찬을 기다리는 얼굴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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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좋은 뜻을 더한 위조

정오가 지나도 대리시 동쪽 기록방에는 밥 냄새가 나지 않았다.서리들은 식은 찐떡을 한 손에 들고 문혜의 봉서를 돌려 읽었다. 한 사람은 제 몫의 녹봉을 못 받은 달을 들먹이며 차밭 일꾼 편을 들었고, 다른 사람은 형이 아버지 밭을 혼자 차지했다며 정안의 친정에 돌려줘야 한다고 했다.“조용히들 못 합니까?”고환이 새 관복의 앞섶을 폈다. 방금 전까지 누구보다 크게 법조문을 읽은 사람이었다.“죽은 이의 말을 바꾸어 문서를 만들었으면 사문서 위조입니다. 까닭이 선하다고 죄명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봉서 전부를 증거에서 빼야 합니다.”“그 안에 실제로 한 말도 있습니다.” 소의가 말했다.“거짓 한 줄이 들어가면 믿을 수 없는 문서입니다.”“그러면 어느 줄이 누구의 말인지 가려야지요.”“그것을 어떻게 가립니까?”“그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묻고, 그 말로 누가 무엇을 했는지 보면 됩니다.”나이 든 서리 하나가 찐떡을 내려놓았다.“돌아가신 제 부친이 막내누이에게 논 한 마지기를 주라 했는데, 형님이 그 말을 빼고 유언을 적었습니다. 그러면 논을 다시 나눠야 합니까?”고환이 곧장 답했다.“증인이 있고 상속 시효가 지나지 않았다면 따져야지요.”서리의 얼굴이 밝아졌다.“하지만 지금 사건과는 다릅니다.”“어디가 다릅니까?”고환은 입을 열었다가 조문을 처음부터 더듬었다. 다른 서리들이 이번에는 웃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자기 집으로 가져가면 쉬운 법이 없었다.고환이 같은 조문을 처음부터 다시 읊으려 했다. 심조문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한 번 눌렀다.“두 사람 다 상대 말을 듣지 않는군.”심리청이 조용해졌다.시경은 봉서를 세 부분으로 나누게 했다. 정안이 직접 했다고 시비가 인정한 말, 시비가 듣지 못했다는 말, 누가 넣었는지 아직 모르는 재산 배분이었다. 당장 효력을 정하지 말고 각 문장으로 실제 돈과 사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조사하라 했다.고환은 입술을 달싹였다.“하실 말이 있나?”“없습니다.”“방금 조문 셋을 더 외울 얼굴인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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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언니의 마지막 말을 들은 사람

조경년은 심리청에 들어오자마자 품삯 장부부터 내놓았다.난정은 바로 곁에 있었지만 그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운주에서 배를 갈아타고 닷새를 올라오는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 얼굴이었다. 손에 밴 차물은 씻겨 있었고 손톱 밑에만 푸른빛이 남았다.“설난정의 이름으로 공동 관리 문서를 내셨습니까?”경연이 물었다.“그렇습니다.”너무 간단한 대답에 고환이 붓을 떨어뜨렸다. 주워 들고도 한참 먹을 묻히지 못했다.난정이 경년을 돌아보았다.“내 이름을 훔쳤어요?”“빌릴 수 없어서 훔쳤습니다.”“누구에게 허락을 구하려 했는데요? 죽은 언니?”경년은 그 말에도 장부를 폈다.정안이 숨을 거두기 한 달 전, 세굽이차원 가운데 능선의 덖음 마당에 일꾼들을 모았다. 위쪽 밭의 늙은 채엽인과 아래 마을 창고지기, 솥을 맡은 여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정안은 차밭을 아이 한 사람에게 넘기면 후부의 빚쟁이들이 몰려올 것이라 했다. 친정과 일꾼이 함께 관리해 어느 쪽도 혼자 팔지 못하게 해 달라고 했다.“왜 글로 남기지 않았습니까?” 소의가 물었다.“그때는 손에 힘이 없었습니다. 연경에 돌아가 봉서를 쓰겠다고 했습니다.”“그 말을 들은 이들은 어디 있습니까?”“둘은 죽었고, 셋은 아직 차밭에 있습니다. 함께 왔으나 배멀미가 심해 객점에 누워 있습니다.”경년은 모든 것을 혼자 증명할 수 있다고 우기지 않았다. 사람을 데려왔고, 그들이 회복되면 각자 따로 물으라고 했다.정안이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뒤 공동 관리 문구가 빠진 봉서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경년은 일꾼들과 들은 부탁을 따로 적었다. 그러나 관리인 이름으로는 혼수 재산에 말을 얹을 수 없었다. 정안의 친정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난정뿐이었다.“그래서 죽립을 쓰고 다른 사람에게 내 이름을 대게 했어요?”“내가 직접 갔습니다.”“당신이 여자가 되었군요.”“차밭에서 글을 가르치던 사람이 대신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은 지난해 열병으로 죽었습니다.”난정이 헛웃음을 냈다. 사라진 사람 하나가 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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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한 집안의 두 장부

정 노부인은 송수당 곡간문을 직접 열었다.문 안에는 쌀독보다 빈 자리가 많았다. 벽을 따라 쌓인 잡곡 자루에는 먹을 사람이 적혀 있었고, 북부엌으로 나갈 자루에는 그날 아침 새끼줄이 묶여 있었다. 노부인은 열쇠를 시비에게 주지 않고 허리춤에 다시 찼다.“후부의 장부는 하나도 감추지 않겠다.”그녀는 공식 살림장부와 부엌에서 따로 적은 식량 장부를 함께 내놓았다.살림을 살펴줄 사람으로 방여운이 왔다. 배씨 종부가 다른 귀족 집안 내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온당하냐는 말이 나오자, 여운은 관청 판단에 끼지 않고 쌀과 숯이 어디로 가는지만 보겠다고 했다. 정 노부인은 같은 종부라면 자기 사정을 알아줄 것이라 여겨 먼저 자리를 내주었다.두 여자는 차도 마시지 않고 장부를 폈다.“제삿상 과실이 너무 많군요.” 여운이 말했다.“죽은 사람 상까지 줄이라는 거요?”“산 사람 죽에는 콩이 빠졌습니다.”정 노부인의 눈썹이 솟았다.“배씨 댁에서는 시어머니 제사에 콩죽을 올리나 보오.”“아닙니다. 대신 산 사람 몫을 빼 제사 체면을 세우지는 않습니다.”문가의 시비들이 고개를 더 숙였다. 소의는 둘 사이에 놓인 장부만 넘겼다.공식 장부에는 매달 북부엌으로 콩 열 섬이 나갔다. 부엌 장부에는 여섯 섬만 들어왔다. 처음에는 창고지기가 팔아먹었다고 했다. 창고지기는 억울하다며 곡간 바닥에 드러누웠고, 북부엌의 늙은 찬모는 빈 자루 넷을 직접 끌고 왔다.“이 자루들은 부엌 문턱도 안 넘었습니다. 받아 오라 하면 공주부에 바친 몫이라고 했습니다.”“누가 그리 말했지?” 노부인이 물었다.“외원에서 내려온 패쪽에 적혀 있었습니다.”찬모는 그해 겨울을 기억했다. 잡곡이 모자라자 어린 시비 셋을 친정으로 돌려보냈고, 남은 사람들은 죽 한 솥에 물을 두 바가지씩 더 부었다. 정윤에게는 흰쌀을 올렸다는 소문 때문에 아이의 밥상을 엎은 하인도 있었다.“도련님 밥도 같은 잡곡이었습니다.” 문혜가 말했다.“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찬모가 정윤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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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안왕이 모르는 돈

북원 사포에는 화살이 과녁을 때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탁, 탁, 퍽.안왕 소경소는 세 번째 화살을 과녁 밖 흙담에 꽂았다. 곁에서 시종들이 못 본 척 고개를 숙였다. 배조린만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웃을 거면 크게 웃어라.”“전하의 체면이 있지 않습니까.”“네가 지켜준 적도 없잖아.”안왕은 활을 조린에게 던졌다. 조린은 받기는 했으나 시위도 제대로 당기지 못했다. 연회에서 악사를 고르고 술잔을 돌리는 손이었다. 화살은 과녁 앞 풀밭에 툭 떨어졌다.“내 체면부터 걱정해야겠군요.”조린은 웃었지만 부채를 펴지 않았다.“전하 이름으로 정원후부 차밭에서 돈을 받으셨습니까?”안왕이 새 화살을 고르던 손을 멈췄다.“무슨 돈?”“황손 교육 기금이라 합니다. 네 해 동안 차밭 수익의 십분의 일이 나갔습니다.”“내가 글도 공짜로 배우지 못할 만큼 가난해 보였나?”“저도 처음에는 술값을 대신 내주신 줄 알았습니다.”“그건 네가 가난해 보여서다.”조린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안왕도 더 농담하지 않았다.안왕이 활 하나를 다시 건넸다.“형의 부탁으로 왔느냐?”“제 발로 왔습니다.”“그럼 친구로 묻는 것이냐, 배씨 집안 사람으로 캐는 것이냐?”조린은 시위를 당겼다가 손가락을 놓쳤다. 팽, 빈 시위가 손등을 때렸다.“그 둘을 어떻게 나눕니까?”“나도 왕과 사람을 잘 못 나눈다.”안왕은 조린의 붉어진 손등을 보았으나 괜찮으냐고 묻지 않았다. 조린도 아프지 않은 척 부채를 폈다가, 활터에서 부채를 펼 까닭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접었다.선태자가 죽은 뒤 태어난 아이. 사람들은 안왕을 볼 때마다 만나 본 적도 없는 아버지의 눈과 어깨를 찾았다. 서책을 받으면 선태자의 학문을 잇는 일이라 했고, 활을 잡으면 선태자의 무용이 돌아왔다고 했다. 잘못 쏜 화살 하나도 그의 것이 되기 어려웠다.“후원 장부를 보자.”안왕은 활을 시종에게 넘기고 사포 북쪽의 작은 장부각으로 걸었다. 연회와 학업에 들어온 기부를 적는 곳이었다. 조린이 뒤따르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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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차를 마시러 온 소경

경연이 청묵재 문을 두드린 것은 해가 세필골 지붕 아래로 내려간 뒤였다.낮 동안 말리던 종이를 거둔 곡우가 빗장을 잡고 물었다.“관청 일입니까?”“문서 하나를 물으러 왔다.”“급합니까?”경연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곡우가 문을 더 열었다. 반월주가 부엌에서는 기름에 파를 볶는 소리가 지글지글 났고, 골목에는 저녁 장사를 걷는 수레가 줄지어 지나갔다. 경연은 관복 대신 검은 겉옷을 입고 있었다. 소의가 꿰맨 안감은 보이지 않았다.소의는 앞방에서 금전 기록을 베끼고 있었다. 은비녀 하나로 대충 올린 머리가 기울 때마다 귀밑의 잔머리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경연을 보고도 먼저 탁자 위 빈자리를 만들었다.“어떤 문서입니까?”경연은 품에서 얇은 문서 한 장을 꺼냈다.“죽은 이가 사람을 시켜 말로 전한 명령도 유언으로 볼 수 있는지 묻고 싶었소.”“소경 대인께서 제게 물으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왜지?”“이건 여섯 해 전 판결입니다.”경연이 문서의 윗줄을 보았다.“알고 있소.”“지금 사건과 관계가 있습니까?”“비슷할 수도 있소.”“어느 부분이요?”경연이 문서의 위아래를 한 번 뒤집었다가 원래대로 놓았다. 오는 길에는 그럴듯했던 까닭이 소의 앞에서는 한 줄도 이어지지 않았다.“구두 유언이라는 점이.”“그 점 말고는 전부 다릅니다. 재산도, 증인 수도, 죽은 사람의 신분도.”“그렇군.”소의는 문서를 다시 읽었다. 경연이 잘못 가져왔을 가능성부터 생각하는 얼굴이었다.“다른 문서와 바뀐 것 아닙니까?”“아니오.”“그럼 왜 가져오셨지요?”경연은 답하지 못했다.그때 옥선이 길 건너에서 앞치마 차림으로 건너왔다.“문서가 밥도 먹여 준답니까? 둘 다 건너와요.”“저녁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경연이 말했다.“이미 밥을 했는데 안 먹고 버티는 게 방해지. 돼지고기 식어요.”“저는 버틴 것이…….”옥선은 듣지도 않고 길을 건넜다. 소의가 문서를 덮고 일어서자 경연도 따라서 일어났다.반월주가 앞방에는 손님 셋이 술을 마시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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