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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붉은 혼서: Chapter 121 - Chapter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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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봉인 줄의 양쪽

수레가 반 자쯤 더 밀렸다.끼이익—.젖은 봉인 줄이 떨리며 소의의 치맛자락을 스쳤다.“줄부터 놓아요!”난정이 수레 위에서 삿자리를 끌어당겼다. 군졸 둘이 줄을 붙잡고 버티는 동안 짐꾼들은 뒤에서 수레바퀴를 밀었다. 검량대 턱에 낀 바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빗물은 찢어진 종이 틈으로 스며들었다.“한 상자만 꺼내 다시 말리게 해주세요. 이것까지 향이 죽으면—”“봉인을 풀 수 없소.”경연의 목소리가 소란을 눌렀다.“어느 상자의 값이 그 기금으로 빠지는지 가려지지 않았소.”“향은 가려질 때까지 기다려준답니까?”난정은 젖은 소매로 얼굴을 훔쳤다. 수레 아래에서는 경년이 군졸의 눈을 피해 뒤쪽 매듭을 더듬고 있었다.소의가 그 손목을 잡았다.“그 줄을 끊으면 차뿐 아니라 오늘 품삯도 압류됩니다.”“이대로 두면 팔 게 없어지오.”“그러니 돈부터 나누자는 겁니다.”소의는 처마 아래의 작은 상으로 돌아갔다. 젖지 않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세 칸으로 접었다.“오늘 짐을 나른 삯과 배에서 내린 삯은 따로 셉니다. 그 돈은 수운창의 전대에 넣고, 차 대금은 관청이 봉합니다. 어느 집에 얼마가 가는지는 일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적겠습니다.”“전대 열쇠는 누가 갖소?” 차 상인이 물었다.“수운창 한 사람, 일꾼 한 사람, 차원 한 사람이 나눠 가집니다.”“글을 누가 읽는데?”“읽을 수 있는 사람만 믿으라는 약조는 쓰지 않겠습니다. 액수를 소리 내어 세 번 읽고 손도장을 받겠습니다.”뒤에 섰던 일꾼들이 웅성거렸다. 조금 전까지 소의 편이라던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그럼 장부도 다 내놓으라는 거요? 우리가 밤에 꾸린 상자까지?”“그래야 정상 품삯을 떼어낼 수 있습니다.”“관청 사람이랑 다를 게 뭐야!”욕설이 날아왔다. 소의는 대꾸하지 않고 종이 귀퉁이를 눌렀다. 다른 쪽에서는 군졸 하나가 동료에게 낮게 말했다.“배 소경이 귀족 차밭을 봐주는 건가?”경연이 고개를 돌리자 군졸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두세 사람이 들은 뒤였다.경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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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남은 한 그릇

옥선은 밥을 네 그릇 퍼놓고서야 손을 멈췄다.“오늘 손님 셋인데요.”곡우가 수저를 놓으며 말했다.“알아.”“그런데 왜 네 그릇이에요?”“네가 두 그릇 먹을까 봐.”“저녁마다 물독을 드는 사람이 먹던 그릇인데요.”옥선은 국자를 솥 안에 탁 던졌다. 국물이 튀어 곡우 손등에 떨어졌다.“손님 그릇이라니까.”그 손님은 밤이 한참 깊어서야 왔다. 수운창에서 짐을 나르던 사내였다. 이틀 동안 품삯을 받으러 다니느라 아침부터 굶었다며 밥을 국에 말아 삼켰다. 경연이 쓰던 반듯한 나무 수저는 그의 거친 손 안에서 달그락거렸다.곡우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물독을 들어 올리다 허리를 삐끗했다.“그걸 왜 네가 들어?” 옥선이 물었다.“그럼 물이 제 발로 들어와요?”둘이 겨우 물독을 들여놓자 바닥에 물이 반이나 쏟아졌다. 경연이 있을 때에는 물독이 무겁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저녁마다 말없이 물을 채우고, 깨진 바가지의 손잡이까지 새끼줄로 감아두곤 했다.“관직 높은 사람이 왜 이런 걸 했대?” 옥선이 젖은 바닥을 닦으며 중얼거렸다.곡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의도 들었으나 붓을 더 세게 쥐었을 뿐이었다.소의는 앞방에서 숫자를 세고 있었다. 차밭 일꾼의 이름 옆에 딸린 식구 수, 밀린 품삯, 외상으로 가져간 곡식이 빼곡했다. 참고패가 없으니 수운창 장부는 볼 수 없었다. 그는 일꾼들이 외운 액수와 차원에서 보낸 쪽지를 맞춰보았다.“관청 기록이 없으면 어느 돈이 묶였는지 모르잖아요.”곡우가 세 번째 말했다.“압니다.”“아는데 왜 계속 써요?”“오늘 일한 사람은 오늘을 기억하니까요.”“배 소경은 안 와요?”붓끝이 잠깐 종이를 눌렀다. 먹이 작은 점으로 번졌다.“올 이유가 없습니다.”“저녁 먹을 이유는 있었잖아요.”소의는 번진 부분을 잘라내고 새 줄을 그었다.뒷문에서 노탁이 헛기침했다. 곡우가 돌아보지 않자 한 번 더 했다.“기침이면 약방에 가세요.”“그게 아니고…… 어머니 말은 내가 시킨 게 아니오.”“무슨 말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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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소경이 대답하지 못한 말

“진소의 낭자와…… 사사로이 왕래하셨습니까?”고환은 질문을 읽고 제 입으로 한 말에 놀랐다. 종이를 넘기려다 아직 쓰지 않은 뒷장을 펼쳤다. 다시 앞장을 찾는 동안 귀가 붉어졌다.경연은 열린 문 안에 서 있었다. 어두운 관복에 금속 허리띠까지 빈틈없이 갖추었으나, 문책청 안에는 그의 자리가 없었다. 심조문이 턱으로 맞은편 방석을 가리켰다.“앉게.”경연이 앉자 고환은 준비한 법조문부터 읽었다.“민간 참고인에게 기록 열람과 현장 참여를 허가할 때에는…… 아니, 이건 뒤 질문입니다.”심조문은 도와주지 않았다. 차가 식는 동안 뚜껑만 한 번 돌렸다.고환이 목을 가다듬었다.“진 낭자께 드린 참고 권한은 정식 허가를 받았습니까?”“받았소.”“청묵재 출입도 모두 사건 때문이었습니까?”“아니오.”붓을 들던 서기가 경연을 보았다. 고환은 오히려 다음 말을 잃었다.“그러면…… 두 분이, 그러니까 진 낭자와 소경께서는…….”“무엇을 묻는 것이오?”“연인입니까?”심조문의 찻잔 뚜껑이 달각 닫혔다.경연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관계를 정한 적은 없었다. 소의의 손이 제 소매를 붙든 적도, 빗속에서 입술이 닿은 적도 아직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수운창에서 서로 다른 편에 섰다는 사실뿐이었다.“아니오.”고환의 붓이 움직였다.“사적인 마음이 없다는 뜻은 아니오.”붓이 다시 멎었다.“그럼 있다고 적어야 합니까, 없다고 적어야 합니까?”“관계의 이름을 정한 적이 없다는 말이오.”“이름이 없는 관계는 기록을 어떻게—”“고 평사.” 심조문이 처음 입을 열었다. “기록할 수 있는 사실을 물어.”고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경연을 망신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허가받은 참고인을 사사로운 마음으로 현장에 불러 쓰는 일이 허용되면 다음 관원도 같은 짓을 할 수 있었다. 다만 법조문은 사람보다 순서가 좋았고, 사람 앞에서는 자꾸 엉켰다.“수운창에서 진 낭자를 물러나게 한 까닭은 무엇입니까?”“증거 자금에 손댔다는 공격을 받을 수 있었소.”“그분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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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닷새째 끓인 묽은 죽

나무숟가락이 빈 솥바닥을 긁었다.어제는 두 번 떠먹을 수 있던 죽이 오늘은 한 번이면 바닥났다. 아이는 그릇에 비친 제 얼굴을 핥듯 숟가락을 돌렸다.“물 더 부으면 안 돼?”어머니는 대답 대신 솥을 기울였다. 마지막 쌀알 세 개가 묽은 물과 함께 굴러 나왔다.거래가 묶인 지 닷새째였다.난정은 비녀 두 개와 팔찌 하나를 팔아 조를 사 왔다. 아래 마을 서른여덟 집에 나누자 저녁 한 끼도 되지 않았다. 곡식 자루가 비었다는 소리가 덖음 마당에 닿기도 전에 경년이 차 상자를 수레에 싣고 있었다.마을 어귀 곡물상은 외상패가 긴 집부터 문전에서 돌려보냈다. 한 집은 낫을 맡겼고 다른 집은 겨울 이불을 내놓았다. 차밭에서 일하려면 낫이 필요했고 밤을 넘기려면 이불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어느 것을 먼저 잃어야 덜 굶는지로 아침부터 싸웠다.“어디로 가져가려고요?”난정의 목소리에 경년이 돌아섰다. 등 뒤에는 장정 셋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눈을 피했고, 한 명은 아이가 셋이라고 먼저 말했다.“남쪽 고개 너머 상인이 그 자리에서 은자로 치르겠답니다.” 경년이 말했다.“관청 봉인을 어기고요?”“젖은 차는 이레를 못 버텨.”“이레째 잡혀가면 향이 남아도 팔 사람이 없겠죠.”“굶는 사람에게 법부터 먹이겠소?”말이 끝나기 전에 흙덩이가 날아왔다. 난정의 어깨에 맞고 부서졌다.“귀한 집 싸움은 귀한 집에서 하지 왜 우리 솥을 비워!”젊은 채엽인이 두 번째 돌을 들었다. 그의 어머니가 팔을 끌어내렸고, 뒤에서는 몰래라도 팔자는 사람과 붙잡히면 모두 끝이라는 사람이 뒤엉켰다.“내 애는 셋이오!”“우리 집엔 걷지도 못하는 노모가 있어!”“그럼 네 집만 먹고 우리는 굶으란 거냐?”고함 속에서도 솥 아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눅눅해진 차를 죽석에 펼쳐 다시 말려야 했다. 난정은 치맛자락을 걷어 묶고 차를 뒤집었다. 경년도 맞은편에 앉아 손을 놀렸다.“또 혼자 팔 생각을 했죠.”“말했으면 허락했소?”“안 했겠죠.”“그러니 말하지 않았소.”난정이 죽석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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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의 약조

소의는 빈 종이를 펼쳤다.“쓴 게 없잖소.”감독이 종이를 들춰보았다. 뒷면까지 희었다.“여기 모인 이들의 말을 듣기 전에 썼다면 제 약조이지, 이분들의 약조가 아닙니다.”“말 잘하네. 그래서 오늘 쌀은 누가 주는데?”솥에서 김이 올랐다. 차를 덖는 큰 솥이었다. 불을 끄면 남은 차까지 버려야 해서 사람들은 굶으면서도 장작을 넣었다.소의가 붓을 들었다.“오늘 꼭 필요한 것부터 말씀하세요.”“품삯.”“곡식.”“우리 밭은 건드리지 말라고 써요!”“아버지 약값도!”“차밭을 설씨가 다시 가져가는지부터 물어야지!”말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소의는 처음 세 사람까지만 적고 붓을 내려놓았다.“한 줄씩 서십시오.”“배고픈 데 줄까지 서?”“안 서면 누구 말이 빠졌는지 모릅니다.”줄은 생기지 않았다. 난정이 죽석을 길게 깔아 능선별로 앉혔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기 집이 어느 능선인지로 또 다퉜다.판매 대금을 세 몫으로 나누자는 데까지 한 시진이 걸렸다. 오늘 일한 품삯과 운송비, 다음 수확까지 먹을 곡식과 종자, 죄에 쓰였는지 가릴 때까지 봉할 돈이었다.“봉한 돈 열쇠는 내가 맡겠소.” 감독이 말했다.뒷줄에서 코웃음이 났다.“지난겨울 곡식도 네 처남 집부터 줬잖아.”“아이 열이 심했어!”“우리 애도 열났어.”소의는 같은 뜻을 세 번씩 풀어 말했다. 한 집이 가져가는 돈은 다른 집이 듣는 앞에서 세고, 열쇠는 세 능선의 대표가 하나씩 나눠 갖는다고 했다. 글을 모르는 노인은 어려운 말을 숨겨놓은 것 아니냐며 종이를 코앞에 들이밀었다.“여기 ‘유보’가 뭐요?”“당장 쓰지 않고 남겨둔다는 뜻입니다.”“그럼 그렇게 쓰면 되잖아.”소의는 ‘유보’를 먹으로 지웠다.손도장을 찍는 일도 쉽지 않았다. 어떤 이는 지난번 찍은 엄지가 죄에 쓰였다며 검지를 내밀었고, 어떤 이는 손을 씻으면 약조가 사라지는 줄 알았다. 소의는 인주가 권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들었다는 표지라고 몇 번이고 설명했다. 난정이 먼저 엄지를 눌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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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종부가 내놓은 빚

“지킬 수 없는 것은 쓸 수 없습니다.”소의가 말했다.노부인의 손등에서 푸른 핏줄이 솟았다. 송수당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복도를 지나던 시비도, 빈 곡식 자루를 끌고 가던 늙은 하인도 안을 들여다보았다.“아이가 이 집에서 산 세월도 법에는 없느냐?”“지금 신분을 보장하려면 별도 심리가 필요합니다. 차밭 약조에 끼워 넣으면 오히려 두 가지가 함께 무효가 됩니다.”“그럼 법이 알아들을 것을 내놓으마.”노부인이 열쇠 꾸러미를 집어 던졌다.“곡간과 장방을 열어라. 진짜 빚문서를 전부 가져와.”회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머니.”“왜. 네 체면도 장부 속에 들어 있느냐?”잠시 뒤 송수당 마루는 장부와 사람으로 가득 찼다. 공식 식솔은 백열둘이라 적혀 있었으나 이름을 불러도 나오지 않는 사람이 스물이었다. 반대로 장부에 없는 아이와 늙은이가 열셋이나 부엌채와 마구간 곁방에서 살았다.부엌을 맡은 늙은 여인은 솥 셋도 재산 목록에 넣으라 했다. 하나는 자기 혼수로 가져온 것이고 두 개는 정안이 차밭 돈으로 샀다는 말에 장방지기가 난색을 보였다. 마구간 아이는 말솔과 낡은 안장을 자기 품삯 대신 받았다고 우겼다. 집안 재산과 식솔의 살림은 이미 오래전에 한 궤짝 안에서 뒤섞여 있었다.“이 집 사람이 아닌데 왜 쌀을 받았지?” 회창이 물었다.늙은 사내가 지팡이로 마루를 쳤다.“삼십 년 말을 돌봤소. 다리를 절어 품삯 대신 이 방을 받은 거요.”“문서가 있소?”“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한 말이다!”회창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도박빚 세 장이 바로 다음 묶음에서 나왔다.“이건 제 개인 빚입니다.”“집안 인장을 찍었는데 어찌 네 개인 것이냐?” 노부인이 쏘아붙였다.회유는 장부를 덮으려 했다.“밖에서 보는 눈이 많습니다. 문부터 닫고—”“십 년을 닫아놓고 망했다. 오늘은 열어둬.”노부인은 곡간 바닥까지 보이게 했다. 남은 곡식은 보름치도 되지 않았다. 제사상에 올릴 술값, 작위를 유지하느라 보낸 예물, 밀린 품삯, 떠난 하인의 노자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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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배씨 집안이 사들인 빚

방여운은 내택 장방의 열쇠를 직접 들고 왔다.장방지기는 문 앞에서 허리를 굽혔지만 비키지 않았다.“돌아가신 가주의 사적인 지시였습니다. 부인께 보여드릴 장부가 아닙니다.”“내가 어느 집에 시집왔는지까지 네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그런 뜻이 아니라—”안에서 궤짝 닫히는 소리가 났다. 명주가 뒷창으로 먼저 들어가 장부를 뒤지고 있었다.“어머니는 문 앞에서 예법을 찾으세요. 저는 돈을 찾을 테니.”“배명주!”“여기 정원후부 채권이 있어요. 세 묶음이나.”여운은 딸을 꾸짖으려다 장부부터 받았다. 종이에 적힌 숫자는 컸지만 실제로 나간 은자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곡식, 약재, 부실 채권을 떠안은 값이었다.모녀는 같은 집에서 서로 다른 길로 움직였다.여운은 상단 창고로 가 곡식 자루가 실제로 나간 날을 물었다. 명주는 내택 시비들을 붙잡고 그날 밤문으로 들어온 사람이 누구였는지 캐물었다.“늙은 사내였어요.”“수염은?”“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옷은?”“북방 사람처럼 두꺼웠어요. 아니, 그때가 겨울이라 다 두꺼웠나?”명주는 답답해 발을 굴렀다. 시비는 자기가 틀린 답을 했다며 울기 시작했다.“울지 말고 그날 네가 하던 일을 말해.”시비는 밤참 국을 데웠다고 했다. 북방 손님은 고기를 먹지 않았고, 시충은 평소 마시지 않던 독한 술을 두 잔이나 마셨다. 얼굴과 옷은 기억하지 못해도 빈 그릇과 부엌 심부름은 기억했다. 명주는 그제야 질문을 바꿨다. 그날 누가 어느 문을 열었고, 몇 사람 몫의 이부자리를 폈는지 물었다.창고의 늙은 마부는 더 완강했다.“가주께서 내 무릎을 고쳐주셨소. 북방 심부름 몇 번 한 것이 무슨 죄라고.”“무엇을 가져왔습니까?” 여운이 물었다.“약재도, 서찰도.”“누구 소식을 샀느냐고 묻는 것입니다.”“그걸 말하면 이 방도 내놓아야 하오?”마부가 제 뒤의 작은 방을 돌아보았다. 아내의 제상과 겨울 이불이 그 안에 있었다. 여운은 나가라고 하지 않았다.“방은 네가 일한 값이다. 말하지 않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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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숨기면 지켜지는가

고월낭이라는 이름을 적은 종이가 빗물 한 방울을 먹었다.빗물은 청묵재 뒤쪽 벽을 타고 흘렀다.곡우는 종이 궤짝을 앞으로 밀었다. 아래에서 물을 먹은 종이 몇 장이 서로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지붕을 고쳤다더니 왜 또 새지?”옥선이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고친 데 옆이 새는 겁니다.”“집도 사람처럼 꼭 안 아프던 데가 새네.”뒷방에는 여운이 앉아 있었다. 좋은 비단 치맛단이 젖어 색이 짙어졌지만 그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월낭이라는 이름으로 정주 성북의원에서 약재를 받았다고 한다.”소의는 젖지 않은 종이를 골라 수령처와 날짜를 적었다.“직접 본 사람은 있습니까?”“마부가 한 번 보았다고 했다. 십여 년 전 일이다. 지금은 산해라는 사람이 확인하러 갔다더구나.”“그럼 살아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그래서 말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여운은 그 말을 너무 빨리 꺼내놓고 손가락을 모았다.“경연은 지금 관직까지 멈췄다. 확인되지 않은 소식으로 더 흔들리게 하고 싶지 않다.”소의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밖에서 듣고 있던 옥선이 대야를 쿵 내려놓았다.“숨기면 덜 흔들립니까?”여운이 눈을 들었다.“집안일이다.”“나도 집안일이라며 십칠 년을 숨겼소. 이 아이 살리겠다고.”옥선이 소의를 턱으로 가리켰다.“살아는 있었지. 대신 자기가 왜 버려졌는지 고를 권리는 없었어.”여운이 옥선을 바라보았다.“확인되지 않은 말을 전했다가 거짓이면 어찌하느냐?”“거짓일 수 있다고 같이 말해야지. 비밀이랑 모르는 건 다른 거요.”옥선은 대야에 찬 물을 버렸다. 처마에서 다시 물이 떨어져 금세 바닥이 찰랑거렸다.“사람을 지킨다는 말은 참 편해. 지키는 쪽은 말하고, 지켜지는 쪽은 입도 못 떼니까.”“내 아들은 배씨 장손이다. 지금 일이 알려지면—”“경연이라는 사람과 배씨 장손 가운데 누구를 걱정하십니까?” 소의가 물었다.여운의 입이 닫혔다.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품삯을 떼인 세탁 일꾼이 소장을 찾으러 온 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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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관복을 벗은 남자

관복 상자 곁에는 식지 않은 목욕물과 손대지 않은 저녁상이 놓여 있었다.경연은 먹빛 평복을 입고 있었다. 허리의 금속 띠도, 관모도 없었다. 그런데도 꼿꼿한 어깨와 흐트러짐 없는 옷깃 때문에 방 안이 관청처럼 좁아 보였다.“내 판단을 후회하지 않소.”소의는 문턱 안에 한 발을 들인 채 멎었다.“무슨 판단을 말씀하십니까?”“수운창 일을 변론하러 온 것 아니오?”“아닙니다.”경연의 얼굴에서 준비해둔 말이 갈 곳을 잃었다. 그는 들어오라는 말도 잊고 서 있었다. 소의가 스스로 신을 벗고 상 맞은편에 앉았다.“그래도 수운창 이야기는 해야겠습니다.”경연도 자리에 앉았다.“전면 동결은 필요했소.”“오늘 품삯까지 막을 필요는 없었습니다.”“돈길이 섞여 있었소.”“그래서 나누려고 했습니다.”“책임질 사람이 없었소.”“찾을 시간을 주지 않으셨습니다.”말은 다시 봉인 줄 양쪽으로 돌아갔다. 소의는 참고패를 내놓은 일을 후회하지 않았고, 경연은 받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그대 판단이 가볍다고 여긴 적은 없소.”한참 뒤 경연이 말했다.“저도 소경께서 사람을 굶기고 싶어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소의가 새 종이를 펴자 경연은 말려 올라가는 귀퉁이를 눌러주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다.소의가 가져온 종이를 펼쳤다. 손가락 끝에 먹이 번져 있었다. 경연의 시선이 그 검은 자국에 닿았다. 긴 손이 들렸다가 허공에서 멎었다.소의는 피하지 않았다.경연은 끝내 손을 대지 못하고 깨끗한 천만 건넸다. 소의는 그것을 받아 들고도 닦지 않았다. 저 손이 닿기를 기다린 것인지 천을 받으려 한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임원기 부인에 관한 소식입니다.”방 안 공기가 바뀌었다.소의는 고월낭이라는 이름, 정주 성북의원, 약재 수령표와 늙은 마부의 말을 차례로 전했다. 산해가 확인하러 갔다는 사실도 덧붙였다.“살아 계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경연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아버지는 알고 있었소?”“소식을 사려고 돈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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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살아 있는 어머니의 다른 이름

북문 밖 객점 앞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멈췄다.경연은 소의가 올 줄 몰랐고, 소의도 경연이 벌써 와 있을 줄 몰랐다.“어찌 왔소?”“산해 어르신이 제게도 전갈을 보냈습니다.”“내가 부른 것은 아니오.”“따라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객점 안에서 주인이 고함쳤다.“증언이고 뭐고 방값부터 내시오! 저 산파가 사흘째 우리 방을 차지했어!”두 사람은 누가 누구를 따라왔는지 더 따지지 못하고 들어갔다.북방에서 온 산파는 방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수레를 오래 타 허리가 상했다며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월낭을 아시오?” 경연이 물었다.“모르오.”“정주 성북의원에서 일한 사람입니다.”“아, 월낭 언니? 그 이름부터 말해야지.”경연의 눈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산파는 그 얼굴을 올려다보다 혀를 찼다.“언니보다 훨씬 희네. 눈도 안 닮았고.”“나이는 몇이었소?”“나보다 다섯 위.”“여덟 위라고 하셨잖아요.” 객점 주인이 문밖에서 끼어들었다.“네가 내 나이를 알아?”산파의 기억은 자꾸 어긋났다. 고월낭의 키는 물을 때마다 달라졌고, 연경을 떠난 해도 맞지 않았다. 경연은 붓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그러나 어려운 산모를 만났을 때 이야기가 나오자 산파의 말이 빨라졌다.“평소에는 오른손을 떨었소. 물잔도 쏟았지. 그런데 아이가 거꾸로 섰다 하면 딱 멎어. 손목에 붉은 흉터가 있었고, 약상자 안에는 오래된 아이 버선 한 짝을 넣어 다녔어.”경연의 붓이 멎었다.그가 태어난 해 겨울, 임원기는 손목에 큰 화상을 입었다. 일곱 살 때까지 신었던 작은 버선 한 짝도 함께 사라졌다.경연은 앞서 적은 나이와 생김새에 줄을 그었다. 맞지 않는 것과 맞는 것을 갈라 적으려 했지만, 아이 버선이라는 네 글자 옆에서는 붓이 자꾸 머물렀다. 산파는 그가 의심하는 줄 알고 같은 이야기를 더 크게 되풀이했다.“아들 이야기를 했소?”“거의 안 했지.”산파는 몸을 뒤집어 벽에 기댔다.“한 번 술을 먹고 울었소. 연경에 일곱 살 난 아이가 있는데, 약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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