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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붉은 혼서: Chapter 111 - Chapter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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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두고 간 판결문

“사흘을 일했는데 엽전은 이틀치만 줬다니까요. 아니, 나흘인가. 첫날에는 빨래만 걷어 왔으니 일을 안 한 셈이라는데, 젖은 이불 여섯 채를 내가 업고 왔어요.”어젯밤 경연이 두고 간 판결문 옆에서 앞방의 여자가 무릎을 쳤다. 치맛자락에는 덜 마른 물자국이 번졌고 손등은 잿물에 터 있었다. 곁에 붙은 아이는 지루한지 활자함을 기웃거렸다.다음 날 저녁, 경연은 열린 문밖에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시선이 탁자 귀퉁이의 판결문에 잠깐 닿았다.소의는 붓을 들고 물었다.“빨래를 걷어 온 날까지 나흘입니까?”“나흘이지요. 그런데 그 집 행수가 내 남편한테 술을 먹여서는, 둘이 무슨 말을 했는지 남편이 집에 와서 나를 때리려고…….”“맞으셨습니까?”“때리려고 했죠. 손을 이렇게 들었는데 내가 빨랫방망이부터 잡았거든요. 그랬더니 그놈이 제 손으로 문기둥을 쳤어요. 내 탓이랍디다.”소의의 붓이 멎었다.“그 일도 함께 적으시겠습니까?”여자는 입을 벌린 채 한참 앉아 있었다.“아니, 오늘은 삯만 받으러 왔는데.”“그럼 삯부터 적겠습니다. 맡은 집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여자는 다시 처음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 집 둘째 며느리가 이불에 술을 쏟았고, 안주인은 며느리 흉을 보느라 빨래 값을 깎았으며, 행수는 제 아들 혼처에 쓸 돈이 없다 했다. 곡우는 주판알을 튕기다가 두 번이나 고개를 들었다. 경연은 문턱 밖에 선 채 그 말을 다 들었다.평소의 그라면 세 번째 문장에서 끊었을 것이다. 날짜, 사람, 액수만 남겼을 것이다. 소의는 그러지 않았다. 쓸모없어 보이는 말을 흘려보내다가, 여자가 숨을 고를 때마다 같은 곳으로 되돌렸다.“그래서 몇 채였습니까?”“뭐가요?”“젖은 이불이요.”“여섯…… 일곱 채였나?”“아까는 여섯이라 하셨습니다.”“작은 요는 안 셌으니까.”“그럼 이불 여섯 채와 요 하나로 적겠습니다.”그사이 아이의 손이 활자 한 개를 집었다.“안 돼!”곡우가 주판을 밀치고 달려왔다. 아이가 놀라 활자를 입에 넣으려 하자 곡우는 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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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넉 달의 약값

“내 약부터 달이라고 했잖아!”“저 산모가 먼저 왔소!”“나는 어젯밤에도 왔어!”“어젯밤 외상값은 오늘 순서가 아니오!”화영약포 앞에는 수레 두 대가 길을 막고 있었다.한쪽에서는 북방 약초 자루를 내렸고, 다른 쪽에서는 해산한 지 사흘 된 여자가 이불에 싸인 채 끙끙거렸다. 점포 뒤 솥에서는 약물이 부글부글 끓었다. 쓴 김이 골목을 눌러 지나가던 개까지 재채기를 했다.약방 주인은 손님과 싸우면서도 외상 장부를 가슴에 끼고 있었다. 한유백이 들어오자 그 장부부터 뒤 선반에 올렸다. 선반이 워낙 높아 발판을 밟고도 두 번이나 헛손질했다.“숨기러 온 것 아닙니다.” 유백이 말했다.“내가 뭘 숨겼다고.”“장부를 숨기셨습니다.”“귀한 집에서 돈을 주면 내려놓으려고 올린 거요.”문혜는 점포 밖에 서 있었다. 정안의 약을 알아보겠다고 따라왔으나, 좁은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산모를 태운 수레가 볕을 가리자 시비에게 수레를 옮기라고 말하고, 자기가 벽 쪽으로 비켜섰다.유백은 탁자 위에 약재를 늘어놓지 않았다.“설정안 부인에게 넉 달 동안 약을 내주셨습니까?”“누구요?”“정원후부의 죽은 적처입니다.”“그런 사람 모릅니다.”“외상값 열일곱 냥.” 문혜가 밖에서 말했다.약방 주인이 입을 다물었다.“엽전 마흔두 닢도요.”“마흔셋이오.”“어젯밤에는 마흔둘이라 하셨습니다.” 유백이 말했다.“오는 길에 이자가 붙었소.”약방 주인은 투덜거리며 발판에 올라 장부를 도로 내렸다. 네 해 전 장에는 빼곡한 외상 표시가 이어졌다. 정원후부 다향원. 처음에는 닷새에 한 첩, 뒤에는 사흘에 한 첩. 마지막 달에는 하루 걸러 같은 약이 나갔다.“처음 온 사람은 의원의 처방을 가져왔소. 가슴이 조이고, 밤새 기침하고, 누우면 숨이 막힌다고 했지. 석 달 동안은 처방에서 벗어나지 않았소.”“마지막 달에는요?”주인은 대답하지 않고 솥으로 달려갔다. 약물이 넘쳐 숯불 위에 치익 쏟아졌다. 그는 젖은 헝겊으로 솥전을 훔치며 손님에게 불을 줄이라고 소리쳤다.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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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유모가 건넨 마지막 잔

“이번에는 깨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지요.”소의의 말에 홍 유모의 젖은 손이 금이 간 약잔 가장자리에서 멎었다.유모는 다향원 침상 휘장을 걷지 않았다.볕이 창호를 환하게 비추었는데도 방 안은 누렇게 어두웠다. 그는 휘장 밑을 쓸고, 침상 다리를 닦고, 금이 간 약잔을 뜨거운 물에 담갔다. 잔 가장자리를 한 번, 두 번, 세 번 문질렀다.“네 해를 닦아도 금은 안 없어집니다.”소의가 문 가까이에 앉아 말했다.유모는 못 들은 척 물을 갈았다.“마지막 약을 이 잔에 따르셨습니까?”“병자는 원래 약을 먹습니다.”“그날 방에는 누가 있었습니까?”“내가 있었지요.”“그다음에는요?”“부인이 기침을 했고.”“사람을 묻고 있습니다.”“기침하다 숨이 넘어가는데 사람 수를 누가 셉니까?”유모는 젖은 헝겊을 짰다. 물이 손마디를 타고 소매로 흘렀다. 앞치마에 닦으려던 빈손이 멈추었다가 다시 잔으로 갔다.소의는 같은 질문을 조금 뒤로 옮겼다.“해가 진 뒤 처음 들어온 사람은요?”“둘째 도련님.”“회창 대인께서 무엇을 했습니까?”“서찰을 내놓으라 소리쳤습니다. 부인은 주지 않았고요. 정윤 도련님은 침상 밑에 숨었습니다.”“그다음에는?”“둘째 도련님을 밀어냈습니다.”“누가요?”“내가.”“그 뒤에 약을 달이셨습니까?”유모가 약잔을 물에서 꺼냈다. 잔 밑으로 물이 똑, 똑 떨어졌다.문밖에는 정윤이 서 있었다. 문혜가 낮 약을 들려 보냈으나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기둥 뒤에 붙어 있었다. 유모는 아이의 기척을 알지 못했다. 소의는 창호에 비친 좁은 그림자를 보았지만 부르지 않았다.“정안 부인이 약을 청했습니까?”“사흘을 못 잤습니다.”“얼마나 달라고 하셨습니까?”“평소대로.”유모는 잔을 내려놓다가 탁자 모서리에 부딪쳤다. 딱, 마른 소리가 났다.“평소보다 진하게 달라고 했습니다.”그가 말을 고쳤다.그날 밤 정안은 베개를 세 개나 받치고도 눕지 못했다. 기침이 올라올 때마다 마른 어깨가 들썩였고, 숨을 들이마실 때 목 안에서 가느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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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잠긴 다향원

드르륵—쿵.정윤이 방 안에서 탁자를 밀어 문을 막았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회유가 한 걸음 물러나자, 다향원 앞에는 문을 부수겠다는 사람부터 몰려들었다.외원 사내 둘, 뜨거운 물을 든 시비, 의원을 부르러 뛰어가다 되돌아온 하인. 회유는 한 사람씩 물러가라 해놓고도 정작 누구를 남길지 정하지 못했다.“아이가 안에서 쓰러지면 어쩌자는 거냐?”“그러니 문을 여셔야지요.”“내가 그걸 몰라서 묻느냐?”회유가 문고리를 당겼다. 안쪽 탁자가 바닥을 긁으며 조금 움직였다. 정윤은 그 소리에 놀라 탁자를 다시 밀었다.끼익, 쿵.“아버지도 가세요!”회유의 손이 문고리에서 떨어졌다.문혜는 북부엌에서 아이의 밥과 약을 새로 받아 왔다. 안뜰을 건너는 동안 사람들이 붙어 같은 말을 했다. 약에 또 독이 들면 어쩌느냐, 유모를 묶어야 하지 않느냐, 문을 깨면 노부인이 화내지 않겠느냐. 문혜는 누구에게도 답하지 않았다.다향원에 이르자 상부터 문 앞에 내려놓았다.“다들 나가세요.”“부인, 문을 부수는 편이…….”“부수면 오늘 밤 어디서 재울 건데요?”사내가 방 안을 가리켰다가 손을 내렸다.“묵화소원에…….”“그 방에도 못 돌아가겠다고 하면요?”문혜는 회유도 보았다.“노야께서 계시면 문을 안 엽니다.”회유가 무슨 말을 하려다, 안에서 짧은 기침이 들리자 입을 다물었다. 그는 백차당 쪽으로 가는 대신 회랑 끝에 서 있었다. 문혜가 다시 보자 그제야 기둥 뒤로 물러났다.사람들이 빠지니 뜰이 갑자기 넓어졌다.홍 유모만 계단 아래에 남았다. 무릎에 쏟은 약물이 말라 치마가 검게 굳어 있었다.“도련님.” 문혜가 문 너머로 말했다. “밥은 왼쪽에 놓겠습니다. 약은 오른쪽입니다.”대답이 없었다.“약은 유모가 달이지 않았습니다. 북부엌에서 의원이 보는 앞에서 달였습니다.”“부인도 보셨습니까?”“아니요. 나는 여기 왔습니다.”문 안이 조용해졌다.문혜는 자기 말이 또 잘못되었다는 것을 늦게 알았다.“은침은 댔습니다.”“그걸 물은 게 아닌데.”정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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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숙부가 바라던 자리

“뱉지 마. 삼켜. 한 모금만 더.”정윤이 서쪽 곁채 문을 열자, 회창은 여섯 살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약을 먹이고 있었다.아이가 고개를 젓자 탕약이 턱을 타고 속옷까지 흘렀다. 회창의 잘린 손가락 사이로 약숟가락이 미끄러졌다.정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따라오겠다는 시비에게 그림물감을 가져오라 하고 반대쪽 회랑으로 보냈다. 밤새 되뇐 말은 하나뿐이었으나, 숙부가 제 아이의 젖은 턱을 닦는 모습을 보자 그마저 바로 나오지 않았다.“아버지 싫어!”“나도 네 약 먹이기 싫어. 입 벌려.”“싫어!”아이가 몸을 비트는 바람에 약그릇이 뒤집혔다. 회창은 욕을 삼키며 젖은 옷부터 벗겼다. 문 앞의 정윤을 보고는 오히려 성을 냈다.“뭘 서서 봐? 나가 있어.”정윤은 움직이지 않았다.“숙부가 나를 죽이려 했습니까?”회창의 손에서 마른 속옷이 떨어졌다.안쪽에서 소란이 달려왔다. 그는 정윤을 먼저 내보내지도, 남편을 먼저 막지도 않았다. 아이에게 새 옷을 입히고 젖은 이불을 걷었다.“애 앞에서 할 말이냐?” 회창이 낮게 말했다.“애 앞에서 하면 안 되는 일을 했습니까?”“그런 말 누가 가르쳤어?”“아무도요.”“아무도 안 가르쳤는데 열네 살짜리가 사람을 살인자로 몰아?”정윤은 소매에서 빚문서를 꺼냈다. 소란이 돌려주지 않고 보관해 온 것이었다. 회창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그걸 왜 네가 갖고 있어?”“내 이름이 있으니까요.”“네 이름이 어디 있다고…….”회창은 문서를 낚아채다 잘린 손가락으로 종이 끝을 놓쳤다. 정윤이 얼른 뒤로 물러났다.“차밭 지분을 담보로 돈을 빌렸잖아요. 내가 없어지면 숙부 아들이 후사가 되고.”“그건 내가 빚쟁이한테 한 말이지, 너한테 한 일이 아니야.”“다릅니까?”“다르지!”아이의 어깨가 움찔했다. 소란은 약 묻은 수건으로 아이 입가를 닦다가 남편을 보았다. 회창은 목소리를 낮추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네 해 전에는 양자 문서를 빼앗으려 했다. 그래, 네가 안 왔으면 우리 애가 후사가 됐을 거라고도 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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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친정에서 온 상자

문혜는 송수당 앞뜰의 상자 열세 개를 두 번 세었다.“더 있을 텐데.”옷상자 일곱, 약상자 넷, 비단을 넣은 긴 함 둘이었다. 정원후부 동쪽 창고에 들어 있던 것 가운데 나씨 집안 표지가 찍힌 것만 골라낸 수였다.창고를 맡은 시비가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지난겨울 솜옷은 이미 나누어 입었고, 여름 비단 한 필은 노부인께서 제사 휘장으로…….”“그것도 가져오세요.”“이미 잘랐습니다.”“자른 채로요.”시비가 송수당 안을 보았다. 문혜는 기다리지 않고 첫 약상자의 뚜껑을 열었다.툭.유소란이 가져온 빈 약갑이 상자 안의 것과 나란히 놓였다. 뚜껑에 찍힌 박쥐무늬, 귀퉁이에 칠한 누런 옻, 묶었던 끈의 빛깔까지 같았다.뜰에 모인 시비들의 말이 한꺼번에 터졌다.“그 약갑은 북부엌에서도 봤습니다.”“아니야, 저건 부인 환약이야.”“아이 쓰러진 날에도 나씨 댁 수레가 왔잖아.”“그걸 부인께 말씀드렸더니 입 다물라 한 사람이…….”“내가 언제 입을 다물라 했어? 소문부터 내지 말라 했지!”문혜가 손을 들었지만 아무도 바로 조용해지지 않았다. 옷상자를 나르던 사내가 앞사람 발뒤꿈치를 밟아 상자 하나를 놓쳤다. 쿵, 뚜껑이 벌어지며 붉은 치마와 연둣빛 윗옷이 흙바닥으로 쏟아졌다.“그건 안 됩니다!”시비 둘이 달려들어 옷부터 안았다. 철마다 친정에서 보내온 새 옷이었다. 아이를 낳지 못한 딸이 시집에서 초라해 보이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온 것들이었다.약상자 안에는 아들을 점지한다는 환약이 달마다 묶여 있었다. 어느 봉지는 뜯지도 않았고, 어느 봉지는 반만 남았다. 문혜는 그 가운데 자기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이것도 부인 약입니까?” 소란이 물었다.“처음에는 그랬습니다.”“그다음에는요?”“내가 아이를 못 낳으면 노야께 첩을 들여야 한다고 했어요. 친정에서 보낸 사람이 부엌까지 가서 떠들었고요.”말을 마친 문혜는 소란을 보았다.“그런데 형님은 빚문서를 네 해나 갖고 계셨지요.”소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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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자물쇠를 사는 두 사람

빈 멍에가 남시 장날의 인파를 비집고 들어왔다.“비켜요! 사람이 다쳤습니다!”한쪽 눈이 부은 수레꾼이 멍에 뒤에서 비틀거렸다. 정원후부에서 나씨 저택으로 가다 사라진 수레의 마부였다.노탁은 곡우에게 잠깐 기다리라 하고 사람들 사이를 거슬러 갔다. 북원로 갈림길에서 사내 셋에게 얻어맞았고, 상자 실은 수레는 북쪽으로 사라졌다는 말까지 들은 뒤 순라 포졸에게 수레꾼을 넘겼다.돌아보니 곡우는 이미 세 걸음 앞에 있었다.남시 장날에는 가만히 서 있는 사람도 떠밀려 갔다.약초 수레와 채소 광주리가 통명가를 반씩 차지했고, 닭을 안은 아이가 울며 어미를 찾았다. 곡우는 사람 틈을 헤집으며 뒤따르는 노탁의 소매를 세 번이나 잡아당겼다.“대리시 포졸이 길 하나를 못 따라옵니까?”“앞에 사람이 많잖소.”“내 뒤에도 많아요.”“그러니 놓치지 말라고 잡고 있소.”노탁의 손은 곡우의 장옷 끝을 쥐고 있었다. 곡우는 그 손을 보다가 말없이 옷자락을 빼냈다.노탁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라 손만 들고 섰다. 그사이 엿장수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첫 번째로 멈춘 곳은 비녀전이었다. 노탁이 은비녀 하나를 들어 보자 곡우는 값을 물었다.“세 냥.”“은 한 덩이를 머리에 꽂습니까?”“세공값이 있지요.”노탁이 비녀를 내려놓았다. 장수가 두 냥 반까지 불렀으나 그는 이미 세 걸음이나 물러나 있었다.곡우가 따라나와 팔짱을 꼈다.“나한테 쓸 돈은 아깝습니까?”“아니오. 오늘 사려던 게 따로 있어서.”“비녀보다 비싼 겁니까?”“그건 아닌데.”“그럼 더 아깝다는 말이잖아요.”노탁은 아니라고 두 번 말하고 나서야 설명을 포기했다.그가 데려간 곳은 자물쇠전이었다. 벽에는 주먹만 한 쇠통부터 아이 손바닥만 한 놋쇠 자물쇠까지 줄줄이 걸려 있었다. 곡우의 얼굴이 구겨졌다.“이걸 나한테 줍니까?”“청묵재 뒷문 빗장이 약하다고 했잖소.”“그러니까 청묵재에 주는 거지, 나한테 주는 게 아니잖아요.”“그대가 청묵재에…… 아니, 청묵재가 그대 것이기도 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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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떠나기 전의 젖은 겉옷

노탁의 옷깃은 밤비에 흠뻑 젖었다.“그만 따라오라고 했죠.”곡우가 반월주가 뒷문으로 들어가며 빗장을 걸었다. 노탁은 처마 아래에서 무어라 해명하려다 안에서 자물쇠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입을 다물었다. 상을 나르던 옥선이 그를 한 번 보고는 우산 대신 빈 술병을 내밀었다.“마시려면 돈 내고, 빌려 쓰려면 내일 돌려줘.”노탁은 술병도 받지 않고 돌아갔다.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반월주가 처마 끝에서는 물이 줄줄 쏟아졌고, 앞방 천장에서는 그보다 가는 물줄기가 대야 안으로 떨어졌다.톡. 톡. 토독.옥선은 영업이 끝난 상을 세 번째 닦고 있었다.“그만 닦아. 나뭇결 벗겨지겠어.”산해가 말했다.“벗겨지면 새 상 사주고 가든가.”“내가 왜 가게 상을…….”옥선이 젖은 행주를 탁 내려쳤다. 산해는 말끝을 삼켰다.그는 내일 새벽 북문을 나가는 정주행 표행에 들기로 했다. 한 달 안에 돌아오겠다고 하지 않았다. 길은 봄비에 무너질 수 있고, 강을 건너는 나룻배는 바람에 묶일 수 있으며, 표행은 돈을 더 주는 짐을 만나면 사흘쯤 돌아갈 수 있었다.“그래서 언제 오는데?”“순조로우면 스무닷새.”“안 순조로우면?”“달을 넘길 수도 있고.”“죽으면?”“그 말을 꼭 지금 해야겠어?”“떠난다는 놈이 날짜도 안 주니까 그렇지.”옥선은 상을 또 닦았다. 십칠 년 전에도 산해는 가난한 표행꾼이라 자리를 잡을 수 없다고 했다. 석 달만 기다리라 해놓고 서문 밖으로 사라졌다. 옥선은 석 달을 기다렸고, 반년을 기다렸고, 첫 남편에게 시집가던 날 아침까지도 북문 쪽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나는 돈이 없어서 못 돌아왔어.” 산해가 말했다.“서찰 한 장을 보낼 품도 없었어?”“글을 써줄 사람 앞에서 할 말이 없었지.”“없으면 없다고 쓰면 되잖아.”“그때는 돌아갈 낯이 생긴 다음에 쓰려고…….”“십칠 년 동안 낯을 빚었냐?”산해는 대답하지 못했다.쿵쿵쿵!닫은 문을 취객이 두드렸다.“한 잔만 더! 옥선 아씨, 안에서 웃는 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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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밤이 지나도 여는 문

옥선은 해가 뜬 뒤에야 눈을 떴다.쿵쿵쿵!“오늘 장사 안 해요?”“주모가 술을 다 마셨나!”옥선은 머리부터 대충 틀어 올리고 나갔다. 문을 여는 순간 단골 셋이 안으로 쏟아졌다.“떠들 거면 술값 두 배야.”“얼굴이 벌건데 열이라도 나셨소?”“네 입에 든 이가 빠질 열은 있다.”손님은 웃으며 찬 자리를 골라 앉았다. 옥선은 술독 마개를 잘못 끼웠다가 술이 바닥으로 찔끔 새는 것을 보고 욕을 했다. 같은 상을 두 번 닦고, 주문하지 않은 탕까지 내놓았다.산해는 가게 뒤 지붕에 올라가 있었다.탕, 탕.망치 소리가 날 때마다 처마의 먼지가 떨어졌다. 옥선이 고개를 들자 산해는 깨진 기와를 하나 들어 보였다.“어젯밤 이게 문제였어.”“어젯밤 문제는 네가 늦게 온 거였지.”“십칠 년 늦은 걸 오늘 다 갚으라고?”“오늘 떠나는 놈이 무슨 흥정을 해.”손님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옥선은 숨길 생각이 없었고, 산해는 지붕에서 내려오지 못했다.소의는 찻물을 얻으러 왔다가 옥선 목 아래의 붉은 자국을 보았다. 시선이 잠깐 머물렀지만 아무 말 없이 주전자를 내밀었다.옥선이 먼저 목깃을 여몄다.“뭘 봐?”“안 봤습니다.”“봤잖아.”“물을 보았습니다.”“그 소경 판결문은 언제 돌려줄 거냐?”소의의 손이 주전자 손잡이에서 미끄러졌다.“왜 갑자기 그 말입니까?”“물을 봤다며. 나도 종이 얘기한 거야.”옥선은 이겼다는 얼굴로 돌아섰다가 술독 마개를 또 반대로 끼웠다. 소의는 말없이 바로잡아 주었다.산해가 지붕에서 내려왔을 때에는 출발할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젖은 기와 조각을 마당에 쌓고, 표행 짐을 앞방으로 가져왔다. 옥선은 음식 보따리보다 노잣돈을 먼저 세었다.“정주까지 열이틀이면 간다며.”“길이 좋으면.”“어제는 스무닷새면 돌아온다며.”“가는 데 열이틀, 오는 데 열이틀.”“그럼 스물나흘이잖아.”“중간에 자야지.”옥선이 노잣돈 주머니를 그의 가슴에 던졌다.소의는 패쪽의 이름을 두 번 읽었다.“직접 보았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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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멈춘 차 수레

“비켜! 상자 젖는다!”“수레부터 빼!”“뒤에 배가 들어온다니까!”백류수운창·남창은 이른 아침부터 길이 막혔다.운주 짐배에서 내린 차를 옮겨 실은 수레 여덟 대가 동쪽 차선창 앞에 꼬리를 물었다. 강에서는 뒤늦게 닿은 배 두 척이 배다리를 차지하려 고함쳤고, 서쪽 곡물선창에서는 노새 한 마리가 놀라 자루를 밟고 넘어졌다.쿵! 우지끈!곡물 자루가 터졌다. 좁쌀이 젖은 널판 위로 쏟아지자 짐꾼들이 모자와 소쿠리로 퍼 담았다. 그 위로 관첩을 읽는 수운 서리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세 줄도 가지 못해 야유에 묻혔다.“대리시는 세굽이차원에서 나온 차와 그 판매 대금을…….”“차가 죄를 지었소?”“돈은 물 건너 상인이 갖고 있는데 왜 우리 짐을 묶어!”“조용히 하라!”군졸이 창 자루로 바닥을 쳤다. 탕, 소리는 컸지만 아무도 조용해지지 않았다.경연은 검량대 위에 서서 수레와 배를 보았다. 검은 관복의 띠와 소매는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발밑에는 젖은 진흙이 튀어 있었지만 닦지 않았다.안왕 이름으로 모인 돈은 세굽이차원의 정상 거래 대금과 같은 장부에서 움직였다. 어느 상자 값이 노동자 품삯으로 가고, 어느 상자 값이 공주부 창고를 돌아 장은에게 닿는지 아직 나뉘지 않았다.“여덟 대 전부 봉한다.”경연의 말에 군졸들이 붉은 줄을 풀었다.설난정이 첫 수레 위로 올라갔다.“줄 치지 마세요! 비부터 막아요!”상자 겉은 기름 먹인 종이로 싸였으나 한 귀퉁이가 찢어져 있었다. 빗물이 스미면 덖어 말린 첫물차의 향이 죽었다. 향이 죽은 차는 상인이 값을 절반도 주지 않았다.난정은 삿자리를 끌어당겼다. 군졸 하나가 봉인할 물건에 손대지 말라며 팔을 잡자, 그는 젖은 삿자리를 군졸 얼굴에 던졌다.“그 줄로 비도 묶어보시죠!”차 상인은 관첩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털었다.“오늘 검량이 안 되면 안 삽니다. 다른 차를 받지.”“약조했잖소!” 조경년이 수레 아래에서 소리쳤다.“관청에 묶인 물건을 누가 사?”상인이 돌아서자 짐꾼들이 길을 막았다. 오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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