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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붉은 혼서: Chapter 81 - Chapter 90

203 Chapters

81화. 네 해 늦은 서찰

첫 번째 붉은 혼서는 쇄성각 가장 안쪽 궤에 들어갔다.장은은 옥사로, 아이를 안은 여자는 대리시 보호방으로 옮겨졌다. 어느 쪽도 그 종이의 주인을 정하지 못했다. 예부는 가짜 관인을 폐기하라 했고, 호부는 그 전에 일곱 여자의 호적부터 가져오라 했다.사흘 동안 경연은 청묵재에 오지 않았다.소의는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대리시 소경이 사건 밖의 일로 세필골을 찾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런데 해가 기울 때마다 묵정 계단을 오르는 장화 소리에 붓끝이 한 번씩 멈췄다.네 번째 날, 문을 연 사람은 경연이 아니었다.먼 길을 온 여자가 흙 묻은 장화를 벗지도 않고 들어섰다. 볕에 그을린 얼굴, 낡은 갈색 겉옷, 손톱 가장자리에 밴 푸른 차물이 먼저 보였다. 여자는 자기 이름보다 물었다.“올봄 연경의 첫물차 값이 얼마였습니까?”곡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사람을 찾아온 겁니까, 차를 팔러 온 겁니까?”“둘 다요. 값을 모르고 사람부터 믿으면 밭을 잃습니다.”여자는 설난정이라 했다. 운주 세굽이차원의 공동 상속인이며, 네 해 전에 죽은 설정안의 동생이었다.옥선은 길손의 꼴을 보고 말없이 더운 물부터 가져왔다. 난정은 대야에 손을 씻으면서도 찻집 간판과 골목의 수레 수를 물었다. 운주에서는 비가 한 차례 더 오면 첫물 값이 오를 것이고, 노평나루 창고가 비면 운송비가 두 배가 된다고 했다.“먼저 좀 먹어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곡우가 반월주가에서 가져온 밀떡을 내밀었다.난정은 사양하지 않았다. 두 장을 연달아 먹고 마지막 한 장은 보퉁이에 넣었다. 오는 길 역참에서 말먹이 값이 올라 은전을 거의 다 썼다며, 오늘 묵을 곳부터 싸게 구해달라고 했다. 귀족가의 혼수를 찾으러 왔다는 사람의 신발 밑창에는 새 짚이 덧대어져 있었다.그녀가 보퉁이에서 서찰을 꺼냈다. 겉봉은 여러 번 젖었다 말랐고 봉한 자리는 새것처럼 단단했다. 난정은 종이를 살피라고 내놓지 않았다. 소의 앞에 펼친 뒤 곧장 가운데 문장을 짚었다.“언니가 죽기 닷새 전에 보냈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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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죽은 며느리의 제삿상

정원후부의 처마에서는 빗물이 샜다.하인들은 제사당 바닥에 떨어지는 물을 놋대야로 받았다. 똑, 똑. 위패 앞 향 연기보다 그 소리가 먼저 방을 채웠다.정 노부인은 새는 지붕을 올려다보지 않았다.“동쪽 끝 대야를 반 자 옮겨라. 절할 자리에 물이 튄다.”그녀 앞에는 설정안의 네 번째 기일상이 차려져 있었다. 생선 머리는 동쪽, 과실 꼭지는 위패 쪽으로 향했다. 상 아래에는 후부 식솔들이 먹을 잡곡 자루 수가 적힌 장부가 놓였다. 죽은 며느리의 제사와 산 사람 백여 명의 끼니를 같은 손이 셌다.나문혜는 마지막 탕을 직접 들고 왔다.새벽부터 북부엌 솥은 쉴 새 없이 끓었다. 제사에 올릴 생선은 비늘이 벗겨지지 않아 두 번 손질했고, 빗물에 젖은 장작은 푹푹 연기만 뿜었다. 부엌아낙 하나가 눈물을 훔치자 곁의 사람이 양파 탓이라고 놀렸다. 웃음은 문혜가 들어서자 금세 잦아들었다.문혜는 탄 전병을 따로 골라냈다. 버리라는 말 대신 행랑 아이들 아침상에 내라고 했다. 부엌 살림을 아끼려는 뜻이었지만, 사람들은 죽은 적처의 제삿날에도 체면을 모른다고 수군거렸다.정회유가 재혼한 지 두 해가 되었지만 하인들은 여전히 그녀를 새 부인이라 불렀다. 이름을 붙이면 전처와 나란히 놓일까 두려운 사람들처럼.“설씨 부인은 맑은 탕을 좋아하셨다는데 고기가 너무 많지 않나.”나이 든 시비가 작게 말했다.“새 부인은 그런 것도 모르지.”문혜는 들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탕그릇 가장자리를 닦고 제자리에 놓았다. 정안을 본 적 없는 여자가 정안이 좋아했다는 음식으로 네 번째 제삿상을 차렸다.정윤은 위패 앞에 엎드렸다.열네 살 소년의 관복은 어깨가 컸다. 내년까지 입히겠다며 크게 지은 옷이었다. 이마가 돗자리에 닿을 때마다 소맷자락이 손등을 덮었다.“양모께 술을 올려라.”노부인의 말에 정윤이 잔을 들었다.그는 정안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병상 옆 쓴 약 냄새와 이불 밖으로 나온 마른 손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집안사람들은 그가 정안의 마지막 소원이라 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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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혼수가 먹여 살리는 집

설난정은 정원후부 정문 앞에서 한 시진을 기다렸다.문지기는 상중인 집에 소란을 들일 수 없다 했고, 난정은 문기둥 아래 주저앉아 차떡을 씹었다. 먼 길에서 굳은 떡은 이로 잘리지 않았다. 그녀는 물로 불려가며 끝까지 먹었다.정회유가 돌아왔을 때 난정은 빈 보퉁이까지 접어 무릎에 올려둔 뒤였다.“오랜만이군.”“네 해 만에 들을 말이 그것뿐입니까?”회유는 그녀를 외원 서재로 들였다. 젊은 시절 난정은 정안을 따라 이 집 부엌까지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이제 이문 앞 하인은 그녀의 신을 어느 방향으로 놓아야 할지도 몰랐다.난정은 앉기도 전에 말했다.“언니의 혼수를 돌려주십시오. 세굽이차원과 노평나루 창고 지분까지 전부.”“돌려주면 누구에게 줄 생각이지?”“설씨 집안에 돌려놓고 내가 맡습니다.”“네가 떠난 뒤 밭을 지킨 사람이 누군지는 아나?”회유가 장부 세 권을 상 위에 놓았다. 난정은 받지 않았다. 그가 직접 자기 손에 건네지 않는 한, 네 해 동안 한 번도 마주 보지 않은 사람의 셈을 대신 읽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창밖으로 기와 조각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놀란 말이 차고에서 발을 굴렀다. 난정은 정문에서 보았던 갈라진 담과 덧댄 수레바퀴를 떠올렸다. 언니가 시집오던 날 붉은 비단이 깔렸던 집은 이제 비를 막을 기름종이도 아껴 쓰고 있었다.“후부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알리지 않았습니까?”“알리면 돌아왔을까?”난정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네 해 동안 그녀도 차밭을 외면했다. 정안과 닮았다는 말을 듣기 싫어 먼 주의 찻집들을 돌았고, 수확철에도 고향 쪽 길을 피해 갔다.“지난해 차밭 수확이 몇 근이었습니까?”“상등차 이천삼백 근.”“거짓말.”회유의 눈썹이 움직였다.“봄에 우박이 왔습니다. 많아야 천팔백 근이에요. 모자란 오백 근을 후부 장부에 먼저 적고 돈을 당겨 썼군요.”외원 문밖에서 장작을 나르던 하인이 걸음을 늦췄다. 회유가 문을 닫았다.“그 돈으로 이 집만 먹였다고 생각하나?”그는 장부를 펼쳐 난정 쪽으로 돌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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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같은 날 다른 유언

소의는 서찰 두 장을 서로 포개지 않았다.한 장은 난정 앞에, 한 장은 회유 앞에 놓았다. 종이와 먹을 비교할 생각은 없었다. 죽어가던 여자가 누구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달랐다.“두 분 모두 이 서찰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십니까?”난정은 아니라고 했고 회유도 아니라고 했다.“그럼 정안 부인이 마음을 바꿨을 수 있습니다.”“언니는 차밭 일에서 마음을 바꾸는 사람이 아닙니다.”“정안은 아이를 버릴 사람도 아니었소.”둘은 죽은 사람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정안을 붙들었다. 소의는 다투게 두었다. 난정은 수확량을 말했고 회유는 아이가 앓던 밤을 말했다. 말이 길어질수록 같은 달의 생활이 드러났다.곡우는 벽에 빈 종이 세 장을 붙였다. 정안이 한 일을 날짜대로 적고, 확실하지 않은 것은 비워 두었다. 난정은 차밭 장부가 올라온 날을 기억했으나 아이가 앓기 시작한 날은 몰랐다. 회유는 아이의 열이 내린 새벽은 기억했지만 아내가 조경년을 만난 시각은 알지 못했다.한 사람이 모든 것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빈칸은 서로의 말을 들어야만 채워졌다.정안은 낮에는 차밭에서 온 장부를 받았다. 밤에는 열병을 앓던 정윤을 자기 방에 재웠다. 의원에게 남은 날을 물었고, 유모에게 아이가 무슨 그림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차밭 감독 조경년에게는 사람들을 지켜달라 했다.앞문 빗장이 울린 것은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경연이 혼적청 인계첩을 들고 들어왔다. 백류나루 이후 처음으로 찾아온 그는 찢어진 소매도, 그날의 입맞춤도 묻지 않았다.“정안 부인의 사망 기록과 양자 관첩을 가져왔습니다.”소의가 자리를 내주었다. 경연은 지난번 마시지 못한 잔이 있던 자리에 앉았다. 차가 뜨거웠다. 그는 잔을 두 번 들었다가 내려놓았다.“그날은…….”경연이 입을 열었다.소의의 손이 장부 위에서 멈췄다.그때 곡우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뒤에는 정원후부에서 나온 늙은 의원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사람 데려왔어요. 이분이 정안 부인을 마지막 달에 세 번 보셨답니다.”경연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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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이유를 만들어 찾아오는 사람

경연은 위촉장 첫 줄을 세 번 고쳤다.민간 필사인 진소의를 대리시 임시 감식인으로 둔다.첫 번째 문장에는 사건 이름이 빠졌고, 두 번째에는 맡길 문서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었다. 세 번째에는 품삯과 출입 가능한 방까지 적었다.심조문은 말린 귤껍질을 씹으며 세 장을 차례로 읽었다.바깥 큰 방에서는 서리들이 점심 종이 울리기만 기다렸다. 먹이 언 손을 녹이는 화로는 하나뿐이었고, 새 자리를 만들려면 탁자부터 들여야 했다. 조문은 위촉장보다 먼저 월별 등잔기름 장부를 끌어당겼다.“사람 하나가 늘면 불 하나, 밥 한 그릇, 지켜볼 눈 둘이 필요하네.”“제 방의 등잔을 함께 쓰겠습니다.”“그건 안 되지. 자네 방에 민간 여자를 두면 사건보다 소문이 먼저 판결될 테니.”경연은 반박하지 못했다. 관청 안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일과 안전하게 머물 자리를 얻는 일은 서로 다른 문제였다.“상속 다툼은 대리시 일이 아닐 텐데.”“처형된 진문재의 이름으로 양자 관첩이 접수됐습니다. 관인 도용과 관청 문서 위조입니다.”“그래서 필사인까지 관청에 들이겠다?”“혼적청 기록과 당사자의 말을 함께 볼 사람이 필요합니다.”조문은 제자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경연은 판결문을 내밀 때보다 더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시승의 서명도 받아오게. 자네가 혼자 줄 수 있는 패가 아니야.”허락이었다.경연은 당일 안에 시승의 서명을 받았다. 품삯은 관청 밖에서 부른 필사인에게 적용하는 법례로 정했고, 쇄성각 출입은 금했다. 소의가 거절할 까닭을 하나씩 없앨수록 사적인 뜻도 함께 사라지는 문서가 되었다.시승은 도장을 찍기 전에 소의가 맡을 책임도 한 줄 덧붙였다. 잘못 감식한 문서로 사람이 벌을 받으면 관원이 아니라 감식인도 함께 문책한다는 조항이었다. 경연은 그 줄을 지워 달라 하지 않았다. 권한만 주고 책임을 감추면 소의가 더 모욕으로 여길 것을 알았다.저녁에는 배명주가 백목소원에 들렀다.그녀는 서재 화로에 던져진 초안 두 장을 집게로 꺼냈다. 가장자리만 그을린 문서에 소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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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열네 살 가장

정원후부에서는 열네 살 소년을 도련님이라 불렀다.하지만 정윤이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은 한 푼도 없었다.아침상을 물리고 나면 정 노부인께 문안을 드리고, 사부에게 경서를 읽고, 오후에는 차원에서 올라온 장부를 한 장씩 베껴야 했다. 먹은 쌀이며 신은 가죽신까지 모두 누이의 혼수에서 나왔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행랑 아이들은 장날마다 엽전을 한두 닢씩 받아 엿을 샀다. 정윤은 그 아이들에게 값을 물을 수는 있어도 함께 줄을 설 수는 없었다. 후부의 양자가 하인 자식과 어울렸다는 말이 송수당에 들어가면 아이들이 대신 꾸지람을 들었다.그래서 그는 사람보다 지붕과 나무를 많이 그렸다. 종이 속에서는 어디로 가든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도련님 붓이 또 멎었습니다.”늙은 사부가 헛기침했다.정윤은 장부 위로 몸을 숙였다. 먹을 진하게 갈아 숫자 하나의 꼬리를 길게 뺐다. 삼십 관이 삼십일 관으로 변했다. 그 한 관이면 남시의 화방에서 본 석청 안료와 가는 붓 두 자루를 살 수 있었다.손바닥에 땀이 찼다.대단한 도둑질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 집에서는 소년이 그림 한 장을 그리고 싶어 하는 일조차 장부를 속여야 가능한 사치였다.그날 저녁, 문혜가 장부를 들고 묵화소원으로 왔다.정윤은 탁자 앞에 꼿꼿이 앉았다. 창호 밖 대숲이 사각사각 흔들렸다. 문혜는 틀린 숫자에 붉은 점을 찍지 않았다. 꾸짖지도 않았다. 다만 장부를 덮고 작은 주머니 하나를 내려놓았다.툭.안에서 붓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남시 것은 털이 잘 빠진다. 동시의 진가 화방으로 가거라.”정윤의 목덜미가 붉어졌다.“제가 무엇을 하든 부인께서 무슨 상관입니까.”문혜의 손끝이 잠시 멎었다.그 아이가 자신을 어머니라 부른 적은 없었다. 문혜도 청한 적이 없었다. 둘 사이에는 호칭보다 먼저 쌓인 것이 너무 많았다.“내 상관은 아니지.”그녀는 주머니를 도로 가져가지 않았다.“다만 네가 숫자를 고치면 장방의 아랫사람이 대신 매를 맞는다. 그림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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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대리시의 첫날

대리시 서쪽 협문이 열리자 안에서 묵은 종이와 젖은 돌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소의는 허리패를 두 번 확인하고 문턱을 넘었다. 정식 관원도, 죄를 묻기 위해 불려 온 백성도 아닌 자가 그 문으로 들어가는 일은 드물었다.“임시 감식인?”고환이 턱을 쓸었다.“대리시에 별 해괴한 자리가 다 생기는군.”주변 서리들이 붓을 놀리면서도 귀를 세웠다. 소의는 맞받지 않았다. 임명장을 펴서 고환 앞에 놓았다.“제가 볼 문서와 쓰지 못할 곳을 정해 주십시오.”고환은 한마디쯤 더 비꼬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싸울 준비를 하고 온 사람보다 규칙을 먼저 묻는 사람이 오히려 다루기 어려웠다.“미결방 장부는 열람하지 마시오. 죄수와 단둘이 마주해서도 안 되고.”“알겠습니다.”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뒤에서 쿵, 나무 궤짝 놓는 소리가 났다.“길을 좀 비키시지요.”기원이 한쪽 팔을 붕대로 감은 채 서 있었다. 그는 여전히 감시를 받았고 관직도 되찾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숨겨 둔 문서를 찾아내기 위해 며칠 동안 검사방 곁방에 붙들려 있었다.소의가 궤짝을 받아 들자 그가 낮게 말했다.“붉은 끈은 오늘 들어온 것, 푸른 끈은 기한이 지난 것입니다. 겉에 적힌 날짜만 믿지 마십시오. 서리들은 급하면 빈 장에 먼저 도장을 찍어 둡니다.”“왜 제게 알려 줍니까?”“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왔다가 또 누군가에게 쓰이는 꼴은 보기 싫어서요.”그는 웃지 않았다. 소의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기원의 잘못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쓸 만한 말까지 버릴 까닭도 없었다.검안방은 생각보다 좁았다. 벽장에는 나무패와 봉한 약병이 빽빽했고, 가운데 탁자는 다리 하나가 짧아 덜컹거렸다.소의가 가져온 먹상자를 올리자 탁자가 다시 기울었다. 노탁이 접은 종이를 괴려 하자 그녀가 손목을 잡았다.“사건 종이를 탁자 다리에 넣을 셈입니까?”“빈 종이입니다.”“한쪽에 접수 도장이 찍혀 있어요.”노탁은 얼른 빼냈다. 곡우가 문가에서 혀를 찼다. 대리시에서 일한 지 오래된 사람도 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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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장날의 약속

남시 장날이면 길부터 좁아졌다.수레바퀴가 돌바닥을 덜커덩 긁고, 엿장수의 목청과 닭 우는 소리가 지붕 밑에서 뒤엉켰다. 기름 솥에서는 밀전병이 지글지글 익었다. 향신료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매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곡우는 평소보다 깨끗한 청색 저고리를 입었다. 소매 끝도 터지지 않았다.노탁은 그 모습을 세 번 보고도 모른 척했다.노탁도 관청에서 입던 낡은 겉옷 대신 짙은 회색옷을 골랐다. 어머니가 목깃을 두 번 털어 주며 어디를 가느냐 묻자 약을 사러 간다고만 했다. 곡우가 볼까 봐 신코의 흙까지 닦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어머니 약부터 보자고 했지?”“그러니까 따라온 겁니다. 내가 언제 놀러 가자 했습니까?”“나도 그런 말 안 했는데.”둘은 나란히 걷지 않았다. 사람이 몰릴 때마다 어깨가 부딪쳤고, 그때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다른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비켜서 오히려 더 자주 부딪쳤다.약재상에서 곡우는 노탁 어머니의 기침약을 한 봉씩 풀어 냄새를 맡았다. 노탁은 주인의 표정부터 살폈다.“이 진피는 지난달 것보다 눅눅한데 같은 값을 받습니까?”“어허, 젊은 사람이 눈은 밝아 가지고.”“눈이 밝은 게 아니라 주머니가 가벼운 겁니다.”노탁이 값을 깎는 동안 곡우는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돌렸다.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활자방이었다. 노탁은 나무 활자 한 벌을 들어 보고 혀를 찼다. 붉은 혼서의 피해 사실을 값싸게 찍어 장터에 돌리려면 글자 수가 더 필요했다.“이 빠진 글자가 스물셋입니다.”“그래서 싸게 내놓았지.”“이를 빠뜨렸으면 죽값을 받아야지, 고깃값을 부르면 쓰나.”주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탁도 지지 않고 손가락을 꼽았다. 곡우는 옆에서 활자를 하나씩 맞춰 보다가 결국 필요한 글자 두 상자를 반값에 얻어 냈다.“약값보다 더 아꼈군요.”노탁이 으스댔다.“그럼 약재상에서도 나를 앞세우지 그랬어요.”“아픈 사람 먹는 걸로는 흥정이 잘 안 됩니다.”그 말이 뜻밖에 부드러워 곡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노탁은 공연히 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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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두 번째 아내가 지키는 것

문혜는 정윤의 저녁상 앞에 먼저 앉아 있었다.소년은 문턱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혜의 손에는 흰 가루가 든 종지와 은수저가 놓여 있었다.“무엇을 넣은 겁니까?”정윤이 물었다.“먹어도 되는 것.”“지난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문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약탕에서 국 한 숟갈을 떠 종지의 가루와 섞었다. 은수저가 검게 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 국을 먼저 마셨다.“이제 됐느냐?”정윤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독이 늦게 퍼지면요?”문혜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아이는 겁에 질리면 더 모진 말을 골랐다. 자신이 먼저 상처 입히면 버림받는 순간이 덜 아플 거라 믿었다.“그러면 내일 아침 내가 죽겠지.”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그때 다시 물어라.”문혜가 방을 나가자 정윤은 한참 뒤에야 밥상 앞에 앉았다. 국에서는 감초와 녹두 냄새가 났다.그 흰 가루는 독이 아니었다.며칠 전부터 문혜가 의원에게 받아 음식에 섞어 온 해독약이었다. 누가 무엇에 손을 댔는지 알 수 없어, 맛과 냄새를 가장 덜 바꾸는 처방을 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윤에게 까닭을 말하면 아이는 송수당에서 내리는 음식도, 유모가 건네는 물도 모두 두려워할 터였다.첫 독은 석 달 전 말린 대추에서 나왔다. 두 번째는 차 달이는 물에 섞여 있었다. 문혜는 부엌사람 셋을 내보냈지만 그중 누구도 범인이 아니었다. 하나는 빚 때문에 남은 대추를 팔았고, 하나는 아픈 딸에게 약을 보내려 차를 덜어냈다. 굶주림과 도둑질은 찾았으나 독을 넣은 손은 찾지 못했다.그 뒤 문혜는 정윤보다 먼저 음식을 맛보았다. 밤마다 혀가 저리거나 손끝이 차가워지는지 적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기록이 약합 밑에 쌓였다.문혜는 아이가 자신만 의심하는 쪽을 택했다.동쪽 안채로 돌아오자 몸종이 방문을 닫았다.“언제까지 오해를 받으시렵니까?”“살아 있을 때까지.”“도련님은 마님을 독살범으로 알고 있습니다.”문혜가 젖은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국물이 묻은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나를 미워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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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여자

다음 날 아침, 정윤은 밥상을 물렸다.“오늘부터 제 음식은 제가 고르겠습니다.”문혜는 국그릇을 덮던 손을 멈췄다.“그러거라.”“누가 만든 것인지도 제가 확인하겠습니다.”“그래.”“부인께서 넣는 가루도 받지 않겠습니다.”문혜는 아이를 설득하지 않았다. 대신 부엌에 명을 내려 쌀독과 찬장을 정윤에게 열어 주고, 요리하는 동안 묵화소원의 시동 하나가 곁을 지키게 했다.그날부터 작은 부엌은 아침마다 부산해졌다. 시동은 생선을 태웠고, 정윤은 죽에 소금을 두 번 넣었다. 솥뚜껑이 덜컹거리고 탄내가 행랑까지 퍼졌다.첫날 정윤은 탄 생선을 끝까지 먹었다. 문혜가 새 것을 보내자 손도 대지 않았다. 둘째 날에는 쌀을 너무 많이 불려 솥 밖으로 죽이 넘쳤다. 문혜는 부엌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화상약만 문턱에 놓고 갔다.정윤은 그 약도 한참 뒤에야 가져갔다. 손등의 물집이 터지고 나서였다.늙은 유모는 이를 갈았다.“아이가 제 밥을 제 손으로 챙기게 두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마님 노릇을 하실 거면 제대로 하십시오.”“어떤 마님 노릇을 말하느냐.”“어머니라 부르게 하셔야지요.”문혜가 유모를 보았다.“그 말은 아이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유모는 죽은 정안의 젖어미였다. 새 안주인이 들어온 뒤에도 다향원의 열쇠를 내놓지 않았고, 정윤의 옷깃 하나까지 간섭했다. 충심은 깊었으나 그 충심 속에서 아이는 늘 죽은 누이의 유품처럼 다뤄졌다.정윤이 감기에 걸리면 유모는 정안이 어릴 때 먹던 약을 달였다. 정윤이 그림을 그리면 정안은 글을 더 좋아했다며 붓을 치웠다. 아이를 사랑했으나, 사랑하는 방식까지 죽은 사람에게서 빌려 왔다.“마님께서는 끝내 그 아이를 남처럼 두실 작정입니까?”“남이라면 이 집에서 가장 안전할지도 모르지.”문혜의 말에 유모가 입을 다물었다.그날 오후, 정윤은 묵화소원의 궤를 뒤졌다. 제 손으로 식재료 값을 적겠다며 옛 장부를 찾다가, 밑칸에 끼인 누런 문서 한 장을 꺼냈다.‘생첩’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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