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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붉은 혼서: Chapter 91 - Chapter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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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차밭의 백 명

연경에서 운주 세굽이차원까지는 서둘러도 엿새였다.소의 일행은 연수문을 나와 백류나루에서 배를 탔다. 청하를 따라 나흘 반을 내려간 뒤 노평나루에서 수레로 갈아탔다. 길은 청우현을 지나며 가팔라졌고, 운무릉 서쪽 고개에 이르자 안개가 수레바퀴 높이까지 내려왔다.배에서는 뱃사공 가족과 한 칸을 나눠 썼다. 난정은 멀미하는 곡우 대신 노를 잡았고, 경연은 관복을 보퉁이에 넣은 채 젖은 밧줄을 당겼다. 소의는 그가 귀한 집 자제답지 않게 손바닥이 까져도 내색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약을 바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경연도 그녀가 밤마다 배 난간에 기대 속을 달래는 것을 보고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저 아래가 모두 차밭입니다.”난정이 채찍 끝으로 골짜기를 가리켰다.산등성이 세 굽이가 층층이 겹쳐 있었다. 위쪽에는 오래된 차나무가 검은 점처럼 박혔고, 가운데에는 기와집과 넓은 덖음 마당이 자리했다. 아래쪽으로는 일꾼들의 흙집과 창고가 물길을 따라 이어졌다.세굽이차원은 장부의 땅 한 줄이 아니었다.아이들이 돌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아낙들은 대바구니를 씻었으며, 사내들은 비가 오기 전에 장작 더미 위로 거적을 씌웠다. 차를 덖는 솥에서는 푸른 김이 솟았다. 쓰고 고소한 냄새가 젖은 바람 속에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수레가 멎자 웃음소리도 멎었다.“후부에서 왔답니다.”누군가 낮게 말했다.사람들의 얼굴에 반가움은 없었다. 그렇다고 난정을 향해 몰려오지도 않았다. 차밭을 후부에서 떼어내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새 주인이 들어와 사람부터 줄일까 두려웠다. 미움과 생계가 같은 뿌리에 엉켜 있었다.아랫마을 공동 부엌에서는 네 작업패가 차례로 솥을 썼다. 먼저 온 사람은 좁쌀을 씻고, 늦은 사람은 남은 불씨를 살렸다. 한 사내는 딸 혼처에서 요구한 예물을 마련하려고 올해 품삯을 미리 달라 했고, 아내는 빚을 내 딸을 보내느니 한 해 더 데리고 있겠다고 맞섰다. 후부가 차밭을 팔면 그 집의 혼례부터 깨질 판이었다.관리인 조경년이 찻간에서 나왔다. 소매는 걷혀 있었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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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쓴 차를 나누는 법

새벽 종이 세 번 울리기 전에 차밭이 먼저 깨어났다.아랫마을 굴뚝에서 연기가 피었고, 젖은 돌계단 위로 대바구니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소의는 밤새 거의 자지 못했지만 남보다 먼저 마당에 나섰다. 경연은 이미 우물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둘은 지난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경연의 눈 밑에는 엷은 그늘이 졌고, 소의는 비녀를 한 번에 꽂지 못해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그대로 두었다. 난정은 두 사람을 보고도 재촉하지 않았다. 차밭에서는 밤을 설친 사람보다 해 뜨기 전에 불을 지피지 않은 사람이 더 큰 꾸지람을 들었다.조경년은 정안이 죽던 해의 삯 장부와 차 대금 기록을 찻간 바닥에 펼쳤다. 숫자는 감출 수 있어도 사람이 사라진 자리는 감추기 어려웠다. 그해 겨울, 일꾼 열일곱 집의 이름 옆에는 석 달치 품삯이 비어 있었다.“후부에서는 모두 지급했다고 했습니다.” 난정이 말했다.“후부 장부에는 그랬겠지.”“그 돈을 당신이 먹었다는 말도 있어.”조경년이 난정을 바라보았다.“그 말을 믿고 싶어서 네 해 만에 온 겁니까?”난정은 장부를 거칠게 덮었다. 소의는 둘을 말리지 않았다. 서로의 말을 끊지 않게 두는 편이 오래 묵은 사실을 더 많이 끌어냈다.해가 중천에 뜰 무렵, 일꾼들이 점심을 먹었다. 좁쌀밥에 절인 채소뿐이었으나 솥 바닥 누룽지를 두고 아이들이 다퉜다. 경연은 따로 차린 상을 물리고 그들과 같은 밥을 받았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눈치를 보았고, 그가 절인 무를 두 번 집자 그제야 제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지난겨울에는 공주 별원 사람이 직접 왔습니다.”조경년이 밥그릇을 내려놓았다.“후부를 거치지 않고 차 대금을 거둬 갔지요.”“누구의 명이었습니까?”“패에는 대장공주부라 적혀 있었습니다. 거절하면 관납을 막겠다고 했고요.”난정이 욕설을 삼켰다. 차밭을 되찾겠다고 달려온 사이, 다른 손은 이미 수익줄을 움켜쥐고 있었다.밤이 깊은 뒤에야 네 사람은 찻간에 모였다. 조경년이 그해 마지막으로 남은 묵은 차를 우리고 물러났다.첫 잔은 떫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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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죽은 언니를 미워한 동생

난정은 아침부터 위쪽 등성이로 올랐다.밤새 비가 내려 돌계단이 미끄러웠다. 조경년은 말없이 앞장서 가장 가파른 곳에 새끼줄을 걸었다. 난정은 그 줄을 잡지 않았다가 두 번이나 발을 헛디뎠다.“고집은 그대로군.”“당신이 놓은 줄이라 그렇지.”두 사람은 열아홉과 스물한 살이던 해, 이 산길에서 혼인을 약속했다. 정안은 동생이 차밭 관리인에게 마음을 준 것을 알고 조경년을 먼 산지로 보냈다. 난정에게는 가문에 맞는 혼처를 정해 주려 했다.떠나는 날 조경년은 찻씨 한 줌을 난정에게 주었다. 어디서 살든 심어 보라고 했다. 난정은 화가 나 그 씨를 우물에 던졌지만, 그중 한 알은 소매 안에 남아 있었다. 먼 고을 객점의 깨진 화분에서 싹을 틔웠고 세 해를 살다 지난겨울 얼어 죽었다.난정은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조경년도 묻지 않았다.정안은 늘 동생에게 좋은 것을 주었다.더 비싼 비단, 더 훌륭한 스승, 더 높은 집안의 혼처. 난정이 원한 것만 빼고.“언니는 제가 망칠 일을 미리 막아 주는 사람이었어요.”그녀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그래서 죽은 뒤까지 언니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조경년이 걸음을 멈췄다.“차밭을 되찾으려는 것도 그 때문입니까?”“반은 그래요.”난정은 순순히 인정했다.“나머지 반은 여기 사람들이 후부의 곡간처럼 사는 꼴을 더 보기 싫어서고.”“되찾은 뒤에는요?”“삯부터 올릴 거예요.”“얼마나?”“한 달에 닷 푼.”“그 돈이면 배수로 하나도 못 고칩니다.”“그럼 석 푼.”“그것도 많아요.”조경년은 품삯 장부를 펴 바위 위에 놓았다. 배수로를 고치지 않으면 첫째 굽이 흙집 여섯 채가 무너지고, 겨울 장작을 미리 사지 않으면 노인들이 덖음 솥의 남은 불에 매달려야 한다고 했다. 난정은 처음에는 그의 반대를 자신을 못 믿는 뜻으로 들었다. 숫자를 하나씩 따라가자 돈이 없다는 말과 사람을 굶기겠다는 말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닷 푼은 가을 수확 뒤에. 지금은 석 푼.”“배수로 값부터 떼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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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문려화의 새 방

교령의 침선방은 동시 비단전 뒤편 골목에 있었다.아래층에서는 하루 종일 가위가 사각사각 움직였다. 다림돌 두드리는 소리와 여인들의 웃음이 얇은 마룻장을 타고 위층까지 올라왔다. 그 위에 작은 방 하나가 비었다.려화는 첫 달 방값을 동전으로 세어 교령에게 건넸다. 교령은 절반만 받으려 했지만 려화가 다시 세어 탁자에 놓았다.“공짜로 두면 언젠가 나가라고 하실 때 제가 억울해져요.”“그럼 겨울에는 숯값을 따로 받을 거야.”“장부에 적어 주세요.”두 여자는 돈을 주고받고 나서야 마음 놓고 웃었다. 호의도 값을 정하면 빚이 되지 않았다.려화는 보퉁이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방에는 침상 하나와 낮은 궤, 손바닥만 한 창문이 전부였다. 몸을 돌리면 옷자락이 벽에 닿을 만큼 좁았지만 누구의 딸방도, 누구의 신방도 아니었다.문려화가 제 삯으로 빌린 첫 방이었다.“창가에 침상을 두면 겨울에 얼어 죽습니다.”문밖에서 유백이 말했다.그는 약재 꾸러미와 새 이불을 양팔에 안고도 문턱을 넘지 않았다.려화가 돌아보았다.“들어오셔도 됩니다.”“확실합니까?”“물어보려고 거기 서 계신 것 아닙니까?”유백은 그제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침상을 안쪽 벽으로 옮기려 했지만 려화가 반대편을 붙잡았다.“창 아래 둘 겁니다.”“찬바람이 곧장 듭니다.”“아침에 하늘이 보여요.”“기침이 나면 하늘도 못 봅니다.”“그러면 한 오작인이 약을 주겠지요.”유백은 할 말을 잃었다. 려화는 그 얼굴을 보고 작게 웃었다.둘은 결국 침상을 창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 비스듬히 놓았다. 궤를 열면 침상 모서리에 걸렸고, 문을 활짝 열면 이불이 밀렸다. 유백은 몇 번이나 자리를 다시 재며 혼잣말로 치수를 읊었다.려화의 짐은 보퉁이 두 개면 끝이었다. 문씨 집에서 가져온 것은 낡은 빗과 청도가 준 은방울, 글을 배우며 채운 종이 몇 장뿐이었다. 유백이 새 이불을 펴자 방 안의 절반이 밝아졌다.“너무 새것입니다.”“이불은 원래 새것을 사는 겁니다.”“값이 얼마였습니까?”유백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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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노태부인의 초대

배씨 종가의 정문은 소의가 알던 관청 문보다도 높았다.가마에서 내린 소의는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옥색 옷은 곡우가 골라 준 것이었고, 비녀는 아무 장식 없는 나무였다. 꾸미지 않은 얼굴은 유난히 희고 맑아 검은 눈과 붉은 입술이 더 선명했다. 문지기들이 시선을 오래 두지 못하고 먼저 고개를 숙였다.문지방 안쪽에는 빗물이 닿지 않게 검은 돌을 한 줄 더 깔았고, 앞뜰 소나무는 아래 가지 하나까지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소의가 수수한 옥색 치마를 입고 담영원에 들어서자 시비들이 소리 없이 그녀의 신과 소매 끝을 훑어보았다.“감식 일을 도운 분께 차 한 잔 대접하려는 자리랍니다.”명주가 마중 나오며 속삭였다.“할머님 말씀은 절반만 믿으세요.”“나머지 절반은 무엇입니까?”“저도 아직 캐는 중이에요.”명주가 방긋 웃었다. 그 웃음 덕에 소의의 어깨가 조금 풀렸다.정심당에는 서 노태부인과 방여운이 먼저 앉아 있었다. 배시충의 자리는 노태부인 오른쪽, 방여운은 그보다 한 자리 아래였다. 소의의 방석은 명주 옆이 아니라 마주 보이는 끝자리에 놓였다.감사받을 손님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얼굴을 가장 오래 살필 수 있는 자리였다.상에는 여섯 사람 몫의 그릇이 놓였으나 음식을 나르는 사람은 소의보다 많았다. 누군가 생선을 발라 접시에 놓고, 찻물이 식기 전에 다른 잔으로 바꾸었다. 청묵재에서는 손 하나 더 쓰는 값부터 셌다. 이 집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많을수록 체면이 높았다.소의는 생선 한 점을 먹는 동안 자기 집 한 끼 값이 들겠다고 헤아렸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방여운이 차를 권했다.“입에 맞을지 모르겠군요.”“좋은 차를 몰라 가리는 법도 없습니다.”“모른다고 바로 말하는구나.” 노태부인이 말했다.“아는 척하다 틀리면 제 일에서는 사람이 다칩니다.”노태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짢아서가 아니라 값을 매길 때의 눈이었다.음식이 들어오자 명주가 쉬지 않고 말을 붙였다. 소의가 답하기 곤란한 가문 이야기가 나오면 새 옷감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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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건너편 창의 불빛

빗줄기는 정문 앞 돌계단을 순식간에 삼켰다.쏴아아—.가마를 부르러 나갔던 노복이 젖은 짚신을 끌며 돌아왔다. 정원로 아래쪽이 무릎까지 잠겨 오늘 밤은 나갈 수 없다고 했다.소의는 담영원 여성 객실에 묵게 되었다.방여운은 마른 옷과 세숫물을 보냈고, 명주는 제 옷 가운데 가장 수수한 것을 골랐다고 말하면서도 옥단추가 달린 저고리를 내놓았다. 소의가 난감해하자 춘초가 얼른 단추를 천으로 감쌌다.담영원 바닥은 세필골 청묵재보다 따뜻했다. 비가 퍼부어도 창호 한 장 젖지 않았고, 침상 아래에는 마른 숯단지가 놓여 있었다. 소의는 젖은 신을 문밖에 가지런히 놓고도 방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했다. 남의 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망가뜨릴까 두려워하는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빛만 가리면 수수해 보입니다.”“그게 되는구나.” 명주가 감탄했다.“아씨께서는 평생 모르셔도 됩니다.”춘초는 명주의 야식까지 챙겨 왔다. 두부 한 접시와 따뜻한 배즙을 내려놓다가, 문 가까이 쪼그려 앉았다.“아씨께서 시집가시면 정말 저를 두고 가실 겁니까?”명주의 젓가락이 멎었다.“네가 원한다면.”“마구간 그 사람과 혼인하면 동협문 밖에 방을 얻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 품삯으로는 주인에게 먼저 치를 석 달 방세가 모자랍니다.”“내가 주면 되지.”“그래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춘초는 명주가 섭섭해할까 한참 말을 골랐다. 자기는 은혜를 갚으려고 혼인하는 것이 아니며, 명주도 자기를 데려가 외로움을 견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명주는 처음에는 입술을 내밀었지만 끝까지 들었다.“그럼 네가 혼인하고도 가끔 와.”“품삯을 주시면요.”“친구 보러 오는데 품삯을 받아?”“아씨 머리 빗기고 옷 고르다 하루가 다 가는데요.”명주는 억울한 얼굴을 했다가 끝내 웃었다. 춘초도 따라 웃었지만 눈가가 붉었다. 오래 함께 산 두 사람도 헤어질 때를 정하는 일에는 서툴렀다.같은 시각, 함화당에서는 방여운과 배시충이 낮은 목소리로 다투고 있었다.“비가 그치면 바로 보내면 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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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찾지 말라는 사람들

경연은 날이 밝기도 전에 외원 서재 문을 열었다.배시충은 밤옷 위에 겉옷만 걸친 채 앉아 있었다. 탁자에는 매년 북방으로 보낼 약재 목록이 놓여 있었다. 감추기에는 너무 오래 되풀이한 일이었다.목록에는 겨울마다 같은 약이 적혀 있었다. 무릎을 덥히는 부자와 계지, 해묵은 기침에 쓰는 길경, 출산 뒤 상한 몸을 보하는 숙지황. 시충은 받는 사람 이름이 달라져도 약만은 바꾸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비겁하고 오래된 안부였다.경연이 낡은 약첩 겉봉을 내려놓았다.“어머니가 살아 계십니까?”시충은 종이를 보지 않았다.“누가 찾았느냐.”“살아 계시는군요.”빗물이 처마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시충은 찻물을 따르려 했지만 주전자 안이 비어 있었다. 그는 빈 잔을 한참 들고 있다 내려놓았다.“마지막으로 확실히 살아 있다는 소식을 받은 것은 열두 해 전이다.”“그 뒤에도 약을 보냈습니다.”“돌아오면 죽는다고 했다. 그 여자가 아니라 그 여자를 도운 사람들이.”“누가 죽입니까?”“네가 지금 쫓는 사람들이다.”시충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임원기가 경연을 낳은 뒤 배씨 가문에서 이름을 잃은 일, 진문재가 거짓 사망 기록을 만들어 북방으로 보낸 일, 공주부 사람이 그 사실을 알아챈 일을 처음으로 말했다.“네가 열한 살이던 해, 원기는 돌아와 너를 데려가겠다고 했다.”경연의 손이 탁자 가장자리에 멎었다.“나는 너를 내주지 않았다. 장손을 빼앗겼다는 소문이 나면 종가가 갈라지고, 원기도 다시 쫓길 거라 했다.”“어머니는 뭐라고 하셨습니까?”“문밖에서 밤을 새웠다.”“제가 묻는 것은 어머니가 하신 말입니다.”시충은 기억하고 있었다. 원기는 아이에게 한 번만 물어보게 해달라고 했다.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나는 그 여자를 살려 보냈다.”경연은 웃지 않았다.“내쫓은 것이 아니라요?”“사랑했다.”“그런데 어머니 대신 가문을 택하셨군요.”시충이 아들을 보았다.“살아남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냐.”“같이 갈지 물었습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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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아이를 죽이려는 사람

노탁은 정원후부 동쪽 물품문에서 회색옷 사내를 붙잡았다.사내의 품에서 장터의 백자병이 나왔다. 마개를 열자 비상의 매캐한 기운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누가 시켰어?”노탁이 사내의 팔을 등 뒤로 꺾었다.“노부인입니다! 북부엌 쥐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송수당 장부에도 같은 지시가 적혀 있었다. 장마가 들자 곡물 창고에 쥐 떼가 번졌고, 전날에는 저장한 콩 두 섬을 버렸다. 노부인은 비상을 사 오라 했으나 양도, 둘 곳도 정하지 않았다.사내는 비상을 창고지기에게 넘기지 않고 자기 방 궤에 숨겼다. 까닭을 묻자 입을 다물었다가, 며칠 전 누군가 같은 양을 두 배 값에 사겠다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아이를 죽이려 산 것은 아니었지만 독을 돈으로 바꾸려 한 죄는 남았다.노부인의 짧은 명령, 가난한 하인의 욕심, 열리지 않는 음식 창고가 한데 얽혀 있었다. 범인 하나를 끌어내도 정윤의 밥상은 안전해지지 않았다.거짓말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독을 아이 음식 가까이에 둔 사람이 하나가 아니란 뜻이네요.” 곡우가 말했다.그때 묵화소원의 시동이 울면서 뛰어왔다.“도련님이 안 계십니다.”정윤은 생첩과 붓 주머니를 들고 동쪽 물품문으로 빠져나갔다. 물건 수레가 드나드는 틈에 몸을 숨긴 것이다. 후부 사람들이 정문과 친척집부터 뒤질 때, 곡우는 아이 방을 살폈다.책상에는 산수화가 펼쳐져 있었지만 사람 얼굴은 하나도 완성되지 않았다. 비어 있는 석청 접시 곁에는 동시 진가 화방에서 붓을 싸준 종이가 놓여 있었다.“그림 도구를 사러 갔을 겁니다.”“이 판국에?” 노탁이 물었다.“이 판국이라서요. 저 아이에게 자기 돈으로 가질 수 있는 곳은 거기뿐이니까.”둘은 동시로 달렸다. 비가 그친 거리는 진흙탕이었다. 장사꾼들이 천막에 고인 물을 쏟고, 수레가 지나갈 때마다 흙물이 튀었다.정윤은 화방 뒤 빈 종이창고에 숨어 있었다.화방 주인은 아이가 후부 도련님인 줄 몰랐다. 젖은 옷을 보고 빈 창고에서 쉬게 했고, 값을 치르지 못한 석청은 작은 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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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죽은 아내의 마지막 방

다향원의 봉한 월문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회유는 열쇠를 들고도 문을 열지 못했다. 난정이 빼앗듯 받아 자물쇠에 꽂았다. 녹이 슨 쇠가 끼익 울고, 네 해 동안 닫혀 있던 문이 안쪽의 눅눅한 공기를 밀어냈다.회유와 난정, 문혜, 정윤이 먼저 들어갔다. 소의와 경연은 관청 증인으로 문턱에 섰다. 홍 유모는 끝내 뜰에 남았다.문을 열자 작은 거미들이 장롱 뒤로 흩어졌다. 비가 샌 천장 아래에는 놋대야가 놓여 있었고, 문혜가 갈아 둔 물에는 먼지 한 점 없었다. 방은 봉해졌으나 누군가는 계절마다 들어와 창을 열고 이불을 말렸다.창가 찻상에는 금이 간 잔 두 개가 놓였고, 침상 곁에는 반쯤 읽은 시집이 엎어져 있었다. 옷장 문을 열자 장뇌 냄새가 확 퍼졌다. 철마다 문혜가 꺼내 바람을 쐰 덕에 옷에는 곰팡이 하나 없었다.“손대지 말게.”회유가 난정에게 말했다.“정안은 물건 자리가 바뀌는 것을 싫어했어.”난정이 붉은 치마를 꺼냈다.“언니는 이 색을 싫어했어요. 형부 앞에서만 입었지.”“좋아했네.”“형부가 좋아했겠지요.”난정은 치마 안쪽에 덧댄 주머니를 찾아냈다. 정안은 어릴 때부터 거기에 사탕과 동전을 숨겨 동생에게 주었다. 그러나 난정이 조경년을 만나던 사실을 알았을 때는 같은 주머니에서 그의 서찰을 꺼내 불태웠다.“언니는 주는 것도 빼앗는 것도 제 허락을 묻지 않았어요.”회유는 처음으로 반박하지 않았다.문혜는 두 사람 사이에서 옷을 다시 접었다.“이 치마는 허리가 두 번 고쳐졌습니다. 처음보다 손바닥 하나만큼 줄었습니다.”회유가 그녀를 보았다. 문혜는 줄어든 허리 안쪽의 묵은 바늘땀과 약 냄새가 밴 안감을 펼쳐 보인 뒤 치마를 다시 접었다.정윤은 침상 곁에 서 있었다. 기억 속 방보다 작았다. 누이는 늘 침상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았는데, 이제 보니 어린아이가 숨을 만한 자리도 고작 침상 밑뿐이었다.“그날 회창 숙부가 왔습니다.”회유가 고개를 돌렸다.“그럴 리 없다.”“형님은 바깥사랑에 계셨습니다.” 정회창이 문밖에서 말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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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아이에게 주지 말라는 뜻

소의는 다향원 창을 모두 열게 했다.오래 갇혔던 장뇌와 약 냄새가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정윤은 침상 끝에 앉아 있었고, 문혜는 한 걸음 떨어진 방석에 앉았다. 누구도 아이를 상석으로 옮기거나 어른 앞에 무릎 꿇게 하지 않았다.탁자 위에는 세 장의 문서가 놓였다.정안을 양모로 올린 양자 문서, 그보다 석 달 늦게 만들어진 생첩, 그리고 죽기 전날 쓴 유언이었다.“먼저 입양되고 나중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소의가 정윤에게 말했다.“그 전에는 관청에 네 출생을 증명할 기록이 없었어. 누가 낳았는지 모르는 아이를 후부의 양자로 만들려고, 진문재가 생첩까지 뒤늦게 꾸민 것이다.”“누이가 시킨 겁니까?”“처음에는 살 곳을 주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차밭 상속인으로 올리는 데에는 반대했다.”정 노부인이 눈을 감았다. 정안이 죽어 가는 사이, 그녀는 작위를 지키려면 후사가 필요하다며 양자 문서를 완성하게 했다. 아이 이름으로 차밭을 붙들어 두면 후부의 식솔도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내가 했다.”노부인의 말에 방 안의 사람들이 돌아보았다.“아이를 들인 것은 정안의 뜻이었다. 차밭까지 아이 앞으로 돌린 것은 내 뜻이었다.”정윤이 물었다.“저를 죽이려 한 것도 할머님입니까?”노부인의 입술이 굳었다.“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리할 까닭을 만든 것은 나다.”소의는 정안의 두 서찰을 나란히 놓았다. 하나에는 정윤을 집에서 내쫓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하나에는 차밭을 주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서로 어긋난 말이 아니었다.정안은 후부의 아이로 살되 차밭 주인은 되지 않게 하려 했다. 차밭을 물려받는 순간, 정윤은 후부의 작위와 설씨 혼수, 공주부로 흘러가는 차 대금까지 한 몸에 쥔 사람이 되었다. 열 살 아이를 없애고 도장 하나만 바꾸면 그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었다.정윤은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럼 차밭은 제 것이 아닙니까?”“네가 원하지 않으면 아니야.” 소의가 말했다.“제가 원하면요?”“사람 백 명의 몫과 함께 정해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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