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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더 이상 돌려 묻지 않는 밤

그건 거의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네가 한 말이 나한테 남았다고, 계속 곱씹고 있다고, 오늘 밤 내 머릿속에 네가 있다는 걸 너무 솔직하게 드러낸 문장이었다. 취소할까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답장은 생각보다 오래 오지 않았다.그 짧은 공백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나는 그 몇 분 사이에 별별 생각을 다 했다.내가 부담스러웠나. 괜한 말을 했나.아니면 지금쯤 아예 답하지 않는 쪽을 택하고 있나.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죄송합니다. 불편하게 해드리려던 건 아니었습니다.’나는 화면을 본 순간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저 문장은 딱 도화준 같았다.앞서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게 넘기지도 않는다.자기가 남긴 흔적을 알고는 있는데, 그걸 굳이 더 밀어붙이진 않는 사람의 말.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저 답장이 조금 서운했다.‘왜지.’나는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불편하게 해드리려던 건 아니었다.그건 분명 예의 바른 답이고, 나를 생각한 말이다.그런데도 나는 그 문장 안에서 아주 옅은 거리감을 느꼈다.갑자기 다시 고객과 파트너 사이의 선이 또렷해진 것 같은 느낌.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쳤다.‘불편하진 않았어요. 그냥… 조금 걱정됐어요.’보내고 나서야 숨이 멎는 것 같았다.‘이건 더 위험했다.’‘걱정.’나는 지금 무료 체험 남친을 걱정한다고 말하고 있었다.정말 큰일이었다.그러나 놀랍게도, 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엔 오히려 조금 편해졌다. 적어도 거짓말은 안 했으니까. 저 문장이 불편해서가 아니라,그 문장 뒤에 있는 사람 얼굴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그건 사실이었다.이번엔 답장이 조금 더 빨리 왔다.‘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나는 그 문장을 보자마자 거의 반사적으로 웃었다.거짓말.왜냐하면, 걱정하실 일은 아니라는 말은 대개 걱정할 일이 있는 사람이 하거든. 그리고 도화준은 지금까지 아주 여러 번,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솔직해왔다. 그러니까 이 문장도 어느 정도는 그런 종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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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낮의 남자, 밤의 남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이렇게 빨리 내 쪽에서 증명될 줄은 몰랐다.궁금해지면 기대하게 되고, 기대하면 다칠 수도 있다고 한 문장.그리고 그 말이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벌써 답장 없는 5분을 서운해하고 있었다.‘정말 우습다. 그때였다.’핸드폰이 다시 울렸다.나는 거의 숨도 못 쉬고 화면을 켰다.도화준.‘네.’딱 한 글자였다.‘네.’그 한 글자를 읽는 순간, 나는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왜냐하면 그 짧은 대답이, 길게 변명하는 문장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말하고 있었으니까.‘네.’기대했다가 다친 적 있냐는 질문에,저 사람은 변명도 설명도 없이, 그저 네, 하고 답했다.나는 갑자기 가슴 안쪽이 조금 아팠다.그렇게 짧은 대답 하나로도 사람이 너무 선명해질 수 있구나.나는 한참을 그 한 글자만 바라보다가, 결국 아주 느리게 답장을 쳤다.‘그랬구나.’정말 별것 없는 문장이었다.그런데 오늘만큼은 그 말 이상을 보낼 수가 없었다.미안하다고 하기도 이상했고, 괜찮냐고 묻기엔 이미 너무 멀리 온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저, 네가 그런 적이 있었구나 하고 받아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이번엔 도화준이 금방 답했다.그래서 이도희 씨가 저까지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나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정말로 가슴이 한 번 멎는 줄 알았다.‘저까지.’그 말이 너무 이상하게 들렸다.나는 그제야 아주 선명하게 알았다.도화준은 지금, 자기 자신을 기대했다가 다칠 쪽에 놓고 있었다.그 인식이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 익숙해서 더 아팠다.마치 이미 여러 번 그렇게 살아본 사람처럼.나는 핸드폰을 쥔 채 한참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저 사람 대체 어떤 밤들을 지나온 거지.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아주 뚜렷한 충동을 느꼈다.‘더 알고 싶다.’단순히 궁금해서가 아니라,저 사람이 왜 저렇게까지 자기 자신을 경계하는지 알고 싶었다.그런데 동시에, 아주 미세하게 두려움도 올라왔다.혹시 내가 정말 그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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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자꾸 먼저 떠오르는 거요

회의실 문 앞에 서 있던 그는 오늘도 단정한 셔츠 차림이었다. 네이비 셔츠에 슬랙스, 손목엔 군더더기 없는 시계 하나. 도화준이 조명 아래서 사람을 더 반짝이게 만드는 얼굴이라면, 강도윤은 밝은 낮에 더 선명해지는 사람이었다. 깨끗하고 정리된 느낌. 무언가를 흐트러뜨리기보다 정돈하는 쪽.“안녕하세요.”“오는 길 안 막히셨어요?”“네. 생각보다 괜찮았어요.”그가 아주 옅게 웃었다.“오늘은 ‘생각보다’가 좋은 쪽으로 많이 붙네요.”나는 그 말에 순간 멈췄다.왜냐하면, 그 표현을 요즘 유난히 많이 쓰게 만든 사람도 도화준이었으니까.생각보다 괜찮은 하루.생각보다 편한 쪽.생각보다 덜 막힌 얼굴.‘아.정말 큰일이다.’도화준이 남긴 말투가 내 문장 안으로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이, 괜히 더 민망했다.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긴 테이블 위엔 샘플 표지 시안 몇 장과 노트북, 인쇄된 자료들이 정리돼 있었다. 강도윤은 자리에 앉기 전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물병을 밀어줬다.아주 사소한 행동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오늘은 조금 현실적인 얘기들을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그가 노트북을 열며 말했다.“표지 방향은 어느 정도 잡혔고, 이제는 외전 구성이나 단행본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감정선 쪽을 더 고민해야 해서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넘겼다.그의 말은 늘 구체적이었다.막연하게 ‘더 좋게 만들자’가 아니라,어디를 어떻게 건드리면 더 살아나는지 정확히 짚는다.“작가님.”강도윤이 자료 중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여기요. 저는 치떡빠 단행본 버전에선, 도희가 사랑을 다시 믿게 되는 감정의 결이 조금 더 섬세하게 보였으면 좋겠어요.”나는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아주 잠깐 숨을 멈췄다.‘도희가 사랑을 다시 믿게 되는 감정의 결.’그 말이 이상하게 너무 직접적으로 들렸다.‘지금의 내 상황과 겹쳐서.’나는 시선을 자료에 둔 채 아주 천천히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강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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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위험하다고 다 나쁜 건 아니니까요

나는 재빨리 자료를 한 장 더 넘기며 웃었다.“그러니까, 예를 들면요. 뭔가 거창한 고백이나 사건보다, 그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일상에 먼저 들어와 있는 거죠.”강도윤은 나를 잠깐 바라봤다.아주 짧았지만, 그 시선은 생각보다 깊었다.그는 내가 지금 단순히 작품 얘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마도 조금은 눈치챘을 것이다.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대신 아주 조용히,마치 그 말을 진짜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원래 진짜 감정은 거창한 장면보다 사소한 반복에서 생기죠.”나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안심했다.이 사람이 좋은 이유는 이런 순간이었다.함부로 파고들지 않으면서도, 내가 던진 말을 너무 가볍게 넘기지도 않는 사람.“그래서 더 위험한 거겠죠.”내가 아주 작게 중얼거리듯 말하자, 강도윤은 희미하게 웃었다.“위험하다고 다 나쁜 건 아니니까요.”그 문장이 떨어지는 순간, 나는 이유 없이 조금 멍해졌다.‘위험하다고 다 나쁜 건 아니니까요.’그 말은 오늘 하루의 핵심 문장 같았다.도화준은 분명 위험한 방향의 사람이었다.가까워질수록 더 알고 싶어지고, 알고 싶어질수록 더 기대하게 되고,기대할수록 더 다칠 수도 있는 사람.그런데도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지금 이 순간 아주 조용히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정말 최악이었다.회의가 끝나고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땐 오후 햇살이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강도윤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와 같이 내려와줬고, 로비를 지나 건물 밖까지 자연스럽게 걸음을 맞췄다.“오늘 어땠어요?”그가 물었다.“뭐가요?”“회의요.”“생각보다 좋았어요.”나는 바로 웃었다.“또 생각보다네요.”강도윤도 웃었다.“이제 진짜 작가님 말버릇 되겠는데요.”“그러게요.”나는 괜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너무 익숙하게,너무 자연스럽게,내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도화준.나는 화면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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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낮의 얼굴, 밤의 그림자

밤은 늘 조용하게 시작된다.누군가는 아직 퇴근길이고, 누군가는 샤워를 하고, 누군가는 TV를 켜놓고 의미 없이 채널을 넘긴다. 겉으로 보면 다들 평범한 밤이다. 그런데 그 평범함 아래에서, 사람 마음은 낮보다 훨씬 더 선명해진다. 낮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덮어두던 것들이, 밤에는 자꾸만 위로 떠오르니까.나는 그날 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노트북은 켜져 있었지만 원고는 한 줄도 늘지 않았고, TV는 켜져 있었지만 무슨 내용이 나오는지도 몰랐다.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고, 화면엔 도화준과의 채팅창이 열려 있었다.‘오늘은 이도희 씨가 덜 막힌 얼굴이라는 걸 알아서요.’그 문장을 또 보고 있었다.오늘만 몇 번째지. 정말 질릴 법도 한데, 전혀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볼수록 더 이상해졌다. 대체 저 남자는 왜 저런 식으로 말할까. 직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는 문장도 아니다. 딱, 사람을 조금 더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이거 진짜 나쁘다….”나는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뒤집었다.이대로 계속 보면 또 빠진다.이 남자의 말투는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그래서 나는 일부러 고개를 들어 거실을 둘러봤다.아침에 대충 치워둔 식탁,소파 위에 접어둔 옷,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야경.이건 내 세계다.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조금 좁고, 조금 어수선하지만그래도 내가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낮에는 강도윤이 있는 세계도 있다.정돈된 회의실,깔끔한 자료,차분하게 이어지는 대화.그 안에 있으면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진다.‘흔들리지 않게 붙들린다.’나는 그 사실을 아주 천천히 인정했다.‘낮의 남자.강도윤.’그는 내 현실을 붙잡아준다.내 글을 정리해주고, 내 생각을 또렷하게 만들어주고, 내가 흔들릴 때 무너지지 않게 잡아준다.그와 함께 있으면,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된다.그리고, 나는 다시 핸드폰을 뒤집어 화면을 켰다.도화준. 밤의 남자.이 남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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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밤의 얼굴

어젯밤, 테이블 위에서 울리던 핸드폰.'실장님. 오늘 11시 전까지 꼭…'나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아. 이거. 이거 뭔가 있다.’그때는 그냥 넘겼다.그럴 수도 있겠지 싶었다.누구나 업무 연락 받을 수 있으니까.그런데 지금‘일이라고 보셔도 됩니다.’그 애매한 문장과 어제의 그 메시지가 겹치면서이상한 느낌이 하나로 이어졌다.이 남자.지금 하는 일이 그냥 평범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심장이 아주 조용하게 빨라지고 있었다.이건 논리적인 확신이 아니라, 그냥 감각이었다.사람을 많이 관찰하는 쪽에서 오는 아주 묘한 직감.도화준은 분명,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복잡한 세계에 있는 사람이다.그리고 그 세계는 아마 밤에 더 가까운 쪽이다.나는 핸드폰을 꽉 쥔 채 한참을 고민했다.‘여기서 물어볼까.’“무슨 일이에요?”“어디에요?”“지금 뭐하고 있어요?”이런 질문들.그런데 손이 멈췄다.도화준은 이미 한 번 경고했다.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리고 나는 지금그 ‘좋지 않을 수도 있는 쪽’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나는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결국, 조금 다른 방향으로 물었다.‘늦게 들어가면 피곤하지 않아요?’보내고 나서, 스스로 조금 놀랐다.‘왜 저렇게 물었지.’궁금한 건 따로 있는데, 말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왔다.마치 그 사람의 세계를 캐묻기보단,그 사람의 상태를 먼저 걱정하는 쪽으로 답장은 이번엔 조금 느리게 왔다.‘괜찮습니다. 익숙한 시간이라서요.’나는 그 문장을 읽고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익숙한 시간. 그 말이 너무 선명하게 박혔다.이 사람에게 밤은 특별한 시간이 아니라 익숙한 시간이다.그건 밤에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밤에 더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나는 괜히 가슴이 조금 서늘해졌다.그리고 동시에 이상하게 더 알고 싶어졌다.‘정말 최악이다.’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손으로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다.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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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아직도 사람 미치게 하네

밤의 골목은 낮보다 조용한데도 묘하게 더 많은 걸 드러낸다.사람들은 낮에 훨씬 많은 얼굴을 하고 다니지만, 이상하게도 진짜 표정은 밤에 더 잘 보인다. 번화가의 불빛이 조금씩 멀어지고, 큰 도로에서 한 블록쯤 안으로 꺾어 들어가자 익숙한 공기가 천천히 몸에 달라붙었다. 화려한 간판 대신 작고 낮은 조명이 늘어나고, 웃음소리 대신 낮게 깔린 음악이 벽 너머로 새어 나오는 거리. 도화준은 그 길을 너무 오래 알아버린 사람처럼 걸었다.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온도의 공기가 먼저 얼굴에 닿았다. 향수와 술, 조명에 데워진 공기,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 그는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굳이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이미 어떤 얼굴들이 있을지 알고 있었고, 어떤 반응들이 자신을 향해 붙을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와, 진짜 왔네?”바 쪽에서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살아는 있었네, 이 새끼.”도화준은 그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안쪽으로 걸었다. 조명은 낮았고, 음악은 적당히 깔려 있었으며,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조차 어딘가 눌린 것처럼 들렸다. 예전엔 이 공간이 지겨울 만큼 익숙했고, 어떤 날에는 여기만큼 편한 곳도 없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람은 결국 알게 된다. 익숙함과 편안함은 전혀 다른 감정이라는 걸.“야.”실장이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예전보다 살이 조금 붙었고, 웃을 때 눈가에 주름도 늘었지만, 사람을 훑어보는 시선만큼은 여전했다. 그런 종류의 눈빛은 나이를 먹어도 쉽게 닳지 않는다.“너 진짜 얼굴 보기가 힘들다.”도화준은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바쁘네요.”“뭐가 바빠.”실장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넌 원래 바쁠 놈이 아니잖아.”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도화준은 그 안에 섞여 있는 의미를 모를 만큼 둔하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틴 사람들은 농담처럼 사람을 묶는 법을 안다. 무심한 척, 편한 척, 별것 아닌 것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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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책임질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룸 안은 바깥보다 더 조용했다.음악 소리도 조금 멀어져 있었고, 공기엔 술 냄새보다 먼저 사람 감정이 눌어붙은 냄새가 남아 있었다. 소파 한쪽에 기대 앉아 있던 여자는 고개를 들자마자 도화준을 알아봤고, 그 순간 얼굴 위로 여러 감정이 동시에 지나갔다. 놀람, 반가움, 원망,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오래 남는 어떤 미련.“너….”여자가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말했다.“너 왜 이제 와.”도화준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가까워 보이지만 절대 닿지 않는 거리. 예전부터 그가 가장 잘 유지하던 거리였다.“오랜만입니다.”“오랜만은 무슨.”여자는 잔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고개를 저었다.“너 없어져서 다들 난리였어.”도화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말엔 대개 대답이 없다.이건 질문이 아니라 감정의 확인 같은 것이니까.여자는 한참 그를 보다가 웃었다.“너 아직도 그런 눈으로 보네.”“어떤 눈이요.”“사람 기대하게 만드는 눈.”도화준은 그 말을 듣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미세하게, 손끝이 한 번 움직였다. 그 반응은 다른 사람 눈엔 티도 안 났겠지만, 그 자신에겐 충분히 선명했다.여자는 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더 깊이 몸을 묻었다.“넌 진짜 나쁘다.”그 말은 비난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원망, 애정, 체념, 그리고 끝내 완전히 미워하지 못하는 쪽의 미련.“그래놓고, 하나도 책임 안 지잖아.”도화준은 아주 잠깐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제가 책임질 위치는 아니었는데요.”여자는 그 말을 듣고 짧게 웃었다.웃는 얼굴인데, 눈가엔 전혀 웃음이 없었다.“그래. 그게 너지.”그걸로 대화는 사실상 끝이었다.도화준은 더 말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말을 덧붙일수록 상대가 더 오래 붙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정이 넘친 사람 앞에서는, 때로 위로보다 침묵이 더 빠르게 끝을 만든다.그는 그런 식으로 수없이 많은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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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이도희는 여기까지 오면 안 된다

그게 오히려 더 곤란했다.그는 결국 안쪽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고 골목 밖으로 걸어 나왔다.가게 문을 나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조명이 다르고, 냄새가 다르고, 무엇보다 사람의 얼굴을 가리는 온도가 달랐다. 그는 골목 끝 가로등 아래에 잠시 멈춰 섰다. 어두운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은 아까보다 더 무표정했고,그 표정은 오래전부터 익숙했다.하지만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은 전혀 다른 온도를 띠고 있었다.도희와 주고받은 짧은 문장들이 채팅창 위에 차곡차곡 남아 있었다.‘괜찮아요.’‘그랬구나.’‘피곤하지 않아요?’‘밤이 더 편한 사람이에요?’도화준은 그 문장들을 한 줄씩 읽다가, 문득 웃지도 못하고 한숨만 쉬었다.‘이상하다.’그 여자는 별로 특별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누군가를 무너뜨릴 만큼 강한 말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감정을 휘젓는 법을 아는 사람처럼 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자꾸만 남는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오래 남는 문장들.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건 늘 큰 말이 아니라, 대개 이런 사소한 것들이다.그는 핸드폰을 쥔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안 된다.”그건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하는 말이었다.‘이도희는 여기까지 오면 안 된다.’그 여자는 아직 이쪽 공기를 모른다. 밤이 왜 편한 시간인지, 어떤 사람들은 왜 밤이 되어야만 겨우 숨을 쉬는지, 왜 어떤 인간관계는 새벽 이후로만 유지되는지. 그런 것들을 모르는 얼굴로 웃고, 매운 떡볶이를 먹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괜찮다고 말하는 여자였다.‘그런 사람이 이쪽으로 오면,대개 망가진다.’도화준은 그걸 너무 오래 봐왔다.그런데도 문제는 그 여자가 자꾸 자기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아니라,정확히는 자기가 자꾸 그 여자를 자기 쪽으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리고 다시 한 번, 아주 짧게 핸드폰 화면을 봤다.‘이도희.’그 이름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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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제일 위험한 사람을 골랐다

정확히는 쓸 수는 있다.그런데 지금 쓰면 안 되는 문장만 나올 것 같았다.이럴 때 쓰는 글은 늘 비슷하다. 감정은 있는데 장면이 안 움직이고, 인물은 많은데 대화가 살아 있지 않고, 괜히 예쁜 문장만 길게 늘어놓다가 정작 읽는 사람 마음엔 하나도 안 남는 종류의 원고. 나는 그런 날의 글을 제일 싫어했다. 그건 슬럼프라기보다, 마음이 아직 장면보다 앞서 있는 상태에 가깝다.결국 나는 노트북을 덮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카카오톡 알림이 떴다.‘오수연’나는 이미 아주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오전 10:13] 오수연 살아있냐[오전 10:13] 오수연아니지. 요즘은 살아있냐보다 잘생긴 애랑 잘 되고 있냐를 먼저 물어야 하나?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그래. 아침부터 네가 빠질 리가 없지.’나는 아주 천천히 답장을 보냈다.[오전 10:14] 나아침부터 개소리 금지[오전 10:14] 오수연 와 욕부터 하는 거 보니까 진짜 뭔가 있네[오전 10:14] 나 없어[오전 10:15] 오수연 진짜 없으면 이렇게 빨리 답 안 함나는 그 문장을 보자마자 핸드폰을 던질 뻔했다.‘진짜 얄밉다.’오수연은 이상하게도 내 연애 쪽 레이더만큼은 거의 귀신 수준이었다. 평소엔 인간 자체가 좀 가벼워 보이고 말도 생각보다 앞서 나가는 타입인데, 꼭 이런 쪽 감정은 귀신같이 집어낸다.[오전 10:15] 나뭔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조금 이상한 사람이야보내고 나서, 나는 아주 잠깐 멈췄다.‘아.’이건 너무 많은 걸 인정한 문장이었다.수연에게 보내놓고 내가 먼저 놀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아니나 다를까.[오전 10:15] 오수연미친 끝났다[오전 10:15] 오수연조금 이상한 사람이야 - 이미 끝장남[오전 10:16] 오수연이름 말해 지금 당장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이걸 말해야 하나.말 안 하면 수연이 더 난리 칠 거고, 말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다.결국 나는 아주 짧게만 보냈다.[오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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