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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더 이상 내 하루를 망칠 수 없다

나는 한참을 빈 입력창만 보다 결국 아주 짧게 보냈다.오늘 공기 좋다는 말, 맞네요.조금 걸으니까 생각이 덜 시끄러워졌어요.보내고 나니 묘하게 안심이 됐다.강치열 얘길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점이.답장은 생각보다 바로 왔다.‘다행이네요. 오늘은 이도희 씨가 덜 피곤한 쪽이면 좋겠습니다.’나는 화면을 보다가 아주 천천히 입술을 깨물었다.‘덜 피곤한 쪽.’정말 이 남자는 이상한 데를 정확하게 짚는다.지금 내가 느끼는 건 분노보다 피로였으니까.나는 길가 벤치에 다시 잠깐 앉았다.손에 들린 딸기 우유가 미지근해져 가고 있었다.도화준에게 뭐라고 더 답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아주 문득 묻고 싶어졌다.‘도화준 씨는 원래 누가 지치면 다 이렇게 알아차려요?’보내고 나서야 조금 과했나 싶었다.너무 의미를 실은 질문 같아서.하지만 답장은 의외로 가볍게 왔다.‘아뇨. 지금은 이도희 씨가 티가 많이 나는 편이라서요.’나는 그대로 웃음이 터졌다.“와, 진짜….”말이 좀 심할 수도 있는데, 이 남자는 타이밍이 진짜 좋다.사람이 한껏 진지해질 뻔한 순간, 꼭 그걸 아주 살짝 덜어준다.나는 결국 답장을 이렇게 보냈다.‘그 말 왠지 기분 나쁜데요.’도화준이 곧바로 답했다.‘오늘은 좋은 뜻입니다.’‘아.’그 짧은 문장을 읽는 순간, 괜히 어깨 힘이 빠졌다.좋은 뜻. 나는 그 문장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젖혔다.공원 가로수 잎 사이로 밤하늘이 조금 보였다. 시커멓고, 가로등 빛 때문에 별은 안 보였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아주 선명하게 알았다.강치열이 다시 끼어들어도 내 하루가 예전처럼 망가지지는 않는구나.그 사실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누군가를 새로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이런 감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내 하루를 망칠 힘을 더는 갖고 있지 않다는 감각. 그리고 그 공백에, 전혀 다른 온도의 사람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다는 감각.강도윤은 낮의 나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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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기대라는 걸 들키는 순간

강치열과의 사랑이 아니라, 강치열이 내 하루의 중심이던 시간이. 그건 생각보다 꽤 큰 일이었다.나는 노트북을 켰다.문서창이 열리고, 깜빡이는 커서가 보였다.오늘은 이상하게 망설임이 덜했다.나는 천천히 문장을 썼다.누군가를 잊는다는 건 그 이름이 완전히 지워지는 일이 아니라,더 이상 제일 먼저 떠오르지 않게 되는 일일지도 몰랐다.쓰고 나니 가슴이 조금 시큰했다.그래도 맞는 말 같았다.그리고 그 아래, 거의 생각 없이 한 줄을 더 적었다.오늘 내 하루엔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나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저장했다.지우고 싶지 않았다.아직은 이 감정의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붙이고 싶지도 않았다.그냥, 먼저 떠오른 사람.지금의 내겐 그 정도로 충분했다.사람은 꼭 감정을 인정한 다음 날부터 더 이상해진다.전날 밤, 노트북 화면에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라는 문장을 써놓고 잠들었을 땐 나름 스스로를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좋다, 인정하자. 아직 사랑은 아니고, 아직 위험한 수준도 아니고, 그냥 조금 더 신경 쓰이는 사람 하나쯤 생긴 거다. 그 정도는 인생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그런데 문제는, 감정을 한 번 인정하고 나면 몸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한다는 데 있었다.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찾았다.그리고 손끝이 먼저 도화준 채팅창을 눌렀다.정말 무섭게도 망설임이 없었다.나는 침대에 반쯤 누운 채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그럼 저도 오늘은 조금 다행이네요.’그 짧은 문장을 밤에 세 번은 더 읽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아침에 또 읽는 것도 이상할 건 없… 는데, 아니다. 솔직히 좀 이상했다. 내가 원래 이런 인간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은 다음 날 아침, 그 채팅창부터 열어보는 쪽은 절대 아니었다.“하….”나는 베개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미친 거지, 진짜.”그래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오늘 아침, 내가 제일 먼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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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자존감을 조용히 받쳐주는 문장

그리고 그 감탄은 단순히 일 잘하는 사람에 대한 감탄이 아니었다. 내 작품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더 컸다. 강도윤은 내 글을 ‘상품’으로만 보지 않았다. 물론 출판사 대표니까 결국은 판매와 기획을 생각하겠지만, 그 안에서도 작가가 지키고 싶은 감정의 결을 존중하는 방식이 있었다.그게 이상하게, 사람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나는 파일을 넘기다가 그가 표시해둔 한 문장 앞에서 손을 멈췄다.“도희의 장점은,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을 우습게 만들지 않는 시선에 있어요.”나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아무도 그렇게 말해준 적 없었다.강치열과 헤어진 뒤, 나는 내 소설조차 조금 우습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사랑을 믿고, 사랑을 쓰고, 사랑을 팔아먹으면서 정작 내 현실은 이렇게 망가졌다는 사실이 너무 우스워서. 그래서 며칠 동안 원고 창도 제대로 못 열었다. 그런데 강도윤은 오히려 그 반대의 지점을 봤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완전히 조롱하지 않는 시선. 그게 내 글의 장점이라고.그 말을 읽는 순간, 이상하게 눈이 조금 뜨거워졌다.나는 재빨리 머그컵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괜히 눈물 날 것 같아서.이상하다.도화준은 사람 심장을 살짝살짝 건드려서 흔들어놓고,강도윤은 사람 자존감 어딘가를 조용히 받쳐준다.둘 다 다른 방식으로 크게 남았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화면을 봤다.‘도화준.’정말 미친 사람처럼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와….”나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메시지는 아주 짧았다.‘오늘은 원고가 좀 써지십니까.’나는 그 문장을 읽고 그대로 멈췄다.‘뭐야.’‘왜 하필 그걸 묻지.’오늘 아침 내내 내가 붙들고 있던 게 원고였고, 방금 전까지 강도윤이 보낸 피드백 문서를 읽으며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저 사람은 왜 또 이렇게 정확한 데를 건드리는 걸까.아니, 물론 우연일 수 있다. 내가 작가라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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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조금 더 알고 싶어지는 저녁

오늘 내 문자엔 그 표현이 유난히 많았다.생각보다 덜 막히고, 생각보다 손에 잡히고, 생각보다 괜찮고.정말, 인생이 조금씩 좋은 쪽으로 미끄러지고 있는 사람 같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좋은 기분 한가운데에,나는 계속 도화준을 의식하고 있었다.그 사실을 더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나는 결국 노트북 앞에서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천장을 봤다.“이도희.”내가 나를 불렀다.“너 지금 기대하고 있지.”정말 창피하게도, 대답은 너무 빨리 나왔다.‘응.’나는 그대로 이마를 짚었다.그래, 기대하고 있었다.오늘 저녁에 또 만날 수 있을까.오늘도 문자 한 줄쯤 더 올까.오늘 내 표정을 보면 또 뭐라고 할까.그 모든 가능성이 자꾸 머릿속을 건드렸다.그리고 바로 그때, 나는 또 하나를 깨달았다.이 감정을 숨기고 싶은 이유는 단지 민망해서만은 아니었다.기대하는 마음은 늘 약점이 된다.기대하는 순간 사람은 상처받을 준비도 같이 하게 되니까.그래서 나는 도화준이 자꾸 신경 쓰이면서도, 동시에 자꾸 선을 긋고 싶어졌다. 이건 체험일 뿐이라고, 일주일 뒤면 끝날 수도 있는 거라고, 너무 깊게 들어가면 안 된다고. 그런데 마음은 늘 반대 방향으로만 걷는다.그걸 증명하듯, 핸드폰이 또 울렸다.나는 거의 숨도 안 쉬고 화면을 봤다.도화준.‘오늘 저녁, 가능하시면 이도희 씨가 덜 막힌 얼굴로 있는 쪽을 보고 싶습니다.’나는 그 문장을 읽고 정말로 몇 초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뭐야.’‘대체 저 말을 왜 저렇게 하지.’‘오늘 저녁 가능하냐는 말인데, 왜 저렇게 말하는 거지. 그냥 만나실래요, 시간 되세요, 저녁 어떠세요, 그런 식으로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덜 막힌 얼굴로 있는 쪽을 보고 싶다고.’정말 사람 심장에 안 좋게 좋은 남자였다.나는 핸드폰을 꽉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심장이 이상하게 빨랐다.그리고 아주 분명하게 알았다.나는 지금 그 사람을 만나러 나가고 싶었다.그걸 부정할 이유가 더는 없었다.나는 결국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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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결국 좋아하시는 걸 다시 고르신 거니까요

도화준은 가게 안쪽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검은색 셔츠에 회색 니트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너무 꾸민 티는 안 나는데, 그렇다고 대충 입은 사람처럼도 안 보이는 차림. 조명 아래에서 보면 검은 머리카락 끝이 아주 살짝 갈색으로 보였고, 옆모습은 또 너무 사람 같지 않게 잘생겨 있었다.정말 문제는 얼굴이 아니라고 몇 번을 생각해도, 가끔은 그냥 얼굴도 문제였다.내가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아주 익숙한 표정으로, 사람을 긴장 풀리게 만드는 그 미묘한 눈빛으로 웃었다.“오셨네요.”“네.”“오늘은 진짜 조금 덜 막힌 얼굴이십니다.”나는 의자에 앉다가 그대로 웃고 말았다.“그걸 보자마자 얘기해요?”“중요한 부분이라서요.”“진짜 직업정신 투철하다.”“좋은 쪽으로 들으시죠.”“그 대사는 너무 자주 써요.”“잘 통하니까요.”나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가방을 내려놓았다.‘아, 이게 문제다.’이 남자랑 마주 앉으면, 내가 원래 갖고 있던 경계심이 자꾸 조금씩 느슨해진다. 말 몇 마디로 바로 편한 온도를 만들어버린다. 오늘은 절대 너무 풀어지지 말자고 다짐하고 왔는데, 시작부터 이미 반쯤 실패한 기분이었다.메뉴판을 펼치자 도화준이 물었다.“맥주 괜찮으십니까?”“오늘은 괜찮을 것 같아요.”“오늘은?”“네.”나는 괜히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기분이 좀… 가벼운 날이라.”도화준은 내 말을 듣고 아주 잠깐 눈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좋네요.”그 짧은 대답이 이상하게 좋았다.‘좋네요.’딱 그 정도만.더 캐묻지도 않고, 굳이 이유를 분석하지도 않고,그냥 내가 조금 가벼운 날이라는 걸 받아주는 방식.우리는 생맥주 두 잔과 닭강정, 국물 떡볶이, 감자튀김을 시켰다.내가 주문을 마치자마자 도화준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오늘은 메뉴가 정직하시네요.”나는 눈을 깜빡였다.“뭐가요.”“결국 치킨과 떡볶이.”나는 그 말을 듣고 결국 웃음이 터졌다.“그러네요?”“원점 회귀하셨습니다.”“아니,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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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좋아하는 건 결국 다시 고르신다니까요

“조용한 시간.”나는 그대로 멈췄다.“그게 좋아하는 거예요?”“네.”“생각보다 되게….”“심심합니까?”“아니요.”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생각보다 진짜 같아요.”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도화준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아주 짧게. 정말, 놓치면 끝일 정도로.그걸 본 순간 나는 괜히 심장이 조금 내려앉았다.“조용한 시간 좋아하는 사람 같아요.”내가 아주 작게 덧붙이자, 도화준은 이번엔 조금 느리게 웃었다.“그렇게 보입니까.”“네.”“어떤 점에서요.”“음….”나는 생각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시끄러운 척은 잘하는데, 원래는 시끄러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요.”도화준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 대신 아주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나를 봤다.“이도희 씨는.”그가 조용히 말했다.“생각보다 사람을 잘 보시는 편이네요.”‘아.또 그런 말.’나는 괜히 웃으며 손등으로 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문질렀다.“작가라서요.”“그렇습니까.”“네. 사람을 관찰 안 하면, 맨날 비슷한 인물만 쓰게 되거든요.”“그럼 저는 어떤 인물로 보입니까.”정말 별안간 던져진 질문이었다.나는 그대로 멈췄다.이건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정면이었다.지금까지의 대화 중 제일 정면이었다.도화준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장난스럽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진지한 압박도 아니었다. 그냥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사람의 얼굴. 그런데 오히려 그런 표정이라 더 어렵다.나는 시선을 잠깐 피했다가,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잘 모르겠어요.”그가 아주 미세하게 눈썹을 움직였다.“의외네요.”“대신….”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겉이랑 속이 좀 다른 사람 같아요.”이번엔 도화준이 아예 대답을 하지 않았다.가게 안은 여전히 시끄럽지도 조용하지도 않은 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유리컵 부딪히는 소리, 옆 테이블 웃음소리, 주방에서 튀김 건지는 소리.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테이블 주변만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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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말하지 않는 사람의 냄새

“그래서 아직도 그래요. 치킨이랑 떡볶이 먹으면, 괜히 좀 괜찮아진 기분이 들어요.”말하고 나니 괜히 민망했다.너무 애처럼 들렸나 싶어서. 그런데 도화준은 웃지 않았다.정말로, 전혀. 그는 아주 조용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네?”“좋아하실 만하네요.”그 한마디에, 나는 정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좋아하실 만하네요.’‘그 말이 왜 이렇게 크게 다가오지.’누군가 내 취향을, 내 습관을, 내 감정이 묻어 있는 사소한 것들을 그럴 만하다고 받아주는 건 생각보다 훨씬 다정한 일이었다. 설명할 필요 없이, 변명할 필요 없이, 그냥 그럴 수 있겠다고 말해주는 일.나는 괜히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도화준 씨는요.”이번엔 내가 물었다.“왜 좋아해요? 치킨이랑 떡볶이.”질문이 떨어지는 순간, 도화준의 표정이 아주 잠깐 멈췄다.정말 짧았다.하지만 분명했다.그는 아주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가, 물잔을 한 번 만지고, 다시 나를 봤다.그리고 낮게 말했다.“비슷합니다.”나는 숨을 아주 조금 멈췄다.“뭐가요.”“괜찮았던 날의 기억이어서요.”‘아.’그 순간, 정말 아주 조용하게 무언가가 움직였다.이 남자는 늘 자기 얘길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하는데도 거의 안 한 것처럼 빠져나간다. 그런데 방금 그 문장은 달랐다. 너무 많은 걸 말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아주 깊은 데서 나온 문장처럼 들렸다.괜찮았던 날의 기억. 나는 그 문장을 마음속으로 천천히 되뇌었다.그리고 처음으로,정말 처음으로,도화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단순한 호기심을 조금 넘고 있다는 걸 알았다.그 사람이 어떤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왔는지,어떤 기억 때문에 치킨과 떡볶이를 좋아하게 됐는지,왜 가끔 그렇게 멀리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지.그걸 알고 싶었다.정말로.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걸 오늘 다 묻고 싶지는 않았다.사람 마음은 참 이상해서,알고 싶을수록 한 번에 다 열어보면 안 될 것 같은 예감도 같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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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완벽한 척하다가 놓치는 순간

나는 그 질문에 포크를 내려놓고 아주 천천히 숨을 골랐다.어느 부분이 궁금하냐고.그 질문은 생각보다 어렵다.왜냐하면 지금 내 안엔 궁금한 게 너무 많았으니까.왜 그렇게 사람 표정을 잘 읽는지.왜 웃을 때도 어딘가 한 발짝 떨어져 있는지.왜 조용한 시간을 좋아하는지.왜 치킨과 떡볶이가 괜찮았던 날의 기억인지.그리고 왜, 가끔 아주 찰나에만이상하게 다친 사람 같은 얼굴을 하는지.하지만 그걸 다 말할 순 없었다.그래서 나는 아주 작게만 말했다.“도화준 씨는….”그리고 잠깐 멈췄다.‘이 말을 해도 되나.’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자꾸, 이 사람한텐 솔직해지고 싶었다.“가끔 되게 밝아 보이는데.”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가끔은 엄청 멀어 보여요.”도화준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정말, 이번에도 찰나였다.하지만 이번엔 확실히 알았다.내가 뭔가를 맞혔다.가게 안에서 누군가가 크게 웃는 소리가 났다.맥주잔 부딪히는 소리도 이어졌다.그런데 우리 테이블 위 공기만 잠깐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도화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아주 천천히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그리고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그건.”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아주 조금 낮았다.“좋은 뜻입니까.”나는 그 말에 결국 웃음이 났다.“또 그거.”“중요하다고 했잖습니까.”“아니요.”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좋다 나쁘다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그럼요.”“그냥….”나는 손가락 끝으로 컵 받침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사람 같아서요.”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도화준은 정말 잠깐 숨을 멈춘 것 같았다.아주 작고 짧은 변화였지만, 그걸 보는 순간 내 심장이 먼저 내려앉았다.‘왜지.’‘왜 그 표정이 저렇게 낯설지.’나는 그제야 아주 미세한 불편함을 느꼈다.불편함이라고 해도 싫은 종류는 아니었다.다만, 그동안 너무 매끈하게만 흘러가던 이 남자의 표면 아래에내가 아직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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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11시 전까지 꼭.그 ‘꼭’이라는 말이 유난히 걸렸다.도화준은 아주 자연스럽게 폰을 뒤집어 놓았다.정말 너무 자연스럽게.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내가 이상하게 느낄 정도로.그가 다시 나를 봤을 땐, 이미 표정은 평소의 도화준으로 돌아와 있었다.“죄송합니다.”“아니에요.”나는 웃는 척했다.“중요한 연락인가 봐요.”“별건 아닙니다.”그 대답은 너무 빨랐다.그리고 그게, 오늘 처음으로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별건 아닙니다.’사람이 정말 별거 아닐 때 하는 말은 대개 저렇게 매끈하지 않다.나는 갑자기 아주 사소한 것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도화준은 늘 자기 얘길 하지 않았다.늘 시간을 정확히 쪼개 쓰는 사람 같았고,가끔 문장 중간에 아주 짧은 공백이 있었고,일할 때와 아닐 때가 다르다고 했고, 조용한 시간을 좋아한다고 했지만그 조용함이 편안한 사람의 조용함은 아닌 것 같을 때가 있었다.마치 누군가가 늘 자기 안을 단단히 잠가두는 사람처럼.나는 그 생각을 하는 순간,이상하게 아주 옅은 냄새 같은 걸 느꼈다.실제로 맡은 냄새가 아니라, 사람에게서 풍기는 어떤 기류.이 사람, 어쩌면 생각보다 어두운 쪽을 오래 지나온 사람일지도 모른다.그 감각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았다.그냥 여자들의 직감 같은 것에 가까웠다.웃고 있는데도 어딘가 한구석이 차갑고, 부드럽게 말하는데도 순간순간 칼날 같은 긴장이 스치는 사람.그리고 정말 최악인 건 그걸 느끼는 순간에도 나는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는 거였다.오히려 더 알고 싶었다.‘이건 좀 위험한데.’나는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차가운 액체가 내려가는데도 속은 오히려 더 뜨거워졌다.“이도희 씨.”도화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갑자기 조용해지셨네요.”나는 그를 잠깐 봤다.이 남자는 지금도 아주 멀끔했다.아까와 똑같이 잘생겼고, 아까와 똑같이 차분했고,아까와 똑같이 나를 보며 웃을 줄 아는 얼굴이었다.그런데 이제는 안다.그 얼굴 안에 내가 아직 전혀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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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오늘은 계속 그 말이 생각나요

보통 사람이라면 저 말에 한 발 물러서야 한다. 아니, 최소한 조금 조심이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내 안에서 먼저 올라오는 감정은 경계심보다도 어떤 종류의 슬픔에 가까웠다. 왜 저 사람이 저런 식으로 말했는지 알 것 같은, 알 수 없는데도 어렴풋이 짐작되는 종류의 기분. 마치 자기 쪽으로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면서도, 그 말이 이미 익숙한 사람처럼 들려서.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나는 그대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문득 강치열이 떠올랐다.강치열은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그 사람은 늘 더 쉽고, 더 단순하게 상처를 줬다. 화가 나면 짜증을 냈고, 귀찮으면 한숨을 쉬었고, 마음이 떠나면 지겹다고 말했다. 그래서 오히려 명확했다. 그 사람의 상처는 직선이었다. 무디고 거칠고, 대신 헷갈리지 않는 칼날.도화준은 달랐다.이 사람은 상처를 주는 방식조차 이상하게 조심스럽다.조심스럽다는 건,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도 그 칼날이 향한다는 뜻일지 모른다.나는 그 생각을 하다가 그대로 허탈하게 웃었다.“이걸 내가 왜 이렇게까지 생각하지….”정말 미친 짓이었다. 무료 체험 남친과의 며칠짜리 만남에 이렇게 깊이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그런데도 사람 마음은 꼭 이런 데서 끝도 없이 진지해진다. 마음이 먼저 가는 쪽은 늘 이성이 싫어하는 방향에 서 있으니까.핸드폰 화면이 다시 짧게 켜졌다.도화준에게서 메시지가 온 건 아니었다. 페이지온 단체방 알림이었다. 나는 괜히 아주 미세하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 사실이 스스로도 너무 한심해서 한참 동안 화면만 내려다봤다. 정말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그러다 결국, 강도윤이 보낸 피드백 문서를 다시 열었다.일을 해야 했다. 지금 같은 밤에는 더더욱. 감정은 문장으로 흘려보내지 않으면 자꾸 안쪽에 고인다. 나는 파일을 펼쳐놓고 강도윤이 표시해둔 부분들을 천천히 읽었다. 표지 카피 제안, 외전 아이디어, 종이책 버전에서 보강하면 좋을 장면들.그러다 한 문장에서 또 손이 멈췄다.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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