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บททั้งหมดของ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บทที่ 61 - บทที่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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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CES 일정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첫날 데모는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다. 둘째 날 오전에는 경쟁사의 기술 사양도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다. 예상보다 빠르게 따라붙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핵심 성능에서는 아직 이쪽이 우위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미국 테크 기업과의 비공개 미팅. 두 시간이 넘는 협상 끝에 최종 계약까지는 아니었지만 공급 조건을 구체화하는 단계까지 끌어냈다. 큰 고비 하나는 넘긴 셈이었다. 회의실을 나오자 누군가 박수를 쳤다. 긴장이 풀린 사람들이 웃었다. 구본일도 드물게 만족한 얼굴이었다. “다들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서하를 보았다. “진 팀장.” “네.” “오늘 잘했어요.”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지난 한 달간 거의 잠을 줄여가며 준비했던 서하는 그 한마디에 피로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본일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 뒤를 바라보던 서하의 옆으로 재혁이 지나갔다. 두 사람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재혁이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서하의 폰으로 메세지 하나가 왔다. [2701호, 11시] 재혁이었다. 서하는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밤 열한 시 십이 분. 서하는 호텔 엘리베이터에 혼자 타고 있었다. 층수가 올라갔다. 22, 23, 24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낮에는 하루 종일 단정하게 묶고 있던 머리를 풀었다. 재킷도 벗었다. 그리고 향수를 뿌렸다. 손목에 한 번, 귀 뒤에 아주 조금.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서하는 복도를 걸었다. 재혁의 방 앞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오래 기다리지 않아 문이 열렸다. 재혁은 낮의 슈트 차림과는 달랐다. 넥타이는 없었고 셔츠 단추도 위쪽 두어 개가 풀려 있었다. “들어와.” 재혁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문이 닫혔다. 찰칵. 그 작은 소리 하나로 하루 종일 유지했던 무언가가 끝났다. 전무와 팀장. 거래처와 파트너사. 그 모든 이름이 문밖에 남았다. 서하가 구두를 벗으며 말했다. 비로소 긴장과 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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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본일의 아침 루틴은 언제나 정확하고 일정했다. 견과류 10 알, 제철 과일 4 조각, 삶은 계란 하나, 노릇하게 구운 팬케이크 그리고 갓 짜낸 오렌지 주스 한 잔. 언제나 정확히 일곱 시 십 분에 식탁에 앉았다. 아침만은 신혼 때부터 아내가 직접 준비했다. 본일보다 여섯 살 어린 재벌가의 막내딸, 어릴 때부터 무용을 해온 재원이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제 손으로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본 적이 없던 여자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요리였다. 처음에는 팬케이크조차 엉망이었다. 가장자리를 태워먹거나, 뒤집다가 반으로 접어버리기도 했다. 삶은 계란은 반숙과 완숙을 오갔고, 과일은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그래도 아내는 매일 아침 주방에 섰다. 몇 달이 지나자 팬케이크는 정확히 본일이 좋아하는 정도로 구워졌고, 계란도 늘 같은 익힘이 됐다.과일은 4 조각, 견과류는 10 알, 주스에는 얼음을 넣지 않았다. 완벽한 아침이었다. 정작 아내는 아침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본일의 식탁은 언제나 조용하고 고요했다.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신혼 때는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자기는 아침을 먹으면 속이 불편하다면서도 본일이 식사를 끝낼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별것 아닌 이야기도 많이 했다. 어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 오늘 입고 나갈 옷, 곧 내한할 발레단 단장과의 미팅 이야기, 본일의 넥타이가 별로라는 이야기.“여보, 듣고 있어요?”“응.”“내가 방금 뭐라고 했는데?”본일이 대답하지 못하면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하나도 안 들었네.”그러고도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랬던 아내가 언제부터 식탁에 앉지 않게 되었는지 본일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 맞은편 의자가 비었다. 아침은 여전히 정확한 시간에 준비되어 있었지만, 아내는 없었다. 본일도 찾지 않았다. 왜 같이 안 먹느냐고 묻지도 않았고, 커피라도 마시고 가라고 부르지도 않았다.결혼하고 첫 일 년은 달랐다. 적어도 침실에서만큼은 그랬다. 둘은 꽤 자주 관계를 가졌다. 아내는 오랫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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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본일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았다. 달라졌을 것이다. 그건 이상할 만큼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을 아니까. 본일은 쉽게 사람을 제 안으로 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제 사람이라고 받아들인 것에는 좀처럼 마음을 거두지 못했다. 하물며 자신의 아이였다면,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낳아준 여자.아마 본일은 그 둘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다시 짰을 것이다. 퇴근 시간을 앞당겼을 것이고,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곧장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아이가 잠들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려고 했을 테고, 아내가 아이 때문에 밤을 새웠다면 다음 날 중요한 회의가 있어도 옆에 남았을 것이다. 그게 사랑인지 책임감인지 본일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본일에게 가족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한번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면 끝까지 책임지는 것. 그래서 가끔은 생각했다.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이 어쩌면 결정적이었을지도 모른다고.아이 하나만 있었어도, 이 지나치게 조용한 집에는 소리가 생겼을 것이다. 맞은편의 빈 의자에도 누군가 앉았을 것이고, 아내와 나눌 말도 지금보다는 많았을 것이다.그리고 어쩌면— 다른 여자를 생각할 틈조차 없었을지도 몰랐다. 본일은 그렇게 믿었다. 아이가 있었다면 자신은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준 여자에게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남편이 되었을 것이다.적어도, 자신은 그럴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본일은 알지 못했다.그 확신이 얼마나 잔인한 농담이 될 수 있는지를.자신이 그토록 쉽게 가정해본—내 핏줄.본일은 팬케이크를 한 조각 잘랐다. 잘 구워져 있었다. 본일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식탁 맞은편의 빈 의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오래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서혜원.라스베이거스로 향하던 비행기에서 본 이혼 기사, 웨딩드레스를 입고 웃고 있던 오래된 사진 그리고 자신의 휴대전화 속에 아직도 남아 있던 어린 시절의 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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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결국 따라갔다. 그냥 계속 달렸다. 평소라면 진작 돌아섰을 거리를 지나고, 익숙한 풍경이 사라지고 처음 보는 길이 이어졌다. 혜원은 가끔 뒤를 돌아봤다. 본일이 따라오는지 확인하고는 다시 앞을 봤다.그날따라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았다. 얼마나 왔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주일 뒤면 혜원은 뉴욕으로 떠날 예정이었다.그 사실을 둘 다 알고 있었지만 그날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치 말하지 않으면 오지 않을 일처럼.둘이 멈춘 것은 다리가 아파서가 아니었다. 혜원이 갑자기 브레이크를 잡았다. “야.” “왜.” “배고파.” 본일이 시계를 봤다. 점심시간은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가자고 했잖아.” “네가 더 신나서 따라왔잖아.” “누가?” “너.” “아닌데.“ “맞는데.” 혜원이 자전거에서 내렸다. “밥이나 먹자.” 둘은 자전거를 세워두고 둑길을 따라 올라왔다.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화성 근처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보다 조금 못 미쳤던 것 같기도 했다. 둘에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문제는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다. “뭐 먹지?” “아무거나.”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 거 몰라?” “네가 배고프다며.” “그러니까 빨리 찾아.” 그렇게 걷던 둘의 눈에 낡은 간판 하나가 들어왔다. [경양식 돈가스] 혜원이 멈췄다. “돈가스.” “먹게?” “응.” “여기서?” “왜?” 본일도 간판을 올려다봤다. 평소 둘이 다니던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혜원은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빨리 와.” 딸랑. 문에 매달린 종이 울렸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가게 안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둘은 창가에 앉았다. “뭐 먹을래?” 본일이 메뉴판을 펼치며 물었다. “돈가스.” “나도.” 경양식 돈가스 두 개. 혜원은 스프가 나오자마자 후추를 잔뜩 뿌렸다. “야, 그렇게 많이 뿌리면 맵겠다.” “맛있어.” “너 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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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뭐야. 왜 그렇게 봐?”본일이 피식 웃었다. “아니.” “뭐가 아닌데.” 혜원이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그냥 옛날 생각나서.” 혜원이 가게 안을 한 바퀴 둘러봤다. “나도.” 혜원이 싱긋 웃었다. “진짜 그대로네.” “안 그대로야. 다 바뀌었어.” “느낌이 그대로잖아.” 혜원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우리 여기 앉았었지?” “네가 여기만 앉았지.” “왜?” “창가 좋아한다고.” “내가?” “응.” “기억 안 나는데.” 본일이 헛웃음을 쳤다. “기억도 못 하면서 느낌이 그대로래.” “느낌은 기억나지.” 혜원이 메뉴판을 집었다. 몇 장 넘기던 손이 멈췄다. “어?” “왜.” “메뉴도 그대로네.” 본일이 보지 않고 말했다. “경양식돈가스?” 혜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 그걸 기억해?” “맨날 먹었잖아.” “맨날은 아니거든?” “열 번 오면 여덟 번.” “아홉 번은 아니고?” “그 정도였나.” 혜원이 웃었다. 바로 그 순간 본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혜원의 미소가 그를 이십 년 전 과거로 소환해버렸다. 지금보다 훨씬 긴 머리,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뉴욕에서 온갖 미슐랭 식당들을 가봐도 여기 돈가스가 제일 맛있다고 말하던 그때의 혜원이 지금의 얼굴 위로 겹쳤다. 본일은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사람이 이렇게 오래 알고 지낼 수도 있구나. 누군가의 열일곱을 알고 스물셋을 알고, 결혼하던 날을 알고, 그리고 이제는 이혼한 뒤의 얼굴까지 알고 있다는 것.혜원이 메뉴판 너머로 그를 봤다. “왜 그렇게 봐?” 본일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늙었나 해서.” 혜원의 눈이 커졌다. ”죽을래?” “별로 안 늙었네.” “너나 거울 봐.” “난 괜찮아.” “여전하네. 재수 없는 거.” 혜원이 웃었다. 본일도 따라 웃었다. 너무 쉬웠다. 이 여자와 웃는 일이. 그래서 오히려 본일은 조금 불편해졌다. 아침마다 맞은편의 빈 의자를 바라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십 년 만에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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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서하와 헤어진 뒤 유건은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까지 걸어가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아직 해소되지 않은 성욕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 한꺼번에 뒤엉켜, 머릿속 어딘가에서 병목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시간만 조금 더 있었더라면, 서하가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그렇게 어정쩡하게 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머릿속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서하의 향수, 기억의 끝에 무언가 매달려 있는 것 같은데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유건은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다 문득 걸음을 늦췄다. 몸에 남은 열과 머릿속의 찜찜함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둘 중 하나라도 해소하고 싶었다.전광판에 열차 도착 안내가 떴다. 유건은 타지 않았다. 잠시 플랫폼에 서 있던 그는 휴대전화를 꺼냈다.채원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오후에 채원이 보낸 것이었다.[오늘 올래?]유건은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도착한 열차를 그냥 보내버렸다. 통화 버튼을 누른다. 연결음을 들으면서 유건은 생각했다 지금은 그냥 다른 생각을 하고 싶다고. 그런데 유건은 몰랐다.사람이 어떤 생각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할수록, 그 생각은 더 집요하게 따라온다는 것을.--------------------몇 번의 신호 끝에 채원이 받았다.“와, 유건!”시끄러웠다.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 잔 부딪치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유건이 눈썹을 찌푸렸다.“너 어디야?”“나? 홍대.”“홍대?”“응. 술 마시는 중.”“누구랑.”“애들이랑.”애들? 유건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가까워졌다. 누군가 채원의 전화를 빼앗아 든 모양이었다.“유건이야? 야, 너도 와. 여기 홍대야. 댄스 동아리 애들이랑 술 마시는 중이야.”축구 동아리 친구였다. 유건은 잠깐 말이 없었다.뭐야, 집에 오라더니. 조금 마음이 상했다. 별것 아닌 일이었다. 채원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도 아니고, 유건이 온다고 미리 말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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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밖으로 나가자 밤공기가 차가웠다. 채원이 골목 입구에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있었다. 짧은 플레어스커트 아래로 하얗고 긴 다리가 드러났다. 크롭 블라우스는 위쪽 단추가 아슬아슬하게 풀려져 있어서 가슴골이 보였다. 술기운 때문인지 뺨과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채원은 팔짱을 낀 채 유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건을 발견하자마자 물었다. “뭔데.” 유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나오라 그랬어?” 유건은 잠깐 그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너 쟤랑 친해?” “누구?” “네 옆에 앉아 있던 새끼.” “그냥 얼굴만 아는 정도.” 그 대답에 유건의 눈빛이 묘하게 달라졌다. “근데 그렇게 놀아?” 채원의 표정이 굳었다. “뭐?” 유건은 그제야 알았다. 잘못 말했다. 그런데 이미 늦었다. 채원이 팔짱을 풀었다. “야.” 목소리가 달라졌다. “너 지금 나한테 뭐라는 거야?” 유건도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그래. 그렇게 술 먹고 아무 남자랑 좋다고 붙어 있는 거 보기 싫어.” 채원의 얼굴에서 취기가 싹 가신 것 같았다. “아무 남자?” 입꼬리가 비틀렸다. “네가 무슨 권리로?” “뭐?”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네가 상관해?” “야—” 유건이 채원의 어깨를 잡았다. 채원이 그 손을 탁 쳐냈다. “말해 봐.” 채원이 유건을 똑바로 바라봤다. “네가 내 남친이야?” “…….” “아니잖아.” 유건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채원은 잠시 기다렸다. 혹시라도 유건이 무슨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러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자 채원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넌?” “뭐.” “넌 오늘 오후부터 뭐 했는데?” 유건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연락도 다 씹었잖아.” 유건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채원은 그것마저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봐.” “…….” “전에 주말 내내 연락 없었을 때도 그랬어. 오늘도 그렇고.넌 네가 필요할 때만 나 찾잖아” 채원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하고 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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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그날은 어느 쪽도 이름 붙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격정적인 감정들이 더 거칠게 둘을 밀어붙였다. 유건은 블라우스 단추를 뜯듯이 풀었고 치마 안의 팬티를 찢어버릴듯이 벗겨버렸다. 채원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유건의 바지 지퍼 안의 달궈진, 아직 서하의 애액이 남아있을지도 모를 성기를 무아지경으로 빨아댔다. 유건은 1시간 전까지 서하 안을 헤집던 성기를 채원의 안에 밀어 넣었다. 부풀어오른 젖꼭지를 오늘 처음 빠는 것처럼 달게 핥았다. 서로를 달래려는 손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금 전 골목에서 미처 뱉지 못한 말들을 대신 쏟아내듯 서로에게 매달렸다. 서하.그 사실을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채원이 유건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너 진짜 싫어.” 숨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유건이 채원의 입술을 막았다. “아까도 들었어.” “재수 없어.” “그것도.“ 채원이 다시 유건을 끌어당겼다. 누가 더 화가 났는지, 누가 더 상대를 원하는지 겨루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가까워질수록 이상할 만큼 차이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시간 차이가 거의 없어서였을까.서하와 채원. 둘은 전혀 달랐다. 서하는 붉게 만개한 꽃 같았다.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고 있었고, 유건이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서하와 함께 있으면 유건은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향도, 눈빛도, 손끝도 이미 완성되어 있는 여자였다. 반면 채원은 이제 막 봉오리를 터뜨리는 연한 꽃 같았다. 그렇다고 순진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멋대로였고, 당돌했고, 유건을 화나게 하는 방법도 기가 막히게 잘 알았다. 그런데 유건의 작은 반응 하나에도 솔직했다. 화를 내다가도 흔들렸고, 밀어내다가도 다시 끌어당겼다.그래서 유건 역시 채원 앞에서는 달라졌다. 서하에게서는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면, 채원과 있을 때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감정이 튀어나왔다.질투, 서운함, 분노, 그리고 욕망. 모든 것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아까 걔랑 왜 그렇게 웃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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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웠다.남자가 여자의 가방끈을 한번 잡아당기며 무언가 말했다. 여자가 웃자 남자가 이번에는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쌌다. 굳이 의식해서 하는 행동처럼 보이지 않았다. 너무 익숙해서 그냥 손이 그곳으로 가는 사람처럼. 남자가 몸을 숙여 여자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여자가 웃으며 그의 팔을 가볍게 쳤다. “…….” 채원은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남자가 여자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여자는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채원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뭐야. 사이 좋잖아.괜히 부러웠다. 유건에게 부모님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적은 없었다.그런데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화목한 집에서 자란 모양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유건의 아빠보다 꽤 어려 보이는데 몇 살 차이지?채원은 혼자 쓸데없는 계산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때 공항 앞에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멈췄다. 기사가 내려 트렁크를 열었다. 남자가 보스턴백을 넘겨주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여자가 먼저 탔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대 부딪치지 않도록 해주고 뒤따라 차에 올랐다. 잠시 후 세단이 공항을 빠져나갔다. 채원은 멀어지는 차를 바라봤다.그러다 휴대폰을 꺼냈다. 유건과의 채팅창을 열었다.[나 제주공항에서 너희 아빠 봄ㅋㅋ 옆에 엄마도 계시더라 두 분 사이 되게 좋아 보이던데?]그렇게 보내려다가 채원은 그냥 화면을 껐다. -굳이 이런 것까지 말할 필요 있나. 어차피 유건에게는 매일 보는 부모일 텐데.채원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마침 버스 도착 알림이 떴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생각했다. 유건은 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구나.----------------------토요일 아침, 서하는 아직도 침대에서 느기적거리고 있었다. 어제까지 야근을 한 탓인지 잠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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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공항 앞에는 검은색 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가 내려 재혁의 보스턴백을 받아 트렁크에 실었다. 서하는 그제야 물었다. “렌터카 아니었어요?” “맞아요.” “근데 기사님도 있어요?“ “운전하면 술 못 마시잖아.” “아.” 재혁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타요.” 서하가 차에 올라타고 잠시 후 재혁이 옆에 앉았다. 차가 공항을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공항 반대편에 있는 오성급 호텔이었다. 창밖 풍경이 조금씩 달라졌다. 야자수를 닮은 나무들이 지나가고, 건물 사이로 파란 바다가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서하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손을 옆으로 움직였다. 재혁의 손등에 손가락이 닿았다. 재혁이 내려다봤다. 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손을 잡았다. 재혁 역시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벌려 깍지를 끼웠다. 그리고 맞잡은 두 손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서하는 잠시 그 손을 바라봤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재혁이 물었다. “왜 웃어요?” “그냥.” “뭐가 그냥인데.”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속초로 가던 버스에서도 이렇게 손을 잡았었다. 하지만 똑같이 깍지를 끼고 있는데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유건의 손에서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고, 재혁의 손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긴장됐다.창밖으로 바다가 길게 나타났다. 수평선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제야 정말 제주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서하는 재혁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고 재혁도 마주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그리고 공항 로비에는, 조금 전 두 사람을 화목한 부부라고 생각했던 스무 살 여자가 남아 있었다. --------------------- 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시야를 채운 건 창이었다. 벽 한쪽을 거의 전부 차지한 통유리 너머로 제주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오후의 햇빛이 수면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서하는 가방도 제대로 내려놓지 않은 채 창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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