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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서하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창밖이 거의 어두워져 있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수평선 끝에 마지막 주홍빛만 조금 남아 있었다. 옆에서는 재혁이 누운 채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하가 몸을 뒤척였다.“몇 시예요?”“일곱 시 조금 넘었어.”“벌써?”“배고파?”“응.”“뭐 먹고 싶어?”서하는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제주도 왔으니까 갈치?”재혁이 피식 웃었다.“그럴 줄 알았어.”“왜요.”“뻔하니까.”“그럼 제주도까지 와서 햄버거 먹어요?”재혁은 휴대전화로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서하는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문득 이상했다. 이 남자의 벗은 몸은 이제 낯설지 않았다. 어깨에 작은 흉터가 있다는 것, 잘 때 어느 쪽으로 돌아눕는지,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 기분이 좋을 때 입꼬리가 어느 쪽부터 올라가는지도 조금씩 알게 됐다. 그런데 정작 박재혁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서하는 생각하다가 불쑥 물었다.“재혁 씨 몇 살이에요?”휴대전화를 보던 재혁이 고개를 돌렸다.“갑자기?”“생각해보니까 정확히 모르잖아.”“지금까지 그것도 모르고 나랑 잤어?”“그러게요.”서하가 웃었다.“좀 위험하게 살았네.”재혁이 나이를 말했다. 서하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생각보다 많네.”“…….”“왜요.”“그 말을 굳이 해야 하나.”서하가 웃음을 터뜨렸다.“미안해요.”“안 미안해 보이는데.”“근데 그렇게 안 보여요.”“됐어.”재혁이 다시 휴대전화를 봤다. 서하는 잠깐 웃다가 다시 그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가족은요?”재혁의 손가락이 멈췄다.“가족?”“응.”“갑자기 신상조사야?”“아니.”서하가 옆으로 돌아누웠다.“생각해보니까 내가 재혁 씨에 대해서 진짜 아는 게 없어서.”“뭐가 궁금한데.”“그냥 이것저것.”“물어봐.”서하는 베개에 턱을 괴었다.“부모님은?”“계셔.”“형제는요?”재혁이 대답했다.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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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다음 날 아침, 서하가 먼저 눈을 떴다. 커튼을 제대로 치지 않고 잔 탓에 방 안이 지나치게 밝았다. 서하는 눈을 찡그리며 몸을 뒤척였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잠깐 멍하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재혁은 창가에 있었다. 호텔 가운을 대충 걸친 채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옆에는 커피가 놓여 있었다. 서하는 베개를 끌어안았다. “일해요?” 재혁이 돌아봤다. “깼어?” “쉬려고 제주도 온 거 아니었어요?” “그랬지.” “근데?” “이게 쉬는거야, 나한텐.” 서하가 베개를 던졌다. 재혁이 한 손으로 받아냈다. “아침부터 성격 나오네.” “휴가까지 와서 노트북 보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재혁이 노트북을 덮었다. “됐지?” “진작 그러지.” 서하가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니 바라보던 재혁이 물었다. “조식 먹을래?” “몇 시인데요?” “아홉 시.” “싫어.” “그럼?” 서하는 이불 속에서 얼굴만 내놓았다. “라면.” 재혁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요.” “오성급 호텔 와서 라면?” “제주도잖아요.”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몰라요. 그냥 먹고 싶어.” 재혁이 피식 웃었다. “나가자.” “어디를요.” “라면 먹으러.” 서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먹고 싶다며.” “룸서비스 시키면 되잖아요.” “진짜 제주도 라면을 먹어야지.“ 재혁이 가운을 벗으며 말했다. “씻어. 바다 보면서 먹게.” 서하는 침대 위에서 그를 빤히 바라봤다. 이 남자는 가끔 이상했다.프레스티지석을 고작 한 시간 타려고 끊고, 기사가 딸린 차를 부르고, 스위트룸을 아무렇지 않게 예약하면서 라면 먹고 싶다는 말에는 직접 차를 타고 나가자고 한다. 재혁이 서하를 데리고 간 곳은 바닷가 근처 작은 분식집이었다. 재혁은 어제와 전혀 다른 차림이었다. 검은 바람막이 재킷 안 줄무늬 폴로 티셔츠에 면바지, 선글라스. 서하는 모자를 눌러쓰고 그 옆에 앉았다. 둘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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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수상한데.” “뭐가.” “재혁 씨.” “내가 왜.” “옛날 여자랑 왔던 데죠?” 재혁이 대답하지 않자 서하가 웃었다. “맞네.” “그게 중요해?” “아뇨.” 서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정말 중요하지 않아야 했다. 결혼까지 했던 남자가 과거가 없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런데 조금 전 직원의 말이 귀에 남았다.— 늘 이쪽을 좋아하셨죠. 늘. 한 번이 아니었다. 서하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최대한 무심하게 던졌다. “전처랑?” 이번에는 재혁이 바로 대답했다. “응.” 서하의 손가락이 물잔을 천천히 돌렸다. “많이 왔어요?” “몇 번.” “여행?” “응.” “사이 좋았나 봐요.“ 재혁의 눈이 서하에게 향했다. “그걸 왜 물어.” “그냥.” “또.” 서하가 웃었다. “오늘 내가 질문이 많죠?” “많네.” “싫어요?” 재혁은 잠시 서하를 바라봤다. “아니.” 그 대답 때문에 오히려 서하가 말을 멈췄다. 음식이 나오고 둘은 한동안 조용히 식사를 했다. 그러다 서하가 물었다. “예뻤어요?” 재혁이 젓가락을 멈췄다. “누가.” “전처.” “…….” “왜요. 그것도 대답하기 싫어요?” 재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 오늘 왜 이래.” “궁금하다니까.” “예뻤어.” 대답이 너무 간단해서 서하가 오히려 당황했다. “많이?” “응.” “나보다?” 재혁이 서하를 빤히 바라봤다. 서하는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질문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니, 취소.” 재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취소해.” “내가 너무 없어 보여서.” “이미 늦었는데.” “잊어요.” 서하가 술잔을 들었다. 재혁이 웃었다. “질투하네.” “아니거든요.” “맞는데.” “아니라고.” “그럼 왜 비교해.” 서하가 대답하지 못했다. 재혁이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달라.” “뭐가요.” “둘이.” 서하가 눈을 들었다. 재혁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게 더 신경 쓰였다. “뭐가 다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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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어느 순간 웃음은 사라지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 남았다. 서하가 팬티 안으로 손을 넣는다. 뜨겁다. 서하가 재혁의 손을 잡아 자신의 안으로 넣는다. 재혁이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서하를 본다. 그리고 천천히 안을 애무한다. 둘은 키스를 하면서 서로의 성기를 만진다. 서하가 천천히 위아래를 쓰다듬을 때 재혁이 손가락을 하나 둘 씩 안으로 넣는다. 처음엔 닫혀있던 아래가 서서히 벌어지더니 결국엔 손가락이 4개가 들어갔고 질퍽하게 애액이 흘러나온다. 서하가 다리를 올려 더 벌어지게 하고는 재혁의 몸 위로 다리를 걸친다. 곧 서로의 팬티까지 벗겨지고 재혁이 서하의 다리를 좀더 가깝게 잡아당기고는 달궈진 성기를 서하의 질펀한 안으로 밀어넣는다. 이불 안의 온도가 빠르게 높아진다. “아…흐음.“ 서하가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좋아 너무.“ 재혁이 더 세게 밀어 넣는다. 서하의 가슴이 재혁의 탄탄한 가슴 근육에 일정한 리듬으로 닿는다. 아직 잠기운에 늘어져 있던 몸이 흥분으로 일순간에 깨워진다. 이불 안에서 뜨거운 마찰이 지속되고, 서하는 재혁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피부에 닿는 체온과 귓가에 들리는 숨소리, 창밖의 일정한 빗소리가 뒤섞였다. 아직 잠기운에 늘어져 있던 몸이 순식간에 깨어나는 것 같았다. 서하는 재혁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입술, 턱, 뺨 다시 입술. 문득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다 덮어버리고 싶어. 처음에는 몸만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제주에 와서 처음 알게 된 재혁의 과거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결혼했던 여자, 스무 살짜리 아들, 자신은 알지 못하는 긴 세월, 그 여자가 재혁과 함께했던 수많은 밤과 아침, 둘만 아는 장소와 기억. 서하는 그게 싫어졌다. 질투라고 인정하기에는 아직 자존심이 상했고, 아무렇지 않다고 넘기기에는 이미 너무 신경 쓰였다. 그래서였을까. 재혁의 진흙탕 같은 기억에 자신의 체액을 들이부어서 깨끗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광안리도, 제주도 그가 앞으로 보게 될 바다도. 언젠가는 박재혁이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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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그런데 곧 유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자기가 아는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박재혁은 한번 결정하면 좀처럼 결정을 뒤집지 않았다. 아니, 좀처럼이 아니라 유건의 기억 속에서는 한 번도 없었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 수는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몇 달이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데 일단 결론을 내리고 나면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필요 없는 것은 버렸고, 끝난 것은 끝난 것으로 두었다. 칼로 베듯이. 미련 때문에 이미 내린 결정을 되돌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때는 그런 아빠가 차갑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지금은 조금 부러웠다.— 나도 저런 걸 좀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그랬다면 지금 자신이 이런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하를 만나고, 남자친구가 있는 채원과도 만나고. 서하와 함께 있을 때는 서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서하와 떨어져 있으면 채원이 궁금했다. 채원이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났고, 그렇다고 서하에게 가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쪽을 놓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 간단한 결정을 못 했다. 이 여자에게 갔다가, 저 여자에게 갔다가. 마치 탁구공처럼.유건은 헛웃음을 흘렸다. “병신 같네.”아빠라면 안 그랬을 것이다. 끝낼 거면 끝냈을 테고, 가질 거면 가졌을 것이다. 적어도 두 선택지 사이를 오가며 자기 마음이 뭔지도 모르는 채 버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그런 아빠가 끝내기로 한 엄마와 다시 제주도 여행을 간다고? 유건의 미간이 천천히 좁아졌다. 엄마가 젊어 보이기는 했다. 원래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전제가 틀렸다면? 채원이 본 여자가 엄마가 아니었다면. 아빠, 엄마에게 다른 이성이 있을수도 있다 . 그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뭔가 걸렸다. 아주 작은 가시 하나가 머릿속에 박힌 기분이었다. 유건은 다시 무거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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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기억나.”“뭐가 제일 기억나는데.”“맨발.”혜원이 웃었다.“그게 그렇게 충격이었어?”“미친 여자인 줄 알았지.”“그래서 구두도 신겨줬어?”“발 밟힐 것 같아서.”“거짓말.”“뭐가.”“나 예뻐서 그랬잖아.”재혁이 혜원을 쳐다보다가 인정했다.“그것도 있고.”혜원이 크게 웃었다.“솔직해졌네.”“나 원래 솔직했어.”“당신이?”“너한테는.”혜원의 웃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러나 금방 다시 맥주를 마셨다.“그럼 하나만 더 솔직하게 대답해봐.”“뭔데.”“나 재혼해도 돼?”재혁의 시선이 혜원에게 향했다.“갑자기?”“갑자기는 아니고.”“남자 있어?”혜원은 대답하지 않고 대신 재혁을 바라봤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남자가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자신을 바라본 것. 그것만으로 혜원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있으면?”“하고 싶으면 해.”혜원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진짜?”“왜.”“예전 같으면 죽인다고 했을 것 같은데.”“누구를.”“나랑 결혼한다는 남자.”재혁이 헛웃음을 흘렸다.“언제적 얘기야.”“그랬잖아.”“그때랑 지금은 다르잖아.”간단한 대답이었다. 혜원은 맥주 캔을 만지작거렸다. 재혁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바람이 불었다. 혜원의 머리카락이 얼굴 앞으로 흩어졌다. 재혁이 무심코 손을 들었지만 곧 멈췄다. 예전 같았으면 귀 뒤로 넘겨줬을 것이다. 혜원은 그 손을 봤다. 재혁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깨달았는지 손을 내렸다. 혜원이 말했다.“왜.”“뭐가.”“해.”“뭘.”“하려던 거.”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혜원이 직접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겁쟁이 됐네.”“쓸데없는 짓을 안 하는 거야.”“나한테 머리카락 넘겨주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지금은.”혜원이 이번에는 웃지 못했다. 한동안 강을 바라보다가 물었다.“나랑 자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재혁의 눈이 혜원에게 돌아왔다. 혜원은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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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재혁이 그 인턴을 다시 만난 건 퇴사 후 몇 달 뒤였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의 만남. 직급도, 회사도, 이해관계도 모두 벗어던지고 남자 대 여자로 마주한 것이 바로 그때였다.런던에서 사장단과의 출장을 마치고 나니 일주일 정도 여유가 생겼다. 원래대로라면 곧장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재혁은 귀국편을 바꿨다. 파리를 거쳐 취리히에서 아웃하는 일정으로 항공권을 변경하고, 오랜만에 혼자 여행을 하기로 했다. 파리는 혜원과 자주 왔던 곳이었다. 혜원은 화려한 도시를 좋아했다. 파리, 밀라노, 바르셀로나, 뉴욕. 좋은 호텔과 좋은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미술관을 좋아했다. 직업 때문이기도 했다.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퐁피두. 혜원과 파리에 오면 하루에 미술관을 두 군데씩 돌 때도 있었다. 재혁은 미술에 별다른 조예가 없었다. 혜원이 그림 앞에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으면 옆에서 기다렸고, 설명하면 들었다.“이거 봐. 색 미쳤지?”재혁에게는 그냥 파란색이었다.“응.”“뭘 응이야. 제대로 봐.”그러면 다시 봤다. 그래도 파란색이었다. 혜원은 그런 재혁을 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였다. 미술관에는 가지 않고 대신 성당에 갔다. 몽마르트르 언덕 끝에 자리한 사크레쾨르 대성당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호텔을 나와 걷다 보니 그쪽이었고, 언덕 위로 하얀 돔이 보이기에 올라갔다. 계단에는 사람이 많았다. 잔디밭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기타를 치는 남자,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재혁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밖과 달리 안은 어두웠다. 촛불이 곳곳에서 흔들렸다. 성당 안에서는 오르간 연주가 한창이었다. 높은 천장 어딘가에서부터 묵직한 음이 내려앉았다. 낮게 울린 소리는 돌기둥 사이를 타고 번졌다가 다시 천장으로 올라갔다. 하나의 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음 음이 겹쳐지면서 거대한 공간 전체가 천천히 진동했다 종교는 없었다. 성당에 들어온 것도 특별한 이유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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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다소 늦은 점심이었다. 몽마르트르 언덕 초입에서 관광객이 몰리는 큰길을 조금 벗어나자 작은 식당 하나가 나왔다. 재혁이 몇 년 전부터 북마크해두고도 이상하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짙은 녹색 차양 아래 금빛으로 식당 이름이 적혀 있었고, 유리창에는 흰 페인트로 그날의 메뉴가 삐뚤빼뚤 적혀 있었다. 문 옆에는 분필로 쓴 작은 칠판도 세워져 있었다.오늘의 요리>문을 열자 작은 종이 딸랑 울렸다. 안은 생각보다 좁았다. 두 사람이 마주 앉으면 무릎이 닿을 것 같은 작은 나무 테이블들이 다닥다닥 놓여 있었고, 오래 사용해 모서리가 닳은 의자들이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크림색 벽에는 빛바랜 파리 사진과 작은 풍경화들이 아무렇게나 걸려 있었다.천장에서는 노란빛의 조명이 낮게 떨어졌다. 주방 쪽에서는 버터에 무언가를 볶는 고소한 냄새와 고기를 오래 끓인 묵직한 향이 섞여 흘러왔다. 점심시간은 이미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았다. 접시는 비어 있는데 와인은 남아 있었다.옆 테이블의 중년 부부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사이에 두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창가에 앉은 노인 둘은 이미 식사를 끝낸 듯한데도 바게트를 조금씩 뜯어 먹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빠르게 먹고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식사가 끝나도 시간이 끝나지 않는 곳 같았다.“여기 분위기 좋은데요?”인턴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그래?”재혁도 자리에 앉으며 천천히 안을 둘러봤다.“다행이네.”“부장님이 찾은 데예요?”“응. 예전부터 한번 와보고 싶었어.”“그런데 왜 안 왔어요?”재혁은 잠시 생각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파리에는 혜원과도 여러 번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곳에는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다.“기회가 없었나 보지.”동양인으로 보이는 젊은 웨이터가 다가왔다. 검은 앞치마를 두른 그는 능숙한 프랑스어로 인사를 건넨 뒤 두 사람이 관광객이라는 것을 알아챘는지 영어로 오늘의 메뉴를 설명했다.레드와인에 소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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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재혁과 인턴은 여유롭게 식사를 했다. 인턴 동기들의 소식, 예전에 함께 일했던 회사 사람들 이야기, 서로의 근황까지. 이미 식사는 끝났는데도 대화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주변 테이블도 비슷했다. 접시를 비운 뒤에도 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둘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재혁은 문득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격의 없이 대화해본 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다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침묵이 생겨도 어색하지 않았고, 상대의 말을 재거나 그 속뜻을 짐작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물이 흐르듯 편했다. 재혁이 계산을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오자 인턴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잘 먹었습니다.”“뭘, 나도 덕분에 제대로 한 끼 먹었어.”“이제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인턴이 예의 그 싱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다시 오후의 햇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글쎄. 딱히?”재혁이 되물었다.“넌?”“저는 여기 가보려고요.”인턴이 휴대폰을 꺼내 재혁에게 내밀었다. 화면에는 높은 스테인드글라스로 둘러싸인 성당 내부 사진이 떠 있었다.—생트샤펠시테섬에 있는 오래된 성당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도 멀지 않았다.“원래 노트르담 가려고 했는데 지금 공사 중이래서요.”인턴이 화면을 넘기며 물었다.“여기는 가보셨어요?”“아니.”“진짜요?”“응.”재혁은 파리에 꽤 자주 왔다. 노트르담에도 여러 번 갔다. 생트샤펠 앞을 스쳐 지나간 적 역시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번도 안으로 들어가본 적은 없었다.“아, 잘됐다.”인턴이 휴대폰을 내렸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같이 가요.”재혁은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 점심을 함께 먹은 것도 우연이었다. 여기서 헤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게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절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그래.”대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가자.”인턴이 웃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재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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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그 다음부터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자연스럽게 함께 걸었다. 생트샤펠을 나와 시테섬을 벗어나 다리를 건넜다. 오후의 센강은 햇빛을 받아 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인턴은 여전히 이야기가 많았고, 재혁은 대부분 들어주는 쪽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이었다. 옆에서 자전거 한 대가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어.”재혁이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인턴의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사이클이 두 사람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괜찮아?”“네. 깜짝이야.”재혁은 그제야 팔을 풀었다. 아주 잠깐이었다.ㅠ그런데 아까보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둘 다 그것을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더 걷다가 재혁이 센강을 바라봤다. 유람선 한 척이 천천히 강물을 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배 탈래?”“좋아요.”배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둘은 2층으로 올라가 난간 가까이에 섰다. 배가 출발하자 바람이 세졌다. 강물이 양쪽으로 갈라지고 오래된 파리의 건물들이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바람에 인턴의 앞머리가 얼굴 위로 계속 흩날렸다. 재혁은 별생각 없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 넘겼다.“아, 제가 할게요.”인턴의 목소리가 순간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의 편안함과 달리 미세하게 긴장한 목소리. 재혁도 그제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다.“어. 그래. 미안.”손을 거두었다.“습관처럼.”인턴이 어색한 분위기를 넘기려는 듯 웃었다.“와, 부장님 되게 아내분한테 다정하신가 보다.”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 배가 완만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건물 뒤에 가려져 있던 에펠탑이 모습을 드러냈다.“와.”인턴이 금세 난간 쪽으로 몸을 돌렸다.“예쁘네요. 역시.”작은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재혁이 손을 내밀었다.“줘봐.”“네?”“찍어줄게.”“아, 네. 그럼 부탁 좀.”인턴이 카메라를 건넸다. 에펠탑을 등지고 난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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