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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얼마나 지났을까. 인턴이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비도 그쳐 있었다. 자신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고, 몸 위에는 얇은 이불이 덮여 있었다. TV도 꺼져 있었다.재혁은 창가에 서서 어두워진 센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잘 잤어?” “네…….” 인턴이 몸을 일으켰다. “몇 시예요?” “열한 시.” “네?” 휴대폰을 확인한 인턴이 화들짝 일어났다. “저 가볼게요.” “지금?” “네.” “아직 세탁물도 안 왔어.” “내일 다시 와서 찾아갈게요.” 서둘러 이불을 정리하는 모습을 재혁이 바라봤다.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그것까지 하면 너무 민폐예요.” “그럼 이 시간에 혼자 갈 거야?” “지하철 타면 되죠.” “여긴 한국 아니야.” “그래도…….” 재혁은 잠시 생각하다 휴대폰과 지갑을 챙겼다. “여기 있어.” “네?” “내가 다른 방 잡아서 잘게.” 인턴의 눈이 커졌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괜찮아.” 재혁이 웃었다. “후배 사랑이라고 생각해. 부담 갖지 말고.” 문 쪽으로 걸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인턴이 그의 팔을 잡았다. 재혁이 멈췄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붙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그래도…….” “괜찮아. 이 정도는 벌어.” 재혁이 웃으며 그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때였다. “그냥.” 인턴이 말했다. 재혁이 눈을 들었다. “같이 자요.” 말을 내뱉고 나서야 자신도 놀란 듯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도 손을 놓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재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야?” 인턴이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눈은 피하지 않았다. “네.” 짧은 대답이었다. 재혁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를 끌어당겼다. 차가운 몸이 품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비의 냉기가 남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참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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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귀국한 뒤 재혁은 인턴을 더 이상 만나지 않기로 했다. 그 결정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을지는 안다. 물론 인턴도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에 첫날과는 달리 더 적극적으로 재혁을 안았다. 그녀도 알았을테니까. 재혁은 그녀가 한 가지는 알아주었으면 했다. 함께한 시간이 짧았다고 해서 마음까지 얕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혜원과 비교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여기서 끝내는 것이 맞았다. 뻔뻔하게 두 여자를 모두 곁에 두고 살아갈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끝냈다.적어도 재혁은 끝냈다고 생각했다. 몇 달 뒤, 문자 한 통이 오기 전까지는.[재혁씨]그 호칭을 보는 순간부터 불길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재혁은 전화를 걸었다. 그제야 알았다.인턴은 재혁의 회사를 나온 뒤 다른 회사에 정규직으로 취업했다. 그곳에서 만난 입사 동기에게 오랫동안 스토킹을 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호감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 거절하면 알아들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남자는 알아듣지 않았다. 연락하지 말라고 하면 사과했고, 며칠 뒤 다시 연락했다. 번호를 차단하면 다른 번호로 전화했고, 퇴근길에 기다렸다가 우연히 만난 척했다.거절이 분명해질수록 행동은 오히려 집요해졌다. 결국 인턴은 회사를 그만두고 집을 비우고 전화번호를 바꿨다. 그것으로 끝날 줄 알았다. 아니, 끝났다고 믿고 싶었다. 한동안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 모아둔 돈도 조금 있었다. 다시 취업하면 언제 이렇게 긴 시간을 비울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게 파리 여행을 온 것이었고 재혁과 만난거였다. 귀국한 뒤에는 다시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한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 이력서를 넣고, 연락이 오면 면접을 보러 다녔다. 오랜만에 정장을 꺼내 입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날도 많았다. 그래서 정말 끝난 줄 알았다. 회사를 그만뒀고, 그 남자와 마주칠 이유도 없어졌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면접을 마치고 나오다가 그를 다시 봤다.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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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저녁은?” “별로 생각 없어요.” “오늘 뭐 먹었는데.” 대답이 없었다. 재혁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당연하게도 텅 비어 있었다. “내가 맛있는 거 해줄까?” 그제야 인턴이 고개를 들었다. “재혁씨가요?” “왜, 못할 것 같아?”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가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재혁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파스타 어때?” 인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혁은 사온 봉투를 뒤졌다. 양송이를 썰고 베이컨을 잘랐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조금 굵은 링귀니 면을 넣었다. 물을 기다리는 동안 문득 파리가 떠올랐다. 마지막 날이었다. 작은 식당에서 파스타를 먹다가 그녀가 말했다.— 저 까르보나라 제일 좋아해요.그러면서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지. 재혁은 그때 처음 알았다. 여자가 맛있는 것을 먹을 때는 생각보다 훨씬 예뻐 보인다는 것을. 그 기억을 따라 크림소스를 만들었다. “먹어봐.” 인턴이 포크로 면을 조금 말아 입에 넣었다. 몇 번 씹던 얼굴이 달라졌다. 며칠 동안 꺼져 있던 눈에 처음으로 생기가 돌았다. “너무 맛있는데요?” 재혁이 웃었다. “다행이네. 많이 먹어.” 처음에는 몇 입만 먹을 것 같던 사람이 결국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재혁이 그릇을 치우려고 일어나는데 인턴이 불렀다. “재혁씨. ” “응.” 눈에 물기가 차 있었다. “고마워요.” 재혁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끌어안았다.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괜찮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품 안에서 작은 몸이 움직였다. 인턴의 팔이 재혁의 등을 감쌌다. 그러자 기억하고 있던 냄새가 났다.파리의 밤, 희미한 달빛, 자신의 품 안에서 떨고 있던 몸. 오래전에 끝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냄새 하나로 너무 쉽게 되살아났다. 재혁은 눈을 감았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다.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고, 밥을 먹이고, 괜찮은지 확인한 뒤 돌아가려고 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래야 했다. 그때 인턴이 말했다. “오늘 밤…… 같이 있어줘요.”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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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혜원이 먼저 알아챈 것은 아주 사소한 변화들이었다. 증거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것들. 토요일 아침이었다. 혜원은 반라로 침대에 엎드린 채 휴대폰을 찾고 있었다. “내 가방 못 봤어?” 욕실에서 면도하던 재혁이 턱을 닦으며 나왔다. “소파 옆.” “가져다줘.” “네가 가져가.” “치사해.” 혜원이 맨발로 침실을 나갔다. 거실 테이블 위에 재혁의 휴대전화가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문자가 와서 화면이 켜졌다. 재혁이 욕실에서 나왔다. 혜원이 무심코 화면을 보려는 순간 재혁이 먼저 휴대전화를 집었다. “뭐야?” “뭐가.” “요즘 핸드폰 많이 보네.” 재혁은 화면을 확인하고 옅게 미소짓더니 짧게 답장을 보냈다. “일 때문에.” “토요일 아침 일곱 시에?” “응.” 혜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열심히 사네, 박재혁.” 재혁은 피식 웃고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혜원도 별생각 없이 가방 안의 휴대폰을 꺼냈다. 이어서 샤워를 마친 혜원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다가 세면대 위에 놓인 병을 집었다. “이거 뭐야?” 재혁이 셔츠 단추를 채우며 거울을 봤다. “로션.” “그건 나도 알아.” 혜원이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당신 이거 안 썼잖아.” “바꿨어.” “왜?” “전에 거 별로라서.” 혜원이 웃었다. “십 년 넘게 잘만 쓰더니?” “사람 취향도 바뀌지.” 그 옆에는 처음 보는 클렌저도 있었다. 혜원이 하나씩 들어봤다. “이것도?” “응.” “누가 사줬어?” 재혁이 넥타이를 매다 혜원을 쳐다봤다. “내가 샀어.” “당신이?” “왜.” 혜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신기해서.” 병을 내려놓고 혜원이 욕실을 나갔다. 어느 날은 밤 열한 시가 넘어서 혜원에게 전화가 왔다. 재혁은 서재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응.” —나 오늘 안 들어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예전이었다면 물었을 것이다. 어디냐고, 누구랑 있느냐고, 몇 시에 들어오느냐고. 그 때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재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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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그날 혜원은 어떻게 운전해서 집까지 돌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신호를 몇 번 받았는지, 무슨 길을 지나왔는지, 라디오에서 무슨 노래가 흘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지하주차장이었다.시동을 껐다. 차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혜원은 핸들 위에 두 손을 올리고그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깨만 작게 떨렸다. 그러다 한 번 숨이 무너지자 참았던 것이 한꺼번에 터졌다.“미친 새끼…….”목소리가 갈라졌다.“진짜…… 미친 새끼.”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화가 났다. 그 여자에게도 화가 났고, 재혁에게는 더 화가 났다. 그런데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병원으로 가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걱정했는지였다.—많이 다친 건 아닐까, 수술해야 하는 건 아닐까, 왜 전화를 안 받지, 혹시 정말 잘못된 건 아닐까.병원까지 오는 내내 심장이 내려앉아 있던 자신이 갑자기 너무 우스워졌다.다른 여자를 지키다가 다친 남편을 걱정하며 달려간 여자. 그게 자신이었다. 혜원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도 계속 흘렀다.“나쁜놈…….”이번에는 웃음까지 섞였다. 혜원은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울음이 잦아들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룸미러 속 얼굴이 엉망이었다. 혜원은 가방에서 화장솜을 꺼네 번진 눈가를 닦았다. 쿠션을 두드리고 립밤을 발랐다. 눈이 부은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꽤 괜찮아 보였다. 혜원은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몇 번 숨을 골랐다.그리고 차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갔다.재혁이 퇴원한 날에도 묻지 않았다.“팔은?”“괜찮아.”“수술은 잘됐대?”“응.“혜원은 재혁의 깁스한 팔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몸조리 잘해.”그게 전부였다. 재혁 역시 더 설명하지 않았다.왜 다쳤는지, 누구 때문에 다쳤는지, 병원에 있던 여자가 누구인지, 아무것도.그 침묵이 혜원을 더 화나게 했다.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래야 잡아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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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용산역이었다. 유건이 편의점 계산대에 음료와 과자를 올려놓았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어, 어디야?”—나 바로 개찰구로 왔어. 안 늦었지? 헥, 헥.“응, 잠깐만. 수고하세요.”카드를 챙긴 유건은 봉투에 든 간식거리를 백팩에 대충 쑤셔 넣으며 개찰구 쪽으로 뛰었다.“유건!”사람들 사이에서 채원이 손을 흔들었다. 짧은 원피스 아래에 카프리 팬츠를 받쳐 입고 작은 배낭을 메고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뛰어왔는지 앞머리가 이마에 조금 붙어 있었다.“네가 늦으면 어떡해.”“미안. 헤헤.”채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유건의 팔에 팔짱을 꼈다.“뛰었단 말이야.”“그러게 좀 일찍 나오지.”“나왔거든?”“놓쳐도 난 모른다.”“같이 놓치는 거지, 뭘 몰라.”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건은 채원의 배낭까지 받아 들었다. 열차에는 출발 직전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자마자 채원이 숨을 몰아쉬며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겼다.“아, 더워.”유건이 아까 산 음료를 건넸다. 채원이 뚜껑을 열어 몇 모금 연달아 마셨다. 유건은 그런 채원을 잠깐 바라보다 물었다.“근데 남친 면회 가는데 나랑 같이 가는 게 맞아?”“왜?”“왜라니.”“면회는 잠깐 하는 거고, 나머지는 너랑 노는 거지.”채원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겸사겸사. 너도 춘천 안 가봤다며.”“그래도.”“뭐가 그래도야.”유건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히 마음에 안 들었다. 하필 오늘따라 예쁘게 입은 것도, 저 옷을 입고 남자친구를 만난다는 것도. 그렇다고 자신이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왜 삐졌어?”“안 삐졌어.”채원이 웃으며 과자 봉지를 뜯었다.“삐진 사람 과자 먹어.”“안 삐졌다니까.”그러면서 하나 집어 먹었다.열차가 출발했다. 도심의 건물들이 뒤로 밀려나고 차창 밖 풍경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유건의 기분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채원이 휴대전화를 꺼냈다.“이거 봤어?”“뭔데.”“웃겨. 봐봐.”이어폰 한쪽을 유건의 귀에 꽂아주고 다른 한쪽은 자신이 꼈다. 둘은 어깨를 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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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도착한 펜션 바로 옆에는 수목원이 있었다. 펜션 자체도 정원이 제법 넓었다. 낮은 돌담을 따라 나무와 꽃이 빼곡했고, 해가 기울면서 정원 전체에 느슨한 저녁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너무 좋다. 그치?” 채원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산 것들을 냉장고에 대충 넣어두고 나니 채원은 벌써 밖으로 나갈 생각뿐이었다. “산책 가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현관으로 향하는 채원의 손을 유건이 붙잡았다. “아직.” 채원이 돌아봤다. “뭐가?” “그 전에.” 유건이 잡은 손을 당겼다. 채원의 몸이 그대로 유건 쪽으로 끌려왔다. “할 일이 있어.” “뭔데?” 채원은 유건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유건이 피식 웃었다. “잘 알잖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을 맞췄다. 평소보다 거칠었다. 채원이 한 걸음 뒤로 밀려나자 유건의 팔이 허리를 감싸 단단히 끌어당겼다. 채원의 몸이 휘청하며 그의 품으로 들어왔다. 채원이 겨우 입술을 떼며 웃었다. “왜 이렇게 급해.” 유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들이 너무 많았다. 면회를 간 것도, 두 시간 반을 기다리게 한 것도, 오늘따라 유난히 예쁘게 차려입은 것도. 유건의 손길은 평소보다 거칠었다. 채원은 눈을 감은 채 그런 유건을 말리지 않았다. 어느새 둘은 옷가지를 벗어던진 채 전라로 침대 위에 뒤엉켜 있었다. 아직 커튼 사이로 느슨한 저녁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유건은 줄곧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채원에게 밀어넣었다. “아…… 오늘 너 좀 귀여운데?” 채원이 웃으며 유건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빗어 넘겼다. 그러다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아…… 아파.” 유건이 움직임을 멈추고 채원을 바라봤다. 잠시 후 고개를 숙여 채원의 쇄골에 입술을 묻었다. 평소보다 오래, 짓궂을 만큼 집요하게. “아앗! 뭐야. 여기다 하면 다 보이잖아.” 채원이 손으로 쇄골을 더듬었다.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왜.” 유건이 아무렇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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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뭐 해?]서하가 유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난번 차 안에서 만난 뒤로 둘은 조용했다. 그사이 서하는 재혁을 자주 만났다. 함께 뮤지컬을 보기도 했고, 그의 집에서 밤을 지새우는 날도 전보다 많아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쪽에 계속 남아 있었다. 잊고 있으면 한 번씩 콕 찌르는 바늘 같은 존재.유건.답장은 금방 왔다.[어, 누나! 나 동아리 회식 중. 누나는?][나도 이제 막 퇴근하는 중. 어딘데?]잠시 후 전화가 걸려왔다.—누나, 나 홍대! 거의 끝나가는데 만날래?“그래? 내가 그쪽으로 갈게. 끝나면 전화해.”전화를 끊은 서하는 회사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 앞에서 입술을 다시 바르고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택시에서 내려 편의점에 들러 비타민 음료 하나를 샀다. 뚜껑을 따 한 모금 마시며 걷는데 길 한복판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반주도 없이 기타 하나에 목소리만 얹은 버스킹이었다. 서하는 걸음을 늦췄다.익숙한 노래였다.“……오랜만이네.”중학생 때였나. 하교하면서 이어폰을 끼고 질리도록 들었던 노래였다. 그때는 사귀어본 남자도 없으면서 혼자 세상에서 제일 처절하게 헤어진 사람처럼 노래를 들었다. 생각해보면 웃겼다.“누나.”바로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유건이 서 있었다.“왔어?”“응.”살짝 붉어진 볼. 가까이 다가오자 은은하게 술 냄새가 났다.“오랜만.”유건이 서하 옆에 섰다.“노래 좋다.”“너 이 노래 알아?”“알지.”잠시 나란히 노래를 듣던 유건이 자연스럽게 서하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얽혔다. 서하는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두었다.“누나.”“응?”“우리 노래방 갈래?”서하가 웃었다.“나도 갑자기 노래 부르고 싶어졌어. 가자.”유건이 서하의 손을 끌었다.건물 전체가 노래방이었다. 통창으로 된 방이 있는 3층에 자리를 잡았다. 창밖으로 홍대의 네온사인과 사람들의 머리가 물결처럼 흘러갔다.“누나 먼저 골라.”“음…… 난 이거.”서하가 리모컨을 눌렀다. 전주가 나오자 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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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서하가 샤워가운을 걸친 채 젖은 머리로 방에 돌아왔다.“안 씻어?”유건은 침대에서 비스듬히 몸을 일으켰다. 서하가 유건의 등 뒤로 다가와 가만히 끌어안았다.“무슨 일 있어?”대답을 기다리듯 잠시 그대로 있다가, 그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화장대로 돌아가 앉는다. 서하에게 등을 보인 채 한동안 테이블만 바라보다 유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이 향수…… 누나가 산 거야?”서하의 시선이 거울 너머로 테이블 위 향수병에 잠깐 머물렀다.“아, 아니. 선물받았어.”다시 아무렇지 않게 볼을 두드렸다.“왜? 향 좋아?”유건이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누가?”이번에는 뒤를 돌아봤다. 괜히 심장이 빨리 뛰었다. 톡, 톡. 얼굴을 두드리던 서하의 손이 잠시 멈췄다. 거울 속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친구가.”그 순간 조용하던 방 안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유건이 화면을 확인했다.[채원]숨이 턱 막혔다. 며칠 전 채원이 했던 말이 너무 선명하게 떠올랐다.—근데 사이 되게 좋으시더라. 엄마도 엄청 젊으시고. 부러웠어.유건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풀리지 않던 실타래가 있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몰랐던.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한 가닥만 잡아당기면 엉켜 있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풀려버릴 것 같았다. 문제는 그걸 풀어버리는 순간 자신까지 같이 무너질 것 같다는 것이었다. 유건은 진동하는 휴대전화의 옆 버튼을 길게 눌렀다. 진동이 멎었다. 다시 방 안이 고요해졌다.“……누나.”“응?”“혹시 최근에 제주도…….”말이 목에 걸렸다. 유건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제주도 갔었어?”서하는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앰플을 꺼내 손가락 끝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응.”너무 쉽게 나온 대답이었다. 서하가 덧붙였다.“왜?”—아유건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4번 정도 해야 작아지던 유건의 그곳은 이미 축 늘어져 있었다. “누구랑?”한 글자 한 글자, 감정을 꾹꾹 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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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와줘서 고마워.”불이 꺼진 갤러리 사무실에는 낮은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다.혜원은 소파 한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벌써 두 번째 와인병이 열려 있었다.“괜찮아?”본일이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쳤다. 소파 앞 바닥에 주저앉아 가방을 뒤적이더니 숙취해소제 하나를 꺼냈다.“마셔.”“고마워.”혜원이 받아 들었다. 술 때문인지 울어서인지 눈가가 붉었다.“지원 씨한텐 오해 안 하게 잘 얘기했어?”“응. 걱정 마.”본일은 짧게 대답했다. 어차피 아내는 자신이 누구를 만나든, 몇 시에 들어오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본일이 그러하듯이. 둘 사이로 흐르던 분위기가 벽에 걸린 밤바다처럼 고요히 가라앉았다.“마음이…….”본일이 말을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많이 힘들어?”혜원이 빈 잔에 와인을 따르며 웃었다.“그렇네.”잔을 들여다보다가 중얼거렸다.“왜 집에 안가고?”“가봤자...아무도 없는데 뭐...” 혜원이 텅 빈 눈으로 잔을 응시한다. “나 되게 바보 같지?”“응.”혜원이 고개를 들었다.“위로 진짜 못한다.”“바보 아니라 그러면 믿을 거야?”“아니.”“그러니까.”혜원이 작게 웃었다. 항상 단정했던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눈가에는 번진 마스카라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본일은 잔에 남은 와인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문득 생각했다. 스무 해 전에도 이랬다.- - - 혜원이 울면서 자신을 불렀던 밤.그날도 본일은 하던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나 헤어졌어…….”혜원은 거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본일이 옆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한참을 울었다. 본일은 그런 혜원을 처음 봤다. 혜원에게 이별은 언제나 한 막이 끝나는 것과 비슷했다. 끝나면 끝난 것이었다. 며칠 툴툴거리고, 여행을 가거나 새 작품에 빠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기 생활로 돌아갔다.그런데 그날은 달랐다.“나 진짜 끝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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