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Chapter 81 - Chapter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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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81화.“재훈아, 그게 아니라….”“그렇게 서 있지 말고 씻어. 나도 꼴이 이래서 좀 씻어야겠어.”젖은 셔츠의 단추를 아무렇지 않게 풀어내며 마치 이곳이 제집인 양 말한다.그러더니 그의 발걸음이 기태의 침실로 향했다.오늘 처음 이 집에 온 사람치고는 마치 원래 살았던 사람처럼 그가 행동했다.“재, 재훈아, 거긴.”은별이 간신히 용기 내 그를 불러 세웠다. 그녀의 입술은 어느새 새파랗게 변해있었다.재훈이 방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이 방, 들어가는 거 싫어?”“그게….”“알아, 그 새끼 방인 거.”“…!”“그나마 내가 당신 봐주는 건, 그 새끼 방이 따로 있다는 거야.”그러더니 순식간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재훈이 기태의 방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재훈아!”은별은 서둘러 그를 따라갔으나 이미 방문은 굳게 닫혔다. 뿐만 아니라, 안에서 잠겼는지 열리지도 않았다.그녀는 재훈이 기태의 방에 들어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그렇다고 재훈을 제힘으로 끌어낼 수도 없었다.예전처럼 막무가내인 그에게 ‘나가!’라며 고래고래 소리치던 사랑의 ‘갑’이었던 고은별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재훈아….”은별은 방문 손잡이를 잡은 채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재훈은 기태의 방에서 나올 기미가 없었다. 무작정 그가 나오길 기다리기엔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은별은 비에 젖어 축축한 몸을 일으켜 자신의 방으로 갔다. 갈아입을 옷을 챙긴 뒤 거실에 있는 욕실로 향했다.재훈의 등장만으로도 온몸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인데, 겨울의 끝자락에 내리는 비를 맞았다. 제 몸이 감기에 걸려 고열이 나게 방치할 수는 없었다.재훈과 갑작스러운 재회를 떠나, 그녀의 몸이 아프면, 함께 사는 기태가 여러 가지로 불편해질 것이 자명했다. 저를 간호한다며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동분서주할 게 눈에 선했다.쏴아아-.희뿌연 수증기와 함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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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82화.정재훈이 나타나기 전, 은별과 기태의 삶은 이러했다.적당한 시간에 일어나 간단하게 아점을 먹고, 카페 디데이로 향했었다.비가 오거나 너무 추운 날은 기태만 집에 있었고, 은별은 거의 매일 카페에 갔었다.한국에 들어와 모든 일을 정리했던 은별은 번역일을 하진 않았지만, 종종 글을 썼다.그녀가 쓰는 글은 동화였는데, 어떤 날은 기태가 보여 달라고 조르면, 은별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녀가 쓴 동화를 읽어 주었다.‘은별아.’‘응?’‘너무 재밌다.’‘그래? 다행이다.’‘미안해.’‘기태 씨…, 미안하다니.’‘이런 능력자를 내가 잡아두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그런 말 하지 마. 기태 씨와 함께 지내는 거, 내가 선택한 거야. 기태 씨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나한테 기태 씨는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이야.’‘그렇게 말 해줘서, 고맙다. 은별아.’불과 얼마 전에 은별과 나눴던 대화였다.은별아…, 정재훈이 우리 앞에 나타난 지금. 넌, 네 선택을 후회하진 않니? 그리고 내가 너에게 여전히 필요한 사람인 걸까?너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난… 고민이 많다.기태는 잠시 어제의 일을 회상했다.카페 디데이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던 중 자신의 셔츠를 입고 유유히 걸어오는 정재훈을 만났었다.그가 입은 셔츠는 기태가 한창 몸이 좋을 때 입었던 옷이었다. 사고 이후, 그의 몸은 의욕을 잃었고 기존의 체형을 유지하지 못했다.고가의 명품 셔츠라 버리기엔 아까워 고이 모셔놨던 옷이었다. 자신의 방, 옷장 깊숙이 넣어뒀던 것을 어떻게 찾아 입었을까.같은 남자가 봐도 눈이 가는 셔츠 핏이었다. 셔츠 밖으로 근육으로 잘 잡힌 몸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야성미를 뽐내고 있었다.애송이 같던 남자는 이제 가장 사나운 맹수가 되어 저를 막아섰다.재훈을 마주한 기태는 더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카페에서 균형을 잃고 엎어지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지만, 절뚝거리며 그의 옆을 지나치고 싶지는 않았다.자신의 처지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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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83화.밤 열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은별이 한 손에는 재훈의 옷이 담긴 쇼핑백과 한 손에는 우산을 든 채 빗속을 가르며 청솔민박으로 향했다.청솔민박은 카페 사장인 무진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기존에 있던 민박을 인수해 새롭게 오픈한 곳이다.무엇보다 이곳은 은별과 재훈이 처음으로 외박을 했던 민박이었다.무진이 청솔민박의 사장이긴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지내지 않았다. 그는 카페 뒤편에 있는 컨테이너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언젠가 무진이 은별과 기태를 민박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예약한 손님이 당일에 취소했는데, 와인까지 주문했던 터라 빈방으로 두기 아깝다며 두 사람을 불렀었다.‘어차피 오늘은 빈방이니, 두 사람 여기서 자고 가. 방도 공짜, 와인도 공짜.’그때만 해도 무진은 두 사람을 연인이라고 생각했던 때였다.은별은 무진의 뜻밖의 초대로 이곳에 다시 발을 디뎠었다.청솔민박은 예전 민박의 뼈대만 남기고 내부는 완전히 새롭게 리모델링 되어 있었다.그대로인 것이 하나 있었는데, 대문이 없다는 것이었다.디귿 자 형태의 민박은 집을 빙 둘러 대나무를 심어놓기는 했으나 2년 전처럼 대문은 없었다.은별이 기태와 묵었던 곳은 가운데 자리한 숙소였다. ‘민박’이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숙소 내부는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웬만한 호텔 룸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욕실이 있었고 정면으로 보이는 벽이 통창으로 되어 있었는데, 집 뒤편에 대나무를 심어놔서 바다가 코앞인 집인데도 숲속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 통창 앞에 더블 침대가 놓여있었고, 침대 건너편으로 조리대와 2인용 식탁이 자리하고 있었다.2년 전과는 너무 낯선 공간이 되어 있었다. 이름만 같을 뿐, 새로운 곳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지금 그곳에 재훈이 지내고 있다.제법 거친 빗방울이 은별의 신발을 적셨다. 신발 속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물기에 발가락이 곱아들자 그녀가 조금 전보다 발걸음을 빨리했다.청솔민박에 도착한 은별은 재훈의 숙소가 어딘지 단박에 알 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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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84화.카페에 나가는 것은 기존에 했던 일상 중 하나였지만, 이곳에 매일 오라니….은별은 명령과 같은 그 말에 기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기태와 한집에 살면서 매일 밤, 재훈을 만나러 나가야 한다니.그건 기태에게 참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기태와 자신이 연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말이다.“왜, 못하겠어?”“그, 그게 아니라….”“미안하다는 말, 또 거짓말이었어?”“아니야, 아니야! 거짓말 아니야. 진심이었어.”은별은 고개까지 강하게 가로저으며 거짓이 아니라 항변했다.“아니면, 그 새끼가 걸리나?”“….”“대답해.”“…재훈아. 여기 매일 오는 건, 나한테 시간을 좀 줘.”“고은별, 당신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난 누구처럼 김기태가 다리 망가졌다고 그 인간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아. 망가진 다리 때문에 당신이 그 새끼 옆에 붙어 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쓸데없이 착해 빠져서는. 당신, 그 새끼 사랑해?”“….”“대답해. 당신이 말없이 사라진 지 자그마치 일 년이야. 미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답답하게 살아온 시간이고. 나, 들을 자격 충분한 것 같은데.”“필, 필요한 사람이야.”“누가, 누구한테!”재훈이 그녀를 무섭게 내려다보며 고성을 질렀다. 은별은 순간 그의 표정에 온몸이 굳어져 갔다.재훈은 겁에 질린 듯한 은별을 보며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고는 화를 참듯 숨을 내쉬었다.하! 필요한 사람이라니…!그럼 난, 고은별한테 불필요한 사람이었나. 그래서 날 떠난 거야? 군대에 손발 묶여 있으니까, 갖다 쓸 데가 없었나 보지?경멸에 가득찬 재훈의 시선이 다시 은별에게 향했다.“와아, 씨. 진짜 욕 나오려고 한다. 그 새끼가 왜 당신한테 필요한데? 왜! 밤마다 위로해 줄 사람이 필요했어? 당신, 나랑 살 때도 아닌 척하면서 내가 밤마다 안아주면 좋아하더니, 남자 없이는 못 사는 그런 여자가 된 건가?”“재훈아! 그런 거 아니.”“잔말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기간은 내 맘이 풀려서 당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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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85화.밤 10시, 청솔 민박.똑똑.은별이 노크를 하자 어제와 다르게 곧장 문이 열렸다.재훈은 은별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더니, 말없이 고개를 안쪽으로 까딱이며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은별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문에 비켜선 재훈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등 뒤로 문이 쾅 소리와 함께 닫혔다.은별은 그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재훈은 유유히 지나가며 흘리듯 말했다.“아직 추워.”“어? 방금 뭐라고….”“돈이 없어?”“무슨… 말이야?”은별은 앞뒤가 맞지 않은 재훈의 질문에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재훈은 은별을 바라보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긴 다리를 꼰 뒤 살짝 인상을 구긴다.뭔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어제도 그러더니, 옷이 너무 얇고 후지잖아.”은별은 재훈의 지적에 흠칫하며 제 옷을 살폈다.오늘 그녀는 화이트톤의 라운드 니트에 청바지, 그리고 가벼운 겨울 코트를 입고 왔다.추위를 많이 타는 은별이지만, 바닷가에서 나는 겨울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이것저것 챙겨오기엔 지금 지내고 있는 집도 협소했고, 무엇보다 밤에는 다닐 일이 없었기에 중무장할 겉옷은 필요하지 않았다. 자주 가는 카페도 걸어서 5분 거리라 대부분 간편하게 입고 다녔다.그리고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분간 일할 계획이 없었기에 굳이 좋은 옷을 마련하지 않았었다.한데 제 차림새가 재훈의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얇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후지다는 말에 은별은 창피함이 몰려왔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져 갔다.“다, 다음엔 더 잘 입고 올게.”“그러시던지.”마치 이젠 관심이 딱 떨어졌다는 듯 재훈은 은별에게 시선을 거두고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혼잣말을 한다.“올 때가 됐는데….”은별은 방 입구에 선 채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반려동물처럼 오도카니 서 있으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재훈은 그런 은별을 힐끗 한번 쳐다보더니, 버석하게 한쪽 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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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86화.“뭐야, 왜 그래?”갑작스러운 은별의 행동에 재훈은 어리둥절하며 재빨리 일어나 그녀를 따라갔다.“우욱! 욱!”은별은 변기를 붙잡고 속에 있는 것을 게워 냈다. 먹은 것이 없으니, 연노랑 위액만이 역류했다.“은별아!”재훈은 놀란 마음에 욕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은별의 등을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우욱!”은별은 한 번 더 위액을 게워 냈다. 다행이도 더는 나올 게 없었는지 헛구역질은 멈췄다.은별은 간신히 손을 뻗어 변기의 레버를 눌렀다.“당신! 괜찮아?”영문을 알기 어려운 상황에 재훈은 놀람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은별은 그 물음에 대답을 못 하고 티슈를 뜯어 입가를 닦았다. 이내 숨을 깊이 들이 내쉬었다.다급하지 않고 침착한 은별의 모습에 재훈의 머릿속은 거센 소용돌이가 일었다.그의 생각을 순식간에 갈아먹는 벌레 같은 의심이 똬리를 틀었다.‘혹시, 설마…. 아니야! 그럴 리 없어!’정재훈, 아닐 거라 확신해?그랬다. 재훈은 은별의 임신을 의심했다.제기랄!‘임신’이라는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자, 재훈은 은별의 몸에서 미련 없이 손을 뗐다.그가 구부렸던 무릎을 펴며 몸을 일으켰다.그의 눈에 아직 기진맥진해 있는 고은별이 보였다.이틀 전, 고은별의 생일에 김기태의 방에 들어간 날.사실 재훈은 씻으러 들어간 게 아니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것은,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핑계일 뿐.그의 목적은 기태의 방과 욕실 구석구석을 뒤집고, 헤집어 은별과 보냈을 밤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다.고은별은, 김기태와 썼던 섹스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보관했던 여자가 아니었나.그녀는 저와 동거할 때도 피임하지 않고 사랑을 나눈 적이 없었다.김기태와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지 수개월이 지나가는 은별이었다.방을 따로 쓴다고 하여 두 사람 사이에 정말 아무 일이 없었을까.두 사람은 저를 만나기 전 이미 일 년을 동거했던 사이가 아닌가.재훈은 제 눈으로 확인이 필요했다.설사 밤의 흔적을 찾는다 하더라도 은별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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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87화.재훈은 서슬 퍼런 얼굴로 일갈하곤 오히려 자신이 먼저 숙소를 나가버렸다.쾅!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에 은별은 다시금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욕실 타일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어떤 장단에 맞춰 재훈을 상대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몇 주 뒤.은별의 일상은 이러했다.항상 가던 시간에 카페 디데이에 갔고, 밤이 되면 재훈의 숙소를 찾아갔다.그곳에서 재훈과 마주 보며 한참 늦은 저녁 식사를 억지로 먹어야 했다.그는 정말 자신을 살찌울 생각인지 매번 식사로 고기를 준비했다. 배달이 가능한 모든 고기 음식을 그녀의 입속에 집어넣었다.다양한 고기와 함께 항상 빠지지 않은 게 있다면, 싱싱한 채소였다.은별은 그렇게 재훈의 집에서 불편한 식사를 하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얼마 전, 너무 거북하게 먹은 날이었다.그날은 소화제를 먹고 잤는데도 다음날까지 체기가 가시지 않아, 카페에서 만난 재훈에게 오늘 밤은 가지 못할 것 같다고 어렵게 말했었다.그때 정재훈이 했던 말은….‘그럼, 내가 당신이 사는 집으로 갈까? 김기태랑 셋이 오붓하게 먹으면 되겠네.’그 말에 은별은 정재훈식 사육에 백기를 들었다.그렇지 않아도 기태가 보는 앞에서 매일 밤 재훈의 숙소로 가는 발걸음이 편치 않았다.아무리 기태가 이해하고 눈감아 준다고 해도 그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다.그런데 셋이 오붓하게 먹으면 된다니…. 그런 험한 꼴을 기태에게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래도 말을 안 한 것보다는 나았는지, 재훈은 그날부터 은별이 먹는 양을 조금 줄였다. 그래봤자, 고기 몇 점이었지만.몇 주가 지나자 은별을 사육하고자 했던 재훈의 노력은 빛을 발했다.3월에 들어서면서, 은별의 얼굴은 살이 오르더니 보기 좋게 화색이 돌았다.재훈이 원하는 대로 그녀의 몸은 예전보다 통통해졌다.***청솔민박, 밤 10시.똑똑.은별은 여느 때처럼 노크했다.그러곤 안에서 문이 열리기 전에 출입문에 달린 키패드에 출입 카드를 대었다.띠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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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88화.“갑자기 일이 있었어.”“무슨 일?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어?”어쭈, 꼬치꼬치 캐묻기까지 하네. 뭐, 기분이 나쁘진 않으니 응해주지.“순이 할머니, 알지? 여기 민박 청소해주시는 어르신.”“어. 근데 순이 할머니가 왜? 할머니한테 무슨 일 생겼어?”은별은 순식간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순이 할머니는 청솔민박을 관리해 주시는 동네 어르신이었다. 60대 중반이라 아주머니라 부르기도 애매했고, 할머니라 부르기도 애매했었다.작년 가을, 기태와 함께 동네 산책을 하다가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일찍 결혼해 손녀가 20대라며 편하게 할머니라 부르라고 말했었다.조용한 어촌 마을에 젊은 사람 둘이 내려와 사니, 기태와 은별은 금세 동네 어르신들 사이에서 궁금증의 대상이 되었다.기태의 목발을 보고 안타까워 처음엔 이런저런 음식도 갖다주는 어르신들이 꽤 있었다.요양차 온 사람들 불편하게 찾아가지 말라고 누군가 말을 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반찬을 가져다주는 어르신들의 발걸음이 끊겨갔다.그래도 마을에서 마주치면 기태나 은별이나 어르신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특히, 순이 할머니는 자녀 없이 혼자 사는 분이었고, 카페 사장 무진과도 가까운 분이라 다른 어르신들보다 더 편하게 대했다.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순이 할머니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걱정이 되는 건 당연했다.“별일은 아니고. 손녀가 외국에서 사는데 오늘 귀국했대.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오다가 택시가 펑크가 났다나. 길 한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한다고 부탁하시길래 갔다 왔어.”“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 손녀는 괜찮아?”“사고가 난 건 아니니까. 멀쩡하더라고.”“다행이다.”“그건 그렇고, 고은별.”“어?”“당신 배 안 고파?”“아, 조금? 많이는 아니.”꼬르륵! 은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의 뱃속에서 먹을 것을 달라 아우성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은별은 밀려드는 당혹감에 얼굴을 확 하고 붉혔다.“하여튼 거짓말은 국가대표급이지. 사람 쉽게 안 변한다는데, 당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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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89화.고은별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성격도, 식성도, 거짓말도, 심지어 핸드폰 잠금 패턴마저 2년 전과 똑같았다.아니, 하나 있구나. 그녀의 마음은 변했지, 씨발.재훈의 매서운 눈빛이 핸드폰 화면에 뜬 메시지를 곧 도려낼 것처럼 노려봤다.[은별아, 집으로 오는 중이야? 어두우면 내가 마중 나갈까?]알아서 기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건, 고은별이나 김기태나 똑같았다.핸드폰 화면에서 시선을 뗀 재훈은 제 앞에서 안절부절못한 채 서 있는 여자를 차갑게 응시했다.곧이어 맹수처럼 이를 드러냈다.“고은별, 오늘은 집에 가지 마. 여기서 자고 가.”“…!”은별은 그러겠다 대답하지 못하고 놀란 마음에 눈을 크게 뜰 뿐이다.재훈은 마치 괴한에게 납치당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별을 보며, 김기태의 메시지를 봤을 때보다 더 기분이 나빴다.그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그 반응은 뭐야? 싫은 거야?”“아, 아니. 갑자기라 당황스러워서….”은별의 머릿속엔 순식간에 복잡한 생각들로 뒤엉켜 갔다.자고 가라는 재훈의 속내는 무엇일까.“나 먼저 씻을 테니까, 대기하고 있어.”“….”“대답 안 해? 왜, 나 씻는 동안 잠적이라도 하게? 그거 당신 전문이잖아.”“아, 아니야…. 여기 있을게.”은별의 대답을 듣고서야 재훈은 잔뜩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러곤 은별의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욕실로 향했다.“저기, 재훈아!”은별이 다급하게 그를 불러세웠다.욕실 문을 열고 막 들어가려던 재훈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옆으로 틀어 은별을 바라봤다.그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왜, 그 사이 마음이 바뀌었어?”“그게 아니고, 내 핸드폰 좀… 돌려줄래?”은별은 재훈의 손에 들릴 제 핸드폰을 눈으로 가리키며 돌려달라 부탁했다.저를 기다리고 있을 기태에게 전화는 못하더라도 오늘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메시지는 보내야 할 것 같았다.“어쩌지? 싫은데.”“재훈아….”“당신이 그 새끼한테 연락하게 내가 그냥 둘 것 같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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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90화.“여행 오셨어요?”“네?”“관광지라고 해도 밤에는 위험해요. 자, 이거 받아요.”기태가 여자에게 제 손에 있던 랜턴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진짜 치한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더 도와드리고 싶지만, 내 상태가 이래서.”기태가 목발을 들어 바닥에 툭, 디뎠다. 여자의 시선이 목발로 향하다 다시 기태에게 향했다.“아까… 놀린 거 아니에요. 밤이라서 저도 걱정되는 마음에.”“압니다. 그래도 내가 더 안전하죠. 어서 받아요. 이러다 팔까지 망가지겠네요.”기태가 손에 든 랜턴을 어서 받으라며 흔들었다. 여자는 머쓱한 얼굴을 하고는 랜턴을 받아서 들었다.그제야 기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럼, 조심히 가세요.”여자에게 예의상 인사를 하고 기태가 몸을 돌렸다.“아, 저기… 랜턴 아저씨.”여자가 기태를 불러세웠다.‘랜턴 아저씨’라는 말이 썩 듣기 좋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틀린 말은 아니라서 기태는 살풋 웃고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여자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제 이름은 설가희예요.”“아, 제 이름은 김기태입니다.”얼떨결에 기태도 제 이름을 말했다.가희가 해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앞으로 자주 봐요. 그리고 랜턴, 감사합니다.” 하며 꾸뻑 인사를 한다.기태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가희는 몸을 돌려 청솔민박이 있는 골목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랜턴 불빛이 요란스럽게 춤을 추듯 사라졌다.기태는 속으로 참 재밌는 여자라 생각하며 그 또한 제 갈 길을 향해 목발을 디뎠다.어린 여자 가희와의 우연한 만남은 기태의 머릿속에서 은별을 잠시나마 잊게 했다.***청솔민박.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이 잔뜩 긴장한 은별의 몸을 이완시켰다.조금 전 샤워를 마친 재훈은 아무렇지 않게 하체에 타월만 두른 채 밖으로 나왔었다.의자에 앉아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은별은, 제 눈 앞에 펼쳐진 남자의 근육질 몸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재빨리 고개를 숙였었다.2년 만에 재훈의 벗은 몸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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