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무능한 장녀라더니 상단을 먹어버렸다: Chapter 21 - Chapter 30

96 Chapters

21화

중앙 향료상단의 사절은 차를 마시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첫 잔에는 향을 칭찬했다. 두 번째 잔에는 온도를 칭찬했다. 세 번째 잔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웃었다.카이든은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차가 식었습니다.”“기다리면 원래 식지요.”사절은 찻잔을 내려놓았다.“다만 로세트에서 기다리는 일은 드물어서, 조금 신기합니다.”부드러운 말투였다. 찻잔보다 더 매끄러웠다.카이든은 웃지 않았다.테이블 위에는 보증장이 놓일 자리만 비어 있었다.중앙 향료상단의 도장과 로세트의 도장이 함께 찍힐 서류였다. 그 아래에 붙어야 할 거래소 확인서가 아직 오지 않았다.평소라면 늦을 일이 아니었다.로세트의 이름이 먼저 가면 확인서는 금방 나왔다. 남부 항구에서 로세트가 ‘분쟁 없음’이라는 한 줄을 받는 일은 차를 새로 내오는 것보다 쉬웠다.그런데 오늘은 차가 세 번 식었다.문밖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바로 노크하지 않았다.한 박자 늦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사절이 찻잔을 내려다보며 웃었다.“네 번째 차가 오나요?”카이든은 문 쪽을 보았다.“들어와.”서기가 들어왔다.그는 사절을 보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더 티가 났다. 사절의 눈꼬리가 아주 조금 휘었다.카이든이 손을 내밀었다.서기는 봉투를 올렸다.로세트의 장미가 아니었다. 거래소의 저울 문양이었다.카이든은 봉투를 열었다.문장은 짧았다.보증장 발급 보류.그 아래에 이유가 붙어 있었다.제17호 공동 진정 및 상업교역 이의제기 접수.카이든은 종이를 접었다.사절은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대신 웃었다. 그게 더 성가셨다.“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카이든이 말했다.사절은 식은 찻잔을 들었다.“차는 놔두셔도 됩니다.”“새로 내오게 하겠습니다.”“아뇨.”사절은 잔 안쪽을 보았다.“어디까지 식는지 보겠습니다.”카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문을 나서자 오르테스가 따라붙었다.“상업교역 이의제기?”“예. 남부 항구 거래소에서 정식 접수됐습니다.”카이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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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오르테스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카이든은 이벨리아를 바라봤다.“네가 뭘 하려는지 알고는 있나.”“그럼요.”레온이 낮게 욕을 삼켰다.정하은은 다시 말했다.“근데 그거 아세요? 저는 방에 가둘 때는 로세트의 딸이었고, 혼담에 올릴 때는 로세트의 장녀였어요. 사고 기록에도 제 이름은 로세트로 남았죠.”그녀는 카이든을 바라봤다.“그런데 상단 분쟁을 확인하려니까 이제 와서 권한이 없다고 하네요. 이상하지 않아요?”거래소 감찰관의 펜이 종이 위를 지나갔다.사각.아주 작은 소리였다.그 순간, 정문 바깥쪽에서 소란이 일었다.직원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작은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그 뒤에 또 한 대.그리고 또 한 대.마차마다 사람이 내렸다.마차주. 짐꾼. 약초상. 작은 창고 서기. 얼굴을 가린 여자. 나이 든 남자. 장갑을 벗지 못한 상인.많지는 않았다.겨우 열댓 명.하지만 모두 손에 종이를 들고 있었다.카이든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오르테스가 낮게 말했다.“막겠습니다.”“아니.”카이든이 멈춰 세웠다.이미 늦었다.저들을 막는 순간 그림은 더 나빠진다. 감찰관이 있는 정문 앞에서 종이를 든 피해자들을 밀어내는 건 로세트에 이롭지 않았다.정하은은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았다.니아가 가장 앞에 있었다. 그녀는 정하은을 보고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세라도 마찬가지였다.헤스는 눈을 피했고, 도미크는 종이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브론은 사람들 뒤에 서서 자기 손을 감추고 있었다.감찰관이 카이든에게 말했다.“확인 장소가 필요합니다.”카이든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로세트 상단 내부에서 하겠다는 말인가.”“이의제기 대상이 로세트 상단입니다. 거래 기록과 책임자 확인이 필요합니다.”“거래소로 보내면 될 일이다.”“거래소 접수는 됐습니다. 이제 상단 측 확인을 받는 절차입니다.”카이든이 낮게 웃었다.“참 빠르군.”감찰관은 무심했다.“오늘은 물류가 멈추면 곤란한 날입니다.”그 말은 협박이 아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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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펠만 리드는 들어오자마자 허리를 숙였다.“부르셨습니까, 도련님.”카이든은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탁자 위에는 조금 전 도미크가 내놓은 보관증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같은 창고의 서명. 비슷한 날짜의 입고 기록. 그리고 서로 다른 피해자의 이름.감찰관이 그중 가장 위에 있는 종이를 앞으로 밀었다.“창고장 대리, 펠만 리드. 본인 서명입니까?”펠만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눈동자가 아주 잠깐 멈췄다.“예. 제 서명입니다.”“제3창고를 닫은 날이 맞습니까?”“폐쇄라기보다는 임시 제한이었습니다.”도미크의 손이 무릎 위에서 꽉 쥐어졌다.카이든이 물었다.“왜 제한했지.”펠만은 준비해온 듯 대답했다.“검수 인력이 부족했습니다. 물량이 몰렸고, 내부 정리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거래자들의 화물은 서류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우선순위?”펠만은 그 말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본 듯 조금 빨라졌다.“예. 상단에서는 늘 큰 물량이 먼저입니다. 소액 거래 건은 현장에서 조정해왔습니다. 오래된 방식입니다.”정하은은 고개를 들었다.오래된 방식.펠만은 방금 자기 손으로 문을 열었다.감찰관의 펜이 움직였다.사각.펠만은 그 소리를 듣고서야 입을 다물었다.카이든이 물었다.“그래서 도미크 하일의 물건은 창고에 들어가지 못했나.”“그날은 그랬습니다.”“그런데 보관료는 붙었다.”펠만의 목울대가 움직였다.“보관증이 발행된 이상, 창고 배정이 된 것으로 처리됩니다.”도미크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배정만 됐지, 물건은 밖에 있었습니다.”펠만이 그를 보았다.“서류상 배정입니다.”“내 물건은 비 맞았습니다.”도미크의 목소리가 떨렸다.“서류는 안 젖었겠지만요.”펠만의 얼굴이 굳었다.카이든은 감찰관에게 시선을 돌렸다.“기록해.”감찰관의 펜이 다시 움직였다.정하은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른 종이 한 장을 펠만 앞으로 밀었다.“그럼 이것도 같은 방식입니까?”펠만은 종이를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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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카이든이 고개를 숙였다.“아버지.”에드문드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회의장을 한 번 훑었다.“설명해라.”카이든이 입을 열었다.“제17호 공동 진정을 확인하던 중, 현장 관례로 처리된 반복 피해가 확인됐습니다. 창고, 검수, 운송, 대금 보류의 처리 방식이 유사합니다.”에드문드는 움직이지 않았다.카이든은 아주 잠깐 정하은을 보았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이벨리아의 내부 지급 기록에서도 같은 방식이 발견됐습니다.”에드문드의 시선이 정하은에게 향했다.정하은이 말했다.“이름은 남기고, 책임자는 흐리는 방식이에요.”“네가 말해라.”정하은은 탁자 위 종이를 손끝으로 맞췄다.“도미크 하일은 물건을 창고에 넣지 못했는데 보관료를 냈어요. 니아 브렌은 검수 지연 때문에 대금을 받지 못했는데, 책임자는 부서명으로 남았고요. 헤스 쪽은 처음 지연이 검수에서 생겼는데 운송 책임으로 넘어갔어요.”그녀는 교육비 기록을 가리켰다.“제 기록도 같아요. 교육비는 지급 완료. 실제 수업 확인은 없음. 담당자는 이름 대신 관리 부서.”에드문드는 종이를 내려다봤다.“로세트가 얻은 돈인가.”“아니라고 봐요.”회의실 안의 몇 사람이 그녀를 보았다.정하은은 이어 말했다.“적어도 로세트가 정상적인 거래로 벌어들인 돈은 아니에요. 어디로 갔는지는 장부를 확인해봐야 알겠죠.”에드문드가 물었다.“그럼 로세트의 손해는.”“오늘 멈춘 보증장이요.”에드문드는 말이 없었다.정하은은 그 침묵이 허락인지 경고인지 알 수 없었다.그래도 멈추지 않았다.“이걸 현장 실수로 덮으면 다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새어 나가요. 보상만 하고 끝내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다시 어디에 말해야 할지 몰라 거래소로 갈 테니까요.”정하은은 말을 이었다.“로세트가 손해를 줄이려면 두 가지가 필요해요.”에드문드가 물었다.“무엇이냐?”정하은은 바로 대답했다.“보상과 통로예요.”정하은은 니아를 보았다.“니아 브렌. 처음 대금이 보류됐을 때 어디로 갔어요?”니아가 대답했다.“지급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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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로세트 상단 소회의실 옆 빈방 하나가 접수실로 바뀌는 데에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긴 탁자 하나, 의자 셋, 잉크병 두 개, 빈 양식지 묶음.그게 전부였다.로세트 상단이 남부 항구를 쥐고 있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접수실은 초라했다. 하지만 정하은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중요한 건 방이 아니었다.문밖에는 이미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첫날이라 그런지 누구도 선뜻 들어오지는 못했다. 서로 눈치를 보며 열린 문 안쪽만 힐끗거렸다.정하은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 펜을 들었다.“들어오라고 해.”문이 열렸다.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세라였다. 그녀는 낡은 가죽 가방을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옷은 깨끗하게 털었지만 소매 끝에는 지워지지 않은 먼지가 남아 있었다.세라는 문턱을 넘자마자 방 안을 한 번 둘러봤다.베른을 보고, 도라를 보고, 맞은편에 앉은 서기까지 확인한 뒤에야 정하은에게 시선을 멈췄다.가방을 끌어안은 손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정하은은 아무 말 없이 펜을 들었다.“이름.”세라는 잠시 멈췄다.“세라.”“성은.”“없습니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서기 하나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카이든이 붙인 상단 서기였다. 기록 보조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감시였다.“그럼 접수자 이름은 세라. 피해자 이름은?”세라가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렸다.“동부 운송 조합.”서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잠깐만요.”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아가씨, 동부 운송 조합 건은 소액 거래 확인 범위가 아닙니다.”정하은은 펜을 멈추지 않았다.“피해자 이름. 동부 운송 조합.”“아가씨.”“들었어. 소액 거래 확인 범위가 아니라고.”서기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예. 조합권, 창고권, 구금 문제까지 얽힌 사안입니다. 임시 접수에서 받을 수 없습니다.”“좋아.”정하은은 새 종이 한 장을 옆으로 꺼냈다.“그럼 범위 밖이라고 판단한 담당자 이름.”서기의 입이 멈췄다.“예?”“네 이름.”“저는 단지 규정을 말씀드린 것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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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정하은의 펜이 멈췄다.“바뀌었어?”에반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렇게까지는…… 저는 그저, 제 병이 아닌 것이 섞여 있었다는 뜻입니다.”겁먹은 사람의 말이었다. 도둑맞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섞였다고 말한다.정하은은 그대로 적었다.반품 물품 중 원소유자 불일치 의심.“약재는 어디서 왔지?”“동북부 레벤 숲입니다.”“품질은.”에반의 눈이 처음으로 조금 밝아졌다.“레벤 숲 꽃가루는 색이 옅어도 향이 오래 갑니다. 가짜는 노란빛이 강하고 손에 묻으면 금방 뭉칩니다. 그런데 반품된 병 안에 그런 가루가 섞여 있었습니다.”“그걸 검수원이 알았나?”에반은 입을 다물었다.“몰랐네.”“…… 알고도 모른 척했을 수도 있습니다.”말하고 나서 그가 스스로 놀란 듯 고개를 숙였다.정하은은 그 말을 적었다.검수자의 품질 판별 능력 또는 고의 묵인 확인 필요.로만이 옆에서 불편한 듯 몸을 움직였다. 정하은은 그에게 빈 종이를 밀었다.“검수장 담당자 목록.”“예?”“레벤 숲 약재를 판별한 검수자가 누구인지 확인해.”로만은 입술을 깨물었다.“검수장 쪽에 문의해야 합니다.”“좋아. 처리 부서명은 검수장. 담당자 실명은?”“확인 후…….”“확인 지연 사유와 책임자 이름.”로만은 더 말하지 못하고 받아 적었다.에반은 그 장면을 보며 손을 꽉 쥐었다.정하은은 접수번호를 적었다.임시 접수 제2호.“사본 받아가세요.”에반은 두 손으로 사본을 받았다.“이걸…… 제가 가져가도 됩니까?”“당신 이름이 적힌 종이잖아요.”에반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종이를 품 안에 넣고서야 숨을 내쉬었다.세 번째는 젊은 남매였다. 누나 쪽이 말을 했다. 동생은 뒤에 서서 모자만 만지작거렸다.“리아 칼렌입니다. 피해자는 저희 아버지, 토반 칼렌입니다.”“본인이 오지 못한 이유.”“다리를 다쳤습니다. 항구에서 짐을 내리다…….”리아는 말을 흐렸다.정하은은 기다렸다.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로세트 짐이 아니라며 치료비 지급이 거절됐습니다.”“그 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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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이번에는 정하은이 아주 잠깐 멈췄다.카이든이 말했다.“카이든 로세트. 임시 보류. 사유는 방금 말한 그대로.”정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그녀는 접수지 하단에 적었다.임시 보류.사유. 권한 범위 초과. 법무 기록실, 창고권 관리부, 운송부 공동 확인 필요.책임자. 카이든 로세트.펜 끝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집무실 안에 또렷하게 남았다.사각.정하은은 그 이름을 보았다.좋다.로세트의 이름이 처음으로 책임 칸에 들어갔다.카이든이 물었다.“오늘 몇 건 받았지.”“지금까지 스물아홉 건이에요.”“바로 확인 가능한 건?”“여섯이요.”“보류는?”“스물세 건이에요.”“담당자 실명 누락은?”“스물여섯 건이요.”“거의 전부군.”카이든은 잠시 말이 없었다.“접수는 계속해.”정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그녀가 돌아서려는 순간, 카이든이 덧붙였다.“대신 네 선을 넘지 마라.”정하은은 문가에서 멈췄다.“제 선이 어디예요?”“접수까지다. 그 뒤는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알고 있어요.”카이든은 그녀를 보았다.“그리고 사람을 모으지 마라.”“제가 모으는 게 아니에요.”“같은 결과가 나오면 다를 것도 없지.”정하은은 문손잡이를 잡았다.“오는 사람을 받는 것뿐이에요.”카이든은 더 말하지 않았다.정하은은 집무실을 나왔다.접수실로 돌아오자, 문은 열려 있었다. 도라는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양식지 위에는 두 줄이 적혀 있었다. 접수자 이름. 피해자 이름.그 이상은 비어 있었다.문밖의 사람들은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늘어나 있었다. 누군가가 밖에서 소식을 전한 모양이었다. 임시 보류든, 접수든, 번호가 붙는다는 말은 빠르게 퍼진다.정하은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도라가 조용히 물었다.“계속합니까?”“계속해.”정하은은 펜을 들었다.“다음.”그날 접수는 해가 기울 때까지 이어졌다.첫날 접수 마흔두 건. 즉시 확인 가능 열한 건. 보류 서른한 건. 담당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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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추가 피해를 받기로 한 일주일이 끝났다.다음 날 아침, 임시 접수실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그 사실을 모르고 찾아온 몇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누군가는 욕을 했고, 누군가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돌아서는 사람도 있었다.정하은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갔다.정치판에서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정말 억울한 사람이 찾아온다. 그러다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면 자기 사정을 얹는 사람이 생기고, 마지막에는 어디서 들은 이야기까지 뒤섞인다.일주일 동안 쌓인 접수부가 그랬다.확인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뒤섞여 있었다.안에서는 벌써 정리가 시작되고 있었다.도라는 남은 양식지를 묶었고, 로만은 일주일 동안 쌓인 접수부를 번호순으로 정리했다.카이든도 안에 들어와 있었다.그가 정리된 접수부를 보며 말했다.“원본은 기록실로 보낸다.”“그렇게 하세요.”“확인이 끝나지 않은 건도 전부 넘긴다. 이후 처리는 담당 부서에서 맡을 거다.”정하은은 쌓여 있는 접수부를 바라봤다.일주일 동안 사람들이 들고 온 이름과 사정도 이제 그녀의 손을 떠났다.오르테스가 문가에 서 있었다. 그는 카이든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아가씨의 방으로 돌아가실 준비를 하겠습니다.”방.정하은은 그 말을 들으며 접수실을 둘러보았다. 일주일 동안 사람들이 앉았던 의자도, 종이가 쌓였던 탁자도 빠르게 치워지고 있었다.참 쉽게 사라진다.자리는 늘 그랬다. 생기는 데는 이유가 많아도, 없어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방으로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카이든이 말했다.정하은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어디죠.”“어머니께.”정하은은 짧게 눈을 깜빡였다.“왜요?”“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카시안이 온다.”정하은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카시안이 로세트에 온다. 그것도 가족 식사 자리에.카이든은 그녀가 묻기 전에 말했다.“결혼식 날짜가 잡혔다.”이상한 일이었다. 그 말이 전혀 뜻밖은 아니었다. 혼담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서류도 오갔고, 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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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저녁 식사는 대식당에서 열렸다.긴 식탁 위에는 촛대가 놓여 있었고, 은식기가 줄지어 빛났다. 벽의 초상화들이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에드문드는 상석에 앉아 있었다. 카이든은 오른쪽, 비비안은 왼쪽. 레온은 한쪽 끝에 느슨하게 앉았고, 클라라는 정하은을 보자마자 입술을 얇게 눌렀다. 그리고 카시안은 정하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웃었다.“오늘은 다른 분 같군요.”정하은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평소에는 어땠는데요?”“위험해 보였습니다.”“오늘은요.”카시안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서 드레스 끝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노골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피하기도 어려웠다.“오늘은 예쁜데, 여전히 위험해 보이십니다.”식탁 위 공기가 미묘하게 멈췄다.정하은은 카시안을 보았다.“원래 그런 말을 식사 전에 하나요?”“식사 후엔 늦을 것 같아서요.”정하은은 물잔을 들었다.“눈은 멀쩡하시네요.”카시안은 웃었다.“덕분에 멀쩡한 걸 알았네요.”레온이 작게 욕을 삼켰다.“식사 자리에서 그만하지?”카시안은 레온을 보았다.“죄송합니다. 사위 될 사람이 신부 될 분께 예의를 차리느라.”“예의를 배운 적은 있나?”“로세트에서 가르쳐주신다면 배우겠습니다.”레온의 얼굴이 굳었다.정하은은 잔을 내려놓았다.“로세트 교육은 추천하지 않아요.”카시안이 바로 그녀를 보았다.“경험자 조언입니까?”“피해자 조언이죠.”순간 식탁이 조용해졌다. 비비안은 웃는 얼굴 그대로 잔을 내려놓았다.“이벨리아.”정하은은 고개를 돌렸다.“예.”“오늘은 좋은 자리란다.”“그래서 얌전히 앉아 있어요.”“말도 얌전하면 좋겠구나.”“노력해볼게요.”얌전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카시안만이 웃었다.식사는 천천히 이어졌다. 고기는 부드러웠고, 수프는 따뜻했으며, 빵은 갓 구운 것이었다. 정하은은 한 입씩 천천히 먹었다.카시안은 맞은편에서 그녀가 칼을 드는 손을 보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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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정하은은 눈썹을 조금 올렸다.“저를 물건 목록 끝에 붙였나요?”“아니요.”카시안은 잔을 내려놓았다.“앞에 둬야 할지 뒤에 둬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그게 더 나쁜데요.”“그래서 고민 중입니다.”정하은은 그를 빤히 보았다.“당신은 저를 어떻게 보고 있나요?”질문은 생각보다 곧게 나갔다. 카시안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깐 그녀를 보았다. 촛불이 두 사람 사이에서 흔들렸다.“처음엔 값이 잘못 매겨진 패라고 봤습니다.”“지금은요.”“패는 맞는데.”카시안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스스로 판을 옮기더군요.”정하은은 그 말을 곱씹었다. 칭찬인가. 경계인가. 둘 다였다.“그럼 조심해야겠네요.”“누가요?”“당신이.”카시안의 눈이 즐겁게 휘었다.“저를 걱정해주시는 겁니까?”“제 패를 함부로 만지다 손 베이지 말라는 뜻이에요.”“역시 걱정이군요.”“해석이 편한 쪽으로 흐르네요.”“로맨스는 원래 조금 뻔뻔해야 하지 않습니까?”정하은은 잔을 내려놓았다.“그 단어를 왜 여기서 꺼내죠?”“혼례를 앞둔 남녀가 술을 마시고 있는데요.”“거래를 앞둔 당사자들이죠.”“둘 다일 수도 있습니다.”카시안은 낮게 말했다.“아가씨가 허락한다면.”정하은은 그를 보았다.허락. 이 집에서 거의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명령은 많았다. 통보도 많았다. 배정, 관리, 처분, 결정. 그런 말은 넘쳤다.허락은 낯설었다.정하은은 술잔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허락을 구하는 사람처럼은 안 보이는데요.”“그럼 어떻게 보입니까?”“기회를 보는 사람.”카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그는 부정하지 않았다.“저는 기회를 봅니다. 돈도 보고, 약점도 보고, 사람도 봅니다.”“그리고 묻기도 하고요?”“필요하면요.”“나도 묻을 건가요?”카시안의 웃음이 멈췄다. 이번에는 조금 길게. 정하은은 그 침묵을 보았다. 농담으로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는 넘기지 않았다.카시안은 잔을 내려놓았다.“아가씨가 제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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