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무능한 장녀라더니 상단을 먹어버렸다: Chapter 11 - Chapter 20

96 Chapters

11화

아직 날이 밝기 전이었다.똑똑.노크 소리에 정하은이 눈을 떴다. 방 안은 어두웠다.“누구야?”“아가씨, 오르테스입니다.”정하은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무슨 일이야?”“카이든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정하은은 문 쪽을 바라봤다.“이 시간에 왜?”“직접 말씀하시겠다고 합니다.”정하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침대 옆에 걸쳐둔 겉옷을 끌어당겨 입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들어오라고 해.”문이 열렸다. 오르테스가 먼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아가씨.”그 뒤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레온과 닮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깔끔한 옷차림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 이른 새벽인데도 막 잠에서 깬 사람 같은 기색은 없었다.남자의 시선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정하은에게 향했다.“이벨리아.”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정하은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처음 보네요.”남자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머리를 다쳤다고 하더니, 예의도 잊었나.”“기억이 온전하지 않아서요.”정하은은 담담하게 말했다.“누구에게 일어나 인사해야 하는지도 아직 정리 중이에요.”오르테스가 급히 입을 열려 했지만, 그가 손을 들어 막았다.“정리할 필요 없다.”그가 말했다.“나는 카이든 로세트다.”카이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네가 어제 저택을 뒤집었다고 들었다.”“뒤집을 만큼 허술했나 봐요.”“주방까지 내려가서 사람들을 들쑤셔 놓고, 클라라까지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줬지.”“클라라가 먼저 공개적으로 나를 모욕했어요.”“그래서?”카이든은 무표정했다.“네 말이 맞다고 치지.”그는 천천히 말했다.“하지만 그걸 네가 처리할 권한은 없다.”카이든은 계속 말했다.“네가 장녀인 건 맞다. 그렇다고 저택의 일에 마음대로 손대거나, 장부를 열람할 권한까지 있는 건 아니야.”정하은은 카이든을 바라봤다.“내 이름으로 배정된 것조차 확인할 권한이 없다는 건가요?”“없다.”카이든은 단호하게 말했다.“필요한 건 정해진 사람을 통해 받으면 돼. 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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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그건 곤란합니다.”“뭐?”카시안은 웃었다.“아가씨께서 저를 먼저 부르신 게 아니라, 제가 먼저 관심을 가진 거라서요.”카이든이 차갑게 물었다.“네가?”“예.”카시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쓸모없는 패라고 들었는데, 직접 보니 가격이 다르더군요.”정하은은 속으로 웃었다.이 남자.정말 위험하다.카이든은 카시안을 향해 말했다.“블랙우드는 로세트의 명령을 따른다.”“물론입니다.”“네 관심은 필요 없다.”“그건 제 사적인 영역 아닌가요?”카시안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게다가 결혼할 상대에게 관심을 갖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카이든의 입술이 굳었다.“내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정하은이 물었다.카시안의 눈이 웃었다.“많이요.”“왜죠?”“싸게 넘겨받을 줄 알았는데.”카시안은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생각보다 비싼 분이라서.”정하은은 피가 묻은 입가를 손수건으로 눌렀다.“비싼 물건은 관리도 까다로운데.”“물건 취급은 싫어하시는 것 같던데요.”“잘 봤네요.”“눈이 좋은 편입니다.”카이든이 날카롭게 끼어들었다.“그만.”카시안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예, 도련님.”하지만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의 시선은 아주 짧게 정하은에게 닿았다.나중에.정하은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카이든은 오르테스에게 말했다.“이벨리아의 방 앞에는 사람을 새로 세워. 오늘부터 허락 없이 방을 나서지 못하게 한다.”“예.”정하은은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감금.부드럽게 포장하지도 않은 감금이었다.카이든은 마지막으로 정하은을 보았다.“네가 머리를 다쳐 잠시 혼란스러운 것은 이해한다.”정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한 번 더 로세트의 질서를 어지럽히면, 그때는 방 안에 머무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로세트의 질서.”정하은은 낮게 되뇌었다.“잘 기억해둘게요.”카이든은 더 말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오르테스가 장부를 들고 뒤따랐다.카시안도 뒤따르려다 정하은의 곁에서 잠시 멈췄다. 그는 마치 우연처럼 손수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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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정오가 되기 전, 비비안 로세트의 초대장이 도착했다.봉투는 희고 매끄러웠다. 가장자리에는 얇은 금선이 둘러져 있었고, 붉은 밀랍 위에는 장미를 휘감은 뱀 문양이 눌려 있었다.정하은은 봉투를 열어 안의 글을 훑었다.길지 않았다.몸이 불편할 테니 차 한 잔 들며 쉬어가라는 내용이었다.도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가시겠습니까, 아가씨?”정하은은 고개를 들었다.“안 갈 이유가 있나?”도라가 대답하지 못했다.정하은은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뺨의 붓기는 조금 가라앉았지만, 붉은 자국은 아직 선명했다. 입술 안쪽이 터진 탓에 말을 할 때마다 미세한 통증이 올라왔다.가릴 수도 있었다.분으로 덮고, 머리카락으로 숨기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웃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숨긴 상처는 약점이 된다.정하은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붉어진 뺨이 더 잘 보였다.도라가 당황한 듯 말했다.“아가씨, 그쪽은…… 머리카락을 조금 내리시는 편이…….”“왜.”도라의 입술이 멈췄다.정하은은 거울 속 도라를 바라봤다.“보기 흉해?”“그런 뜻이 아니라…….”“그럼 됐어.”정하은은 거울에서 물러나 옷장으로 향했다.도라는 더 말하지 못한 채 뒤따랐다. 그녀는 수수한 드레스를 골랐다. 창백한 얼굴과 붉은 뺨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문밖에 서 있던 베른은 정하은이 나오자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시선이 아주 짧게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가 내려갔다.정하은은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따라와.”베른은 잠시 멈칫했다.“도련님께서는 허락 없이 방을 나서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그럼 방이 비었다고 보고하든가.”베른은 대답하지 못했다.정하은은 그를 지나쳐 복도를 걸었다.지나가던 하녀들이 고개를 숙였다. 몇몇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숨을 삼켰다. 정하은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소문은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보여주기만 하면 된다.**비비안의 응접실은 저택에서 가장 밝은 방 중 하나였다.남향 창으로 빛이 들어왔고, 레이스 커튼이 그 빛을 부드럽게 걸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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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셀라.비비안은 정하은이 꺼낸 그 이름을 피하지 않았다.오히려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래에 넣었다.내가 관리하는 아이.정하은은 비비안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부드럽고 우아하게.“이벨리아.”비비안이 낮게 불렀다.“너는 블랙우드 이야기가 나온 뒤부터 많이 흔들렸단다.”“그랬나요?”“그래. 불안해했고, 피하려 했고, 하지 않아도 될 생각들을 했지.”비비안은 차분히 말했다.“어린 마음에 그럴 수 있어. 낯선 곳으로 가야 한다는 건 두려운 일이니까.”정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때로는 작은 충격이 사람을 멈추게 하기도 한단다.”비비안은 여전히 부드럽게 말했다.“죽지 않을 만큼의 충격. 며칠 누워 쉬면 될 만큼의 상처.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게 할 정도의 일.”그녀는 정하은을 보며 미소 지었다.“그것마저 누군가의 악의로만 보면, 세상 살기가 너무 힘들어지지 않겠니?”계단에서 밀었다는 말은 없었다.쪽지를 보냈다는 말도 없었다.셀라에게 시켰다는 말도 없었다.하지만 정하은은 알아들었다.죽이려던 게 아니었다.관리하려던 것이다.블랙우드로 가기 전까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도망치거나 버티거나 쓸데없는 감정을 품지 못하게.적당히 다치고, 적당히 누워 있다가, 조용히 보내지도록.이 집에서는 그조차 관리였다.비비안은 찻잔을 다시 들었다.“이제 그만 쉬렴.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도 좋아. 차든, 옷감이든, 선생이든. 다시 넣어줄 수 있는 것은 넣어주마.”정하은은 비비안을 바라봤다.“제가 원하는 것이요?”“그래.”비비안은 다정하게 웃었다.“가족이잖니.”그 말이 가장 차가웠다.비비안은 찻잔을 정하은 앞으로 밀어주었다.“마시렴. 진정에 좋은 차란다.”정하은은 찻잔을 들었다.비비안의 눈은 웃고 있었다.정하은은 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대신, 손목을 아주 조금 틀었다.잔이 기울었다.차가 흘렀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다친 손목이 순간 힘을 잃은 것처럼.찻물이 흰 레이스 덮개 위로 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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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정하은은 마차 안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현관 앞에 선 하인들의 얼굴이 빠르게 멀어졌다.당황. 불안. 그리고 어쩔 줄 모르는 눈빛.누군가는 곧 비비안에게 달려갈 것이고, 누군가는 카이든에게 보고할 것이다.하지만 늦었다.이미 마차는 움직이고 있었다.바퀴가 자갈길을 밟았다. 로세트 저택의 정문이 가까워졌다. 문지기들은 마차를 확인하고 허둥지둥 문을 열었다.베른은 말을 탄 채 뒤따르고 있었다. 정하은은 커튼을 조금 걷었다.로세트 저택은 밖에서 보니 더 컸다. 높은 담장, 넓은 정원, 줄지어 선 창고 건물, 상단 사무동, 마차길, 경비 초소.그 모든 것이 하나의 작은 도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돈이 만든 성이었다.그리고 그 성 안에서 이벨리아 로세트는 방 하나에 갇혀 있다.우스운 일이다.정하은은 손끝으로 마차 창틀을 가볍게 두드렸다.내부에는 편이 없다. 로세트의 벽 안에서 그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감시와 침묵뿐이다.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밖으로 나가야 한다.정치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부에서 밀리면 외부 세력을 끌어온다. 내 편이 없으면 상대의 적을 찾는다.적의 적이라면 최소한 같은 방향으로 칼을 겨눌 수는 있다.로세트가 남부 최대 상단이라면, 로세트에게 눌린 사람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그들을 찾아야 했다.마차가 정문을 빠져나갔다.풍경이 바뀌었다.정원과 대리석 길이 사라지고, 넓은 도로와 창고들이 나타났다. 로세트 문장이 새겨진 마차들이 오갔고, 짐꾼들이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봉인된 화물, 두꺼운 밧줄, 휘어진 나무 수레, 소리를 지르는 점원들.저택 안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냄새도 밀려왔다.땀. 먼지. 짐승 냄새. 젖은 나무. 소금기. 그리고 돈 냄새.정하은은 그 냄새를 싫어하지 않았다.정치판에서도 돈은 늘 냄새를 남겼다. 다만 그곳의 돈은 향수와 양복, 고급 술 냄새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이곳의 돈은 훨씬 노골적이었다.“아가씨.”도라가 조심스럽게 불렀다.정하은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말해.”“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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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정하은은 그들을 천천히 둘러봤다.“이벨리아 로세트.”창고 안에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누군가는 이름을 처음 듣는 얼굴이었다. 누군가는 들은 적은 있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닌 표정이었다.역시.밖에서도 이벨리아는 없는 사람이다.남자가 낮게 말했다.“로세트 장녀?”“그래.”“장녀가 왜 밖에 나와?”“그러게.”정하은은 입꼬리를 아주 희미하게 올렸다.“너희한테 운이 좋았나 보지.”“운이 좋아?”“클라라를 잡았다면 너희는 죽었을 거야.”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지금은 달라?”“다르지.”정하은의 시선이 그가 들고 있는 구겨진 요구서에 닿았다.“나는 너희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있거든.”후드를 쓴 여자가 웃었다. 차갑고 날 선 웃음이었다.“로세트가 우리 이야기를 들어?”“나는 로세트지만.”정하은은 천천히 말했다.“지금 로세트에 좋은 감정은 별로 없어.”그녀는 구겨진 요구서를 바라봤다.“동부 창고권. 운송 조합장 루벤. 미지급 대금 삼천 골드.”정하은은 하나씩 되짚었다.“그게 너희가 원하는 거지.”“그래.”“왜 빼앗겼지?”남자는 이를 악물었다.“로세트가 계약을 뒤집었다.”“어떻게.”“우리는 제때 물건을 옮겼어. 비가 오는 날에도. 항구가 막힌 날에도. 그런데 로세트는 검수가 늦었다며 불량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겼다. 대금을 주지 않았고, 위약금까지 물렸다. 조합장은 항의하러 갔다가 감옥에 들어갔고.”“계약서는?”남자가 멈칫했다.“있어, 없어.”“있다.”“가져와.”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네가 왜.”“보려고.”“우리를 속이려는 거겠지.”“속일 거였으면 지금쯤 비명을 질렀겠지.”정하은은 묶인 손목을 들어 보였다.“로세트 장녀를 납치했다. 살려달라고 울고, 아버지를 부르고, 돈을 약속하는 게 더 편하지 않나?”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정하은은 낮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묻고 있잖아. 계약서가 있냐고.”창고 안에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후드 쓴 여자가 남자를 보았다.“보여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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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베른이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카이든은 책상 위의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이벨리아가 나갔다지?”베른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도련님.”“알긴 아는군.”카이든의 손끝이 멈췄다.“그깟 계집 하나 관리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베른의 고개가 더 낮아졌다.“면목 없습니다.”“실망스러워, 베른.”카이든의 시선은 여전히 서류에 머물러 있었다.“그래서 지금 이벨리아는 어디 있지? 방으로 돌아갔나?”베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이벨리아 아가씨가 납치됐습니다.”“납치?”그제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베른의 입가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왼쪽 소매는 찢어져 있었다. 먼지 묻은 머리카락 아래로 굳은 턱이 보였다.“상인 거리 남쪽에서 습격이 있었습니다. 제가 뒤쪽에서 저지당하는 사이 놈들이 아가씨를 데려갔습니다.”카이든이 천천히 등을 의자에 기댔다.“이 미친 계집이.”“결국 사고를 치는군.”잠시 침묵이 흘렀다.“로세트 문장이 있는 마차를 보고도 공격했다는 건가?”“그렇습니다, 도련님.”카이든의 표정이 굳었다.이내 손에 들고 있던 서류가 구겨졌다.“감히. 로세트의 마차를 건드려?”카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사람을 풀어.”“예.”“상단 경비대를 움직여. 성문과 항구, 뒷골목까지 확인하고 이벨리아가 지나간 길에서 습격에 동조한 놈들은 전부 잡아들여.”베른이 고개를 들었다.“전부 말씀이십니까?”카이든의 시선이 날카롭게 꽂혔다.“내 말을 두 번 하게 할 셈인가?”“아닙니다.”“누가 했는지, 누가 뒤를 봐줬는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샅샅이 알아내.”카이든은 구겨진 서류를 책상 위에 던졌다.“로세트 문장을 보고도 손을 댔다면, 우리가 우습게 보였다는 뜻이겠지.”그의 입가가 차갑게 굳었다.“그 착각부터 고쳐줘야겠군.”베른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카이든이 다시 불렀다.“베른.”“예, 도련님.”“놈들이 무슨 요구를 해도 받아주지 마.”베른이 잠시 머뭇거렸다.“아가씨의 안전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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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골목을 빠져나온 세 사람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동부 운송 조합이 쓰던 창고를 가까운 곳부터 몇 군데 돌아봤지만, 별다른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남은 곳은 남쪽 폐창고 구역이었다얼마 뒤, 마차 앞쪽에서 실렌의 목소리가 들렸다.“다 왔습니다.”마차가 멈췄다.문이 열리자 소금기 섞인 바람이 밀려들었다. 오래된 창고들이 좁은 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낡은 나무벽과 뜯어진 천막 사이로 사람 몇이 드문드문 오갔다.카시안이 마차에서 내렸다.그 순간, 거리 끝에서 남자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 뒷걸음질쳤다. 카시안은 그쪽을 보지도 않았지만, 남자는 그대로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베라가 피식 웃었다.“친절한 길잡이네요.”카시안이 뒤를 따랐다.“놓치지 마.”실렌은 이미 골목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도망친 남자가 진흙을 튀기며 골목을 꺾었다. 실렌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뒤를 따라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카시안과 베라가 골목 끝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낡은 창고 옆 벽에 주저앉아 있었다. 입은 막혀 있었고 두 손은 등 뒤로 묶여 있었다.실렌이 창고 문을 가리켰다.“여기로 들어가려 했습니다.”문틈 아래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카시안은 창고 쪽으로 다가갔다.안에서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화를 냈고, 누군가는 그 말을 받아쳤다.그 사이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그건 나중에 따져요.”카시안의 걸음이 멈췄다.그가 손을 들자 뒤따르던 베라와 실렌도 멈췄다.“누가 더 당했는지 싸울 거면 밤을 새도 모자라요. 지금은 할 일부터 정해야 해요.”남자가 거칠게 말했다.“우리더러 로세트 물건을 또 옮기라는 거야?”“일은 평소대로 하세요.”“뭐?”“마차도 대고, 물건도 옮기고, 창고도 여세요.”잠시 안쪽이 조용해졌다.“대신 이름은 함부로 쓰지 마세요.”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운송 확인서든 보관증이든, 지난 거래부터 확인해 달라고 해요. 그전에는 이름 쓰지 말고. 필요하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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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남문 대기소의 첫 마차는 해가 완전히 뜨기도 전에 도착했다.말들은 흰 숨을 뿜었고, 바퀴에는 마른 진흙이 굳어 있었다. 마차주 헤스는 마차 옆에 서서 품속의 운송 확인서를 만지작거렸다.평소 같으면 벌써 서명하고 지나갔을 자리였다.로세트 서기가 손을 내밀었다.“확인서 주시죠.”헤스는 품에서 종이를 꺼냈지만 건네지는 않았다.“지난번 운임부터 확인해 주시오.”서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그건 지난 건이고요. 오늘 건부터 처리하시죠.”“지난 것도 아직 안 끝났잖소.”“그 얘기는 담당자한테 하시고.”서기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오늘 물건 인수한 것만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헤스는 종이를 내려다봤다.“입회인 하나 세워주시오. 그럼 쓰겠소.”서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운송 확인 하나 하는데 무슨 입회인입니까?”“내 이름 들어가는 종이잖소.”“헤스 씨.”서기의 웃음이 사라졌다.“아침부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헤스는 말채찍 끝으로 바닥을 한 번 두드렸다.“나도 곤란해서 이러는 거요.”“뭐가 그렇게 불안하십니까? 물건 가져왔고, 수량 맞으면 끝나는 일인데.”“지난번에도 그렇게 쓰고 끝인 줄 알았소.”서기가 입을 다물었다.헤스가 종이를 다시 접었다.“이번에는 확인하고 쓰겠소.”그때 뒤쪽에서 두 번째 마차가 들어왔다.말이 투레질을 하며 멈췄다.서기가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지금 뒤에 마차 들어오는 거 안 보입니까?”“보이오.”“헤스 씨 하나 때문에 남문을 세워둘 순 없습니다.”“그럼 입회인을 부르시오.”서기의 표정이 굳었다.“계속 이러시면 다음 배차에서 빠질 수도 있습니다.”헤스의 손이 멈췄다.다음 일.그 말은 쉽게 넘길 수 없었다.마차 한 번을 놓치면 하루 품삯이 사라진다. 두 번, 세 번 밀리기 시작하면 다시 일을 받는 것부터 어려워진다.서기는 헤스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지난 일 때문에 앞으로 받을 일까지 날리실 겁니까?”헤스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뒤에서 마부가 목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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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남부 항구 거래소는 아침부터 시끄러웠다.대금 문제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 창고 배정표를 들고 따지는 사람, 선적 순서를 바꿔달라고 매달리는 사람들로 접수대 앞은 늘 붐볐다.니아와 도미크도 그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갔다.접수원이 손을 내밀었다.“서류 주십시오.”니아가 접수용 종이를 내밀었다.접수원은 첫 장을 훑다가 손을 멈췄다.“로세트 상단 관련 건이군요.”“그래.”“이쪽에서는 바로 받을 수 없습니다. 먼저 상단 조정실을 거치셔야 합니다.”니아의 얼굴이 굳었다.“거기서 해결이 안 됐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야.”“그래도 순서가 있습니다.”접수원이 서류를 돌려주려 했다.니아는 받지 않았다.“공동 진정이야. 거래소에서 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일반적인 거래 분쟁이라면 그렇습니다.”“대금 못 받고, 창고 때문에 운송이 밀리고, 그 책임까지 떠안았어. 이게 거래 분쟁이 아니면 뭐지?”접수원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관련 상단이 로세트입니다. 확인해야 할 내용이 많습니다.”“그럼 확인해.”“서류를 두고 가시면 검토한 뒤 연락드리겠습니다.”니아는 종이를 접수대 쪽으로 다시 밀었다.“두고 가는 건 안 돼.”접수원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뜻입니까?”“접수부터 해. 번호 받고 두고 갈 테니까.”주변에 있던 몇 사람이 이쪽을 돌아봤다.접수원은 목소리를 낮췄다.“지금 업무를 방해하고 계십니다.”“접수해 달라는 게 방해야?”이번에는 접수원이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니아 옆에 서 있던 도미크에게 향했다.“증빙을 가지고 오셨습니까?”도미크가 품에 안고 있던 보관증 묶음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저는…….”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그는 이런 곳에서 자기 일을 설명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창고에서 시키는 대로 짐을 옮기고, 내미는 종이에 이름을 쓰는 게 전부였다.니아가 도미크를 바라봤다.“가져온 거 보여줘.”도미크는 잠시 망설이다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그리고 한 장을 더 올렸다.접수원이 무심히 보던 얼굴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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