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일라는 뺨을 간지럽히는 따스한 햇살에 천천히 눈을 떴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공기에는 옅은 소금기와 향긋한 오렌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언제나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한기와 무거운 눈구름으로 가득했던 에이든하르트 대공성의 아침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아일라는 기지개를 켜며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이토록 즐겁고 기대되는 일이었다니, 과거의 삶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탁자 위에는 어젯밤 보았던 푸른빛의 블루 세레나가 여전히 생기 넘치는 자태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일라는 꽃잎을 가볍게 쓰다듬은 뒤, 활기찬 발걸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
두꺼운 모피와 목을 옥죄던 검은색 드레스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녀는 남부 특유의 가볍고 부드러운 실크로 지어진 연한 레몬색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은빛 머리카락은 복잡하게 틀어 올리는 대신, 산뜻하게 하나로 땋아 내렸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한결 젊고 생기가 넘쳐 보였다. 아니, 원래 이 나이 또래의 아가씨들이 가져야 할 자연스러운 생기를 이제야 되찾은 것에 가까웠다.
'오늘은 드디어 내 이름으로 된 상회를 세우는 날이야.'
아일라는 카일락이 넘겨주었던 막대한 자본금이 든 전표와 신분 증명서를 작은 가죽 가방에 챙겨 넣었다. 심장이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콩닥거렸다. 누구의 인형도, 누구의 약혼녀도 아닌 온전한 상단주 아일라로서 내딛는 첫걸음이었다.
***
로젤 수도의 중심부는 아일라의 예상보다 훨씬 활기차고 거대했다. 마차의 창문을 열자 끝없이 늘어선 상점들과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들의 경쾌한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북부의 억눌린 정적에 익숙해져 있던 아일라에게 이 시끄러운 소음은 차라리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렸다.마차가 거대한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건물 정면에는 거대한 황금 저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남부 전체의 상권을 쥐락펴락한다는 황금 천칭 상단 연합의 본부였다.
마차에서 내린 아일라는 당당하게 걸음을 옮겨 연합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대리석 바닥이 끝없이 펼쳐진 1층 로비는 수많은 상인들과 귀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안내 데스크로 다가간 아일라가 가방에서 최고 등급의 황금 전표를 꺼내어 올려놓자, 접수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로운 상회를 등록하고, 점포를 임대하기 위해 왔어요. 책임자 분과 면담을 하고 싶은데요."
접수원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더니 아일라를 3층의 최고급 귀빈실로 안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잘 다듬어진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가 정중한 미소를 띠며 귀빈실로 들어왔다. 그의 가슴팍에는 상단 연합의 고위 간부를 뜻하는 푸른색 뱃지가 달려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일라 영애. 저는 황금 천칭 연합의 점포 및 상회 등록을 총괄하고 있는 관리장 바르토라고 합니다. 수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르토 관리장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저는 수도에서 최고급 수입 원단과 희귀 향신료를 취급하는 상회를 열 계획입니다."
아일라는 맑고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사업 계획을 설명했다. 젊고 어린 귀족 영애의 철없는 유희쯤으로 치부할 법도 한데, 바르토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호의적인 태도로 아일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과연, 훌륭한 안목이십니다. 영애께서 지참하신 자본금이라면 연합에서도 최고 등급의 상회로 등록해 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 염두에 두신 점포의 위치가 있으십니까."
"해와 달 거리가 교차하는 중앙 광장의 교차로 부근이었으면 합니다. 접근성이 가장 좋으니까요."
하지만 장난감은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버둥 칠 때 비로소 가장 완벽한 유희가 되는 법이다. 카일락의 붉은 눈동자가 잔혹한 희열로 타올랐다. 극의 막이 내릴 시간이었다.***아일라는 장부를 내던지고 1층으로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다. 도망쳐야 했다. 이 소름 끼치는 무대에서, 저주받은 유리장에서 단 한 발자국이라도 멀어져야 했다.쾅가게 문을 부서져라 열어젖히고 뛰쳐나간 아일라는, 밤거리를 마주한 순간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낮에는 그토록 활기차고 다정했던 해와 달 거리가 죽은 듯이 고요했다. 하얀 차양막 아래로 짙게 깔린 그림자 속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마리안, 바르토, 렌, 그리고 거리의 이웃 상인들.수십 명의 사람들이 가게 불이 모두 꺼진 깜깜한 밤거리 한가운데에 미동도 없이 서서, 일제히 아일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언제나 짓고 있던 그 다정하고 살가운 미소가 거짓말처럼 지워져 있었다. 감정 하나 없는 차갑고 공허한 눈빛들. 마치 무대 뒤에서 인형술사의 다음 실조종을 기다리는 텅 빈 목각 인형들 같았다."마리안, 렌."아일라가 뒷걸음질을 치며 이름을 불렀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끔찍한 정적을 가르고, 거리를 울리는 여유로운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또각, 또각.인형처럼 굳어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양옆으로 길을 터주며 고개를 숙였다. 갈라진 군중의 틈바구니 사이로, 칠흑 같은 어둠을 찢고 걸어 나오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와 단정하게 넘긴 흑발,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카일락 에이든하르트였다."아일라."카일락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아일라의 귓가에 닿았다. 아일라는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점의 벽면으로 물러섰다. 등 뒤로 차가운 벽돌이 닿았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카일락은 겁에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자, 마치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는 천천히
핏자국이 엉겨 붙은 무쇠 구두칼.아일라는 카운터 밑바닥에서 끄집어낸 그 차가운 금속 덩어리를 쥔 채,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손끝에 묻어난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찔렀다. 고향으로 은퇴했다던 늙은 장인의 목숨과도 같은 분신이, 왜 피에 젖은 채 자신의 가게 구석에 처박혀 있단 말인가.머릿속에서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위화감들이 하나둘씩 소름 끼치는 속도로 엉겨 붙기 시작했다. 벌벌 떨며 도망치듯 사라졌던 토비, 자신의 치수와 걸음걸이마저 완벽하게 알고 있던 카를로 장인, 속마음을 읽어내듯 발 빠르게 움직이던 서기 렌, 그리고 미세한 습관 하나까지 놓치지 않던 다정한 이웃 마리안.아일라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구두칼을 쥔 채 2층의 집무실로 향했다. 렌의 자리를 확인해야 했다. 언제나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던 수석 서기의 책상. 아일라는 떨리는 손으로 잠겨 있는 서랍 틈새에 구두칼의 끝을 밀어 넣고 체중을 실어 비틀었다.우지직나무가 쪼개지는 파열음과 함께 서랍이 뜯겨 나갔다. 텅 비어 있어야 할 서랍의 이중 바닥 아래,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두꺼운 검은색 가죽 장부가 모습을 드러냈다.장부의 겉면에는 은색으로 각인된 문양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시나무 검. 남부의 중심인 로젤 수도에서는 결코 발견되어서는 안 될, 북부의 지배자 에이든하르트 대공가의 문양이었다.아일라는 헉 숨을 들이키며 장부를 펼쳤다. 달빛 아래로 드러난 페이지에는 믿을 수 없는 문장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대상 아일라 관찰 보고서 및 각본.배역 마리안: 대상의 경계심을 허무는 다정하고 수다스러운 이웃 역할. 월 십만 금화 지급. 각본대로 차 취향 자연스럽게 주입 완료.배역 바르토: 상단 연합의 조력자 역할. 일호 점포 매입 및 원래 있던 상단주 추방 완료.배역 렌: 최측근 감시자 및 동선 통제자.그 아래로는 그녀가 겪었던 모든 일들이 철저한 통제와 계산 아래 이루어진 사태임이 건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토비: 대상에게 각본의 진실을
그런데 보석상을 운영하는 평범한 이웃인 마리안이, 대체 어떻게 장인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그 미세한 굽의 차이와 자신의 은밀한 습관을 똑같이 읊어댈 수 있단 말인가."마리안."아일라의 목소리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차갑게 가라앉았다."당신이 내 걸음걸이 습관을 어떻게 아는 거죠. 아니, 그보다 구두 굽의 중심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 당신이 어떻게 눈으로만 보고 아는 건가요."마리안의 얼굴에 번져 있던 미소가 일순간 멈췄다. 마치 태엽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녀의 입꼬리가 허공에 매달린 채 굳어버렸다. 마리안의 동공이 극도로 팽창하며 잘게 흔들렸다. 그 찰나의 침묵은 숨이 막힐 정도로 이질적이고 끔찍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마리안은 입을 크게 벌려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어머머. 내가 말을 너무 복잡하게 했나 봐요. 보석을 세공하다 보면 아주 미세한 균형의 차이도 한눈에 들어오는 직업병이 있거든요. 아일라가 걸을 때 치맛자락이 흔들리는 각도를 보고 혼자 짐작해 본 것뿐이에요. 내 눈썰미가 제법 훌륭하죠."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변명이었다. 보석 세공사 특유의 예리한 관찰력. 어제 카를로 장인이 했던 변명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지극히 논리적인 대답.평소의 아일라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자신이 예민했다고 자책하며 이 다정한 이웃에게 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아니야. 이건 우연이 아니야. 무언가, 아주 거대하고 기분 나쁜 톱니바퀴가 내 주변에서 굴러가고 있어.'아일라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아, 직업병이시구나. 정말 대단한 눈썰미네요, 마리안.""호호, 다행이네요. 그럼 난 파이만 두고 이만 가볼게요.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서요."마리안은 황급히 바구니를 카운터에 올려두고는 뒤돌아 도망치듯 상회를 빠져나갔다. 언제나 여유롭고 사근사근했던 그녀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아일라는 문이 닫힌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아일라 상회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눈부신 햇살과 함께 시작되었다.아일라는 2층 집무실에 앉아 오늘 납품될 원단 목록을 점검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어제 설치된 새하얀 차양막이 부드러운 바람에 기분 좋게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순조로웠다. 적어도 수석 서기인 렌이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점주님, 주문하셨던 맞춤 구두가 완성되어 가져왔습니다."렌이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 든 은쟁반 위에는, 최고급 흑색 가죽으로 지어진 우아한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은은한 광택과 유려한 곡선은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공이 들어간 명품이었다.아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두를 만지작거렸다. 어제 늦은 오후에 치수를 쟀을 뿐인데, 하룻밤 만에 이토록 완벽한 결과물이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정말 아름답네요. 카를로 장인어른의 솜씨가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손이 빠르신 줄은 몰랐어요. 직접 뵙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아래층에 계신가요."아일라가 묻자 렌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아, 그게 실은 카를로 장인께서 어젯밤 갑작스럽게 은퇴를 결정하셨습니다.""네. 은퇴요."아일라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고질적인 관절염이 심해지셔서 더 이상 세밀한 공정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하신 모양입니다. 남은 작업은 에덴 공방의 다른 숙련공들이 밤을 새워 마무리하여 방금 전 상회로 보내왔습니다. 솜씨 좋은 명장이 펠루아 구역을 떠나게 되어 상단 연합에서도 몹시 아쉬워하고 있습니다."렌의 설명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고,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노령의 장인이 건강 문제로 고향에 내려가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일라의 가슴 한구석에서 서늘한 이물감이 고개를 들었다.원단 납품을 앞두고 사시나무 떨듯 겁에 질려 있다가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토비.그리고 어제 처음 만나 구두 본을 뜰 때까지만 해도 자부심에 차 있던 장인 카를로의 갑작스러운 은퇴.자신과
'그래, 삼십 년을 구두만 만든 명장이라면 걸음걸이만 보고도 알 수 있겠지. 게다가 렌이 오전에 미리 가계약을 하면서 내 인상착의를 꼼꼼하게 설명해 주었을지도 몰라.'자신도 모르게 피어올랐던 서늘한 불안감은, 늙은 장인의 호탕한 웃음과 합리적인 설명 앞에 눈 녹듯 사라졌다.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겁을 집어먹다니, 과거의 억눌렸던 트라우마가 자신을 잠시 과민하게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이곳은 따뜻하고 친절한 남부였고, 이들은 그저 뛰어난 실력으로 자신을 돕고 있을 뿐이었다."제가 오해를 했네요. 과연 명장다운 훌륭한 눈썰미이십니다. 이 본으로 당장 구두 제작을 진행해 주세요."아일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카를로의 계약서에 기분 좋게 서명했다. 의심은 옅어졌고, 일상은 다시 눈부시게 안전한 궤도로 돌아왔다.*** 밤이 깊었다.오늘 하루도 무사히 상회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아일라는, 시녀들이 준비해 준 따뜻한 물로 목욕을 마친 뒤 포근한 침대에 누웠다. 머릿속에는 내일 새롭게 진열할 구두 디자인과 원단 배치에 대한 즐거운 계획들로 가득했다. 단 한 점의 근심도 없는 평온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맴돌다 이내 규칙적인 숨소리로 변했다.아일라가 곤히 잠든 그 시각. 로젤 수도의 후미진 뒷골목에 위치한 에덴 수제화 공방의 지하 창고.습기 차고 어두운 지하실의 바닥에, 낮에 아일라를 만났던 백발의 장인 카를로가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짙은 어둠 속으로 모습의 대부분을 숨긴 검은 인영이 조각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살려, 살려주십시오. 제가 잠시, 아주 잠시 실언을 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점주님께서, 아니 영애께서 발본을 보고 그렇게 예리하게 물어보실 줄은 꿈에도 몰라서……."카를로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그의 이마에서 진땀이 뚝뚝 떨어져 돌바
"정말 고마워요. 렌 같은 서기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그럼 오후에 그 수석 장인을 이쪽으로 모셔다 줄래요. 내 구두부터 먼저 한 켤레 맞춰보고 실력을 확인해 봐야겠어요."***그날 오후, 아일라 상회의 응접실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장인 하나가 큼직한 가죽 가방을 들고 찾아왔다. 에덴 공방의 수석 장인 카를로였다. 그는 아일라를 보자마자 깊숙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아일라 점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점주님의 고귀한 발을 감쌀 구두를 짓게 되다니, 제 장인 인생에 이보다 큰 기쁨은 없을 겁니다.""환영합니다, 카를로 장인어른. 솜씨가 아주 뛰어나시다고 들었습니다. 우선 제 발 치수부터 재보시겠어요."아일라가 응접실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구두를 벗으려 하자, 카를로는 다급하게 손을 저으며 가죽 가방을 열었다."아이고, 아닙니다. 점주님처럼 귀하신 분의 발을 어찌 함부로 주무르겠습니까. 이미 점주님을 위한 완벽한 구두 본을 준비해 왔습니다."그가 조심스럽게 꺼내어 탁자 위에 올린 것은, 티끌 하나 없이 매끄럽게 깎인 목각 발본이었다. 구두를 만들 때 뼈대가 되는 나무틀이었다. 카를로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목각 본을 어루만졌다."발등의 높이, 발볼의 너비, 그리고 점주님께서 평소 걸으실 때 체중이 미세하게 쏠리는 왼쪽 발꿈치의 각도까지 완벽하게 계산하여 깎아낸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본입니다. 굽 역시 점주님께서 가장 편안해하시는 높이로 맞추어 두었습니다."아일라는 탁자 위에 놓인 목각 본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그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녀의 발 모양과 완벽하게 똑같았다. 굽의 높이마저 취향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녀는 남부에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맞춤 구두를 주문한 적이 없었고, 당연히 누군가에게 발 치수를 내어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처음 만난 장인이 어떻게 그녀의 왼쪽 발꿈치에 체중이 더 실린다는 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