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내 곁에 묶어둘 생각은 없습니다. 짐을 싸서 영지를 나가겠다면 호위와 마차를 준비시켜 주지. 네가 정착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재산과 신분도 보장해 주겠습니다."
그가 거칠어진 아일라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러니 그렇게 두려워하는 눈으로 나를 보지 마십시오. 네가 그런 눈으로 나를 볼 때마다, 내 심장이 찢겨 나갈 것 같으니까."
아일라는 멍한 얼굴로 카일락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신을 잃게 되었다는 깊은 슬픔과,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체념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정말… 이렇게 쉽게 보내준다고?'
과거의 기억 속에서 그토록 미친 듯이 자신을 속박했던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카일락은 너무나 이성적이고 다정했다. 어쩌면 자신이 알고 있던 미래가, 단순히 자신이 그를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은 아니었을까?
아일라는 혼란스러웠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전하의 배려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황급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행여나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두려워, 발걸음은 거의 뛰다시피 빨랐다.
거대한 흑단목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아일라의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카일락은 닫힌 문을 향해 우두커니 서 있었다.적막이 내려앉은 집무실.
조금 전까지 애절한 체념으로 가득했던 카일락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지워졌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소름 끼치도록 짙고 끈적한 광기였다."…인형 노릇이 싫다."
카일락은 자신의 뺨에 닿았던 아일라의 온기를 기억하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낮고 기괴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큭… 크큭… 아아, 나의 아일라. 나의 가엾고 사랑스러운 새."
그는 집무 책상 위로 걸어가 놓여 있던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백색의 퀸 체스말을 집어 든 그의 손가락이 희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조그마한 새장 안에서 숨막혀 죽어가는 인형은 이제 그에게도 매력이 없었다. 그녀가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려 발버둥 치는 모습을 방금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그 앙칼진 반항과 경멸에 찬 눈빛은 카일락의 내면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파괴적이고 통제적인 욕망에 불을 지폈다.
"네가 그 작은 새장이 싫어 날아가겠다면, 기꺼이 열어주지."
카일락의 붉은 눈동자가 잔혹한 빛으로 형형하게 타올랐다.
"하지만 아일라. 정말로 네가 내게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는 건 아니겠지."
카일락은 손안의 하얀 체스말을 천천히 굴렸다. 그녀가 어떤 길을 택하든, 그 길의 끝에서 그녀가 결국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될지. 그 달콤하고도 잔혹한 그림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온몸이 짜릿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망쳐 보아라, 아일라."
카일락이 쥐고 있던 백색의 체스말을 체스판 맨 끝자리, 아무 데도 도망칠 곳 없는 구석으로 천천히 밀어 넣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네가 겪게 될 모든 불행과 좌절의 끝에는, 항상 내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중앙의 의자에, 카일락 에이든하르트가 다리를 꼰 채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일찍 일어났군요, 나의 아일라. 아침 산책이라도 나온 겁니까."카일락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도망치려 한 약혼녀를 향한 책망도 없었다. 그저 첫걸음마를 떼다 넘어진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애정 어린 유열만이 가득했다. 아일라는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다 치워. 당장 비켜요. 난 당신이 만든 이 끔찍한 연극판에서 단 일 분 일 초도 숨을 쉴 수가 없어."그녀의 날 선 외침에도 카일락은 그저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아일라에게 다가왔다. 큰 키가 만들어내는 서늘한 그림자가 그녀의 위로 쏟아졌다."숨이 막힌다니 가슴이 아프군요. 당신이 마음껏 숨 쉴 수 있도록 이 넓은 수도의 하늘을 통째로 사서 당신의 새장에 덮어주었는데도 말입니다."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아일라의 손에 쥐여주었다. 방금 전, 그녀가 마차 매표소에 지불했던 바로 그 은화들이었다."당신의 고귀한 손에 이런 더러운 쇳덩어리가 닿는 것은 참을 수가 없군요. 여행이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내어 주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걷는 길, 타는 마차, 스치는 바람까지 모두 내가 준비한, 가장 완벽하고 깨끗한 것이어야만 합니다."카일락의 커다란 손이 아일라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도망칠 수 없는 지독한 얽매임."그러니 도망쳐 보십시오. 짐을 싸서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너 세상의 끝까지 달려가도 좋습니다."그의 붉은 눈동자가 잔혹할 정도의 쾌락으로 반짝였다."네가 필사적으로 도망쳐 다다른 그곳 역시, 내가 널 위해 지어둔 또 다른 요람일 테니까요."짝.날카로운 마찰음이 뒷골목의 정적을 찢었다. 아일라가 있는 힘껏 카일락의 뺨을 내리친 것이다.
아일라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어둠 속에서 그녀를 짓누르는 것은 더 이상 북부의 매서운 추위가 아니었다. 펠루아 구역의 화려한 저택, 푹신한 침구, 심지어 창문을 넘어오는 부드러운 남부의 바람결조차 모두 카일락 에이든하르트가 직조해 낸 거미줄처럼 느껴졌다.'도망쳐야 해.'동이 트기 무섭게 아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대공이 마련해 준 최고급 실크 드레스와 보석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남부의 시장에서 평범한 천을 끊어다 직접 지었던 수수한 여행용 망토를 걸쳤다. 금고 안에 산처럼 쌓여 있던 에이든하르트 가문의 황금 전표 대신, 자신이 상회를 운영하며 직접 벌어들인 은화 몇 닢만을 작은 가죽 주머니에 챙겼다.저택의 복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평소라면 부지런히 아침을 준비했을 하녀들의 인기척조차 없었다. 아니, 어쩌면 어둠 속에 숨어 그녀의 행동을 빠짐없이 지켜보며 다음 각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일라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저택의 뒷문을 통해 새벽의 거리로 빠져나왔다.새벽안개가 짙게 깔린 로젤 수도의 거리는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아일라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젯밤과는 완전히 달랐다. 갓 구운 빵 냄새를 풍기는 빵집, 부지런히 길을 쓰는 청소부, 수레를 끄는 상인들. 그 모든 것이 오직 자신을 속이기 위해 세워진 정교한 무대 장치처럼 기괴하게 일렁였다.아일라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수도의 동문 외곽에 위치한 대형 마차 정류장이었다. 북부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동대륙의 끝자락, 이름 모를 작은 항구 도시로 숨어들 생각이었다. 그곳에서라면 이 지독한 연극을 끝내고 진짜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정류장은 아침 일찍부터 먼 길을 떠나려는 여행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일라는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매표소로 다가갔다."동대륙의 끝, 모르테 항구로 가는 가장 빠른 마차표를 한 장 부탁
하지만 장난감은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버둥 칠 때 비로소 가장 완벽한 유희가 되는 법이다. 카일락의 붉은 눈동자가 잔혹한 희열로 타올랐다. 극의 막이 내릴 시간이었다.***아일라는 장부를 내던지고 1층으로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다. 도망쳐야 했다. 이 소름 끼치는 무대에서, 저주받은 유리장에서 단 한 발자국이라도 멀어져야 했다.쾅가게 문을 부서져라 열어젖히고 뛰쳐나간 아일라는, 밤거리를 마주한 순간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낮에는 그토록 활기차고 다정했던 해와 달 거리가 죽은 듯이 고요했다. 하얀 차양막 아래로 짙게 깔린 그림자 속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마리안, 바르토, 렌, 그리고 거리의 이웃 상인들.수십 명의 사람들이 가게 불이 모두 꺼진 깜깜한 밤거리 한가운데에 미동도 없이 서서, 일제히 아일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언제나 짓고 있던 그 다정하고 살가운 미소가 거짓말처럼 지워져 있었다. 감정 하나 없는 차갑고 공허한 눈빛들. 마치 무대 뒤에서 인형술사의 다음 실조종을 기다리는 텅 빈 목각 인형들 같았다."마리안, 렌."아일라가 뒷걸음질을 치며 이름을 불렀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끔찍한 정적을 가르고, 거리를 울리는 여유로운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또각, 또각.인형처럼 굳어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양옆으로 길을 터주며 고개를 숙였다. 갈라진 군중의 틈바구니 사이로, 칠흑 같은 어둠을 찢고 걸어 나오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와 단정하게 넘긴 흑발,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카일락 에이든하르트였다."아일라."카일락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아일라의 귓가에 닿았다. 아일라는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점의 벽면으로 물러섰다. 등 뒤로 차가운 벽돌이 닿았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카일락은 겁에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자, 마치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는 천천히
핏자국이 엉겨 붙은 무쇠 구두칼.아일라는 카운터 밑바닥에서 끄집어낸 그 차가운 금속 덩어리를 쥔 채,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손끝에 묻어난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찔렀다. 고향으로 은퇴했다던 늙은 장인의 목숨과도 같은 분신이, 왜 피에 젖은 채 자신의 가게 구석에 처박혀 있단 말인가.머릿속에서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위화감들이 하나둘씩 소름 끼치는 속도로 엉겨 붙기 시작했다. 벌벌 떨며 도망치듯 사라졌던 토비, 자신의 치수와 걸음걸이마저 완벽하게 알고 있던 카를로 장인, 속마음을 읽어내듯 발 빠르게 움직이던 서기 렌, 그리고 미세한 습관 하나까지 놓치지 않던 다정한 이웃 마리안.아일라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구두칼을 쥔 채 2층의 집무실로 향했다. 렌의 자리를 확인해야 했다. 언제나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던 수석 서기의 책상. 아일라는 떨리는 손으로 잠겨 있는 서랍 틈새에 구두칼의 끝을 밀어 넣고 체중을 실어 비틀었다.우지직나무가 쪼개지는 파열음과 함께 서랍이 뜯겨 나갔다. 텅 비어 있어야 할 서랍의 이중 바닥 아래,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두꺼운 검은색 가죽 장부가 모습을 드러냈다.장부의 겉면에는 은색으로 각인된 문양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시나무 검. 남부의 중심인 로젤 수도에서는 결코 발견되어서는 안 될, 북부의 지배자 에이든하르트 대공가의 문양이었다.아일라는 헉 숨을 들이키며 장부를 펼쳤다. 달빛 아래로 드러난 페이지에는 믿을 수 없는 문장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대상 아일라 관찰 보고서 및 각본.배역 마리안: 대상의 경계심을 허무는 다정하고 수다스러운 이웃 역할. 월 십만 금화 지급. 각본대로 차 취향 자연스럽게 주입 완료.배역 바르토: 상단 연합의 조력자 역할. 일호 점포 매입 및 원래 있던 상단주 추방 완료.배역 렌: 최측근 감시자 및 동선 통제자.그 아래로는 그녀가 겪었던 모든 일들이 철저한 통제와 계산 아래 이루어진 사태임이 건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토비: 대상에게 각본의 진실을
그런데 보석상을 운영하는 평범한 이웃인 마리안이, 대체 어떻게 장인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그 미세한 굽의 차이와 자신의 은밀한 습관을 똑같이 읊어댈 수 있단 말인가."마리안."아일라의 목소리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차갑게 가라앉았다."당신이 내 걸음걸이 습관을 어떻게 아는 거죠. 아니, 그보다 구두 굽의 중심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 당신이 어떻게 눈으로만 보고 아는 건가요."마리안의 얼굴에 번져 있던 미소가 일순간 멈췄다. 마치 태엽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녀의 입꼬리가 허공에 매달린 채 굳어버렸다. 마리안의 동공이 극도로 팽창하며 잘게 흔들렸다. 그 찰나의 침묵은 숨이 막힐 정도로 이질적이고 끔찍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마리안은 입을 크게 벌려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어머머. 내가 말을 너무 복잡하게 했나 봐요. 보석을 세공하다 보면 아주 미세한 균형의 차이도 한눈에 들어오는 직업병이 있거든요. 아일라가 걸을 때 치맛자락이 흔들리는 각도를 보고 혼자 짐작해 본 것뿐이에요. 내 눈썰미가 제법 훌륭하죠."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변명이었다. 보석 세공사 특유의 예리한 관찰력. 어제 카를로 장인이 했던 변명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지극히 논리적인 대답.평소의 아일라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자신이 예민했다고 자책하며 이 다정한 이웃에게 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아니야. 이건 우연이 아니야. 무언가, 아주 거대하고 기분 나쁜 톱니바퀴가 내 주변에서 굴러가고 있어.'아일라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아, 직업병이시구나. 정말 대단한 눈썰미네요, 마리안.""호호, 다행이네요. 그럼 난 파이만 두고 이만 가볼게요.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서요."마리안은 황급히 바구니를 카운터에 올려두고는 뒤돌아 도망치듯 상회를 빠져나갔다. 언제나 여유롭고 사근사근했던 그녀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아일라는 문이 닫힌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아일라 상회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눈부신 햇살과 함께 시작되었다.아일라는 2층 집무실에 앉아 오늘 납품될 원단 목록을 점검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어제 설치된 새하얀 차양막이 부드러운 바람에 기분 좋게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순조로웠다. 적어도 수석 서기인 렌이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점주님, 주문하셨던 맞춤 구두가 완성되어 가져왔습니다."렌이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 든 은쟁반 위에는, 최고급 흑색 가죽으로 지어진 우아한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은은한 광택과 유려한 곡선은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공이 들어간 명품이었다.아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두를 만지작거렸다. 어제 늦은 오후에 치수를 쟀을 뿐인데, 하룻밤 만에 이토록 완벽한 결과물이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정말 아름답네요. 카를로 장인어른의 솜씨가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손이 빠르신 줄은 몰랐어요. 직접 뵙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아래층에 계신가요."아일라가 묻자 렌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아, 그게 실은 카를로 장인께서 어젯밤 갑작스럽게 은퇴를 결정하셨습니다.""네. 은퇴요."아일라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고질적인 관절염이 심해지셔서 더 이상 세밀한 공정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하신 모양입니다. 남은 작업은 에덴 공방의 다른 숙련공들이 밤을 새워 마무리하여 방금 전 상회로 보내왔습니다. 솜씨 좋은 명장이 펠루아 구역을 떠나게 되어 상단 연합에서도 몹시 아쉬워하고 있습니다."렌의 설명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고,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노령의 장인이 건강 문제로 고향에 내려가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일라의 가슴 한구석에서 서늘한 이물감이 고개를 들었다.원단 납품을 앞두고 사시나무 떨듯 겁에 질려 있다가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토비.그리고 어제 처음 만나 구두 본을 뜰 때까지만 해도 자부심에 차 있던 장인 카를로의 갑작스러운 은퇴.자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