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새장 밖의 하늘 (1)

Author: 뮤네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7 17:49:40

아일라는 자신의 눈앞에 도열한 마차와 호위 기사들을 보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북부의 칼바람이 뺨을 때렸지만, 묘하게도 춥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에이든하르트 대공성의 정문 앞이었다. 과거의 삶에서는 단 한 번도 제 발로 넘어보지 못했던, 육중하고 거대한 철문이 지금 그녀를 위해 활짝 열려 있었다.

"정말 이것으로 충분합니까."

등 뒤에서 들려온 차분한 목소리에 아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카일락 에이든하르트. 북부의 지배자이자 그녀를 옭아맸던 거대한 사슬. 하지만 지금 그녀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에는 그 어떤 집착이나 광기도 서려 있지 않았다. 오직 떠나는 정혼자를 걱정하는 다정함과, 그녀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고결한 체념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네. 전하께서 챙겨주신 것만으로도 남부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에 과분할 정도입니다."

아일라는 곁에 놓인 묵직한 가죽 가방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파혼을 선언하고 영지를 떠나겠다는 그녀의 말에 카일락은 단 하루 만에 모든 것을 준비해주었다. 남부 수도 중심가에 위치한 번듯한 저택의 권리증, 평생을 놀고먹어도 다 쓰지 못할 만큼의 막대한 금화가 든 전표, 그리고 그녀의 안전을 책임질 정예 호위 기사단까지.

'과거의 내가 바보였어. 이렇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면, 진작에 내 의사를 확실히 밝히는 건데.'

아일라는 속으로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지난 삶에서 그녀는 카일락을 두려워하기만 했다. 그가 내어주는 완벽한 환경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녔고, 결국 그의 통제욕을 자극해 파국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당당하게 요구했고, 그는 이성적으로 납득했다. 그것이 이 남자의 진면목이었던 것이다.

"남부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합니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거나,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에이든하르트의 이름을 쓰십시오. 북부는 영원히 당신의 편일 테니까요."

카일락이 천천히 손을 뻗어 아일라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그의 손길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무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일라는 한 걸음 물러서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전하.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제 힘으로 살아갈 테니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카일락은 물러선 아일라의 행동에 상처받은 듯 잠시 손을 허공에 멈추었지만,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평안하시길."

그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아일라는 마차에 올랐다. 기사가 정중하게 마차 문을 닫았다. 덜컹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에이든하르트 대공성의 거대한 첨탑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아일라는 그 압도적인 풍경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창틀을 꽉 쥐고 있었다.

마침내 대공성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끝없는 설원만이 펼쳐지자, 아일라는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해냈어. 드디어 벗어난 거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아닌 환희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자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내린 결정이 그녀의 운명을 완벽하게 비틀어 놓았다. 이제 다시는 그 숨 막히는 온실에 갇혀 죽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완벽한 자유. 온전한 내 삶. 아일라는 마차의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다가올 남부에서의 눈부신 날들이 벌써부터 눈앞에 아른거렸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사냥개를 풀어놓은 빈집 (2)

    깊은 밤. 카일락이 연병장에서 마지막으로 군부의 수뇌부를 압박하며 살기를 뿌리는 동안, 아일라는 내실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잿빛 머리카락의 총괄 관료를 조용히 불러들였다."전, 전하. 주군께서 내일 새벽 드디어 수도로 떠나신다 들었사옵니다."관료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안도와 극도의 공포가 뒤섞인 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북부를 짓누르던 거대한 폭력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사실은 숨통이 트이는 일이었으나, 반대로 대공의 비호 없이 늙은 재무 장관과 맞서야 한다는 사실은 그를 사시나무처럼 떨게 만들었다."장관 일파가 움직이기 시작했사옵니다. 대공께서 성을 비우시는 즉시, 유령 기사단의 배급을 끊어버린 저희를 '군수 자금 횡령'이라는 역모로 몰아세워 무력으로 재무부를 장악하려 든다는 은밀한 보고가 들어왔나이다!"관료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카일락이 없는 빈집. 무력을 상실한 채 옥좌에 남겨진 아일라는, 재무 장관과 기사단에게 있어 가장 손쉽게 찢어발길 수 있는 연약한 먹잇감으로 보일 것이 자명했다. 그들은 아일라를 반역의 배후로 몰아 처형하고, 잃어버렸던 대장부의 실무 통제권을 완벽하게 되찾으려 할 것이다.그러나 아일라의 시선은 찻잔의 수면을 바라보듯 고요하고 서늘했다."그들이 이빨을 드러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예……?""그 늙고 교활한 여우가 견고한 성벽 뒤에 숨어 명분만 내세우는 한, 북부 재정의 심장을 완벽하게 파낼 방법은 없었죠. 하지만 주군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오만하게 칼을 뽑아 든다면, 그것은 완벽한 반역."아일라의 붉은 입술 사이로 소름 끼치는 살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쥐새끼들이 제 발로 성벽 밖으로 기어 나와 덫을 밟아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카일락이 두고 가는 암영대, 그리고 아일라가 서부에서부터 치밀하게 모아

  •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사냥개를 풀어놓은 빈집 (1)

    북부의 새벽은 짐승의 날 선 송곳니처럼 차갑고 매서웠다.에이든하르트 대공성의 넓은 연병장 위로는, 제국의 수도인 로젤을 향해 진군할 수천 명의 기사단이 내뿜는 서늘한 살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표면적인 명분은 건국 기념제와 사열식에 참석하기 위한 사절단이었으나, 그 거대한 철갑의 행렬은 누가 보아도 황제의 오만에 경고를 보내기 위해 벼려진 압도적인 폭력의 시위였다.하지만 정작 그 무자비한 폭력의 정점인 대공 카일락 에이든하르트는, 연병장이 아닌 굳게 닫힌 내실 안에서 극도의 불안에 짓눌려 짐승처럼 서성이고 있었다."역시 안 되겠어."카일락이 핏발 선 눈동자를 번뜩이며 아일라의 앞을 가로막았다.그의 거친 호흡이 내실의 서늘한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황제의 친서가 당도한 지 사흘. 내일 아침이면 국경을 향해 출발해야 할 시점이었으나, 카일락의 내면에 똬리를 튼 병적인 집착은 좀처럼 그를 밖으로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너를 이곳에 두고 갈 수는 없어. 네가 내 시야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미칠 것 같단 말이다. 차라리 너를 내 마차 안에 가두고 수도로 데려가겠어. 황제 새끼든 뭐든, 감히 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쳐다보는 놈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두 눈을 파버리면 그만이니까."카일락의 커다란 두 손이 아일라의 가녀린 어깨를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자신을 시험하려는 황제에게 압도적인 무력을 각인시키고 오겠다는 오만함은 분명했다. 그러나 아일라를 홀로 두고 북부를 비운다는 사실은, 이 맹수의 무의식 깊은 곳에 끔찍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가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공포. 혹은 그녀가 너무 많은 실권을 쥐고 자신을 영원히 통제 밖으로 밀어낼지도 모른다는 기괴한 불안감.아일라는 자신의 뼈를 으스러뜨릴 듯 조여오는 카일락의 악력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고요하고 투명한 잿빛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직시했다.

  •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맹수를 부르는 오만한 초대장 (2)

    문장 하나하나는 지독하게 정중하고 우아했으나,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정치적인 독니는 아일라의 잿빛 눈동자 속에서 완벽하게 해부되고 있었다.'교활한 늙은이 같으니.'아일라의 붉은 입술 사이로 서늘한 조소가 흘러나왔다.황제는 북부의 내부가 썩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챘다. 바르토 백작의 고립, 카엘 자작의 배신, 그리고 기사단장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군수 자금의 동결. 북부를 지탱하던 견고한 파벌들이 무너지고 가신들이 서로의 목을 물어뜯는 이 이상 기류의 냄새를, 대륙의 가장 교활한 포식자가 놓칠 리 없었다.그래서 황제는 덫을 놓은 것이다.대공을 수도의 사열식으로 불러내어, 북부의 무력이 정말로 마비되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건재한지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수작. 만약 카일락이 이 초청을 거부한다면, 황실은 북부의 군권에 심각한 내분이 생겼음을 확신하고 정당한 명분 아래 토벌대를 파견하거나 북부의 이권을 물어뜯으려 들 것이다.하지만 아일라의 이성을 가장 차갑게 벼려낸 부분은 서신의 마지막 구절이었다.'나를 함께 수도로 부르겠다.'황제는 북부의 폭군을 얌전하게 만든 정체불명의 여자, 갑작스럽게 권력의 중심에 나타난 아일라의 존재를 명확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폭군의 유일한 약점이자 목줄. 황제는 아일라를 수도로 끌어들여 인질로 삼거나, 그녀를 이용해 카일락을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서늘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아일라. 표정이 왜 그래. 그 늙은이가 감히 네 심기를 거스르는 개소리라도 적어놓은 거야?"바닥에 엎드려 아일라의 눈치를 살피던 카일락이 낮게 으르렁거렸다."당장 그 종이 쪼가리를 찢어버려. 내가 수도를 불태우러 갈 테니까, 넌 여기서 나만 기다리고 있으면 돼.""아니요."아일라가 친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서늘하게 대답했다."이건 당신이 칼을 휘두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내부의 적을 정리하기도 전에 마주한 외부의 거대한 포식자. 황실의 개입은 분명 아일라가 치밀하게 쌓아 올리던 방패에 균열을 낼

  •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맹수를 부르는 오만한 초대장 (1)

    에이든하르트 대공성의 집무실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서늘한 긴장감으로 얼어붙어 있었다.창백하게 질린 기사단 부단장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들어 올린 서신. 그 위에 찍힌 황금빛 밀랍은 대륙의 심장부인 로젤 황실을 상징하는 화려하고도 오만한 문양을 품고 있었다. 수십 년간 북부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숨을 죽이고 눈치만 살피던 중앙의 권력이, 기어이 이 얼어붙은 설원을 향해 징그러운 촉수를 뻗어온 것이다."로젤의 늙은 황제 새끼가, 기어이 노망이 났군."카일락의 목구멍에서 짐승의 뼈를 긁어내는 듯한 기괴하고 흉포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방금 전까지 아일라의 허리를 안고 맹목적으로 체향을 들이마시던 그는, 외부에서 날아든 이 불경한 종이 쪼가리가 자신과 아일라의 완벽한 세상을 침범했다는 사실에 끔찍한 살기를 폭발시키고 있었다.스릉카일락의 커다란 손이 허리춤의 검자루를 거칠게 틀어쥐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바닥에 엎드린 기사단 부단장의 목덜미를 당장이라도 찢어발길 듯 번들거렸다."내 성벽 안으로 저딴 쓰레기를 함부로 들인 이유가 무엇이냐. 황실의 전령이 이 서신을 들고 북부의 국경을 넘을 때, 그 새끼의 사지를 잘라 국경선에 매달지 않고 내 눈앞까지 가져온 이유가 뭐냐고 묻고 있잖아!""주, 주군! 그것이, 황제의 친서를 함부로 훼손하는 것은 로젤 황실에 대한 명백한 선전포고가 되옵기에……!""선전포고? 그게 두려워서 내 심기를 거스르겠다는 건가!"카일락이 짐승처럼 포효하며 장검을 뽑아 들려던 찰나였다."그만."아일라의 하얗고 차가운 손이 카일락의 억센 팔뚝을 가볍게 내리눌렀다. 단 하나의 짧고 서늘한 단문. 하지만 그 가벼운 통제 한 번에, 대륙을 피로 물들이려던 괴물의 살기는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멈춰 섰다.카일락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핏발 선 눈으로 아일라를 내려다보았다. 왜 자신을 말리느냐는 원망과,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는 맹목적인 복종이 기괴하게 뒤엉킨 짐승의 눈빛.아일라는 턱짓으로 기사단 부단장을 물렸다."두

  •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불탄 잿더미 위로 쌓아 올린 덫 (2)

    유령 기사단의 자금줄이 완벽하게 끊기자, 횡령으로 배를 불리던 군부 수뇌부와 재무 장관 일파는 혼란과 극도의 공포에 빠졌다. 그들은 대공이 이 사태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얄팍한 명분을 내세워 재무부 실무진을 압박하려 했으나, 아일라의 통제 아래 있는 관료는 '대공의 명령'이라는 방패를 앞세워 단 한 닢의 은화도 내주지 않았다.궁지에 몰린 그들은 결국 썩어 문드러진 틈새를 스스로 벌리고 말았다."늙은 재무 장관이 결국 꼬리를 잘랐사옵니다."어둠이 내린 집무실, 관료가 은밀히 바친 보고서는 아일라의 예상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동부 능선의 기사단장이 독단으로 자금을 빼돌렸다는 거짓 자백서를 대공성에 바치고, 기사단장 본인은 어젯밤 영지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하옵니다. 그리고 장관은 그 죗값을 치르겠다며, 군수 자금의 배급 실무 권한을 재무부 관료인 소인에게 절반 넘게 이양하겠다는 타협안을 보내왔사옵니다."아일라의 하얀 손가락이 타협안이 적힌 양피지를 가볍게 쓸어내렸다.기사단장이라는 거대한 꼬리를 잘라 자신들의 치부를 덮고, 실무 권한의 절반을 내어주는 대가로 더 이상의 추궁을 막아보려는 늙은 여우의 처절한 몸부림. 하지만 그들이 내어준 그 '절반의 권한'은 에이든하르트 대장부를 둘러싼 견고한 성벽의 핵심 문빗장을 아일라의 손에 쥐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수고했어요. 당분간은 그 절반의 권한으로 실무를 옥죄며 장관 일파의 숨통을 말려두세요."무력으로 단숨에 목을 치는 대신, 가신들이 살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헌납하게 만드는 완벽하고도 잔혹한 포식자의 방식이었다. 카일락이라는 압도적인 흉기를 등 뒤에 세워둔 채, 북부 재정의 심장부가 그녀의 발밑으로 서서히 함락되어 가고 있었다."아일라."관료가 물러간 후, 집무실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카일락이 낮게 으르렁거렸다.그는 늪을 걷는 듯한 발걸음으로

  •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불탄 잿더미 위로 쌓아 올린 덫 (1)

    에이든하르트 대공성의 아침은 묘하리만치 고요했다.어젯밤, 대공이 눈이 뒤집혀 미친 듯이 성을 휘젓고 다녔다는 소문이 하룻밤 새 핏빛 서리가 되어 가신들의 입방아를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 광포한 폭풍이 남긴 흔적이라고는 내실 화로에 쌓인 검은 잿더미와, 대공의 비호 아래 다시 서늘하게 자리 잡은 아일라의 모습뿐이었다.아일라는 집무실의 흑요석 책상 앞에 앉아, 잿빛 머리카락의 총괄 관료가 벌벌 떨며 새로 올린 양피지 뭉치들을 건조한 시선으로 훑고 있었다.그녀의 등 뒤에는 거대한 짐승이 조각상처럼 굳어 있었다. 대공 카일락 에이든하르트. 그는 지난밤 밀실에서 벌어진 끔찍한 심리전의 여파로 짐승처럼 앓던 숨소리마저 완벽하게 죽인 채, 오직 아일라의 시선이 자신의 발밑을 향해 있다는 기만적인 안도감에만 매달려 있었다.아일라가 선고했던 '무력 없이 껍데기만 남은 자는 필요 없다'는 그 잔혹한 진실. 카일락은 자신이 아일라 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녀가 북부의 실권을 뜯어먹는 그 오만한 사냥을 방해 없이 뒷받침하는 '힘의 과시'로서 얌전히 존재해야 한다는 기괴한 속박에 짓눌려 있었다."전하, 어젯밤 주군께서…… 그, 서류들을 전부 불태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만."관료가 식은땀을 흘리며 카일락의 거대한 그림자를 곁눈질했다. 유령 기사단의 횡령을 폭로할 결정적인 명분이 잿더미로 변해버렸으니, 대장부를 거머쥐려던 아일라의 사냥이 완벽하게 실패로 끝났다고 착각한 것이다."그래서요."아일라의 하얗고 차가운 손가락이 깃펜의 끝을 느릿하게 매만졌다."종이 쪼가리 몇 장 타버렸다고 해서 당신이 동결시킨 군수 자금의 흐름이 다시 열리기라도 한답니까?"관료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아, 아니옵니다! 한 번 동결된 은화는 전하께서 쥐신 새로운 금고로 완벽하게 묶여 있사옵니다! 다만…&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