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Chapter 31 - Chapter 40

121 Chapters

31. 세자의 곁

동이 트기 전부터 동궁 안은 분주했다.최 상궁은 대전으로 가져갈 진술서와 목록을 마지막으로 확인했고, 박 의녀는 채원의 목에 감은 비단을 다시 살폈다.붉은 자국은 옅어졌지만, 조금만 말을 오래 해도 목 안쪽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오늘은 가급적 말씀을 아끼셔야 합니다.”박 의녀의 당부에 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날은 아니었다.대전에서 물러나면 박칠성과 최만석의 진술도, 동궁이 모은 장부도 모두 거짓이 된다.윤정명의 가문은 다시 역모를 꾀한 집안으로 남는다.설이가 겉옷을 여며 주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이운이었다.정식 조회에 나설 때 입는 곤룡포 차림이었다.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눈 밑이 어두웠다. 그는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채원의 목을 먼저 봤다.“괜찮으냐.”채원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한 걸음 내딛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졌다. 몸이 옆으로 기울기 전에 이운이 팔을 잡았다.“앉아 있어도 된다.”“대전에 나가겠다고 한 건 저예요.”“알고 있다.”이운은 채원의 팔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그러니 쓰러질 때까지 버티겠다는 말은 하지 마라.”채원은 붙잡힌 팔을 내려다봤다.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애정이 어린 손길이었다. 이운이 채원의 목에 감긴 비단 끝을 만졌다.흐트러진 매듭을 다시 묶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상처 가까이에는 닿지 않으려는 듯, 손끝이 몇 번이나 멈췄다.“아프면 손을 들어.”채원이 그를 올려다봤다.“대전 한가운데서요?”“그러면 내가 데리고 나오겠다.”“저하까지 함께 끌려나올 수 있어요.”이운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래도 네 곁에 있겠다.”짧은 말이었다.그런데 채원은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윤서아가 기다렸던 것은 이런 말이었을지도 몰랐다.가장 힘든 날에 찾아와 손을 잡아 주는 것. 혼자 두지 않겠다고 말해 주는 것.하지만 채원은 그 마음에 기대기보다, 이운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오늘은 저하도 물러서지 마세요.”“그럴 생각 없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Read more

32. 대전의 심문

대전 안은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상단에는 임금이 앉아 있었고, 그 아래로 의금부 당상과 대신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병조판서 김태겸은 이미 와 있었다. 채원이 들어서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눈빛이었다.채원은 이운보다 반걸음 뒤에 섰다. 목 안쪽이 바짝 말랐다.대전 바닥까지 걸어오는 짧은 길도 버거웠지만, 여기서 약한 기색을 보일 수는 없었다.임금이 먼저 입을 열었다.“빈궁이 증인을 붙잡아 거짓 진술을 강요했다는 고변이 올라왔다.”김태겸이 앞으로 나와 예를 갖췄다.“박칠성은 윤정명 대감 댁의 식솔이었습니다. 그자가 의금부에서 이미 무기를 보았다고 증언했는데, 동궁에서 이를 뒤집으라 압박했다 하옵니다.”“압박했다는 근거는?”“박칠성이 동궁에 갇힌 뒤 갑자기 말을 바꾸려 했습니다. 그의 가족까지 동궁이 거두었다 하니, 어찌 강요가 아니겠사옵니까.”대신들 사이에서 낮은 수군거림이 흘렀다.채원은 김태겸을 똑바로 바라봤다. 박칠성의 가족을 먼저 붙잡아 협박한 쪽은 저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동궁이 가족을 보호한 일을 협박으로 바꿔 말하고 있었다.이운이 한 걸음 나섰다.“박칠성은 동궁에 오기 전, 북한산에서 자객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그의 목숨을 노린 자들이 세 명이었고, 그중 둘을 붙잡았습니다.”김태겸의 눈썹이 움직였다.“그 일과 박칠성의 증언이 무슨 상관입니까.”“증언을 바꾸려는 자를 죽이려 한 일이,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오?”대전 안이 조용해졌다.이운은 품에서 봉인한 문서를 꺼냈다.“자객에게서 나온 물건과, 동궁 안에서 박칠성에게 독을 쓰려 한 나인의 진술입니다.박칠성이 입을 열기로 한 날, 누군가 그의 약에 독을 섞었습니다.”“그 나인이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밝혀졌습니까?”김태겸의 반문은 빠르고 침착했다.채원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아직 배후를 밝히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이운의 대답이 잠시 늦어졌다.그 틈에 김태겸이 다시 입을 열었다.“자객이 있었다 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Read more

33.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의금부 당상은 해가 기울 무렵 동궁에 도착했다.그는 박 의녀가 적은 소견부터 확인했다.박칠성은 침상 위에서 식은땀에 젖은 채, 상처 난 허벅지를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당상은 상처를 직접 살핀 뒤 박 의녀에게 물었다.“이자를 지금 의금부로 옮길 수 있겠느냐.”“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절대 움직이면 안 됩니다.”고개를 끄덕인 당상이 이어 박칠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동궁에서 네게 진술을 바꾸라 협박했느냐.”박칠성의 입술이 말라 있었다. 그는 채원과 이운을 한 번씩 보고서야 입을 열었다.“아닙니다.”“가족을 동궁이 거두었으니, 살려 달라는 대가로 말을 바꾼 것이 아니냐.”“제 처자식을 먼저 붙잡은 쪽은 조필규였습니다.”박칠성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그자가 윤 대감 댁에 무기가 있다고 말하면 살려 주겠다 했습니다. 저는 그 말대로 의금부에서 거짓말을 했습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당상은 붓을 든 서리에게 진술을 적게 했다.“처음 증언을 뒤집는 까닭은 무엇이냐.”“저를 죽이려는 자들이 왔습니다. 제가 아는 게 없었다면, 그자들이 제 목을 베려 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박칠성은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움켜쥐었다.“이제는 더 숨길 수 없습니다.”당상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 서리에게 말했다.“진술을 두 부 작성해라. 한 부는 의금부에 보관하고, 한 부는 대전에 올린다.”그는 마지막으로 채원을 향해 예를 갖췄다.“빈궁마마, 수레 기록과 장부의 날짜도 의금부에서 대조하였습니다. 박칠성의 최초 증언은 날짜가 맞지 않았습니다.”채원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윤정명 가문이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궁이 증인을 협박해 거짓말을 꾸몄다는 고변은 더 이어가기 어려워졌다.이운이 당상에게 물었다.“오늘 대전에는 어떻게 아뢸 셈이냐.”“박칠성의 진술과 물증 사이에 어긋나는 부분이 확인되었다고 올리겠습니다.김태겸 대감이 제기한 고변은 더 조사해야 하나, 동궁이 강요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Read more

34화. 끊어진 줄

박 의녀는 채원의 팔꿈치를 닦아 낸 뒤 새 천을 감았다.“다행히 깊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물에 닿지 않게 하셔야 합니다.”“이 정도면 괜찮아요.”“덧나지 않으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박 의녀는 단호하게 대꾸한 뒤 약병을 챙겼다. 침상 곁에 선 이운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다만 채원의 팔에 감긴 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의녀와 설이가 물러난 뒤에야 이운이 입을 열었다.“김서령을 구할 필요가 있었느냐.”채원은 고개를 들었다.“그럼 그냥 두라고요?”“그 말이 아니다.”“그 여자가 다칠 자리에 제가 있었어요. 피할 수 있었고, 손을 뻗을 수도 있었죠.”이운의 손이 탁자 끝을 짚었다.“너는 아직 제 몸 하나도 온전히 가누지 못한다.”“그래도 눈앞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네가 다쳤다.”“팔꿈치 조금 쓸린 거예요.”“그 조금이 쌓여 네 몸을 망가뜨린다.”채원은 더 말하지 못했다.화를 내는 목소리였지만, 이운의 눈에는 화보다 두려움이 먼저 있었다.자신이 또 늦을까 봐 겁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이운은 한참 뒤 낮게 물었다.“어디서 그런 몸놀림을 배웠지.”채원의 손끝이 이불 위에서 멈췄다.“등이 떨어지기 전에 줄이 풀린 걸 봤어요.”“그걸 본다고 모두 몸을 던지지는 않는다.”“생각할 시간이 없었어요. 몸이 먼저 움직였을 뿐이에요.”이운은 채원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더 묻지 않았지만, 그 눈빛에는 분명 질문이 남아 있었다.문밖에서 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저하, 회랑을 살핀 이가 왔습니다.”이운이 문을 열자 호위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천으로 감싼 밧줄 한 토막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청동 등을 매달았던 줄입니다.”이운이 천을 풀었다.밧줄은 오래 닳아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쪽이 매끈하게 잘려 있었다. 끊긴 끝에는 칼날이 스친 듯 가는 섬유가 삐죽삐죽 남아 있었다.채원의 눈빛이 달라졌다.“사고가 아니었네요.”채원은 밧줄의 잘린 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한 번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

35. 남은 발자국

사흘 뒤, 채원은 해가 뜨기도 전에 침상에서 내려왔다.설이가 잠든 사이였다.채원은 뜰 기둥을 잡고 발목부터 천천히 풀었다. 무릎을 굽혔다 펴고, 굳은 허리를 낮게 숙였다. 몸 안쪽이 당길 때마다 숨을 고른 뒤 같은 동작을 한 번 더 했다.열 번째로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멈췄다.“언제부터 나와 있었지?”채원이 고개를 들었다.이운이 뜰 입구에 서 있었다. 옷차림은 단정했지만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남아 있었다.“방금요.”“박 의녀는 아느냐.”“알면 말렸겠죠.”채원은 다시 무릎을 굽혔다. 허벅지가 떨렸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자세를 버텼다.이운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그러다 도로 쓰러진다..”“몸을 되찾으려는 겁니다.”채원이 천천히 일어섰다.“움직이지 않으면 이 몸은 계속 여기까지예요.”이운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채원이 기둥에서 손을 떼자, 그가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채원의 발이 잠깐 흔들렸다.이운의 손이 팔꿈치 아래를 받쳤다.“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아직 할 수 있어요.”“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일은 다르다.”채원은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 이운은 채원이 중심을 잡은 뒤에야 천천히 손을 놓았다.그때 바깥에서 백건의 목소리가 들렸다.“저하.”백건은 뜰에 들어서자 채원을 보고 말을 멈췄다. 기둥 옆에 선 채원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발끝은 아직도 바닥을 단단히 누르고 있었다.이운이 먼저 물었다.“찾았느냐.”“예.”백건은 품에서 작은 나무패 하나를 꺼냈다.“회랑에서 죽은 나인이 밤마다 서쪽 협문으로 나간 기록을 찾았습니다. 근무하던 수문장이 이 패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나무패 한쪽에는 흐릿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도성 서쪽, 버드나무골.“나인은 약 꾸러미를 들고 나갔다고 합니다. 돌아올 때마다 빈손이었고요.”“어디로 갔는지는?”“버드나무골 끝의 빈 별채입니다. 사람을 붙여 두었는데, 드나드는 자는 아직 없었습니다.”채원이 나무패를 받아 들었다.회랑의 등불이 떨어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Read more

36. 북문 밖 주막

해가 기울 무렵, 북문 밖 주막에는 장사꾼과 행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채원은 주막 맞은편 포목전 이층 창가에 앉아 있었다.평민 차림으로 갈아입었지만 목에는 아직 얇은 천을 둘렀다. 창틀 옆에서 골목을 살피는 건 이운이었다.백건의 사람들은 손님과 장사꾼 틈에 흩어져 있었고, 백건 자신은 뒤뜰이 보이는 골목 입구에 자리를 잡았다.채원이 창가로 바싹 다가가자 이운이 낮게 말했다.“너무 앞으로 나가지 마라.”“여기서 봐야 놓치지 않죠.”이운이 창문을 조금 닫자, 찬바람이 막힌 자리에서 채원이 그를 올려다봤다.“감기라도 들면 또 사흘을 누워 있을 테니까.”“이번에는 안 그럴 겁니다.”“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채원은 웃을 뻔하다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쪽지에 적힌 시각이 가까워지자, 회색 두루마기를 입은 사내가 뒤뜰로 들어섰다.그는 빈 평상 앞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이내 왼쪽 뺨에 긴 흉터가 난 사내가 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회색 두루마기 사내 앞에 멈췄다.회색 두루마기 사내가 품에서 작은 종이뭉치를 꺼냈다.흉터 사내가 손을 내미는 순간, 백건이 골목 입구를 막아섰다.“거기서 움직이지 마라.”두 사내의 얼굴이 동시에 바뀌었다.회색 두루마기 사내가 종이뭉치를 흉터 사내의 손에 밀어 넣고는 주막 담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연락책을 따라가!”백건의 목소리에 호위 둘이 회색 두루마기 사내를 뒤쫓았다.흉터 사내는 반대편으로 달아났다.채원이 창가에서 몸을 일으켰다.“서아야!!”이운이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채원은 계단으로 향했다.포목전 안쪽 계단을 내려가 뒤뜰로 나가자, 흉터 사내가 낮은 담장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사내는 담 너머 포목전 뒤마당으로 뛰어내렸다.채원은 옆문을 열고 뒤마당으로 들어갔다.흉터 사내는 마당 끝 좁은 문으로 향했다. 채원이 널린 빨래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사내가 문을 열려는 순간, 채원이 빨랫줄에 걸린 젖은 천을 잡아당겼다.젖은 천이 사내의 얼굴을 덮었다.사내가 욕설을 내뱉으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Read more

37. 초여드레의 증언

붙잡힌 사내는 동궁 안쪽 빈 전각에 가둬 두었다.두 손은 등 뒤로 묶여 있었고, 문밖에는 백건이 고른 호위 둘이 서 있었다.채원과 이운이 들어서자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왼쪽 뺨의 흉터가 등불 아래 선명했다.이운이 탁자 위에 쪽지를 내려놓았다."누가 쓴 것이냐."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세자빈을 죽이라는 명을 받고 북문까지 왔다. 이제 와서 모른다고 하면 믿어 줄 사람이 있겠느냐.""저는 심부름만 했습니다.""누구의 심부름이지?"사내가 고개를 돌렸다.채원이 말했다."박칠성을 아느냐?"사내의 눈꺼풀이 잠깐 움직였다.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당신의 뺨에 난 흉터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사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이운이 문을 열었다."박칠성이 있는 방으로 데려가라."호위들이 사내를 일으켰다. 그는 버티려 했지만 묶인 손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박칠성은 침상에 기대 앉아 있었다. 열은 조금 내렸지만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박 의녀가 약그릇을 들고 곁에 서 있었다.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박칠성의 손이 이불을 움켜쥐었다."저자입니다."목소리가 떨렸다."저자가 제게 글을 읽어 줬습니다. 초여드레 밤, 윤정명 대감의 집 서쪽 창고에서 검 서른 자루와 군량을 봤다고 말하라고 했습니다."사내가 박칠성을 노려봤다."입 다물어."사내는 이를 갈고 있었다.박칠성이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틀리면 처와 아이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글을 외우지 못하면 두들겨 맞기도 했습니다."박 의녀의 손이 약그릇 위에서 멈췄다.채원이 사내를 바라봤다."누가 시켰어?""저는 모릅니다.""모르는 사람이 왜 윤가 서쪽 창고를 알고, 검이 몇 자루인지 알고, 날짜까지 외우게 해?"사내는 입을 다물었다.이운이 쪽지를 들어 보였다."북문에서 네게 이걸 건넨 자는 연락책이라고 했다. 그 연락책은 누구의 명을 받지?""말하면 죽습니다.""말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죽는다."이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세자빈을 죽이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38. 아버지와 아들

해가 지고서야 이운은 대전으로 향했다.내관이 앞을 막아섰다.“저하, 전하께서는 지금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내가 직접 말씀드리겠다.”“귀비마마께서 안에 계십니다.”이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아바마마를 뵙겠다는 말이다. 비켜라.”내관은 더 막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대전 안에는 임금과 귀비가 마주 앉아 있었다.탁자 위에는 의금부에서 올라온 장계가 펼쳐져 있었다.이운은 귀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다.“아바마마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임금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또 윤정명 일인가.”“예.”“의금부에 맡긴 일이니 기다려라.”“기다릴 수 없습니다.”귀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세자저하께서 빈궁마마 일에는 지나치게 마음을 쓰시는 듯합니다.죄인의 딸이 세자빈 자리에 있는 것부터가 조정의 말거리가 되었는데, 이제는 역모 사건까지 다시 뒤집으려 하시니요.”이운이 고개를 들었다.“귀비마마께서는 잠시 물러나 주십시오.”대전 안의 공기가 멈췄다.귀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지금 나더러 나가라 한 것이냐?”부자 지간에 긴히 나눌 말이 있습니다.임금이 손을 들었다.“귀비는 물러가 있어라.”귀비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서기 전, 이운을 향한 시선만 길게 남겼다.문이 닫히자 임금은 이운을 내려다봤다.“이제 말해라.”이운은 품에서 장부 사본과 박칠성의 새 진술서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박칠성은 거짓말을 했습니다.”“증언 하나가 틀렸다고 윤정명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그 한 사람의 증언으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이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무기가 윤정명 대감의 사가에서 나왔고, 그 무기를 봤다는 자가 나타났습니다.그 말이 있었기에 대감의 해명이 거짓으로 몰렸습니다.”“그래서?”“그자가 외웠던 문장이 나왔습니다. 무기가 들어오기 전날에 창고에서 봤다고 말하라는 지시도 확인했습니다.”임금의 눈이 장부 위로 내려갔다.이운은 멈추지 않았다.“사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39. 꽃이 피는 자리

이운이 대전을 나간 뒤에도 임금은 한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탁자 위에는 수레 장부와 대장간 기록, 박칠성의 진술서가 펼쳐져 있었다. 임금은 그 가운데 놓인 진술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초여드레 밤에 무기를 봤다는 증언.초아흐레에 무기가 사가로 들어갔다는 기록.하루 차이였다.그러나 그 하루가 윤정명과 두 아들의 목숨을 가를 수도 있었다.“전하.”낮은 목소리와 함께 귀비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임금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아직 돌아가지 않았느냐.”“전하의 심기가 편치 않으신 듯하여, 곁을 지키고 싶었습니다.”귀비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갈았다. 향이 은은한 차를 따르는 손끝은 흔들리지 않았다.“세자저하께서 오늘 말씀을 너무 강하게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마음 쓰실 필요는 없사옵니다.”“마음 쓰지 말라?”임금이 낮게 되물었다.“청렴하다고 믿었던 신하의 집안을 역모로 다스렸다. 그 집의 딸은 세자빈이 되었고, 이제 와 그 증언이 거짓일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임금은 진술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내가 섣부르게 판단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귀비의 손끝이 찻잔 위에서 잠시 멈췄다.“전하. 아직 윤정명 대감의 무죄가 밝혀진 것은 아니옵니다. 박칠성 하나가 말을 바꾸었다 하여, 역모의 의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사옵니까.”“그러니 다시 조사하라 한 것이다.”“그러하오나 세자빈마마의 폐위 논의까지 멈추신 것은 지나치신 듯하옵니다.”임금의 시선이 귀비에게 향했다.“무엇이 지나치다는 것이냐.”“세자빈마마는 역적의 여식이옵니다. 윤정명 대감의 죄가 완전히 벗겨진 것도 아닌데, 동궁의 안주인 자리를 그대로 두는 것이 옳겠사옵니까.”귀비가 고개를 숙였다.“원래 세자빈 자리에는 병조판서 댁 여식인 김서령이 앉기로 되어 있었습니다.그런데 세자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다는 정만 보고 세자빈으로 들이셨지 않사옵니까.”임금의 표정이 굳었다.“왜 서아가 세자빈이 되기에 자격이 없다는 것이냐.”“소첩은 다만, 지금의 처지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40. 입을 연 사람들

의금부 심문실 안에는 조필규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손은 뒤로 묶여 있었고, 얼굴에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만은 아직 죽지 않았다.당상 하나가 탁자 위의 장부를 펼쳤다."이 장부는 네 집 서재 바닥에서 나왔다. 무기값, 수레 삯, 사람들 품삯까지 빠짐없이 적혀 있더군."조필규는 장부를 보지도 않았다."제 것이 아닙니다.""네 손도장이 찍혀 있는데도?""누군가 제 도장을 훔쳐 찍었겠지요."당상이 장부를 덮었다."좋다. 그 말은 의금부에서 더 따져 보겠다."이운은 심문실 한쪽에 서 있었다. 왕명이 내려간 뒤 처음 열리는 심문이었다. 당상들은 그를 향해 예를 갖췄지만, 이운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조필규가 고개를 들었다."세자께서 이곳까지 직접 오실 일입니까.""네가 한 일을 들으러 왔다.""소신은 한 일이 없습니다.""윤정명 대감의 사가에 들어간 무기 서른 자루도?"조필규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당상이 손짓하자 문이 열렸다. 호위 둘 사이로 대장장이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이마를 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초아흐레 새벽, 칼 서른 자루를 수레에 실었습니다."조필규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수레를 마련한 사람이 조필규 나리 댁의 마부였습니다."대장장이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무기값도 그자가 냈습니다. 나리의 도장이 찍힌 문서를 들고 왔습니다."당상이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이 도장도 가짜라고 하겠느냐."조필규는 문서를 보지 않았다.“누군가 제 도장을 훔쳐 썼겠지요.”“네 마부도 네 도장을 훔쳐 썼다는 말이냐.”“마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제가 어찌 다 압니까.”당상이 다른 장부를 펼쳤다.“수레 장부에는 그날 칼 서른 자루를 실은 수레가 윤정명 대감의 사가로 갔다고 적혀 있다. 수레를 끈 자의 이름도 조필규의 마부와 같다.”조필규의 눈빛이 흔들렸다가 이내 가라앉았다.“수레꾼 하나의 이름이 같다고 저를 엮으실 셈입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PREV
123456
...
1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