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Chapter 41 - Chapter 50

121 Chapters

41. 붙잡힌 사람

해가 진 뒤, 도성 서문 앞에 짐보따리를 멘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성문을 지키던 군졸들은 낮부터 드나드는 사람의 얼굴과 통행패를 하나씩 확인하고 있었다.사내는 문 앞에서 한참 머뭇거렸다. 그러다 군졸 하나에게 다가가 품에서 패를 꺼냈다.“고향에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오늘 안에 나가야 합니다.”군졸이 통행패를 받아 들었다.“이건 사흘 전 패다.”“새것을 받을 겨를이 없었습니다.”“오늘은 누구도 나갈 수 없다.”사내의 얼굴이 굳었다.“잠깐만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 은전 두 닢이 놓여 있었다.군졸은 은전을 보지 않았다.“그 손 내려라.”“나리.”“내리라고 했다.”사내가 황급히 손을 거두려는 순간이었다.“잡아라!”성문 옆 그늘에 서 있던 백건의 사람이 달려들었다.사내는 곧장 몸을 돌려 달아났다. 짐보따리가 땅에 떨어지고, 안에서 옷가지와 마른 떡이 흩어졌다.사내는 성벽 아래 좁은 길로 뛰어들었다.앞쪽 길목에는 이미 호위 둘이 서 있었다.그가 방향을 바꾸려 하자 백건이 뒤에서 팔을 꺾었다. 사내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놔주십시오! 저는 아무것도....”“조필규의 마부가 맞나.”사내가 입을 다물었다.백건은 그의 머리채를 잡아 얼굴을 들게 했다.“조필규가 의금부에 끌려간 날, 넌 도성 밖으로 달아나려 했다.”“저는 나리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그럼 왜 통행패까지 꾸며 들고 왔지.”마부는 대답하지 못했다.백건이 호위에게 말했다.“동궁으로 데려가라.”“예.”마부가 끌려간 뒤, 백건은 바닥에 떨어진 보따리를 살폈다.옷가지 아래에는 작은 돈주머니 하나가 있었다. 은전은 많지 않았다. 며칠 숨어 지내다 떠날 생각으로 챙긴 돈이었다.백건은 돈주머니를 쥔 채 성문 쪽을 돌아봤다.도성문을 막지 않았다면, 이자는 지금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터였다.동궁의 빈 방에는 흉터 사내가 먼저 와 있었다.손목에는 굵은 밧줄이 묶여 있었고, 양옆에는 호위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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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닫힌 별채

동궁 뒤편의 작은 감방 문이 열렸다.박칠성을 죽이라는 쪽지를 받았던 나인이 두 손을 모은 채 나왔다. 며칠 사이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앞에는 백건과 호위 둘이 섰고, 이운은 나인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말했다.“의금부로 넘기기 전, 다시 묻겠다. 네게 쪽지를 건넨 자의 얼굴을 기억하느냐.”나인은 고개를 저었다.“등만 보았습니다. 검은 도포를 입었고… 손등에 붉은 점이 있었습니다.”“목소리는.”“낮았습니다. 사내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이운은 더 묻지 않았다.“데려가라.”나인이 돌아서자 채원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저도 가겠어요.”이운이 그녀를 보았다.“어디까지.”“의금부요.”“안 된다.”“왜요. 제가 잡은 나인이에요. 그날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제가 가장 잘 알아요.”“호위가 있다.”“호위가 있다고 해서, 제가 들은 말까지 대신 기억하는 건 아니잖아요.”이운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백건이 호위들에게 눈짓했다. 나인을 앞세운 일행이 먼저 감방을 나갔다.채원도 뒤따르려 하자 이운이 길을 막았다.“서아야.”“저하가 저를 데려가지 않아도 갈 거예요.”“혼자 나설 생각이었나.”“예.”이운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그건 약속 못 해요.”채원은 그렇게 말하고 먼저 걸었다.동궁과 의금부로 이어지는 길은 두 갈래였다. 백건은 사람 눈에 띄는 큰길 대신, 창고 뒤편의 좁은 길로 나인을 데리고 들어갔다. 높은 담장과 창고 벽이 양옆을 막고 있었다.채원은 길 안쪽에 발을 들이자마자 걸음을 늦췄다.낡은 창고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백건.”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창고 안에서 사내 하나가 튀어나왔다. 사내의 칼끝은 백건이 아니라 나인을 향했다.호위가 앞을 막았지만, 사내는 칼을 거두며 옆으로 몸을 틀었다. 나인을 베는 데 실패하자마자 담장 쪽으로 달렸다.“생포하라!”이운의 목소리가 뒤를 쫓았다.사내는 좁은 길 끝에서 담장을 짚고 올라가려 했다. 채원은 그가 오른발을 올린 담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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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궁 안의 사람

자객의 시신이 치워진 뒤에도 동궁 앞마당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궁인들은 물을 몇 번이나 부었지만, 돌 틈에 밴 검붉은 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백건은 호위들을 나누어 보냈다.담장 밖.창고 뒤편.동궁으로 이어지는 골목.화살이 날아온 방향과 자객이 숨어 있었을 법한 곳을 빠짐없이 뒤지게 했다.그러나 돌아온 보고는 같았다.담장 너머에는 발자국이 없었다.버려진 활도, 피 묻은 옷자락도 없었다.화살을 쏜 자는 자객이 쓰러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흔적까지 지우고 사라진 듯했다.채원은 서고 안 탁자 앞에 섰다.자객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특징을 남겼다.왼손 엄지가 없고.손등에 붉은 점이 있는 병조 별감.그것이 자객이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이운은 백건이 가져온 군적을 받아 들었다.“병조 별감은 모두 몇이냐.”“스물일곱입니다.”“왼손에 큰 상처가 있는 자는.”백건은 미리 표시해 둔 군적을 넘겼다.“다섯입니다.”“엄지가 없는 자만.”백건의 손이 한 줄에서 멈췄다.“한 명입니다.”그가 이름을 읽었다.“신태오. 병조 무기고의 출납을 맡고 있습니다. 열세 해 전 북쪽 군영에서 손을 다쳤다고 적혀 있습니다.”채원은 그 이름을 천천히 되뇌었다.“신태오.”병조 무기고의 출납을 맡은 사람.무기가 어디서 나와 어디로 들어갔는지, 장부가 아니라 실제 물건의 흐름을 아는 자리였다.박칠성이 보았다고 말한 칼.윤정명 사가에서 나왔다고 기록된 무기.그 사이에 신태오가 있었다면, 단순히 거짓말을 시킨 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채원이 물었다.“지금 어디 있죠.”“병조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자리를 비웠다고 합니다.”“집은.”“사람을 보내 두었습니다.”백건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부인 말로는 사흘 전 밤에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무기고에도 들른 흔적이 없습니다.”“도망쳤군요.”채원의 말에 백건은 섣불리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자객이 남긴 말 하나로 병조 별감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신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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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손등의 붉은 점

동궁 정문 앞에는 호위들이 두 겹으로 늘어서 있었다.신태오는 그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었다. 병조 별감의 관복은 먼지 하나 없이 단정했다.그러나 두 손은 넓은 소매 안에 감춘 채였다.백건이 이운 곁에서 낮게 말했다.“신태오 별감입니다. 해 질 무렵 서문으로 들어온 뒤, 곧장 동궁으로 왔습니다. 동행한 사람은 없습니다.”이운은 신태오를 내려다봤다.“세자빈을 뵙겠다고 했나.”“예, 저하.”“무슨 일로.”“빈궁마마께만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이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여기서 말해라.”신태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윤정명 대감의 일입니다.”문 안쪽에서 채원이 걸음을 옮겼다. 설이가 소매를 붙잡았다.“마마, 밖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저 사람이 찾는 건 나다.”“그래서 더 안 됩니다.”채원은 설이의 손을 조심히 떼어 냈다.“여기서 숨으면, 저 사람은 다음에도 내 앞에 나타날 거야.”이운이 채원을 돌아봤다.“안으로 들어가 있어라.”“신태오가 찾는것은 저입니다. 저희집 일을 말하러 왔다잖아요.”이운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채원은 물러서지 않았다.“호위 사이에 서 있어라.”채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문 앞까지 나갔다. 이운보다 반 걸음 뒤였다. 신태오의 시선이 그제야 올라왔다.그는 채원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목소리가 들리는 방향과 발의 위치, 양옆 호위의 거리를 살폈다.채원은 그 시선이 자신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세자빈마마.”“말하세요.”“박칠성은 살았습니까.”이운이 앞으로 나섰다.“네가 박칠성을 죽이려 한 것이냐.”“소신은 그런 명을 내린 적 없습니다.”“그럼 나인을 죽이려 보낸 자객은 누구냐.”신태오가 처음으로 웃었다.“자객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손을 꺼내라.”신태오의 웃음이 사라졌다.“저하.”“왼손부터.”호위 둘이 가까이 붙었다. 신태오는 천천히 왼손을 소매 밖으로 내놓았다.엄지가 없었다.엄지와 검지 사이, 손등에는 동전만 한 붉은 점이 있었다.채원은 자객이 죽기 직전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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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다시 열린 대전

대전 문이 열리자 채원은 걸음을 늦췄다.임금은 어좌에 앉아 있었고, 귀비는 그보다 한 걸음 아래에 자리했다.귀비의 곁에는 낯선 여인이 서 있었다. 옅은 연분홍 치마에 단정한 머리.눈길을 내리지도, 먼저 올리지도 않는 얼굴이었다.김서령이었다.채원이 대전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 여인은 채원의 옷자락과 손목을 살폈다.적의를 숨기려 하지 않는 시선과는 달랐다.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해야 자신에게 이로운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채원은 대전 가운데에 섰다.“빈궁, 신태오 별감을 잡았다 들었다.”임금의 목소리가 내려왔다.“예, 전하.”“병조 별감이 동궁 정문까지 와서 세자와 빈궁에게 칼을 겨눴다더구나.”“그자가 나인을 죽이려 한 자객의 명을 내렸다는 말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려 했습니다.”귀비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세자께서야 동궁의 일을 살피실 수 있습니다.하지만 빈궁이 직접 그 자를 대면할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이미 한 번 자객에게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으셨습니까.”채원은 고개를 들었다.“그자가 저희집 사건을 입에 올렸습니다.”“이조판서 집안의 죄여부는 의금부가 다시 조사 중입니다. 빈궁이 앞장설 일은 아니지요.”“저희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일입니다.”귀비의 미소가 아주 옅게 움직였다.“그래서 더 조심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조정에서는 빈궁이 아비의 일에만 매달려 동궁을 어지럽힌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임금이 채원에게 물었다.“신태오가 네게 무엇을 말했지.”“박칠성에게 초여드레 밤의 말을 시킨 자가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대전 안이 조용해졌다.“누구냐.”“끝까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자는 병조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귀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신태오는 지금 자신의 목숨을 건지려 아무 이름이나 입에 올릴 수 있는 자입니다.그 말 하나로 조정을 다시 흔들 수는 없습니다.”"저희 집안은 박칠성의 한마디로 가문이 몰락했습니다. 해서 저는 신태오의 말만 믿지 않을 것입니다."채원의 목소리는 흔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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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초여드레의 증언

다음 날 대전에는 평소보다 많은 신하들이 들어와 있었다.채원은 이운의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맞은편에는 김태겸이 서 있었다.어제 동궁에서 신태오가 칼을 꺼냈다는 보고를 들었을 텐데도, 그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대전 양옆에는 대신들만 서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사건 관련자만 들라는 명이었다.임금이 말했다.“윤정명 사건을 다시 살필 만한 근거가 있는지, 오늘 대전에서 듣겠다. 의금부는 기록을 읽어라.”의금부 당상이 앞으로 나왔다. 손에는 박칠성의 처음 진술과 대장간 장부, 수레 장부가 들려 있었다.“박칠성은 초여드레 밤, 윤정명 사가의 서쪽 창고에서 칼 여러 자루를 보았다고 진술했습니다.”당상이 첫 장을 내려놓고 다음 장을 폈다.“대장장이의 장부에는 초아흐레 새벽, 칼 서른 자루를 만들고 수레에 실었다고 적혀 있습니다.무기값은 조필규의 마부가 냈고, 수레 역시 그 마부가 마련했습니다.”대전 안에서 낮은 목소리들이 일었다.“또한 그 마부는 수레를 윤정명 사가 근처까지 끌고 갔으며, 서쪽 담 부근에서 흉터가 있는 사내에게 넘겼다고 진술했습니다.”김태겸이 입을 열었다.“그 진술로 윤정명이 무죄가 됩니까.”당상이 고개를 숙였다.“아직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감.”“그렇다면 왜 조정 대신들을 불러 이미 끝난 일을 다시 어지럽히는 것입니까.박칠성은 칼 서른 자루만 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창고 안에 무기가 있었다고 했습니다.”채원이 김태겸을 보았다. 그는 박칠성의 거짓말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그 진술의 빈틈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임금이 채원에게 시선을 옮겼다.“빈궁은 할 말이 있느냐.”채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박칠성의 말 하나로 제 아비와 오라버니들은 죽었습니다.”대전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였다.“그가 본 무기가 무엇이든, 그는 무기가 들어오기 전날 이미 창고에서 봤다고 말했습니다.누군가에게 그날과 그 장소를 외워서 말하라 지시받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증언입니다.”대신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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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두 번째 목격자

김태겸의 말이 끝나자 대전 안이 술렁였다.“다른 목격자라니.”임금이 물었다.김태겸은 한쪽으로 비켜섰다.“윤정명 사가에서 오래 일했던 자입니다.집안이 무너진 뒤 몸을 숨기고 있었으나, 이번 재조사 소식을 듣고 저를 찾아왔습니다.”“누가 그자를 데려왔느냐.”“의금부에 넘겼습니다. 오늘의 심문에는 의금부 관리들이 함께 지켜보게 하였습니다.”임금이 내관에게 손을 들었다.“들라 하라.”잠시 뒤, 회색 두루마기를 입은 사내가 의금부 나장 둘 사이로 들어왔다.오십 줄은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옷차림은 남루했지만 허리를 깊이 굽히는 모양은 익숙했다.채원의 눈이 사내의 얼굴에서 멈췄다.낯이 익었다.기억이라기보다, 몸 어딘가에 남아 있던 감각이었다.비가 오던 날 마차를 대령하던 손. 어린 서아에게 말 안장에 오르는 법을 가르치며 웃던 목소리.“이름이 무엇이냐.”“최억쇠라 하옵니다. 윤정명 대감 댁에서 마부로 일했습니다.”사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의금부 당상이 품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윤정명 사가의 옛 호적과 마구간 인부 명단을 대조했습니다. 최억쇠는 십이 년간 그 집 마부로 적혀 있습니다.”임금의 시선이 사내에게 다시 향했다.“네가 달아난 뒤 어디에 있었느냐.”“서문 밖 장터를 떠돌았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짐을 나르며 살았습니다.”“그런 네가 어찌 병조판서를 찾아갔지.”최억쇠가 움찔했다.“제가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며칠 전, 저를 아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윤정명 대감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다 하여… 제가 본 것을 말하면 되겠느냐 물었습니다.”김태겸이 담담하게 덧붙였다.“그자가 제게 온 까닭은, 예전에 병조에 말을 납품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듣고 의금부에 넘겼을 뿐입니다.”채원은 김태겸을 잠시 바라봤다. 너무 매끈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따져 물어도, 최억쇠가 그날 밤 무엇을 보았는지는 사라지지 않았다.“대감이 잡혀가던 날 밤, 겁이 나서 달아났습니다. 저까지 붙들리면 아내와 아이도 죽을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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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기억나지 않는 외출

“세자빈마마셨습니다.”최억쇠의 말이 떨어지자 대전이 조용해졌다.채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몸에 남은 기억 속의 최억쇠는 마차를 끌던 사람이었다.말이 놀라면 먼저 고삐를 잡고, 어린 서아가 울면 몰래 엿을 쥐여 주던 사람이었다.그런 사람이 지금 자신을 역모의 한가운데 세웠다.이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본 것을 처음부터 다시 말해라. 창고 안에 무엇이 있었지.”최억쇠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칼이었습니다.”“몇 자루였느냐.”사내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서른 자루였습니다.”채원이 고개를 들었다.대전 안의 몇몇 신하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앞서 의금부가 읽은 대장간 장부에는 초아흐레 새벽 칼 서른 자루를 수레에 실었다고 적혀 있었다.그런데 최억쇠가 본 밤은 초여드레였다.“방금 뭐라고 하였느냐.”채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최억쇠가 대답하지 못했다.“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상자 하나가 넘어지며 칼집 든 칼이 보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상자 안의 칼이 정확히 서른 자루였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긴 상자가 다섯 개였습니다. 하나에 여섯 자루씩….”“상자를 열어 보고 말 한 것이냐?”“아니옵니다.”“그럼 누가 하나에 여섯 자루라고 말해 주었느냐?”최억쇠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김태겸이 나섰다.“상자 수와 크기를 보고 짐작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마부로 오래 일한 자라면 무기 상자의 모양도 알았을 것입니다.”채원은 김태겸을 보지 않았다.“짐작한 숫자가 공교롭게도 다음 날 대장간에서 나왔다는 칼의 수와 같다는 말씀이군요.”“그 칼만 윤정명 사가에 있었다는 증거도 없지요.”“그렇다면 최억쇠에게 다른 무기를 보았다고 말하게 하셨어야 했습니다.”대전 안에서 짧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최억쇠의 시선이 바닥을 헤맸다.손등은 떨리고 있었다. 채원은 그 손이 예전처럼 고삐를 잡을 때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고 생각했다.“최억쇠.”임금이 불렀다.“네가 본 칼은 몇 자루였느냐.”사내는 답하지 못했다.“모른다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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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서문의 기록

내관은 떨리는 손으로 출입부를 바쳤다.“초여드레 자시 전, 세자빈마마께서 서문으로 나가셨다고 적혀 있사옵니다.”대전 안의 시선이 다시 채원에게 쏠렸다.채원은 장부를 보지 않았다. 이 기록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자신은 알 수 없었다.다만 최억쇠가 본 것이라며 외운 날짜와 시각이 이 기록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이운이 내관에게 손을 내밀었다.“내가 보겠다.”그는 출입부를 받아 한 줄씩 훑었다. 붓으로 적힌 글씨 아래에는 서문 당직자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이운의 표정이 달라졌다.“여기 적힌 당직자가 누구냐.”내관이 장부를 들여다보았다.“병조 별감 신태오입니다, 저하.”대전 안에서 웅성거림이 터졌다.신태오는 며칠 전 동궁에서 세자빈을 향해 칼을 뽑았다.그가 나인을 죽이려 한 자객과도 이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의금부에 올라가 있었다.김태겸이 입을 열었다.“신태오가 당직이었다고 하여, 출입 기록까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맞습니다.”이운이 말했다.“그러니 기록이 만들어진 절차를 확인해야 합니다.”“세자빈이 자시가 넘어 궁문을 나가려면, 출궁을 허락한 명과 동행한 궁인의 이름이 함께 남아야 하지 않습니까.”임금이 내관에게 물었다.“그러하냐.”“그러하옵니다. 특히 세자빈마마께서는 홀로 궁문을 나가실 수 없사옵니다.”“그 기록에는 무엇이 적혀 있느냐.”내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세자빈마마의 성함과 서문을 나간 시각만 있습니다.”“출궁을 허락한 명은?”“없사옵니다.”“동행 궁인은?”“적혀 있지 않사옵니다.”김태겸의 입가에서 웃음이 지워졌다.이운이 장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신태오는 세자빈이 나간 것을 확인한 자가 아니라, 세자빈이 나갔다고 적은 자다.”“저하.”“허락도, 동행한 사람도 없는 출궁이 궁문을 통과했다는 말이냐.그 기록을 믿으려면 신태오 하나의 말을 믿어야 한다.”김태겸이 낮게 말했다.“세자빈마마께서 허락 없이 몰래 나가셨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채원이 그를 돌아보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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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신태오의 말

임금은 의금부 당상의 보고를 듣자마자 손을 들었다.“신태오를 대전으로 들라.”잠시 뒤 나장들이 사내 하나를 끌고 들어왔다.신태오는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왼손의 엄지가 잘린 자리와 검지 사이의 붉은 점이 등불 아래 그대로 드러났다.대전 양옆에 선 대신들이 낮게 술렁였다.이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초여드레 밤, 세자빈의 출궁 기록을 네가 적었지.”신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임금의 목소리가 대전을 눌렀다.“궁문 장부를 고친 죄만으로도 네 목숨은 남기기 어렵다. 네가 누구의 명을 받았는지,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 말해라.”신태오의 입술이 잠깐 떨렸다.김태겸이 앞으로 나섰다.“전하, 죄인이 살길을 찾으려 거짓을 꾸밀 수도 있습니다. 장부 하나가 잘못되었다 하여 윤정명 사건을 다시...”“병조판서는 물러서라.”임금의 말에 김태겸의 입이 다물렸다.“지금은 이 자의 말을 듣겠다.”이운은 신태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누가 시켰지.”신태오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조필규의 사람입니다.”“이름을 말해라.”“모릅니다. 밤에 왔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조필규의 사람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그자가 조필규 나리의 명이라고 했습니다. 초여드레 자시 전, 세자빈마마께서 서문을 나갔다고 적으라 했습니다.서문을 지키던 사람들에게는 왕명으로 궁 안쪽의 순찰을 도우라 했고요.”채원이 차분히 물었다.“통행패는.”신태오가 고개를 들었다.“없었습니다.”“수행한 나인은.”“적지 않았습니다.”“그런데도 내 출궁을 장부에 적었다.”“예.”채원의 손이 천천히 쥐어졌다.그날 밤 자신은 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장부 속의 윤서아는 서문을 지나 윤정명 사가로 향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김태겸이 다시 입을 열었다.“세자빈마마께서 궁을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과 윤정명 사가에 역모의 물건이 없었다는 사실은 별개입니다.죄인의 장부 한 줄을 물고 늘어져...”“대감께서는 이미 답을 알고 계신 듯 말씀하십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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