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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우리 사이의 조건

격렬하고도 탐닉적인 입맞춤 속에서 도윤은 수아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 순간, 아직 완벽하게 아물지 않은 수아의 팔에 힘이 실리며 통증이 번졌다. "앗……!" 수아가 아픔에 겨운 신음 섞인 비명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은듯, 도윤은 흠칫하며 몸을 멈췄다. 팽팽하게 끊어질 듯 당겨져 있던 이성의 끈이 제자리를 찾았다. 도윤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수아의 상태를 살폈다. 아직 깁스를 풀고 재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다친 팔이었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수아의 하얀 얼굴에 식은땀이 살짝 맺혀 있었다. "……미안해." 도윤의 낮고 잠긴 목소리에서 미네랄처럼 서늘한 긴장이 흩어졌다. 그는 여전히 붉어진 수아의 입술을 한 번 눈에 담고는, 조금 전의 격정을 진정시키듯 숨을 골랐다. “많이 아파?”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까까지의 날카롭던 기색도 사라졌다. 수아는 팔을 살짝 움직여봤다. “괜찮아요. 갑자기 힘이 들어가서 조금 놀란 거예요.” 도윤의 미간이 깊게 좁아졌다. “내일 재활치료 전에 확인해.” “알겠어요.” 그제야 도윤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수아의 팔을 내려다보다 말했다. "내일부터 당장 네 옥탑방 짐을 정리할 거야. 더 이상 거길 들어 갈 생각은 버려." 수아는 아직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채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 이런 강압적인 방식으로 당신의 옆에 묶이는 건 싫어요. 난 당신의 인형이 아니에요." 도윤은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수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수아의 발그레하게 상기된 볼과 촉촉하게 젖은 입술, 그리고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는 가슴으로 향했다. "인형이라기엔, 네 몸은 아주 솔직하게 대답하던데." "……!" "방금 그 키스에 반응한 건 네 몸이야, 수아." 수아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도윤의 말대로 그의 품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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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엇갈린 일상과 스며드는 흔적

눈을 뜬 수아의 귓가에 어젯밤 도윤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난 절대 널 놓아줄 생각이 없어.” 자신의 손목을 감싸던 뜨거운 체온과 숨이 멎을 듯 깊었던 입맞춤의 여운이 아직도 심장을 어지럽게 두드렸다. 수아는 뺨을 스치는 서늘한 공기 속에서 화들짝 놀라며 이불을 바로잡았다. 이런 식의 강압적인 묶임에 반발하려 했지만, 그의 품 안에서 맥없이 무너지던 제 자신을 떠올리며 수아는 복잡한 한숨을 삼켰다. 생각에 잠겨 있을 겨를이 없었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미술학원의 김미숙 원장을 만나 앞으로의 출근 여부를 의논해야 했고, 무엇보다 야간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코앞에 둔 시점이라 친구들에게 그동안 교수님이 내준 과제들을 확인해 제출해야 했다. 수아는 아침부터 서둘러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수아는 거울 앞에 섰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자.” 거울 속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옷장을 열었다. 한참 고민하다 연한 하늘색 셔츠와 크림색 롱스커트를 골랐다. 너무 꾸민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오랜만에 학원에 가는 날이니 단정해 보이고 싶었다. 머리는 낮게 하나로 묶었다. 옅은 화장을 하고 립밤을 바르던 손이 잠시 멈췄다. 지난밤의 키스가 생각났지만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한편, 도윤은 흰 셔츠에 짙은 회색 수트를 입은 모습은 어젯밤 수아 앞에서 보였던 남자와는 전혀 달랐다. 표정도, 눈빛도, 말투도 모두 평소의 차도윤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출근전, 도윤은 이미 유진에게 짧고 단호한 지시를 남기고 간 참이었다. "수아는 당분간 여기에 계속 머물 겁니다." 그리고 기사 태수를 향해서는 "오늘부터 아저씨는 수아를 맡아 주세요." 유진은 도윤의 그 지시를 전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오랫동안 도윤을 곁에서 지켜봐 온 유진이었다. 도윤은 늘 태하그룹의 후계자라는 무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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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웃는 남자와 균열의 시작

태하그룹 본사, 38층 전략 회의실. 긴 테이블 위로 수십 장의 보고서와 태블릿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찬란한 서울의 도심 전경을 등진 채, 차도윤은 서류 검토에 몰두하고 있었다. 핏줄이 살짝 돋아난 길쭉한 손가락이 만년필을 쥐고 움직일 때마다, 완벽하게 다려진 짙은 차콜 그레이 수트의 소매 끝에서 은은한 카리스마가 흘러넘쳤다. 다크 브라운 톤의 단정한 포마드 헤어와 날카로운 콧날, 그리고 결코 흐트러짐 없는 서늘한 턱선은 언제나처럼 빈틈없는 냉철한 경영자 그 자체였다. 전면 스크린에는 유럽 현지 법인의 분기 실적과 신규 사업 투자안이 떠 있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다음 날이었지만 피곤한 기색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집중력이 좋아 보였다. “영국 법인 매출 성장률이 예상치보다 3.8퍼센트 낮습니다.” 한 임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윤의 손이 멈췄다. “이유는.” “환율 문제도 있었고 현지 유통 채널 확대가 계획보다 늦어졌습니다.” “환율은 세 달 전부터 예상됐습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 그뿐이었지만 회의실의 공기가 단번에 무거워졌다.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예상 가능한 변수를 실패 이유로 보고하지 마세요.” “……네.” “유통 채널 확대가 늦어진 진짜 이유를 다시 분석해서 오늘 오후까지 올리십시오.” “알겠습니다.” 도윤은 다시 자료를 넘겼다. “다음.” 회의는 빠르게 진행됐다. 감정은 없었다. 쓸데없는 말도 없었다. 문제가 있으면 정확히 짚었고, 답이 부족하면 다시 가져오라고 했다. 태하그룹 임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차도윤의 모습이었다. 빈틈이 없는 남자. 결과로 평가하며, 감정을 업무에 끌어들이지 않는 사람.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민철은 회의실 한쪽에서 도윤을 지켜보다 아주 미세하게 눈썹을 움직였다.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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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약점

태하그룹 계열사인 태하 건설 상무실 차도진의 집무실은 도윤의 집무실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현대 미술 작품. 이탈리아에서 주문 제작한 짙은 브라운 가죽 소파. 유리 테이블 위에는 최신 해외 경제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창가에는 값비싼 위스키 몇 병이 장식처럼 놓여 있었다. 도진은 넓은 책상 뒤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짙은 버건디색 타이에 몸에 꼭 맞게 재단된 네이비 수트. 짧게 정리한 검은 머리는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뒤로 넘겨져 있었다. 도윤과 닮은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큰 키. 선명한 이목구비. 재벌가 특유의 여유와 자신감. 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도윤의 차가움이 타고난 절제에서 나왔다면, 도진의 차가움에는 상대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오만함이 섞여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학부를 마치고 영국에서 MBA를 받았다. 도진의 완벽하게 정돈된 금발 브릿지가 섞인 헤어스타일은 그가 얼마나 트렌드에 민감하고 오만한 지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미국 명문대 유학파 출신이라는 타이틀과 세련된 매너를 무기로, 도진은 이미 회사 내 임원진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지세를 영리하게 넓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목표는 따로 있었다. 태하그룹의 절대적인 권력, 사촌 형 차도윤이 쥐고 있는 후계자의 자리였다. 그리고 도진은 무엇보다 자신이 차도윤보다 뒤질 이유가 없다는 확신. 도진은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상무님.” 도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지도 않은 채 물었다. “확인했어?” “네.” 그제야 도진이 시선을 들었다. 비서가 조심스럽게 얇은 서류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최근 차도윤 전무님 동선과 외부 업체 사용 내역을 중심으로 확인했습니다.” 도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서.” “최근 몇 달 사이 생활 패턴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도진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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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기다리는 자

그날 저녁. 태하그룹 태하건설 사장실. 차진만은 창가에 서서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자세는 꼿꼿했다. 희끗한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넘겨져 있었고, 짙은 감색 수트 안에는 은은한 회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형인 차태하 회장보다 부드러운 인상을 가졌지만— 그 눈만큼은 달랐다. 웃고 있어도 속을 쉽게 읽을 수 없는 눈. 오랜 세월 회사 안에서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며 살아온 사람의 눈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도진이 서류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아버지.” 진만이 돌아봤다. “뭔데.” “재미있는 거 하나 찾았습니다.” “무슨.” 도진은 팔짱을 끼고 웃었다. “차도윤이 요즘 이상해요.” 진만은 아무 반응 없이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차도윤이?” “네.” “뭐가.” “퇴근하면 집으로 곧장 들어갑니다.” 진만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집에 가는 게 이상하냐?” “형한테는요.” 도진이 웃었다.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진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진이 계속했다. “출장에서 돌아오면 회사부터 들르던 사람이 요즘은 집으로 먼저 갑니다. 저녁 약속도 예전보다 많이 줄었고요.” “그래서.”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도진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외부 경호업체를 썼어요.” 진만의 눈빛이 처음으로 조금 달라졌다. “회사 보안팀 말고?” “그렇습니다.” 진만이 손을 내밀었다. 도진이 자료를 건넸다. 진만은 천천히 서류를 살폈다. “누구 경호지.” “그건 아직 못 알아냈습니다.” “그럼 아무것도 알아낸 게 아니군.” 도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정황이 있잖아요.” “정황은 증거가 아니야.” 진만은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너는 아직 그걸 구분 못 하냐.” “아버지.” “차도윤이 괜히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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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걷잡을 수 없는 흔들림

시계바늘이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었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 친구들에게 그동안 밀린 과제와 교수의 전달 사항을 확인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태수가 기다리고 있어 편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며 태수가 운전하는 차에서 내린 수아는 펜트하우스 현관문을 열었다. 늦은 귀가에 당연히 집안이 조용할 줄 알았건만, 넓은 거실의 은은한 조명 아래 도윤이 홀로 앉아 있었다. 수아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도윤은 방금 막 샤워를 마친 듯했다. 완벽하게 포마드로 뒤로 쓸어 넘겨 이마를 드러내던 평소의 출근 스타일과 달리, 물기를 머금은 흑발은 자연스럽게 그의 이마 위로 흩어져 내렸다. 그 사소한 차이 하나로 냉철한 경영자 특유의 서늘하고 날카로운 인상이 순식간에 지워지고, 그의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고 부드러운 소년미가 묻어났다. 물기가 살짝 남아 있는 목선과 편안한 네이비 톤의 룸웨어 차림은 묘한 생경함과 함께 위험할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도윤의 시선이 현관 쪽에 멈춰 선 수아에게로 향했다. 밤늦은 시각에 돌아오는 여자를 기다리며 소파에 앉아 있던 그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자신이 허락한 '오후 시간 외출과 학업'이라는 조건 때문에 억지로 참고는 있지만, 밤늦은 시간에 다른 이들의 시선 속에 노출된 채 돌아오는 그녀를 보는 그의 속은 편할리가 없었다. 도윤이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수아에게 다가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쌉싸름한 우디 향과 서늘한 체온이 수아의 호흡을 조여왔다. 도윤은 말없이 수아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채듯 끌어당겼다. 그의 단단한 손목에 채워진 실버 팔찌가 차가운 빛을 반사했다. "늦었네." 낮고 잠긴 목소리가 거실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수업이 조금 늦어졌어요……." 수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간신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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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

도윤의 서늘한 경고가 귓가를 맴돌 즈음, 수아의 일상은 겉보기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일주일에 사흘은 야간 대학 수업을 소화하고, 낮에는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마주하며 평온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평온의 이면은 아슬아슬한 균열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수아를 가장 짓누르는 것은 주변의 시선이었다. 정식으로 결혼을 한 것도, 그렇다고 당당한 연인 관계도 아닌 채로 완벽한 보안 속에 통제된 도윤의 집, 그 펜트하우스에 들어가 살고 있는 자신. 집사 유진이나 기사 태수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생각할지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수년 동안 도윤을 보좌해 온 이들답게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묵묵히 예를 갖추었지만, 그 침묵 속의 배려조차 수아에게는 묘한 가시처럼 박혔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일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황치우 사건도. 마치 오래전 일처럼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야간 대학은 마지막 학기였다. 사고 때문에 밀린 과제가 많았다. 교수에게 따로 제출해야 하는 과제도 있었고, 놓친 수업 내용을 따라잡기 위해 친구들에게 자료를 받아 정리해야 했다. 오전에는 과제를 하고, 오후에는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야간 수업이 있는 날이면 곧장 학교로 향했다. 바빴다. 오히려 좋았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면— 차도윤을 생각할 시간이 줄어들었으니까. 적어도 수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생님!” 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미술실 안을 울렸다. “왜?” 수아가 몸을 숙였다. 일곱 살 지민이가 도화지를 들고 달려왔다. “이거 봐요.” 도화지에는 삐뚤빼뚤한 집 한 채가 그려져 있었다. 집 앞에는 네 사람이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누구야?” “엄마, 아빠, 나, 동생.” “가족이네?” “네!” 지민이가 활짝 웃었다. “선생님도 가족 그려보세요.” 수아의 손이 잠시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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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가져야 하는 남자

한서희는 휴대전화를 한참 내려다봤다. 차도윤. 저장된 이름은 단 세 글자였다. 몇 번이나 먼저 연락할까 말까 고민했던 것도 아니었다. 서희에게 남자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은 자존심이 상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자신이 연락하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좋아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이 왔다. 그런데— 차도윤은 달랐다. 서희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몇 번 이어졌다. 그리고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 짧았다. 서희가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 "도윤 오빠, 왜 이렇게 연락이 없어요? 우리 얼굴 본 지가 언제인지 알아요? 이번 주에 시간 언제 돼요? 같이 저녁 먹어요." 애교 섞인 목소리로 건넨 데이트 신청이었으나, 도윤의 반응은 냉혹했다. “일이 바빠. 당분간 시간 내기 어려울거 같아.” 수화기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서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도 일해요?” “응.”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이 서늘했다. 툭, 하고 통화가 끊어졌다. 서희의 완벽하게 다듬어진 미간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서희는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세상의 모든 남자가 자신에게 눈도장을 찍지 못해 안달복달했다.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줄을 서서 무릎을 꿇는 남자들이 사방에 널렸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안달복달하는 이들은 부지기수였다. 하물며 집안끼리 공식적인 혼담이 오고 가며 정략결혼의 대상자로 묶인 마당에, 차도윤은 정작 제대로 된 만남조차 회피하며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서희는 휴대전화를 귀에서 천천히 내렸다. 화면에는 통화 종료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진짜.” 기가 막혔다. 자신이 먼저 전화했다. 그런데 차도윤은 또 거절했다. 그것도 별다른 설명조차 없이. 바빠. 그 한마디. 서희는 휴대전화를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럴수록 도윤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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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보고 싶어서

태하그룹 본사 38층 회의실. 저녁 일곱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걸 지금 보고서라고 가져온 겁니까?” 도윤의 낮은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라앉혔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긴 테이블 끝에 앉은 임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전면 스크린에는 태하그룹이 추진 중인 동남아 복합개발사업의 수정 사업계획서가 떠 있었다. 총사업비만 수천억 원. 진만이 이끄는 태하건설까지 이해관계가 얽힌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도윤은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원자재 가격 상승분은 반영했는데 환율 변동 위험은 그대로고, 현지 인허가 지연 가능성은 낙관적인 수치만 넣었습니다.” “전무님, 그 부분은 현지 법인에서—” “현지 법인이 책임집니까?” 임원의 입이 다물어졌다. 도윤이 차갑게 바라봤다. “최종 결정은 우리가 합니다.” “…….” “잘못되면 현지 법인 탓이라고 주주들에게 설명할 겁니까?” “아닙니다.” “그럼 다시 하세요.”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오전까지 수정안 올리십시오.” “네, 전무님.” “같은 숫자 다시 가져오지 마세요.” 도윤이 회의실을 나섰다. 뒤따라 나오던 민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도윤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해외 법인 보고서부터 신규 투자안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후에는 차진만 쪽 임원과도 한 차례 부딪혔다. 도윤은 화를 내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차도윤이 정말 화가 났을 때는 목소리가 더 낮아졌으니까. 집무실로 돌아온 도윤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늦은 시각까지 이어진 밀린 결재와 까다로운 투자 건으로 도윤의 머릿속은 지끈거릴 정도로 복잡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도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의자에 깊숙이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았다. 지독한 피로를 털어내려 했으나, 눈꺼풀을 감자마자 떠오른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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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빗장이 풀린 밤

캠퍼스 정문을 빠져나오는 수아의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늦은 시각까지 이어진 강의 탓에 어깨가 뻐근했다. 그 때 문득 정문 가로등 아래 세워진 낯익은 고급 세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차 안에 도윤이 있다는 직감이 온몸을 스쳤다. 수아가 긴장한 채 다가서려던 찰나였다. "저기, 수아 씨." 갑자기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누군가로 인해 수아의 걸음이 뚝 멈췄다. 야간 대학에서 몇 번 조별 과제를 같이 하며 은근히 호감을 비치던 동기 남학생이었다. 그는 주머니 뒤로 숨기고 있던 작은 장미 꽃다발을 수줍은 얼굴로 내밀었다. "갑자기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미안해요. 사실 이전부터 계속 마음이 있었어요…… 부담 갖지 말고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뜻밖의 고백에 수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려 입을 달싹였다. "저기, 이건…… 정말곤란해요. 저 그런 마음 전혀 없으니까……." 수아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끼익- 가까운 곳에 정차해 있던 세단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완벽하게 재단된 수트 차림의 그는 칠흑 같은 눈빛에서 서늘한 살기와 폭발 직전의 광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지는 듯한 압도적인 아우라에, 고백을 하던 남학생은 채 다 전하지 못한 꽃다발을 든 채 굳어버렸다. 도윤은 수아의 손목을 단단히 그러쥐며 제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벌벌 떨고 있는 남학생을 향해 낮고 차가운 경고를 내뱉었다. "내 여자야. 두 번 다시 이딴 짓거리로 눈독 들이지 마." 숨통을 조이는 듯한 서늘한 기세에 질린 남학생은 허겁지겁 자리를 피해 도망치듯 사라졌다. “도윤 씨.” 그제야 수아를 봤다. “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도윤은 말이 없었다. 수아 역시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차 안에는 팽팽한 침묵만 흘렀다. 수아는 몇 번이나 도윤을 힐끗 바라봤다. 굳게 다문 입술. 날카롭게 굳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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