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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낯선 아침 식사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수아가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이제 막 밝아지고 있었다. 한동안 낯선 천장을 바라봤다. 다시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정신은 이미 맑아져 있었다. 결국 침대 옆에 놓인 목발을 집었다. 다친 팔 때문에 한 손으로만 목발을 짚는 것도 쉽지 않았다. 조심조심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도윤이 있었다. 벌써 출근 준비를 끝낸 모습이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슈트. 단정하게 넘긴 머리. 도윤은 식탁에 앉아 커피와 간단한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수아는 순간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유진이 어제 건네준 헐렁한 원피스. 세수도 하지 않은 맨 얼굴. 자다 일어나 흐트러진 머리. ‘아…….’ 부끄러움이 확 밀려와 급하게 몸을 돌려 방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급하게 움직인 탓에 목발을 짚은 한쪽 팔이 꼬였고, 몸이 한쪽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어……!" 몸이 기울었다. 도윤이 벌떡 일어났다. 몇 걸음 만에 다가온 도윤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수아의 몸이 그대로 그의 품으로 들어왔다. “…….” 쿵—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밀착되었다. 바짝 다가온 도윤의 품에서는 은은한 스킨 향과 함께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체온이 훅 끼쳐왔다. 수아의 코끝이 도윤의 탄탄한 가슴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순간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못했다. 수아의 손이 본능적으로 도윤의 가슴을 짚고 있었다. 단단한 가슴 아래로 그의 체온이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졌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수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윤과 눈이 마주쳤다. “…….”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짙은 눈썹. 곧게 뻗은 콧날.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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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그림자의 얼굴

경찰서 조사실. 황치우를 심문하던 형사의 미간이 거칠게 찌푸려졌다. 치우는 횡설수설하며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거듭 중얼거렸다. “수아를 불러주세요.” 황치우가 형사를 바라봤다. “수아랑 이야기하면 돼요.” 형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봤다. “이수아 씨는 피해자입니다.” “알아요.” 치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만나게 해달라고요.” “왜 만나려고 합니까?” “설명해야죠.” “뭘요?” 치우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다요.” “전 수아를 해치려고 한 것이 아니예요” “수아가 자신을 오해한 것뿐이예요!” “수아가 내 얘기를 들으면 이해해요.” “…….” “그리고 용서해줄 거예요.” 형사의 눈빛이 굳었다. “이수아 씨가 왜 용서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치우가 이상하다는 듯 형사를 바라봤다. “수아니까.” “…….” “수아는 착해요.” 그리고 웃었다. “나를 좋아하기도 하고.” 형사는 펜을 내려놓았다. 몇 시간째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었다.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수아는 자신을 좋아한다. 차도윤 때문에 오해가 생겼다. 수아를 만나 설명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결국 경찰은 정신건강 전문가의 감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수사는 계속됐다. 그리고 치우의 과거를 조사하던 중— 또 다른 사실이 드러났다. “7년이요?” 민철이 되물었다. 담당 형사가 서류를 내려다봤다. “네. 교도소에서 7년을 복역했습니다.” “죄명이 뭡니까?” “상해치사입니다.” 민철의 표정이 굳었다. “피해자는요?” 형사가 잠시 민철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아버지입니다.” “…….”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와 몸싸움을 벌이다 우발적으로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그 일로 소년원을 거쳐 7년이라는 시간을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출소했던 것이다. 민철은 잠시 생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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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돌아가고 싶은 곳

태하그룹 전무실. 도윤은 비서 김민철로부터 수아가 직접 경찰서에 방문해 피해자 진술을 마쳤다는 보고를 건네받았다. “수아 씨가 오늘 경찰서에 직접 다녀왔습니다.” 도윤의 미간이 좁아졌다. “황치우도 봤어?” 민철이 잠시 머뭇거렸다. “네.” 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만났다고?” “직접 대면한 건 아닙니다. 황치우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사받는 모습을 확인한 것 같습니다.” 도윤은 말이 없었다. 수아가 그 끔찍한 녀석과 다시 한 번 같은 공간에 숨을 쉬며 진술서를 써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게 짓눌려 왔다. 얼마나 두려웠을지, 얼마나 지난 기억들이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었을지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모든 일을 집어던지고 펜트하우스로 달려가 품에 안고 싶었다. 지금 도윤의 머릿속은 온통 수아를 향해 있었다. 민철이 나가려다 멈췄다. “전무님.” “왜.” “수아 씨가 생각보다 강한 분인 것 같습니다.” 도윤이 민철을 바라봤다. “경찰에서도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본인이 가겠다고 했답니다.” 수아는 약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날부터 그랬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했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두려워도 도망치기만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도윤은 시계를 확인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갈 생각이었다. 아니. 들어가고 싶었다. 수아의 얼굴을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하지만 퇴근 시간을 불과 십여 분 앞둔 시각, 비서실에서 달갑지 않은 인터폰이 울렸다. "전무님, 현성그룹 한서희 씨가 찾아오셨습니다." 도윤의 미간이 차갑게 좁혀졌다. "들여보내." 문이 열리고 한서희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명품으로 휘감은 그녀는 재벌가 외동딸다운 도도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서희는 도윤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긴 다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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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뒤틀린 기억

“이수아 씨를 사랑합니까?” 치우는 의사를 바라봤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수아 씨도 황치우 씨를 사랑합니까?” “그럼요.”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걸 이수아 씨가 직접 말했습니까?” 치우의 표정이 굳었다. “말해야 알아요?” “…….” “수아는 나한테 웃어줬어요.” 의사는 조용히 기록했다. 치우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갔다. “왜 자꾸 적어요?” “황치우 씨 이야기를 기록하는 겁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쓰는 거죠?”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치우가 피식 웃었다. “다들 똑같아.” 잠시 후 중얼거렸다. “수아만 달라.” 병원 부속의 폐쇄된 정신 치료 병동. 차가운 흰색 벽으로 둘러싸인 병실 안, 환자복을 입은 황치우는 침대에 멍하니 누워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들의 정밀 진단 결과는 명확했다. 그는 조현병 초기 및 심각한 편집증 판정을 받았다. 법적으로는 감옥에 가야 마땅할 중범죄를 저질렀지만, 극도의 정신적 결함과 망상 증세로 인해 형 집행보다 강제적인 약물 치료와 격리가 우선시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투여되는 강력한 진정제와 약물 덕분에, 며칠 전까지 광기에 사로잡혀 발악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머릿속이 멍하고 핑 도는 기분 속에서, 치우의 의식은 자꾸만 과거의 한 지점으로 가라앉았다. 증상이 조금 가라앉아 제정신이 돌아올 때면, 자신이 수아를 밀어 넘어뜨려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찢어지듯 아프게 헤집었다. 사과해야 한다고, 당장 무릎을 꿇고 그녀를 만나야 한다고 눈물을 흘리다가도, 약효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광기가 되살아나 "수아는 내 여자야, 그 누구도 못 뺏어"라며 억지 소리를 중얼거리곤 했다. 치우의 멍한 눈앞에 스쳐 지나간 것은,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유일하게 건져 올린 구원의 잔상이었다. 오래전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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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익숙해지면 안 되는 것

수아가 도윤의 펜트하우스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몸은 하루하루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팔다리의 깁스는 여전히 풀지 못했지만, 온몸에 흉하게 들어차 있던 멍들은 제법 색이 옅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상처가 아물어 갈수록 수아의 마음 한구석은 복잡한 생각들로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태수에게 ‘기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태수가 손사래를 쳤다. “기사님은 무슨. 그냥 아저씨라고 해요.” 그래서 이제는 자연스럽게 아저씨라고 불렀다. 이상했다. 고작 일주일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빠르게 편안해지고 있었다. 새로 출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큰 소동을 겪는 바람에 원장인 김미숙과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행히 미숙은 수아의 사정을 전해 듣고는 몸조리가 먼저라며 따뜻하게 다독여 주었지만, 마음의 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치우가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는 도윤에게 들었다.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수아의 마음은 복잡했다.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 이름만 들어도 아직까지 심장이 내려앉고 손끝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공포가 밀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역시 자신처럼 지독하게 외로운 고독 속에서 마음의 병을 키워온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씁쓸한 허무함이 밀려왔다. 비뚤어진 방식으로밖에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던 그 불쌍한 영혼이, 묘하게도 자신의 상처 입은 과거와 겹쳐 보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맞으며 자랐던 사람. 가족에게조차 따뜻함을 받지 못했던 사람. 수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외로웠던 걸까.’ 펜트하우스 안에서의 나날은 그야말로 꿈결처럼 따스했다. 유진과 기사 태수는 며칠 새 수아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특히 유진은 고아원에서 홀로 자라며 악착같이 버텨온 수아의 내면을 눈치채기라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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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멈춰야 하는 순간

밤이 깊어서야 현관문이 열렸다. 도윤이 집으로 들어섰다. 오늘도 늦었다. 넥타이는 그대로였고 셔츠와 슈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루 종일 회의와 업무에 시달린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단정했다. 도윤은 습관처럼 거실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수아가 있었다. 넓은 소파 한쪽에 편안하게 기대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유진이 사준 부드러운 홈웨어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의 수아는 늘 긴장해 있었다. 낯선 공간을 조심스럽게 바라봤고, 필요한 것이 있어도 쉽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제법 편안해 보였다. 자신의 집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수아의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도윤은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기분이 좋았다. 언제부터였을까. 퇴근하면 빨리 집에 오고 싶어진 것이. 예전의 이곳은 그저 잠을 자기 위해 돌아오는 공간이었다. 호텔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관 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수아가 고개를 들었다. 걸어오는 도윤과 눈이 마주친 순간, 수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그의 깊고 짙은 시선에 단단히 붙들린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 사람은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다 돌아오는데도, 방금 출근하는 사람처럼 저렇게 흐트러짐이 없을까…….’ 조금 피곤해 보이는 눈빛마저 이상하게 잘 어울렸다.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빤히 바라봤다. 생각에 잠겨 멍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수아를 향해 도윤이 성큼성큼 걸어가 발 앞에 멈춰 섰다. 거리를 좁혀올수록 그에게서 풍겨오는 묵직하고 서늘한 체온이 수아의 호흡을 어지럽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허공에 팽팽한 공기와 이름 모를 설렘이 소리 없이 얽혀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린 수아가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서진 다리를 조심스럽게 절뚝이며 방으로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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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돌아가야 하는데

유진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에 수아의 온몸에 흉하게 들어차 있던 멍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원래의 하얀 피부를 되찾았다. 그리고 오늘은 드디어 팔다리의 깁스를 완전히 푸는 날이었다. “이제 거의 다 나았네요.” 의사의 말에 수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요?” “네. 뼈도 잘 붙었고 상태도 좋습니다. 오늘은 깁스 풀어도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드디어였다. 사고 이후 몇 주 동안 자신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깁스를 오늘 드디어 풀 수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유진도 기쁜 표정을 지었다. “잘됐네요. 얼마나 답답했어요.” “그러게요.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잠시 후 깁스를 제거하고 나니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수아는 조심스럽게 팔을 움직여봤다. “아…….” 생각보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인지 팔도 다리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했다. 의사가 말했다. “아직 무리하면 안 됩니다. 깁스를 오래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육이 약해져 있어요. 당분간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천천히 회복하셔야 합니다.” “재활치료요?” 의사는 깁스를 풀며 당분간은 굳은 근육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꾸준한 재활 치료가 필수적이라고 신신당부했다. "수아 씨, 걱정 말아요. 재활 운동은 제가 병원 왔다 갔다 하며 잘 도울 테니까." 유진이 다독이듯 웃으며 수첩을 내밀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앞으로 받아야 할 재활 치료 스케줄이 날짜와 시간대별로 완벽하게 짜여 있었다. 도윤의 비서 김민철이 언제 의사와 상담을 끝마쳤는지, 펜트하우스 안에서 받을 수 있는 방문 재활 프로그램까지 빈틈없이 예약되어 있었다. “첫 치료는 이틀 뒤로 예약되어 있습니다. 일단 몇 차례 진행해보고 회복 상태에 따라 횟수를 조절하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수아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도윤은 그날 밤, 손님방 침대 앞에서 자신을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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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돌아가고 싶은 곳

인천국제공항. 비즈니스 제트기 터미널을 빠져나온 도윤은 곧바로 대기 중인 검은색 세단 뒷좌석에 올라탔다. 일주일간의 유럽 출장을 마친 도윤이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긴 비행에도 흐트러진 모습은 없었다. 짙은 색 정장 위로 코트를 걸친 채 빠르게 걷는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조차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뒤따르던 민철이 태블릿을 확인했다. “본사로 갈까요? 전무님” “본사 도착하면 바로 전략기획실에서 유럽 출장 결과 보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현지에서 수정된 계약서는 법무팀에서...” “아니, 집으로 간다.” 민철의 말이 멈췄다. “네?” 도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집으로 가.” 민철이 순간 도윤을 바라봤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민철은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앞 차량에 전달하겠습니다.”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조금 놀랐다. 차도윤이 해외 출장을 마치고 곧바로 집으로 간다. 민철이 그를 보좌한 이후 거의 없었던 일이었다. 예전의 도윤이라면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을 하고 돌아왔어도 회사부터 들렀다. 출장 결과를 직접 확인하고, 밀린 결재를 처리하고, 다음 일정을 점검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집은 도윤에게 쉬는 곳이라기보다 잠을 자는 장소에 가까웠다. 도윤은 뒷좌석에 기대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파리와 프랑크푸르트, 런던을 오가는 일정이 빡빡했다. 하루에도 몇 개씩 이어지는 회의와 만찬. 현지 법인 보고. 계약 검토. 수백억이 오가는 협상. 그런데도 도윤은 단 한 번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일은 일이었다. 감정 따위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적어도— 예전에는 그랬다. 도윤이 천천히 눈을 떴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서울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의 머릿속에 전혀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이수아. 도윤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또였다. 유럽에 있는 일주일 동안에도 그랬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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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귀환, 그리고 마주한 시선

검은색 세단이 청담동 펜트하우스 지하 주차장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차문이 열리고 내린 도윤의 걸음걸이는 다급하면서도 묵직했다. 1주일간의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지만,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비상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펜트하우스로 올라온 도윤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은 고요했다. 거실을 가로질러 안으로 향하려던 찰나, 복도 끝 욕실 쪽에서 가볍고 물기 젖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방금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수아가 서 있었다. 수아는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아 젖은 채 어깨를 적시고 있는 긴 머리칼을 타올로 톡톡 두드리는 중이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은 방금 더운 김을 쐬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고, 목 늘어난 편안한 홈웨어 차림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가녀린 체구와 청초한 매력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도윤의 걸음이 그 자리에 뚝 멎었다. 1주일간 악물고 참아왔던 이성의 둑이, 수아의 물기에 젖은 맨 얼굴과 가녀린 모습 앞에 무참히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수아 역시 멍하니 현관 쪽에 서 있는 도윤을 발견하고는 동작을 멈추었다. 2주 넘게 보지 못했던 얼굴, 꿈에서조차 지독하게 그리워했던 그 서늘하고도 짙은 눈빛이 지금 제 앞에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시간에 홀린 듯,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팽팽한 공기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 "……."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펜트하우스의 복도를 깬 것은 주방 쪽에서 들려온 유진의 목소리였다. “도련님?” 유진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도윤과 수아가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주방에서 나온 유진이 반갑게 웃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네.” 도윤이 짧게 대답했다. “저녁 식사 준비 다 했어요. 씻고 나오세요.” “수아 씨도 같이 식사해요.” “알겠어요.” 도윤은 다시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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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입맞춤

스르륵— 서재 문이 닫히고, 무거운 방음 장치가 외부의 모든 소리를 차단했다. 도윤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한 이곳은 지금 두 사람의 숨소리조차 거칠게 부딪히는 밀실이나 다름없었다. 도윤이 천천히 수아를 돌아보았다. 짙게 가라앉은 눈빛 속에는 오랜 시간 억눌러온 감정의 파도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말해.” 단호하게 내뱉는 음성에 수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차가운 바닥 위에서 서성이다가,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을 서로 맞잡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수아가 문가에 어정쩡하게 멈춰 선 채 말을 꺼냈다. 그러자 서재 책상 앞에 서 있던 도윤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퇴로를 완전히 막아섰다. 벽과 도윤의 단단한 가슴 사이에 갇힌 수아가 숨을 들이쉬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도윤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어디를 가려고." 도윤의 목소리는 서늘했지만, 그 이면에는 맹수가 제 먹이를 몰아넣듯 위험하고도 뜨거운 독점욕이 들끓고 있었다. 수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도윤 씨 덕분에 다치지 않고 잘 치료받았어요. 하지만 이제 몸도 다 나았고…… 저도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게 맞아요. 내일 당장 짐을 싸서 옥탑방으로……." "그 입 다물어." 도윤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그 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수아의 귓가로 바짝 다가갔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수아의 하얀 귓바퀴를 스치며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내가 널 다시 내 품에 들여놓기까지 얼마나 미칠 것 같았는지 알아? 그런데 지금 네가 그 좁고 위험한 옥탑방으로 다시 기어들어 가겠다고 이 판국에 그런 소릴 해?" "도윤 씨……!" "잘 들어, 이 수아." 도윤이 수아의 턱 끝을 강단 있게 그러쥐어 제 눈을 똑바로 보게 만들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그의 눈동자 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광기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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