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장군님이나 잘하세요: Chapter 31 - Chapt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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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어머니 덕분에 오늘은 속이 다 시원합니다. 오전 잔치에서 배윤호 때문에 얼마나 부아가 치밀었는지 모릅니다.”배진성은 연회 내내 배윤호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곧 효기장군에 봉해질 아들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배윤호도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맹 대장군마저 그에게 술을 권할 정도였다. 반면 배명천은 그들 뒤를 따라다니며 웃음을 보태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지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존재감이 없었다.진씨도 얼른 맞장구를 치며 설 소실을 추켜세웠다.“고씨도 마찬가지였어요. 여인들 자리에서도 그 잘난 아들을 얼마나 치켜세우던지요. 어머님께서 미리 눈치채고 아버님께 먼저 말씀드리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오늘은 그 모자가 아주 기고만장할 뻔했어요.”설 소실은 찻잔 뚜껑으로 물 위에 뜬 거품을 걷어 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이 정도가 대수냐. 그 아이가 효기장군 자리에 오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인데.”배명천과 진씨는 화들짝 놀라 한목소리로 물었다.“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설 소실은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야 대답했다.“그 송씨 집안 여식을 배윤호가 군에 데리고 다니다 도성으로 함께 데려왔다는 말이 벌써 집 안에 돌고 있더구나. 경위소에서 근무하는 내 둘째 오라버니께 그 일을 전해 두었다. 무얼 해야 할지는 오라버니께서도 잘 아실 게야.”세 사람은 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뜻을 알았다. 눈길을 주고받는 얼굴마다 흡족한 기색이 번졌다.빛과 그림자가 흐르고, 흩날리는 꽃잎은 꿈결 같았다. 사방에 가득한 봄기운이 따스하게 무르익고 있었다.도성 동쪽 거리의 창국공부 앞은 수레와 말이 꼬리를 물고, 사람들의 목소리로 들썩였다. 오늘이 바로 창국공의 환갑잔치가 열리는 날이었다.창국공은 젊은 시절 선황과 함께 전장을 누볐을 뿐 아니라, 지금의 황제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황제의 부탁으로 여러 황자도 가르쳤으니 그들에게도 스승인 셈이었다. 소국에서 그만한 위상과 지위를 누리는 이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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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널찍한 청석 길을 따라 안뜰로 향했다. 정교하게 꾸민 둥근 월동문을 지나자 눈앞의 풍경이 환히 트였다.정원에는 정자와 누각이 조화롭게 들어서 있었다. 날렵하게 치켜든 처마와 정교한 공포, 채색한 들보와 조각한 기둥이 어우러지고, 그 사이사이로 진귀한 꽃들이 저마다 고운 자태를 뽐냈다.물가에는 팔각정 하나가 서 있었다. 주위에 늘어선 수양버들의 연둣빛 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수면을 가볍게 스쳐, 잔물결이 겹겹이 번져 나갔다.팔각정을 중심으로 호숫가를 따라 수십 개의 상이 놓여 있었다. 상마다 정갈한 과자와 좋은 술, 갖가지 진미가 차려져 손님들이 자리에 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심설화는 부군과 함께 물가에서 도일을 데리고 놀고 있었다. 그러다 송청아가 왔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일어나 맞으러 나왔다.심설화가 반갑게 송청아의 손을 잡았다.“청아야, 왔구나!”그러고는 곁의 남자를 소개했다.“이쪽은 내 부군 장유건이야.”창국공은 막내딸 심설화를 유난히 아낀 나머지, 다른 집으로 시집보내기가 아쉬워 데릴사위를 들였다고 했다. 눈앞의 단아하고 온화한 남자가 바로 그 사람인 모양이었다. 수려한 용모에 몸가짐까지 훌륭했다.장유건은 송청아에게 거듭 감사의 예를 올렸다. 송청아가 답례하자 심설화는 얼른 뒤를 돌아 도일을 불렀다.“도일아, 어서 이모께 인사드려야지.”어린 도일은 제법 의젓했다. 그날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송청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공손히 예를 올리며 또렷하게 말했다.“이모님, 저 도일이 인사 올립니다. 늘 평안하세요.”송청아는 다정하게 웃으며 아이를 일으켰다. 이어 봉 어멈에게 눈짓해 준비해 온 예물을 건네게 했다.하나는 송청아가 직접 조합한 가남향 한 갑이었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히고 숙면을 돕는 향이었다.또 하나는 창출과 웅황, 쑥잎을 법제한 뒤 곱게 갈아 빚은 벽온 팔찌였다. 사기를 물리치고 습기를 몰아내는 데 쓰는 물건이었다.마지막은 빙편과 단향을 더한 송연 향묵 한 자루였다. 정신을 맑게 해 주고, 글씨를 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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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옅은 갈색 눈동자는 높은 하늘의 별처럼 맑게 빛났고, 그 안에 어린 눈빛은 잔물결 이는 봄물처럼 부드러웠다.남자는 연꽃무늬를 짜 넣은 옅은 꿀빛 비단 금포를 입고 있었는데, 검은 머리는 청옥을 박은 관으로 정수리에 단정히 묶었다. 한 손으로는 호두 두 알을 굴리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백옥 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얇은 입술 끝에는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듯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비 갠 뒤의 달처럼 맑고 바람처럼 산뜻한 기품에, 수려하고 귀한 자태까지 더해지니 속세의 사람 같지 않았다.송청아는 그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넋을 잃고 눈을 떼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저분은…….”그 표정을 본 심설화는 곧바로 알아차리고 신이 나서 설명했다.“폐하의 둘째 황자이신 제왕 신경찬 전하다. 어릴 때 아버지께 군사를 이끌고 싸우는 법을 조금 배우셨으니, 아버지의 제자라고도 할 수 있지.”송청아는 무심코 말을 받았다.“아, 문무를 겸비하신 분이군요.”“그렇지도 않아.”심설화가 신경찬 쪽을 흘끗 보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저분은 원래 나랏일에는 관심이 없고 먹고 마시며 노는 것만 좋아하시거든. 마구며 사냥부터 육박, 엽자희에 이르기까지 못 하시는 놀이가 없어. 귀뚜라미를 싸움 붙이거나 앵무새를 기르는 데도 능하시고. 왕부에 모아 둔 서화와 진귀한 물건은 셀 수도 없다더라. 오늘도 아버지 생신 잔치에 상품이 걸려 있다는 말을 듣고 구경하러 오셨을걸.”송청아는 귀담아들으며 생각했다. 알고 보니 풍류나 즐기는 한량 왕야였구나.심설화는 도일과 송청아를 데리고 여인들의 자리로 향했다.남녀의 자리는 모두 정원 안에 마련되어 있었다.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청석 길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이었다.신경찬이 처음 정원에 들어섰을 때부터 여인들 자리에서는 감탄 어린 탄성이 나직이 터져 나왔다. 그가 맞은편 상 앞에 자리를 잡자, 귀한 집 아가씨들은 또다시 수줍게 속삭이며 웃음을 흘렸다.신경찬은 그런 반응에 익숙한 듯했다. 어색해하지도, 차갑게 낯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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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신경찬이 갑자기 진지해지자 주변 남자들은 멋쩍게 웃었다. 더는 놀리는 재미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은 차츰 흩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연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맞은편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송청아는 제왕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가볍게 풍류만 즐기는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사연을 품고 있는 사람 같았다.그 가락지에는 대체 무엇이 있기에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로 여기는 것일까. 송청아의 마음에도 호기심이 일었다.손님들과 국공부 식구들이 모두 자리를 잡자, 창국공 심태형이 시종의 부축을 받아 정원으로 나왔다. 상석에 놓인 태사의에 천천히 앉은 뒤에는 맏아들과 창국공이 차례로 인사말을 전했다. 생신을 축하하러 찾아온 손님들에게 환영과 감사의 뜻을 표하는 말이었다.인사가 끝나자 주인과 손님이 함께 잔을 들었다. 창국공의 강녕과 장수를 비는 축원이 잇달았다.축하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자리의 분위기도 한결 편안해졌다. 남자들은 흥겹게 술잔을 주고받았고, 여인들은 술과 음식, 다과를 맛보며 집안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러나 송청아는 남몰래 미간을 좁혔다. 몸이 조금 불편했다.지난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속이 비어 있었는데, 조금 전 축하주까지 한 잔 마신 탓인지 위가 쓰리고 화끈거렸다.이를 알아채지 못한 심설화가 살갑게 계화 꿀연근 한 조각을 송청아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호의를 거절하기도 미안해 송청아는 그것을 집어 먹었다. 하지만 달고 진한 맛이 입안에 퍼지자 은근한 구역질이 치밀고 가슴까지 답답해졌다.송청아는 얼른 젓가락을 내려놓고 차를 몇 모금 마셔 입안을 씻어 냈다. 그래도 심설화는 즐거운 얼굴로 쉬지 않고 음식을 덜어 주었다.송청아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중 먹을 만한 것만 조금씩 골라 먹었다. 하지만 속이 메스꺼운 느낌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손님들이 술과 음식을 어느 정도 즐기고 나자, 관사가 앞으로 나와 오늘 생신 잔치에 마련된 유원 놀이를 설명했다.“귀빈 여러분께서는 두 분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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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얇고 연분홍빛 도는 입술에 희미한 미소까지 어리니, 웬만한 여인들보다도 한층 귀하고 고운 모습이었다.그러나 송청아는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았다. 눈길을 한 번 주었을 뿐, 마침 소고기국이 나오자 관심은 곧 그쪽으로 옮겨 갔다. 덕분에 신경찬이 눈을 들며 여인들 자리의 오른편을 재빨리 훑어본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공자들이 모두 종이학을 접은 것을 확인한 관사가 낭랑하게 외쳤다.“귀빈 여러분, 이제 종이학을 날려 주십시오!”그 말이 떨어지자 갖가지 빛깔의 종이학이 봄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내력에 실려 여인들 자리로 향하는 모습은, 알록달록한 새들이 봄기운을 싣고 정해진 인연을 찾아드는 듯했다.성격이 활달한 아가씨 몇몇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를 가볍게 밀치며 들뜬 소리를 내더니, 신경찬의 살구빛 종이학을 향해 다투어 손을 뻗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옆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종이학 무리가 일제히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그중 신경찬의 종이학은 우연인 듯, 정해진 운명인 듯 누군가의 머리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송청아는 고개를 숙이고 숟가락으로 소고기국을 떠 먹고 있었다. 지금은 이처럼 담백한 국이 입맛에 꼭 맞았다.그때 왼편에서 일제히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송청아가 고개를 돌리자, 아가씨들이 어째서인지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의 눈에는 노골적인 적의까지 어려 있었다.송청아는 영문을 몰라 심설화를 돌아보았다.“언니, 무슨 일이에요? 다들 왜 이쪽을 보는 거죠?”심설화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귀엽다는 듯 웃더니, 손을 뻗어 송청아의 머리 위에 얹힌 종이학을 집어 들었다.송청아가 깜짝 놀랐다.“이게 뭐예요?”조금 전까지 국을 먹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언제 머리 위에 이런 것이 내려앉았는지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다.“종이학이잖아. 맞은편에서 날려 보낸 건데, 바람이 불어서 네 머리 위로 떨어졌어.”심설화가 말하며 종이학을 펼쳤다. 종이 위로 힘 있고 반듯한 글씨 세 자가 드러났다.신경찬.“어머, 제왕 전하의 종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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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종이학이 워낙 가벼우니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말을 마친 신경찬은 잠시 멈칫하더니, 뒤늦게 뜻을 알아차리고 짐짓 성을 냈다.“스승님마저 설화 누님과 함께 저를 놀리시는군요!”정원에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그 가운데 앉은 송청아는 조금 멋쩍었다. 저들은 모두 허물없이 가까운 사이였고, 혼자만 낯선 사람이라 곁에 가만히 앉아 대화에서 비켜나 있었다.하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저렇게 농담을 주고받다 보면 다른 사람들도 조금 전의 뜻밖의 일을 잊을지 몰랐다.그런데 맞은편의 신경찬은 송청아를 그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불쑥 화제를 되돌렸다.“그런데 설화 누님 곁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심설화는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살짝 들었다. 어딘가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송청아를 소개했다.“소용장군부의 맏며느리 송청아예요. 대대로 향을 만드는 송씨 집안의 딸이라 조향 솜씨가 아주 뛰어나죠. 무엇보다 도일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랍니다. 제가 의동생으로 삼았으니 이제는 우리 심씨 집안사람이나 다름없어요. 앞으로 다들 이 아이를 함부로 대하시면 안 돼요.”그제야 손님들도 송청아가 어째서 심설화 곁에 앉아 있는지 이해했다.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송청아는 그 틈에 자리에서 일어나 신경찬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과찬이십니다. 종이학이 제게 온 것은 우연이니, 전하께서 다시 날려 주시면 됩니다.”신경찬이 미소를 머금고 송청아를 바라보며 막 입을 열려는데, 여인들 자리 왼편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다시 날리실 필요가 있나요? 그 종이학은 아무래도 제 쪽으로 오던 것 같은데요. 제게 돌려주시겠어요, 부인?”말을 꺼낸 이는 열다섯이나 열여섯쯤 된 소녀였다. 선명한 노란빛 유군을 입은 모습이 화사하고 앳되었다. 하지만 눈빛에는 드센 기운과 오만함이 묻어났고, 목소리도 유난히 쩌렁쩌렁했다. 성미가 급하고 콧대가 높은 아가씨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신경찬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소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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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수군거리는 내용은 뻔했다. 송청아는 이미 남의 부인인데, 신경찬이 어찌 함께 정원을 거닐며 물건을 찾자고 청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평소에도 신경찬의 파격적인 행실을 못마땅해하던 노신 몇몇은 참지 못하고 나섰다.“남녀가 한 쌍이 되어 정원을 돌다 보면 둘만 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어찌 남의 부인에게 동행을 청하십니까? 이는 인륜과 강상을 거스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남자들도 잇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눈이 없어서 가만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인들 가운데 송청아의 미모가 유독 빼어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다. 예법에 어긋날까 꺼리지 않았다면, 누군들 함께 가자고 청할 줄 몰랐겠는가.그런데 신경찬은 대담하게도 대놓고 송청아에게 종이학을 날려 보내 놓고, 우연인 척까지 했다. 낯도 참 두꺼웠다.손님들의 곱지 않은 눈길과 수군거림에도 신경찬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본왕은 놀이 규칙에 이미 혼인한 사람과 함께 가면 안 된다는 말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군. 게다가 정원을 거닐며 상품을 찾는 흔한 놀이가 어찌 장 대인의 입을 거치니 음란한 밀회라도 되는 듯하지? 아니면 장 대인은 본왕이 창국공부에서 남의 부인과 부정한 짓이라도 벌일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장 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수치와 분노가 뒤엉킨 채 그는 연신 손을 내저었다.“노신은 그런 뜻이……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신경찬은 입가에 가벼운 비웃음을 띠었다.“제 마음이 음란하면 무엇을 보든 음란하게 보이는 법이지. 장 대인은 스스로를 좀 돌아봐야겠군.”장 대인은 말문이 막혔다. 끝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못내 분한 기색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이 소동 뒤로는 아무도 감히 신경찬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또다시 따졌다가는 제 마음이 음란하다고 인정하는 꼴이 될 터였다.더구나 제왕이 방탕하고 여색을 즐긴다는 소문은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었다. 오늘 문득 남의 부인에게 흥미가 동했다 한들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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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오늘 제왕이 자신에게 동행을 청했다는 사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이제 와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부군을 두고 다른 사내에게 눈을 돌렸다는 소문은 내일이면 도성에 퍼질 터였다.그렇다면 차라리 그 청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았다. 운이 좋아 창국공의 작전 수고를 찾는다면, 배씨와 송씨 두 집안을 상대로 협상할 패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더구나 이 한량 왕야가 무슨 뜻으로 이러는지 송청아도 알고 싶었다. 아무리 보아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전부인 사람은 아닌 듯했다. 함께 거닐다 보면 뜻밖의 소득이 있을지도 몰랐다.맑고 부드러운 대답이 끝나자 맞은편 신경찬의 얼굴에 진심 어린 웃음이 번졌다. 조금 전까지 가슴을 조이던 불편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눈에는 소년 같은 순수한 기쁨만 남았다.송청아는 칼날처럼 꽂히는 여인들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심설화에게 인사를 건넨 뒤 차분히 자리에서 걸어 나왔다.마침 신경찬도 맞은편에서 나와, 두 사람은 가운데의 청석 길에서 마주했다.신경찬이 거리낌 없는 태도로 손을 내밀어 길을 권했다.“부인, 가시오.”송청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정원을 둘러보는 길로 향했다.이를 본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짝을 지어 정원으로 흩어졌다.송청아와 신경찬은 반 사람쯤 들어설 간격을 두고 꽃밭 사이의 오솔길을 나란히 걸었다.옅은 꿀빛과 남보랏빛 옷자락이 푸른 버들가지 사이로 어우러졌다. 키가 큰 신경찬과 그보다 작은 송청아의 모습이 서로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신경찬은 이따금 송청아의 왼쪽 귓불을 살폈다. 과연 그곳에 동그란 갈색 점이 있었다.마음이 조금 술렁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송청아가 그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인적 없는 곳에 이르러서야 신경찬은 백옥 가락지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본왕의 청을 받아들이시다니, 부인의 용기에 감탄했소.”송청아가 방긋 웃었다.“전하께서 정원을 거닐며 상품을 찾는 건 흔한 놀이일 뿐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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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제가 어찌 마다하겠습니까.”“그럼 부인은 평소 어느 향료점에 자주 가시오? 어디로 가면 부인을 만날 수 있소?”두 사람은 어느덧 연못가에 이르렀다. 한쪽에는 해당화 나무 한 그루가 물가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아래로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 몇 개가 있어, 두 사람은 그곳에 잠시 앉아 쉬기로 했다.송청아는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하며 자연스레 수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청록빛 연못 위로 산들바람이 스치자 잔물결이 겹겹이 일었다. 그 위에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잘게 부서진 빛이 반짝였다.반짝이는 물빛에 눈이 부신 송청아는 문득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동시에 속에서 구역질이 울컥 치밀었다.그러는 사이에도 발은 바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전하께서는…….”말을 잇던 순간, 발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송청아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앗!”비명이 채 터져 나오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를 힘껏 잡아당겼다. 송청아는 순식간에 감귤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단단한 품으로 쓰러져 안겼다.찰나의 순간,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송청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눈을 가늘게 떠 그를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은 그의 몸에 부드러운 빛이 엷게 감돌았다. 티 하나 없이 빼어난 얼굴에는 고귀한 기품이 어려 있었다. 아득한 하늘의 별 하나가 문득 눈앞으로 내려온 듯했다.신경찬 역시 잠시 넋을 놓았다.방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긴 뒤였다.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연분홍빛 해당화 꽃잎이 꽃비처럼 흩날리며 두 사람의 어깨와 옷자락 위로 내려앉았다. 꽃잎에 둘러싸인 품 안의 여인은 옥처럼 희고 발그스름했다. 고운 얼굴에 어린 부드러운 자태가 한층 더 눈부셨다.신경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코끝이 맞닿을 듯 가까워지자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얼굴에 닿았다.그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기억 저 깊은 곳에 새겨진 연꽃 향이 코끝으로 은은히 스며들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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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송청아는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황급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저, 전하. 제가 오늘 속이 좋지 않아 본의 아니게 전하의 귀한 옷을 더럽혔습니다. 옷값은 제가 전부 물어드릴 터이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신경찬이 입은 비단 도포는 옷감이며 바느질 솜씨만 보아도 값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하지만 오늘 큰돈이 나가는 한이 있어도 이 한량 왕야에게 빚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속이 좋지 않다는 말에 신경찬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그제야 송청아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몸은 가냘프고 야위었다. 엷게 분을 발라 안색은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지만, 눈매에 밴 피로까지 감추지는 못했다.시선을 조금 더 올리던 신경찬의 눈길이 문득 멎었다. 이마에 붙인 화전 사이로 붉은 상처가 비쳤다. 다친 지 사나흘쯤 되었을까. 아직 딱지도 온전히 앉지 않은 상처였다. 그 둘레를 화전으로 가려 두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터였다.신경찬은 가슴 한복판이 바늘에 찔린 듯 아팠다.소용장군부에서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인가?자신에게는 더없이 귀한 아기 고양이였다. 그런 그녀를 감히 이 지경으로 대하다니. 장군부의 것들은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 모양이었다.분노가 치밀었으나 지금 당장 상처를 들추어 캐물을 수는 없었다. 신경찬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쓰린 마음을 눌렀다.이윽고 표정을 가다듬은 그는 가슴팍에 묻은 얼룩을 내려다보며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돈이야 상관없소. 다만 본왕이 무척 아끼는 옷이라서 말이오.”송청아는 속으로 바짝 긴장했다.돈을 받지 않겠다면 대체 무얼 바라는 걸까?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눈앞의 신경찬이 느닷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저, 전하. 지금 무얼…….”송청아는 화들짝 놀라 두어 걸음 물러섰다. 두 번의 생을 살면서도 이토록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다음에는 또 무슨 짓을 할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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