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이혼 후 꽃길 / Chapter 91 - Chapter 100

All Chapters of 이혼 후 꽃길: Chapter 91 - Chapter 100

100 Chapters

제91화

“못 온다고?”“네. 그냥 저희끼리 먹어요. 더 기다릴 필요 없을 것 같아요.”박여정은 화가 치미는지 혀를 찼다.“대체 뭐가 그렇게 바쁘다는 거야!”정채윤은 박여정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달랬다.“회사 일이 워낙 바쁘잖아요. 저희끼리 식사하러 가요.”박여정은 정채윤이 또 권예준을 감싸고돈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너도 참. 그렇게 예준이 편만 들어라.”정채윤은 그저 옅게 웃을 뿐,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점심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뒤, 박여정은 정채윤을 거실에 앉히고 직접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여자는 흉터 남으면 안 돼. 이건 할머니가 한의원에서 따로 구해 온 연고인데, 흉터 안 남는 데 효과가 좋다더라. 앞으로 잊지 말고 꼬박꼬박 발라.”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말을 바꿨다.“아니다. 앞으로는 예준이한테 발라 달라고 해! 오늘 저녁에 그놈 들어오기만 해 봐. 할머니가 아주 단단히 혼내 줄 테니까.”정채윤은 옅게 웃었다.‘권예준이 나한테 약을 발라 줄 리가 없는데...’애초에 권예준은 정채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다면 어젯밤 병원에 혼자 남겨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테니까.하지만 정채윤은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할머니.”...그날 오후.프로젝트팀에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없었던 정채윤은 반차를 내고 회사로 돌아가는 대신 집에 머물렀다. 책을 읽거나 디자인 작업에 참고할 만한 자료를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지만, 굳이 반차까지 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저녁에 권예준이 돌아오면 이혼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오늘 모든 이야기를 매듭짓고 나면 앞으로 이 집에 다시 올 일도 없을 터였다.저녁 무렵, 정채윤이 박여정과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고 권예준과 권나율이 모습을 드러냈다.박여정은 여전히 권예준에게 화가 나 있었지만, 권나율을 맞
Read more

제92화

정채윤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입을 열었다.“할머니, 괜찮아요. 이러다 음식 다 식겠어요. 일단 식사부터 하러 가요.”하지만 권나율은 정채윤과 함께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얼른 방으로 올라가 안하린과 영상 통화도 하고 싶었고, 가방에 넣어 둔 작은 선물도 뜯어 보고 싶었다.“증조할머니, 저 배 안 고파요. 올라가서 숙제할게요!”권나율이 곧장 계단으로 향하려 하자 박여정이 얼른 붙잡았다.“엄마가 너 먹으라고 음식도 여러 가지 준비해 놨는데 안 먹으면 어떡해? 다 너 생각해서 만든 건데.”권나율은 고개를 홱 돌리고 입술을 깨물었다.‘엄마가 좋아서 한 거잖아. 내가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아, 증조할머니. 저 진짜 배 안 고파요. 먹기 싫어요.”정채윤은 그런 권나율을 잠시 바라보다가 곁에 서 있는 권예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권예준은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오늘 이혼 이야기를 끝내고 나면 권나율과 이렇게 한집에서 지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딸에게 밥이라도 한 끼 제대로 차려 주고 싶었다.하지만 권나율은 그마저도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정채윤은 더 이상 붙잡지 않기로 했다.“할머니, 그냥 두세요.”그러나 박여정은 오히려 정채윤이 속상할까 봐 걱정됐는지 권나율을 나무랐다.“나율아, 엄마가 다친 몸으로 너 먹이겠다고 밥까지 해 놨는데 그러면 어떡해?”“다쳤다고요?”권나율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놀란 눈길이 곧장 정채윤에게 향했다.‘정말 다친 거였어?’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권나율은 지금까지 정채윤이 거짓말을 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엄마, 정말 다쳤어요?”“응.”정채윤은 짧게 대답했다.“아...”그제야 권나율의 얼굴에서 심통 난 기색이 사라졌다.정채윤에게 다가온 권나율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잡았다.“엄마, 어디 다쳤어요? 많이 다친 거예요? 저 좀 보여 주세요...”권나율이 가까이 다가오자 익숙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Read more

제93화

다이닝룸에 들어서자, 장미정은 정채윤이 차려 놓은 음식을 식탁 위에 먹음직스럽게 세팅하고 있었다.정채윤은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뒤따라 들어온 권나율이 정채윤의 옆자리에 앉으려 하자 박여정이 불러 세웠다.“나율아, 너는 증조할머니 옆에 앉자. 엄마 옆에는 아빠가 앉게 해 주는 거야. 알았지?”권나율은 잠시 눈을 굴렸지만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정채윤의 맞은편에 앉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밖에서 밥 먹을 때는 아빠가 늘 하린 이모 옆에 앉아서 반찬도 챙겨 줬는데.’그때 권나율은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작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참, 이건 엄마한테 말하면 안 되지. 알면 또 화내실 테니까.’권나율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래, 우리 나율이 착하네.”박여정은 웃으며 권나율을 옆자리에 앉혔다. 그러고는 뒤늦게 다이닝룸으로 들어오는 권예준에게 눈짓을 보냈다.정채윤은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박여정은 오늘도 어떻게든 두 사람 사이의 냉랭한 분위기를 풀어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정말 이러실 필요 없는데.’어차피 권예준이 박여정의 바람대로 움직일 리도 없었다.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옆에서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권예준이 아무 말 없이 정채윤의 옆자리에 앉은 것이다.정채윤은 잠시 멈칫했다. 이내 권예준에게서 희미하게 풍겨 오는 향수 냄새를 맡고는 다시 표정을 가라앉혔다.아침에도 맡았던 안하린의 향수였다.‘어차피 할머니 앞이라 맞춰 주는 것뿐이겠지.’정채윤은 더 신경 쓰지 않고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여정이 슬쩍 헛기침했다.권예준에게 정채윤의 반찬을 챙겨 주라는 신호였다.이번에는 권예준도 모른 척하지 않았다. 젓가락을 들어 정채윤이 좋아하는 갈비찜 한 점을 그릇에 놓아 주었다.그 모습을 본 권나율도 곧바로 따라 했다.참치회 한 점을 정채윤의 그릇에 올려 주며 말했다.“엄마, 제가 어디서 들었는데 생선 먹으면 상처 회복에 좋대요. 많이 드세요. 다 드시면 제가 또 드
Read more

제94화

그런 생각에 권나율은 어린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밥을 몇 숟갈 떠먹었다.정채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그래도 엄마랑은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잖아...’하지만 안하린과는 달랐다. 매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내일만큼은 안하린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내일 하루만 하린 이모랑 놀면 안 되나...’권나율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정채윤은 권나율과 권예준을 차례로 바라봤다. 두 사람 모두 자신과 함께 선물을 고르러 갈 마음이 없다는 건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그렇다고 딱히 서운하지도 않았다.하지만 박여정은 달랐다.“권예준, 회사가 너 하나 없다고 안 돌아가?”박여정은 못마땅한 얼굴로 손자를 쏘아보더니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내일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 있는 일이면 맡겨. 하루쯤 시간 내서 채윤이랑 같이 장인어른 선물이나 제대로 고르란 말이야!”권예준이 무어라 대꾸하려던 찰나, 정채윤이 한 발 앞서 입을 열었다.“할머니, 저도 내일은 일이 있어서 시간 내기가 어려워요. 금요일까지 아직 며칠 남았잖아요. 나중에 시간 맞춰서 나율이 아빠랑 나율이한테 같이 가 달라고 할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권예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없이 정채윤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무언가 묘한 기색이 스쳤지만, 정채윤은 개의치 않았다.박여정 역시 정채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억지로 둘러대는 것 같지는 않으니 더는 고집을 부릴 명분도 없었다.결국 박여정은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나중에 시간 나면 꼭 셋이 같이 가야 한다.”정채윤은 옅게 미소 지었다.“네, 그럴게요.”그 말을 듣자마자 시무룩해 있던 권나율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다행이다! 내일 엄마랑 안 가도 된다!’이제 예정대로 안하린과 경매에 갈 수 있었다.하지만 기쁨도 잠시, 권나율은 문득 조금 전에 정채윤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정채윤이 집에 있는 동안 곁에서 말동무도 해 주
Read more

제95화

‘안 그러면 엄마도 같이 가겠다고 할지 모르니까.’“그래.”권예준은 짧게 대답했다.정채윤은 두 사람을 힐끗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십중팔구 안하린과 관련된 이야기일 터였다.딱히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정채윤은 책장에서 전공 서적 한 권을 꺼내 소파에 앉았다.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권예준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미뤄 두었던 이혼 문제를 꺼내기 위해서였다.잠시 후 화장실에 다녀온 박여정은 세 식구가 어느새 다시 서로에게 무관심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너희도 참...”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이제는 슬슬 잠자리에 들 때였다. 박여정도 더는 잔소리하고 싶지 않았는지 손을 내저었다.“됐다. 다들 올라가서 씻고 쉬어.”정채윤은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할머니도 일찍 주무세요.”“그래.”권나율도 얌전히 인사를 건넸다.“증조할머니, 안녕히 주무세요.”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 가방을 품에 꼭 끌어안고 소파에서 내려왔다. 얼른 방으로 올라가 안하린이 준 선물을 풀어 보고 싶었다.‘하린 이모랑 영상 통화는 오늘 안 해도 되겠지. 시간도 늦었고, 이모는 매일 바쁘니까 푹 쉬어야 해.’계단을 오르려던 권나율은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정채윤을 돌아봤다.“엄마, 팔 다치셨으니까, 오늘은 아주머니한테 씻겨 달라고 할게요. 엄마는 푹 쉬세요.”걱정하는 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엄마가 다쳐서 나 씻겨 줄 수 없으니까 내 방에도 안 들어오겠지? 그러면 하린 이모가 준 선물도 안 들킬 거야!’정채윤은 아이가 품에서 내려놓을 줄 모르는 가방을 힐끗 바라봤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건 뻔히 보였지만, 굳이 캐묻거나 아는 척하지 않았다.“그래. 씻고 일찍 자.”“네! 엄마도요!”권나율은 신이 나서 대답했다.그러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아, 맞다. 엄마!”“왜?”“지난번에 만들던 블록 있잖아요. 그거 조립하는 게
Read more

제96화

권나율은 수납장에서 삼 분의 일쯤 조립된 블록과 남은 부품, 조립 설명서를 꺼냈다.“엄마, 이거예요. 꼭 끝까지 다 만들어 주셔야 해요.”정채윤이 블록을 받아 들고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권나율은 등을 떠밀어 방 밖으로 내보냈다.“엄마, 안녕히 주무세요!”정채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고 방을 나왔다.그때, 곧바로 등 뒤에서 방문이 닫혔다.정채윤은 굳게 닫힌 문을 잠시 바라봤다.아무래도 권나율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벌써 잊은 모양이었다.약도 발라 주고 며칠 동안 곁에 있어 주겠다더니,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정채윤을 방 밖으로 내보냈다.하지만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애초에 오래갈 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정채윤은 시선을 거두고 블록을 든 채 안방으로 향했다.그러다 난간 옆을 지나며 무심코 아래층을 내려다봤다.조금 전까지 소파에 앉아 있던 권예준이 보이지 않았다.정채윤의 걸음이 멈췄다.‘설마 벌써 나간 건가?’오늘은 반드시 이혼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었다. 이대로 권예준이 집을 나가 버리면 또 다음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마침 권나율을 씻겨 주러 위층으로 올라오는 장미정이 보이자, 정채윤은 대뜸 물었다.“아주머니, 대표님 어디 가셨어요?”장미정은 순간 누구를 말하는지 몰라 멈칫했다.정채윤이 평소 권예준을 ‘나율이 아빠’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잠시 뒤에야 권예준을 묻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대답했다.“아, 권 대표님이요? 전화 받으러 가셨어요.”“그래요?”아직 집을 나간 건 아니란 소리였다.“알겠어요. 나율이 좀 씻겨 주세요.”정채윤은 더 묻지 않았다.“네, 사모님.”정채윤은 블록을 들고 그대로 안방으로 향했다.장미정이 자리를 떠나자, 정채윤도 안방으로 돌아왔다.권예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권나율이 맡긴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블록은 어느덧 3분의 2가량 완성됐지만, 권예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정채윤은 시계를 확인하고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손에 들고
Read more

제97화

이제는 권예준이 무슨 짓을 하든 더 이상 상처받을 일은 없을 줄 알았다.하지만 안하린의 말을 듣는 순간, 정채윤은 가슴 한구석이 견디기 힘들 만큼 아려 왔다.‘대체 권예준에게 난 뭐였던 거야? 밖에서 안하린이랑 바람피우는 동안 남들 눈이나 속여 주는 허울뿐인 아내였나?’정채윤은 허탈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치욕스러운 감정이 밀려들자, 저도 모르게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문득 결혼 전,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권예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가 건넸던 달콤한 말들과 굳게 약속했던 미래까지...돌이켜 보니 그 모든 것이 우스울 따름이었다.정채윤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친 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안하린 씨, 그런 말로 절 자극하려던 거라면 성공하셨네요. 그런데 안하린 씨라고 저보다 나을 게 뭐가 있죠?”이내 정채윤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안하린 씨는 어디까지나 불륜 상대일 뿐이에요. 권예준이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는 순간,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거예요. 권씨 집안에서도 가만있을 것 같아요? 정말 안하린 씨를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세요?”그러자 안하린이 코웃음을 쳤다.“정채윤 씨,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진짜 불쌍한 건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당장 나율이만 봐도 그렇잖아요. 나율이가 정채윤 씨를 더 좋아할까요, 아니면 저를 더 좋아할까요?”안하린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권씨 집안에서 반대하든 예준 오빠가 알아서 해결해 줄 거예요. 그러니까 쓸데없이 제 걱정하지 마시고 본인 앞날이나 걱정하세요.”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더욱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지금이야 아직 이혼 전이니까 오빠가 생활비라도 주는 거죠. 이혼하고 나면 정채윤 씨한테 돌아갈 돈은 한 푼도 없을 거예요. 남진 그룹도 마찬가지고요. 이번 평가만 끝나면 짐 싸서 나가야 할 테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나 해 두세요.”그 말을 끝으로 안하린은 일
Read more

제98화

식사 생각이 나자, 정채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협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었다.그리고 엄준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점심에 시간 있어? 밥 살게.]며칠 전 백화점에서 문방사우를 둘러봤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지 못했다.그래서 오늘은 미술품 경매장에 가서 다시 한번 살펴볼 생각이었다.정채윤은 윤세형에게 미리 하루 휴가를 낸 상태였다.마침 외출하는 김에 엄준후에게 진 빚까지 정리하면 될 것 같았다.메시지를 보낸 정채윤은 답장이 바로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씻으러 가려던 순간, 알림음이 울렸다.엄준후였다.[그래. 어디로 가면 돼?]생각보다 빠른 답장에 정채윤은 잠시 멈칫했다가 점심을 먹을 레스토랑의 주소를 보내 주었다.그걸로 대화가 끝난 줄 알았는데 곧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너 출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시간이 나서 밥을 먹자고 해?]정채윤은 잠시 생각했다.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다. 정태환의 생일이 다가온다는 건 엄씨 가문에서도 알고 있었다.[미술품 경매장에 가서 아빠 선물 좀 고르려고.]이번에도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알았어.]정채윤은 메시지를 확인한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씻고 나온 뒤 옷을 갈아입던 정채윤은 탁자 위에 놓인 블록을 발견했다.어젯밤 늦게까지 조립해 완성한 작은 캐슬이었다.정채윤은 블록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권나율의 방으로 향했다.마침 아침이니 권나율도 깨울 생각이었다.문을 두드린 뒤 안으로 들어가자 권나율은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정채윤이 막 입을 열려는데 권나율이 고개를 내밀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엄마, 저 깼다고 했잖아요. 안 들어오셔도 된다고 했는데 왜 또 들어오셨어요?”정채윤이 걸음을 멈췄다.“엄마는 못 들었어. 이불 뒤집어쓰고 말해서 그런가 봐.”그러면서 완성한 블록을 수납장 위에 올려놓았다.권나율은 입술을 삐죽였다.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조금 전 권예준에게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어젯밤 갑자
Read more

제99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정채윤은 오히려 차분해졌다.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멎자,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고 흐트러진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해 베개 위에 올려놓았다.잠시 후 권나율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욕실에서 나왔다.“엄마, 저 다 씻었어요.”권나율은 씻고 나왔다는 말이 무섭게 침대 위에 놓인 휴대전화부터 집어 들었다. 화면을 확인하더니 어린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졌다.정채윤은 누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옷장 문을 열며 평소처럼 물었다.“오늘은 뭐 입고 싶어?”그런데 권나율은 대답은커녕 휴대전화를 내려놓더니 정채윤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엄마의 등을 떠밀어 방 밖으로 내보냈다.“엄마, 옷은 제가 알아서 고를게요. 엄마는 얼른 내려가서 아침 드세요. 저 신경 안 쓰셔도 돼요!”권나율은 조금 있다가 안하린이 어젯밤 선물해 준 원피스를 입을 생각이었다.안하린이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맞췄다는 원피스였다. 어젯밤 선물을 받은 순간부터 얼른 입어 보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하지만 정채윤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엄마가 알면 또 하린 이모한테 뭐라고 할지도 몰라.’“나율아, 오늘 비 온다고 했으니까 옷은...”정채윤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권나율은 그녀를 문밖으로 밀어냈다.곧이어 방문이 닫혔다.그것도 모자라 안쪽에서 잠금장치를 한 번 더 거는 소리까지 들렸다.정채윤은 굳게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굳이 문을 두 번씩이나 잠그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정채윤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문을 두드렸다.“나율아.”“왜요?”“이번 주 금요일이 외할아버지 생신이잖아. 선물은 준비했어?”그 시각 권나율은 옷장을 열어 어젯밤 몰래 숨겨 둔 원피스를 꺼내 든 참이었다.예쁜 원피스를 펼쳐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던 아이는 정채윤의 목소리가 들리자 금세 입술을 삐죽였다.“준비했어요. 엄마, 이제 그만 물어보세요. 저 옷 갈아입고 있단 말이에요.”선물은 이미
Read more

제100화

그때 박여정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다이닝룸 입구에 서 있는 정채윤을 발견한 박여정은 그제야 치켜들었던 손을 내렸다. 끓어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애써 표정을 누그러뜨렸다.“채윤아, 일어났니?”정채윤도 옅게 미소 지었다.“네, 할머니.”권예준은 정채윤을 힐끗 바라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그러다 정채윤이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잠시 시선을 멈췄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정채윤 역시 무심코 권예준에게 눈길을 주었다.어젯밤과는 옷차림이 달라져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아마 안하린의 집에서 갈아입고 온 모양이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일은 놀랍지도 않았다.오히려 정채윤의 눈길을 끈 건 정장의 색깔이었다.‘남색 정장을 입었네?’권예준은 평소 검은색 계열의 정장만 고집했다. 정채윤도 그의 취향에 맞춰 옷을 골라 주곤 했다.예전에 몇 번 다른 색상의 정장을 사 준 적도 있었지만, 권예준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남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정채윤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봤다.‘정장 색깔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게 아니었구나. 내가 골라 준 게 싫었던 거였어.’정채윤은 씁쓸한 생각을 떨쳐 내고 시선을 거두려 했다.그런데 권예준은 그 짧은 순간의 눈길을 달리 받아들인 듯했다.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정채윤은 아무 말 없이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권예준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마침 그때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옷을 갈아입은 권나율이 내려오고 있었다.다이닝룸에 들어선 권나율은 권예준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달려갔다.“아빠, 오셨어요!”아이가 품에 와락 안기자, 권예준의 굳어 있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응.”권예준은 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권나율은 기분 좋게 웃다가 슬그머니 정채윤 쪽을 살폈다. 그러고는 권예준의
Read more
PREV
1
...
567891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