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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꽃길의 모든 챕터: 챕터 71 - 챕터 80

100 챕터

제71화

“제가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육준석은 정채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코웃음을 쳤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는 경멸과 무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정채윤은 불쾌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막 따져 물으려던 찰나, 육준석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차갑게 한마디를 던졌다.“형수 같은 여자, 저도 많이 봤어요. 적당히 하세요. 그러다 정말 아무것도 못 건질 수도 있으니까.”‘나 같은 여자? 내가 어떤 여자인데?’계속되는 조롱에 정채윤의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하지만 정채윤도 알고 있었다. 육준석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무시할 수 있는 건 결국 변해 버린 권예준 때문이라는 것을.몇 년 전, 권예준이 정채윤에게 잘해 주던 시절이었다면 육준석도 감히 이런 식으로 말하지 못했을 터였다.정채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준석 씨, 말이 너무 심하네요.”그러나 육준석은 정채윤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정채윤은 목이 턱 막히는 기분에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그때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최형섭에게 온 메시지였다.[2층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정채윤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더 이상 불쾌한 일에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알겠다고 답장을 보낸 뒤 리조트 안으로 들어갔다.곧장 2층 레스토랑으로 향한 정채윤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또다시 육준석을 발견했다.육준석은 안쪽에 있는 테이블로 걸어가고 있었다.그곳에는 권예준과 안하린, 권나율, 권서진이 함께 앉아 있었다.네 사람은 영락없는 한 식구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다.권나율은 안하린에게 바짝 붙어 안하린이 들고 있는 작은 케이크를 받아먹고 있었고, 권예준은 그런 두 사람을 다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권서진은 옆에서 세 사람의 사진까지 찍어 주고 있었다.그 광경을 본 정채윤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저도 모르게 걸음도 멈췄다.그제야 조금 전 육준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육준석은 정채윤이 권예준을 미행해 여기까지 따라왔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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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권나율은 계속 정채윤을 지켜봤다.정채윤이 자리를 뜨기는커녕 아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자, 권나율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안하린이 그런 권나율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엄마한테 가서 인사하고 와.”권나율은 가고 싶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리며 권예준을 바라봤다.“아빠...”권예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다녀와.”그 말을 들은 안하린이 순간 멈칫하며 권예준을 바라봤다. 권서진과 육준석 역시 의외라는 듯 잠시 굳었다.그러나 권서진은 곧 권예준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말했다.“가서 인사는 해야지. 안 그랬다가 나중에 할머니한테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잖아.”그 말을 들은 안하린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그러네. 워낙 노친네한테 예준 오빠 흉보는 걸 좋아하니까... 괜히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면 나율이한테 다녀오라고 하는 게 낫겠어.’안하린은 권나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아빠 말씀 들어야지. 다녀와.”권나율은 억울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투덜거렸다. 그래도 권예준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어 마지못해 의자에서 내려와 정채윤에게 향했다.잔뜩 내키지 않는 얼굴로 정채윤 앞에 선 권나율이 물었다.“엄마도 여기 놀러 오셨어요?”식사 중이던 정채윤은 권나율이 찾아올 줄 몰랐기에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잔뜩 못마땅해하는 표정만 봐도 마지못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정채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차라리 권나율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엄마는 친구 만나러 온 거야. 이따가 친구랑 같이 있어야 해서 나율이까지 챙기기는 어려울 것 같아. 오늘은 아빠랑 같이 있어.”그 말을 듣자 시무룩했던 권나율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말씀 잘 듣고 있을게요!”정채윤은 옅게 웃었다.“그래. 가 봐.”권나율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마도 천천히 드세요!”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권나율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의자에 앉자마자 권예준에게 말했다.“아빠, 엄마는 친구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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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그런 생각을 하던 안하린은 빙그레 웃으며 권예준을 바라봤다.‘이번에는 정말 예준 오빠 덕분에 살았어.’권서진이 감탄하듯 말했다.“오빠는 하린 언니한테 진짜 잘해 주는 것 같아!”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잠깐만. 하종규 교수님 만나게 해 줘서 청수랑 태우가 다시 협업할 수 있게 다리도 놔 주고, 하린 언니가 교수님 제자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려는 거잖아. 설마 이게 다 하린 언니 생일 선물이야?”그 말을 들은 안하린도 순간 놀라 권예준을 바라봤다. 눈에는 감출 수 없는 기대감이 가득했다.‘예준 오빠는 정말 다정한 남자야...’생일 선물이라는 말에 권나율도 고개를 들었다. 호기심 어린 얼굴로 권예준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권예준이 말했다.“아니야. 생일 선물은 따로 있어.”권나율이 궁금한 듯 물었다.“무슨 선물이에요? 아빠, 저한테만 알려 주시면 안 돼요?”권서진은 부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권나율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생일 선물인데 지금 말하면 재미없잖아.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알겠어요.”안하린은 고개를 숙이고 달콤하게 웃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예준 오빠가 따로 준비했다는 생일 선물... 설마 권씨 가문에 우리 사이를 밝히고 정채윤과 이혼하는 건가? 드디어 나와의 관계를 공개하려는 건가?’전에 권예준이 했던 말을 떠올리자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그렇게 생각하니 안하린의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었다....정채윤은 최형섭을 따라 창가 자리로 향했다.통창 너머로 산과 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자리였다.최형섭은 정채윤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며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돌려 말하지 않을게. 며칠 전에 교수님한테 들었는데, 권예준이 따로 만나자고 했다더라고. 단순히 협업 얘기만 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아. 교수님 말씀을 들어 보니 안하린을 제자로 받아 달라고 부탁도 하려는 모양이던데...”정채윤은 순간 멈칫하며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부탁까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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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정채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별다른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그대로 프런트로 향해 신분증을 꺼내 막 직원에게 말을 건네려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4153호요. 객실 키 받으러 왔습니다.”정채윤은 순간 멈칫했다.뒤를 돌아보니 안하린이 권예준의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무척 다정해 보였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관계를 숨기려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안하린 역시 정채윤을 발견했다.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정말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네. 아예 여기서 묵기까지 하겠다고?’안하린은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권예준의 팔짱을 낀 채 정채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아예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괜히 신경 쓰느니 없는 사람 취급해 버려야겠다.’안하린은 가방에서 자신과 권예준의 신분증을 꺼내 프런트 직원에게 건넸다.권예준도 정채윤을 발견했지만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정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다정하게 팔짱을 낀 두 사람에 이어 안하린의 손에 들린 신분증 두 장이 눈에 들어오자, 표정이 굳었다.정채윤과 권예준이 함께한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하지만 정채윤은 그의 신분증을 마음대로 만져 본 적이 없었다.처음에는 두 사람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권예준은 자신의 영역에 정채윤이 들어오는 것을 꺼렸다. 서재에는 아예 발도 들이지 못하게 했고 신분증을 비롯한 개인 물품에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했다.그런 권예준의 신분증이 안하린의 손에 들려 있었다.두 사람의 관계는 정채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모양이었다.직원은 신분증으로 예약자 정보를 확인한 뒤 객실 키와 신분증을 함께 건네며 미소 지었다.“예약하신 더블룸 확인됐습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정채윤도 두 사람이 같은 객실을 예약했으리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아마 권나율은 권서진에게 맡겼을 터였다. 그래야 방해받지 않고 둘만의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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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가만히 있어. 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야. 네 옷으로 갈아입고 빠져나가기만 하면 돼. 하지만 허튼짓해서 경찰이라도 끌어들이면 그때는 가만 안 둬!”정채윤의 얼굴은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숨이 가빠졌다.그래도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소리를 냈다.“읍...”바로 그때, 뒤쪽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이내 남녀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나 이 옷 어때?”“괜찮네.”낮게 잠긴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권예준이야!’정채윤의 눈시울이 순간 뜨거워졌다.지금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권예준뿐일지도 몰랐다.정채윤은 있는 힘을 다해 목소리를 짜냈다.“읍... 권예준...”하지만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권예준은 정채윤이 있는 쪽으로 돌아보지 않았다.안하린과 함께 그대로 다른 온천탕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그 모습을 본 순간 정채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머릿속이 새하얘졌다.두 사람과 정채윤 사이의 거리는 고작 몇 미터에 불과했다.정채윤은 권예준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예전에는 안하린이 가벼운 감기에 걸려 몇 번 작게 기침하는 것만으로도 곧바로 알아차리던 사람이었다.그런데 자신에게는 달랐다.권예준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나한테 관심 따위 있을 리 없지. 내 목소리라고 다를 것도 없고...’정채윤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정채윤을 뒤에서 붙잡고 있던 남자는 그녀가 감히 도움을 요청할 줄은 몰랐는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남자는 정채윤의 입을 더욱 세게 틀어막은 채 문을 열고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대로 정채윤을 벽에 거칠게 밀어붙였다.“윽!”정채윤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두려움에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남자는 한 손으로 정채윤의 두 손목을 머리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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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자는 금세 정채윤을 쫓아 나왔다.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오른쪽 뺨의 흉터를 따라 번지면서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얼굴이 더욱 섬뜩해 보였다.정채윤의 꾀에 제대로 당한 이상 남자에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정채윤을 다시 붙잡아 인질로 삼아야 경찰을 따돌리고 빠져나갈 여지가 생길 터였다.“X발, 감히 날 속여?”남자가 이를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정채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두려움을 억누르며 아랫입술을 세게 깨문 채 죽을힘을 다해 앞으로 달렸다.그런데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정면에서 누군가와 세게 부딪쳤다.“악!”정채윤은 혼비백산해 비명을 질렀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바닥에 부딪힐 거라고 생각한 순간, 단단한 팔이 뻗어 와 허리를 감쌌다.정채윤의 몸이 그대로 상대의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깨끗하고 은은한 비누 향이 훅 끼쳐 왔다.아직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정채윤은 익숙한 향에 순간 멍해졌다.“괜찮아요?”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엄준후?’정채윤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눈가는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엄준후의 차갑고 단단한 얼굴을 확인한 순간,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입술까지 떨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엄준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흐트러진 정채윤의 옷차림을 확인한 엄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심스럽게 정채윤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무슨 일인지 천천히 말해 봐.”극도의 긴장 속에서 겨우 버티고 있던 탓인지 다정한 한마디에 그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무너졌다.평소라면 누구보다 밀어냈을 엄준후였지만 지금만큼은 그에게 기대고 싶었다.정채윤은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떨리는 두 손으로 엄준후의 가슴께 옷자락을 움켜쥔 채 울먹였다.“어떤 남자가... 남자가...”아직 두려움이 가시지 않아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했다.하지만 엄준후는 재촉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떨고 있는 정채윤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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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엄준후는 부대원들과 협력해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를 붙잡았다.그 순간, 조금 전 정채윤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흐트러진 옷차림과 손목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손자국.조금만 늦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엄준후의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남자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쥔 엄준후는 그대로 복부를 걷어찼다.“악!”남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남자가 복부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지만 엄준후는 멈추지 않았다.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남자의 아랫배를 몇 차례 더 걷어찼다.함께 온 부하들은 엄준후가 갑자기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이대로 두었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아 황급히 엄준후를 말렸다.“소령님, 그만하십시오! 더 때리시면 저 자식 못 버팁니다!”“맞습니다. 진정하십시오!”엄준후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남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엄준후는 쓰러진 남자를 차갑게 내려다봤다.“걱정하지 마. 안 죽어.”부하들도 엄준후가 사람을 죽일 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모습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었다.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소령님, 혹시 저 자식이 아까 소령님 심기라도 건드렸습니까? 평소보다 많이 화나신 것 같아서...”엄준후가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부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경찰에 인계해. 나는 사람 좀 만나고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알겠습니다.”엄준후가 다시 돌아갔을 때, 정채윤은 벽 한쪽에 쪼그려 앉아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잔뜩 겁을 먹고 몸을 웅크린 모습이 꼭 고양이 같았다.예전에도 정채윤은 상처받거나 힘든 일을 겪을 때면 꼭 저렇게 혼자 웅크려 있곤 했다.엄준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췄다.기척을 느낀 정채윤이 고개를 들었다.엄준후를 발견하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술을 달싹였다.“왔어요?”이제는 어느 정도 진정된 상태였다.그러자 오히려 엄준후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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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일단 이거 입고 있어. 옷은 나중에 갈아입고.”깨끗하고 은은한 비누 향이 훅 끼쳐 오자 정채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척 좋아했던 향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했다.정채윤은 겉옷을 다시 벗으려 했다.“아니, 됐어...”엄준후가 미간을 좁히더니 정채윤의 속내를 단번에 짚었다.“뭘 그렇게 수줍어해? 설마 아직도 나 못 잊었어?”정채윤은 어이가 없어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내 억울하다는 듯 엄준후를 노려보며 받아쳤다.“웃기지 마. 누가 널 못 잊었다고 그래? 그냥 네 옷에서 나는 땀 냄새가 싫은 거야!”엄준후는 정채윤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능청스럽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벗겨지지 않도록 겉옷을 다시 단단히 여며 주었다.“그래도 지금은 참고 입어.”정채윤이 눈을 흘겼다.엄준후의 입가가 아주 잠깐 올라간 듯했다.그는 먼저 몸을 돌렸다.“고집 그만 부리고 가자.”정채윤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엄준후를 따라갔다.아래층으로 내려온 정채윤은 엄준후의 SUV에 올라타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앉았다.두 사람은 이제 예전과 같은 사이가 아니었다. 더는 아무렇지 않게 조수석에 앉을 만큼 가까운 관계도 아니었다.엄준후는 시동을 걸다 룸미러로 뒷좌석을 한번 바라봤다. 정채윤의 표정을 잠시 살핀 뒤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30분쯤 뒤, 차가 관할 경찰서에 도착했다.엄준후는 정채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먼저 와 있던 몇몇 부하들이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러다 정채윤이 걸치고 있는 검은색 아웃도어 재킷을 알아보고는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지난 몇 년 동안 엄준후가 여자에게 이 정도로 신경 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작전 중 여성을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늘 철저하게 선을 지켰고, 자기 옷까지 벗어 줄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그런데 저분은...’엄준후가 가까이 오자 장인호가 슬쩍 다가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소령님, 저분은 누구십니까? 아까 그놈 일행은 아닌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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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권예준에게 연락하는 건 더 내키지 않았다.지금쯤 안하린과 온천을 즐기고 있을 테니, 정채윤에게 무슨 일이 생겼든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게 뻔했다.정채윤이 아무 말 없이 망설이자, 담당 경찰이 부드럽게 말했다.“남편분께 연락해 보셔도 되고요. 혹시 연락하기 어려우신가요?”정채윤은 차마 사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그때 문틀에 기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엄준후가 눈에 들어왔다.정채윤은 더욱 불편해졌다.아무리 그래도 엄준후 앞에서 자신의 실패한 결혼 생활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무엇보다 지난번에는 엄준후 앞에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잖아. 권예준을 사랑한다고. 언젠가는 권예준도 마음을 돌릴 거라고 믿는다고...’한참 고민하던 정채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결국 권예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휴대전화를 쥔 손바닥에 땀이 밸 정도로 긴장했지만, 끝내 권예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정채윤은 입술을 깨물었다.엄준후의 깊은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는 게 느껴져 고개를 조금 숙인 채 권예준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그런데 먼저 권예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바빠. 할 말 있으면 이따 해.]정채윤은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을 참으며 답장을 입력했다.[돌발상황이 생겨서 지금 경찰서야. 경찰에서도 혼자 가지 말고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과 같이 가는 게 좋겠다고 해. 미안한데 데리러 와줄 수 있어? 정말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그래.]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정채윤은 한참 동안 채팅창을 바라봤다.휴대전화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권예준이 바로 직전에 메시지를 보냈고, 자신도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아직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채윤은 자꾸만 최악의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내가 죽든 살든, 무슨 일을 당했든 권예준은 아무 관심 없을 거야...’정채윤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채팅창을 닫았다.이제 부모님에게 전화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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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엄준후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차가운 눈으로 정채윤을 바라봤다.“타.”정채윤은 연달아 이어지는 엄준후의 호의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날을 세우며 싸웠는데, 돌아서자마자 또 이렇게 자신을 챙기고 있었다.정채윤은 한 걸음 물러서며 어색하게 말했다.“아까도 네가 도와줘서 해결됐잖아. 이제는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돼. 고마워.”두 사람의 인연은 9년 전에 이미 끝났다.지난번 엄석현과 함께 식사할 일이 없었다면, 그리고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평생 다시 마주칠 일조차 없었을지 몰랐다.이제 일도 모두 해결됐으니 더는 서로 엮일 이유가 없었다.정채윤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려 했다.엄준후는 운전대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얼굴도 눈에 띄게 굳었다.“누가 너 신경 쓰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할아버지가 나중에 이 일 아시면 너를 두고 혼자 갔다고 나한테 뭐라고 하실 게 뻔하니까 그러는 거야.”‘역시...’그 말을 듣자 오히려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되는 듯했다.‘하긴. 한 번 나를 버린 사람이 갑자기 나를 걱정할 리가 없지. 아까 내가 놀라서 매달렸을 때 달래 준 것도 결국 할아버지 때문이었나 봐.’차라리 이렇게 확실히 말해 주니 나았다. 적어도 혼자 엄준후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정채윤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괜찮아. 나중에 할아버지가 물어보시면 내가 너한테 폐 끼치기 싫어서 혼자 갔다고 해. 필요하면 내가 직접 설명할게.”엄준후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말없이 정채윤을 바라보던 엄준후는 잠시 후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타.”그러고는 싸늘하게 덧붙였다.“그 꼴로 밤길 돌아다니다 또 누구한테 잡혀가기라도 하면, 그때는 나도 할아버지한테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정채윤은 말끝마다 자신을 긁는 엄준후가 못마땅했다.괜한 걱정이라며 다시 거절하려던 순간, 뒤에서 차 한 대가 다가왔다.엄준후의 차에 길이 막히자, 운전자가 짜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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