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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꽃길의 모든 챕터: 챕터 61 - 챕터 70

100 챕터

제61화

정채윤은 멈칫했다.윤세형이 놀란 듯 물었다.“권 대표님도 오셨어요?”한규빈이 대답했다.“네. 오늘 안하린 씨와 함께 오셨어요.”윤세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정채윤은 무심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권예준은 관리해야 할 회사가 한두 곳이 아니었고, 평소에 무척 바빴다. 무슨 일이 생겨서 전화를 걸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바로 바쁘다거나, 시간이 없다는 말이었다.그래서 나중에는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굳이 권예준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어떤 태도로 나올지 뻔히 아는데 괜히 전화를 걸어 안 좋은 얘기를 들으며 굴욕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여자들은 대부분 섬세한 편이라 여러 번 거절당하다 보면 상대방이 정말로 바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지금 권예준이 안하린에게 보이는 태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게다가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이렇게 오랫동안 위층에서 내려오지 않는 걸까?정채윤은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금방 생각을 정리했다.사무실 문은 한참 뒤에야 열렸다.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안하린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해요. 예준 오빠랑 얘기를 나누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위에서 수정하다 보니 좀 늦었어요...”사과하는 태도는 꽤 정중했지만, 사과의 대상은 윤세형과 한규빈뿐이었다.정채윤에게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한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빼주었다.“괜찮습니다. 별로 늦지 않았어요.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윤세형은 티포트를 들더니 안하린에게 차를 따라주며 살갑게 말했다.“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던 거잖아요. 저희는 조금 기다려도 괜찮아요.”안하린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와 함께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안하린은 자료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그럼 지금부터 시작하죠.”“네.”정채윤은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자료를 펼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자신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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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안하린이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걸 정채윤이 모를 리 없었다.정말 웃기는 일이었다.안하린이 어떤 인간인지 들춰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텐데, 안하린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채윤을 조롱했다.정채윤이 한규빈과 윤세형 앞에서 대놓고 그런 말을 했으니 안하린은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안하린은 입술을 깨물다가 정채윤을 한 번 바라보고는 윤세형에게 말했다.“죄송해요, 윤 팀장님. 현장에 가지 않은 건 제 잘못이에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윤세형은 어색하게 웃었다.사실 윤세형은 안하린이 현장에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는 조금 못마땅했다.하지만 안하린 뒤에는 권예준이 있었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그리고 윤세형은 안하린이 꽤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뛰어난 인재는 조금 더 배려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윤세형이 말했다.“괜찮습니다. 자책하지 않아도 돼요. 몸이 안 좋으면 쉬는 게 맞죠.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안하린 씨가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현장에 직접 가서 보는 거나 사진으로 확인하는 거나, 안하린 씨에게는 큰 차이가 없겠죠.”말을 마친 뒤에는 정채윤을 바라보며 말했다.“정채윤 씨, 안하린 씨의 능력이 의심스러웠다면 저한테 먼저 물어보시지 그랬어요? 제가 사실대로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런 일은 다시 없었으면 합니다.”한규빈은 상황을 파악하고 말했다.“맞아요, 정채윤 씨. 안하린 씨를 의심하시면 안 되죠. 정채윤 씨는 이제 막 업계에 들어오셨으니 잘 모르실 수도 있는데, 안하린 씨는 건축업계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큼 실력이 뛰어난 분이에요.”안하린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웃으며 정채윤을 힐끗 바라보았다.설마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정채윤도 예상하지 못했다.역시 사람에게는 든든한 뒷배가 있어야 했다. 그래야 잘못을 저질러도 모든 걸 정당화할 수 있었다.정채윤은 차갑게 웃었다. 이제 와서 더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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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엄마, 보고 싶어요. 이따가 데리러 와주면 안 돼요? 우리 같이 집에 가요.”사실 정채윤은 권나율이 한동안 침묵하고 있을 때 이미 눈치챘다. 권나율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권예준과 안하린이 저녁에 자신을 돌봐줄 수 없게 됐으니 그제야 엄마가 필요해진 것이었다.정채윤은 창밖을 바라보며 덤덤히 말했다.“엄마 아직 일이 남았어. 집에 못 가. 주말에 나율이 보러 갈게.”권나율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싫어요. 주말까지 기다려야 엄마랑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너무 늦어요. 저는 지금 당장 엄마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에요. 네?”정채윤은 골치 아픈 듯 미간을 꾹 눌렀다.“나율아, 엄마 진짜 일 때문에 바빠서 그래.”“싫어요, 싫어요! 엄마가 해준 밥도 정말 오래 못 먹었단 말이에요!”“...”정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이번에는 타협하지 않았다.“나율아, 엄마 일 보러 가야 하니까 이따가 얌전히 집에 돌아가도록 해.”재차 거절당하자 권나율은 정말 서러워졌다. 화가 난 권나율은 코웃음을 치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통화가 끊기자 정채윤은 잠시 멈칫했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괴로웠고, 점점 눈시울까지 붉어졌다.“아가씨, 괜찮아요?”지나가던 사람이 그 자리에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는 정채윤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정채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눈가를 닦으며 애써 괜찮은 척했다.“괜찮아요.”그러고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서둘러 자리를 떴다.차에 올라타 회사로 돌아가려는데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최형섭에게서 걸려 온 전화인 걸 확인한 정채윤은 눈가를 한 번 문지르고 몇 초간 감정을 추스른 뒤 전화를 받았다. 정채윤은 차에 시동을 걸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최형섭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난번에 나랑 밥 먹을 때 오늘 문진에 가서 협상해야 한다고 했었지?”정채윤은 멈칫했다.“응. 오늘 갔다 왔었는데 왜?”깊게 숨을 들이마신 최형섭은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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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정채윤은 최형섭과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청수와는 더더욱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청수가 정채윤을 위해서 태우 그룹을 상대로 손을 쓸 리가 없었다.안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됐어요, 엄마. 이번 일은 아마 업계 내 경쟁 때문일 거예요. 나중에 예준 오빠한테 이야기해 볼게요. 오빠가 우리를 도와줄 거예요.”말을 끝맺자마자 문이 열리며 권예준이 걸어 나와 초조한 얼굴을 한 안하린을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안하린은 고개를 들며 심각한 표정으로 권예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불안했던 탓인지 저도 모르게 눈시울까지 붉어졌다.권예준은 이야기를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손을 들어 안하린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 말을 들은 안하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안심한 듯 권예준의 어깨에 기대며 고맙다고 했다.권예준은 안하린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한편 정채윤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직접 운전해서 병원에 도착한 뒤 근처 식당에서 담백한 음식을 포장해 병실로 향했다.정채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또 찾아온 것을 본 서은영은 한편으로는 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흐뭇했다.“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집에 돌아가서 나율이를 잘 돌보라니까.”정태환도 거들었다.“네가 여기 오면 나율이는 혼자 집에 있어야 하잖아. 얼마나 불쌍해? 아이는 어른들의 보살핌이 가장 필요한 법인데 말이야.”정채윤은 덤덤히 웃으며 가방을 사물함 위에 올려놓고 음식이 든 봉투를 들고 테이블로 향했다.정채윤은 굳이 부모님에게 권예준과 권나율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저 주말에는 집에 갈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서 드세요. 이러다 음식 다 식겠어요.”서은영과 정태환은 결국 정채윤을 더 설득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주말에는 꼭 돌아가도록 해.”“알겠어요.”정채윤은 무심하게 대답했다.그런 다음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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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아마 오늘 정채윤이 돌아올 것을 알고 일부러 마주치지 않으려고 나간 모양이었다.아마 안하린을 만나러 갔을 것이다.모처럼 맞은 주말이고, 아이를 돌보지 않아도 되는 날이기도 하니 둘만의 시간을 마음껏 보내고 싶을 테니 말이다.물론 정채윤은 개의치 않았다. 슬리퍼로 갈아신은 뒤 사 온 물건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며 권나율을 불렀다.“나율아.”권나율은 목소리를 듣고 잠시 멈칫했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대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콧방귀를 뀌더니 태블릿을 품에 안고 몸을 돌려버렸다.정채윤은 며칠 전 자신이 부탁을 거절한 일 때문에 권나율이 화가 나 있다는 걸 알았다.정채윤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다.인기척을 들은 장미정은 과일이 담긴 접시를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가 정채윤이 돌아온 것을 보자 무척 반가워하며 이내 접시를 내려놓고 다가와 그녀가 들고 있던 물건을 받아주려 했다.“사모님, 돌아오셨어요? 뭘 이렇게 사 오셨어요? 제가 갖다 놓을게요.”사모님이라는 말에 정채윤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덤덤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저었다.“퍼즐 장난감 좀 샀어요. 제가 갖다 놓으면 돼요.”“그래요.”‘장난감?’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토라져 있던 권나율은 그 말을 듣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장난감이 든 봉투를 바라보았다.“엄마...”권나율은 잠시 망설이다가 정채윤을 불렀고 정채윤은 권나율을 바라보았다.“왜?”권나율은 입술을 깨물다가 태블릿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내려와 정채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정채윤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화해하고 싶다는 뜻이었다.권나율을 줄곧 키워온 정채윤은 권나율이 쉽게 토라지고 부끄러움도 잘 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애초에 권나율을 위해서 사 온 장난감이었고 굳이 어린 아이에게 화를 낼 이유는 없었기에 권나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위층에 올라가서 놀자.”권나율은 금세 활짝 웃으며 장난감이 든 봉투를 받아서 들었다.“좋아요!”아빠는 볼일이 있어서 아침에 같이 놀아주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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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당연히 가겠다고 하겠지.’정채윤이 담담하게 말했다.“아직 말씀 안 드렸어. 아빠 오시면 물어볼게.”‘아직 말 안 했다고? 그렇가면 아빠는 안 갈 가능성도 있다는 거잖아!’권나율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그래요.”“외할아버지한테 드릴 선물도 꼭 준비해. 나율이가 준비한 선물 받으시면 분명 좋아하실 거야.”“아...”권나율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내 입술을 꾹 다문 채 고민에 빠졌다.외할아버지 생일에 가든 안 가든 선물은 챙겨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하린의 선물을 준비하느라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녔다.‘하나 더 준비하라고? 그게 얼마나 힘든데...’권나율은 풀이 죽은 채 고개를 숙였다.“알겠어요...”정채윤은 그런 권나율을 가만히 바라봤다. 표정이 한층 굳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퍼즐은 이제 안 할 거야?”기분이 상한 권나율은 그만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이더니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권나율은 몸을 돌려 수납장에서 주문 제작한 블록 부품을 꺼냈다.“엄마, 우리 같이 블록 만들어요!”블록은 구조가 꽤 복잡해 혼자 조립하기에는 버거웠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작은 부품도 많아서 오래 만지다 보면 손가락까지 아팠다.무엇보다 시간이 촉박했다. 서둘러 완성하지 않으면 안하린의 생일에 선물로 줄 수 없었다.외할아버지한테 드릴 선물은 나중에 하나 사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외할아버지는 자신을 무척 예뻐하니 선물 하나쯤 늦게 준비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을 짓누르던 걱정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 인지 작은 얼굴에 다시 환한 웃음이 번졌다.권나율은 조립하기 까다로운 부품들을 골라 정채윤 앞에 내려놓았다.“엄마, 이것 좀 만들어 줘요.”정채윤은 이 블록이 안하린에게 줄 선물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갑자기 살갑게 구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굳이 거절하지 않고 부품을 집어 들었다.“그래.”“고마워요, 엄마.”두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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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정채윤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차 소리를 들은 권나율은 반색하며 위층에서 내려와 현관으로 달려갔다.“아빠!”권예준은 다정하게 웃으며 권나율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나율아, 오늘은 집에서 뭐 하고 놀았어?”권나율은 곧바로 권예준의 손을 잡고 오늘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늘어놓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정채윤과 함께 있을 때와는 같은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랐다.잠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채윤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주방에서 음식을 가져와 식탁에 내려놓았다.권예준은 정채윤을 보고도 무심히 시선을 돌릴 뿐, 별다른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그때 권나율이 식탁을 보고 말했다.“엄마, 왜 두 사람 것만 준비했어요? 아빠도 저녁 안 먹었대요. 우리랑 같이 먹을 거래요!”정채윤은 권나율을 한번 바라본 뒤 권예준에게 시선을 돌렸다.‘안하린이랑 저녁을 먹고 온 게 아니었어?’그렇다고 직접 권예준의 수저와 식기까지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정채윤은 식탁에 앉으며 장미정에게 말했다.“수저 한 세트만 더 준비해 주세요.”장미정은 순간 멈칫했다.사실 권예준이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평소 같으면 권예준이 퇴근해 돌아오는 즉시 정채윤도 현관까지 마중 나갔을 테니까.그리고 저녁 메뉴가 무엇인지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식기까지 직접 살뜰히 챙기는 것도 늘 정채윤의 몫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정채윤의 태도는 평소와 확연히 달랐고 집 안에는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듯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두 분이 정말 싸우기라도 하신 건가?’하지만 장미정은 어디까지나 집안일을 돕는 사람일 뿐이었다. 주인 가족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답만 하고는 조용히 주방으로 가 수저를 챙겨 왔다.권예준은 그런 정채윤을 한번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정채윤의 맞은편에 앉았다.정채윤은 잠시 멈칫했지만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고개를 숙여 식사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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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잘됐다! 내일 하린 이모를 만날 수 있겠어!’하지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정채윤을 보고 있자니 권나율도 조금은 마음에 걸렸다.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권나율은 혼자 남을 정채윤이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앞으로 엄마와 함께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거야. 하지만 하린 이모와 함께할 기회는 흔치 않아.’그렇게 생각하자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께름칙함도 금세 사라졌다.정채윤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권나율에게 물었다.“나율아, 왜 그래?”“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엄마 일은 언제 끝나나 궁금해서요. 월요일 저 학교에 데려다줄 수 있어요?”정채윤은 아이가 자신이 일을 마치고 찾아올까 봐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아직 한동안 더 바쁠 것 같아. 월요일에도 학교에는 못 데려다줄 것 같고.”‘잘됐다!’그 말을 들은 권나율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네, 알겠어요. 엄마, 건강 잘 챙겨요.”“그래.”정채윤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권예준은 그런 정채윤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어린 권나율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권예준은 달랐다. 평소와 달리 냉랭한 정채윤의 태도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권예준의 시선이 워낙 노골적인 탓에 정채윤도 계속 모른 척하기는 어려웠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고 물으려 그를 바라본 순간, 때마침 권예준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그리고 정채윤은 화면에 뜬 이름을 그대로 보게 되었다.‘내 사랑?’정채윤은 순간 숨이 턱 막혀왔고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이내 속눈썹이 두어 번 가늘게 떨렸다.권예준은 더 이상 정채윤을 바라보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전화를 받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확연히 부드러워져 있었다.“여보세요.”닫힌 유리문 너머로 안하린의 나긋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오빠, 내일 놀러 갈 때 데리러 올 거야?”“그렇게 할게.”안하린이 나긋하게 웃었다.정채윤은 순간 젓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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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정채윤은 의아했지만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그럴 리가 없지.’정채윤은 권나율을 데리고 욕실로 향했다.잠시 후, 권나율을 씻겨 준 뒤 말했다.“엄마도 씻고 올 테니까 졸리면 먼저 자.”권나율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엄마, 오늘은 아빠랑 같이 안 자요?”정채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오늘은 나율이랑 같이 자고 싶어.”“아... 네.”권나율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방으로 나가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안하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정채윤이 씻고 나오면 더는 메시지를 주고받기 어려울 것 같아 마음이 급했다.[하린 이모, 잘 자요. 내일 봐요!]안하린에게서도 곧바로 답장이 왔다.[잘 자, 나율아. 내일 보자.]권나율은 기분 좋게 웃으며 안하린과 몇 마디 더 메시지를 주고받았다.그러다 정채윤이 욕실에서 나오자 황급히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엄마, 다 씻었어요?”정채윤은 권나율을 한번 바라본 뒤 옆에 내려놓은 휴대전화로 시선을 옮겼다.무얼 하고 있었는지는 뻔했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척하지 않고 권나율의 곁에 누웠다.“응. 시간도 늦었으니까 이제 자자.”“네. 엄마, 잘 자요.”“잘 자.”담담하게 대답한 정채윤은 불을 끄려다 협탁 위의 시계를 발견했다.어느새 시곗바늘은 밤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권예준과 냉전을 시작한 뒤 정채윤이 이 집에서 밤을 보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그런데 시간이 이렇게 늦도록 권예준은 정채윤이 안방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아무 말이 없었다. 어디서 잘 건지 묻기는커녕 찾아오지도 않았다.‘정말 내가 안방에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는 모양이네. 아니면 아예 나율이 방에서 자기를 바라는 건가.’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었다. 결혼한 뒤 지금까지 몇 년을 거의 이런 식으로 살아왔으니까.이제는 이혼까지 앞두고 있으니 새삼 마음 쓸 것도 없었다.정채윤은 불을 끄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 채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출근할 필요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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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장미정은 차마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창고에 가져다 두었다.‘이걸 내가 함부로 버릴 수는 없지. 대표님 돌아오시면 말씀드리고 처리해야겠어...’...이든 별장을 나온 정채윤은 한동안 목적지도 정하지 못한 채 차를 몰고 시내를 돌아다녔다.마음 같아서는 곧장 병원으로 가 부모님 곁에 있고 싶었다.하지만 서은영과 정태환은 전부터 주말만큼은 아이와 함께 보내라고 신신당부했었다.지금 병원으로 찾아가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할 터였다.운전대를 잡고 한참 고민하던 정채윤은 결국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버지에게 드릴 생신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였다.젊은 시절 서예를 가르쳤던 정태환은 문방사우를 무척 좋아했다.하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 제대로 된 문방사우 한 벌을 사 본 적은 없었다.늘 돈을 아꼈다가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면 권나율에게 용돈으로 쥐여 주곤 했다.그렇게 손녀를 살뜰히 챙겼건만 정작 정태환에게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제법 자란 권나율은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조차 싫어하고 있었다.정채윤은 가슴이 답답해져 길게 숨을 내쉰 뒤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주변을 둘러보니 물건을 고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누군가와 함께였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도 있었고, 연인끼리 온 사람도, 친구와 함께 온 사람도 있었다.그 사이에 홀로 서 있으니 유독 자신만 혼자인 것처럼 느껴졌다.그때 가까운 곳에서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이 붓 너무 예뻐요. 외할아버지도 분명 좋아하실 것 같아요!”“그래? 이걸로 하자.”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가격을 확인하고는 만류했다.“이건 너무 비싸. 다른 걸로 고르자.”그러자 남편은 아내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웃었다.“괜찮아. 장인어른께 드릴 선물이니 가격은 따지지 말자.”남자는 아이와 아내의 손을 잡고 계산대로 향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채윤은 문득 눈시울이 시큰해졌다.권예준에게 미련이 남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에 대한 마음은 접은 지 오래였다.그저 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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