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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화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의사는 몇 번이나 엄준후를 힐끗거렸다.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여자친구가 이렇게 다칠 때까지 뭐 하셨어요?”정채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선생님,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그런데 정채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준후가 낮게 말했다.“맞는 말씀이세요. 제가 더 신경 쓰고 지켜줘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요.”엄준후는 정채윤의 팔뚝 여기저기에 난 상처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정채윤은 순간 멍하니 엄준후를 쳐다봤다.하지만 굳게 찌푸린 미간을 보고는 이내 나름대로 이해했다.‘굳이 해명하기 귀찮아서 그냥 저렇게 말한 거겠지.’정채윤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시선을 거뒀다.치료를 마친 의사는 처방전을 내주며 당부했다.“며칠 동안은 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조심하시고, 약도 잘 바르세요. 흉터가 남으면 속상하잖아요.”정채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처방전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네, 알겠습니다.”그런데 엄준후가 한 발 먼저 처방전을 가져갔다.정채윤이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봤다.“아니, 내가...”엄준후는 짤막하게 말했다.“내가 더 빨라.”정채윤은 잠시 엄준후를 바라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아마 더 시간을 지체하기 싫은 모양이었다.“알겠어. 그럼 부탁할게.”엄준후는 별다른 대답 없이 밖에서 기다리라고만 한 뒤 진료실을 나갔다.정채윤도 뒤따라 나와 복도 의자에 앉았다.공교롭게도 그 자리에서는 통창 너머로 병원 앞 약국이 훤히 내다보였다.늦은 시간이었지만 약국에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정채윤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엄준후를 한동안 바라봤다.사람이 많아 제법 기다려야 할 것 같았지만 엄준후에게서는 조금도 조급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9년 전에 헤어진 엄준후조차 이렇게 자신을 챙겨 주고 있었다.그런데 정작 5년을 함께한 남편은 달랐다.지난해 왼쪽 유방에서 3.5밀리미터 크기의 결절이 발견됐을 때도 그랬다.검사 결과를 처음 들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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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왜 그래?”엄준후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정채윤은 뒤늦게 자신이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민망해진 정채윤은 황급히 손을 놓고 등 뒤로 감춘 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여기 마침 약도 있으니까 내가 발라 줄게. 괜찮다고 내버려뒀다가 상처 덧나면 어떡해.”오늘 하루 엄준후에게 받은 도움이 한둘이 아녔다.‘이렇게 다친 걸 보고도 모른 척하면 너무 염치없잖아.’무엇보다 더는 엄준후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다.엄준후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정채윤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읽히지 않는 얼굴이었다.정채윤은 그런 시선이 괜히 신경 쓰였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한참 뒤에야 엄준후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네 그 서툰 손으로 약은 제대로 바를 줄 알아? 멀쩡한 상처 더 덧나게 하는 거 아니야?”말은 짓궂었지만 엄준후는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정채윤이 발끈했다.“뭐가 서툴러? 알지도 못하면서!”예전의 정채윤이라면 서툴렀을지도 몰랐다.부모님은 정채윤을 귀하게 키웠고, 엄준후 역시 늘 정채윤을 살뜰히 챙겼다.덕분에 정채윤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돌봐야 할 일은 거의 없었다.하지만 결혼하고 권나율을 낳은 뒤로는 달라졌다.아이가 넘어져 무릎이라도 까질까, 어디에 부딪혀 상처라도 입을까 늘 신경을 써야 했다.집에는 자연스럽게 소독약과 연고, 밴드 같은 상비약이 갖춰졌고, 간단한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는 일도 어느새 익숙해졌다.엄준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미간이 희미하게 좁혀졌지만 정채윤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약 봉투에서 소독약과 면봉을 꺼냈다.“앉아 봐. 팔 들고. 내가 소독해 줄게. 요즘처럼 더울 때는 상처를 그냥 두면 금방 덧나.”엄준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정채윤이 다시 한번 앉으라고 재촉하고 나서야 의자에 앉아 팔을 내밀었다.정채윤은 의아한 눈으로 엄준후를 한번 바라본 뒤 가까이 다가갔다.막상 거리가 가까워지자 조금 어색했다.정채윤은 애써 덤덤한 척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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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권예준은 의외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먼저 엄준후에게 인사를 건넸다.“엄 소령님, 오랜만입니다.”엄준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예준을 잠시 바라보던 엄준후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권 대표님이셨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정채윤은 괜히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닌 듯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권예준이 옅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채윤이를 경찰서에서 데리고 나와 병원까지 데려와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엄준후가 낮게 웃었다. 말투에는 은근한 비꼼이 묻어났다.“권 대표님께서 저한테 감사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엄준후는 모르는 척 정채윤에게 한번 시선을 줬다가 다시 권예준을 바라봤다.“그런데 채윤이와 권 대표님은 무슨 사이이신데요?”잠시 뜸을 들인 엄준후가 능청스럽게 덧붙였다.“설마 채윤이가 권 대표님 아내라도 됩니까?”그러고는 마치 정말 몰랐다는 듯 말을 이었다.“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권 대표님께서는 지난 몇 년 동안 공식 석상에 사모님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으셨던 것 같은데요.”엄준후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저는 진작 이혼하신 줄 알았습니다.”정채윤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고개를 돌려 엄준후를 노려봤다.‘내가 권예준이랑 무슨 사이인지 뻔히 알면서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야?’일부러 권예준의 심기를 건드리려는 게 분명했다.권예준은 정채윤에게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그 상대가 엄준후라는 사실은 몰랐다.그러니 엄준후가 아무리 저런 식으로 빈정거려도 권예준으로서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자신이 남편이라고 밝히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아니나 다를까, 권예준은 별다른 동요 없이 대답했다.“엄 소령님께서 제대로 보셨네요. 채윤이는 제 아내가 맞습니다.”권예준은 잠시 엄준후를 바라보다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저희가 결혼할 때 엄씨 가문에도 청첩장을 보냈던 걸로 기억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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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정채윤은 순간 멈칫했다.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곧 권예준과 안하린 사이에 있었던 온갖 일들이 떠오르자 그런 마음도 금세 사라졌다.바람을 피우며 다른 여자와 버젓이 연인 행세를 하고 다니는 사람은 권예준이었다.정채윤은 그저 자신의 옛 연인이 엄준후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잘못이라고 눈치를 봐야 한단 말인가.’오히려 떳떳하지 못해야 할 사람은 권예준이었다.정채윤은 입술을 앙다문 채 몸을 숙여 의자 위에 놓아둔 약 봉투를 집어 들었다. 잠시 생각하다 먼저 침묵을 깼다.“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내가 병원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고?”‘분명 안하린과 함께 있었을 텐데...’정채윤이 경찰서에 있다는 연락까지 무시해 놓고 갑자기 왜 병원까지 찾아온 건지 알 수 없었다.권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정채윤이 걸치고 있는 검은색 아웃도어 재킷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권예준에게 정채윤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러나 어떻게 찾아왔는지 설명하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입원 수속 해 놨어. 오늘은 여기서 자.”“뭐?”정채윤은 의아한 얼굴로 권예준을 바라봤다.갑자기 자신을 챙기는 권예준의 태도가 낯설었다.예전 같았으면 기뻐서 권예준의 품에 안겨 고맙다고 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정작 필요할 때마다 외면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와 뒤늦게 보이는 관심이 반가울 리 없었다.“됐어. 집에 가서 약 바르면 돼.”권예준은 말없이 정채윤을 바라봤다.정채윤이 다시 말했다.“정말 괜찮아. 내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몇 초간 침묵하던 권예준이 입을 열었다.“그래도 입원해. 집에 갔다가 다시 병원 오는 것도 번거롭잖아. 오늘 하루 자고 내일 아침에 처치 받은 다음, 그래도 싫으면 그때 퇴원해.”정채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권예준이 왜 이렇게까지 고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지난해 왼쪽 유방에서 결절이 발견됐을 때도 이 정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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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그 뒤로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정채윤은 천천히 유리컵을 내려놓았다.이제야 앞뒤가 맞았다.권예준은 정채윤이 걱정돼서 병원까지 찾아온 게 아니었다.정채윤이 경찰서에 간 일로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지, 그 여파가 수석 디자이너인 안하린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을지 직접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정채윤은 마른침을 삼키다 문득 헛웃음을 흘렸다.‘그래. 권예준이 나를 걱정할 리가 없지. 정말 나를 걱정했다면 결혼한 뒤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지도, 이토록 오랫동안 아내인 나를 외면하지도 않았을 테니까.’그래도 이제는 괜찮았다.더는 권예준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었다.“정채윤.”통화를 마친 권예준이 정채윤을 불렀다.이제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정채윤은 다시 리조트로 돌아가 안하린과 시간을 보낼 건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갈 건지는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정채윤은 권예준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쳤다.“이제 가. 나갈 때 문 닫아 주고.”권예준은 등을 돌린 정채윤을 잠시 바라봤다.그러다 휴대전화 화면에 안하린의 메시지가 뜨자 이내 시선을 내렸다.“필요한 거 있으면 간호사 불러.”담담하게 한마디를 남긴 권예준은 휴대전화로 답장을 보내며 병실을 나갔다.잠시 후 문이 닫혔다.정채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커튼을 마저 쳤다.문득 조금 전 권예준이 남긴 말이 떠올랐다.‘필요한 게 있으면 간호사를 부르라니...’끝까지 곁에 있어 줄 생각은 없다는 뜻처럼 들렸다.그야말로 정채윤이 알던 권예준다웠다.안하린에게는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자신에게는 늘 무심한 사람.이제는 그 사실이 새삼스럽지 않았다.정채윤은 검은색 아웃도어 재킷을 벗고 깨끗한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뒤 세면실에서 간단히 씻었다.씻고 나오자 한결 개운해졌다.침대에 편안하게 누운 정채윤은 더 이상 골치 아픈 생각은 하지 않고 잠이나 자기로 했다.그때 벗어 둔 옷 주머니에서 휴대전화 알림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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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뒤 10분이 지나도록 엄준후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정채윤은 굳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엄준후와의 인연은 이미 9년 전에 끝났고, 최근 몇 번이나 마주친 것도 그저 우연이 겹쳤을 뿐이라고 생각했다.앞으로 엄준후는 다시 부대로 돌아갈 테고 정채윤에게도 살아가야 할 일상이 있었다.‘이렇게 계속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다음 날.정채윤의 예상대로 권예준은 병원에 오지 않았다.심지어 전화 한 통도 없었다.그러나 정채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안하린이 맡은 프로젝트가 아니었다면 어제도 굳이 병원까지 찾아오지 않았겠지.’얼마 뒤 간호사가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갈아 주기 위해 병실에 들어왔다.침대 위에 혼자 앉아 있는 정채윤을 본 간호사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환자분, 보호자분은 안 오셨어요?”정채윤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저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사실 지난 몇 년 동안 늘 그래 왔다.혼자 권나율을 돌봤고, 아파도 혼자 병원에 다녔다.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아, 그러세요... 아침은 드셨어요?”간호사의 질문에 정채윤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아침은 먹지 않았다. 정확히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하지만 굳이 그런 사정까지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정채윤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아직 배가 안 고파서요. 이따 내려가서 먹으려고요.”“네. 그러면 먼저 상처부터 볼게요.”“네, 부탁드릴게요.”간호사는 익숙한 손길로 상처를 소독하고 새로 약을 발라 주었다. 처치를 마친 뒤에는 카트를 밀고 다음 병실로 향했다.문이 닫히자, 정채윤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빈속이라 그런지 속이 쓰렸다. 배를 가만히 문지르던 정채윤은 뭐라도 조금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때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휴대전화가 울렸다.권나율이었다.정채윤은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왜, 나율아?”“엄마, 진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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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잠깐만!”그때 수화기 너머로 갑자기 박여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채윤이 잠시 멈칫했다.박여정은 권나율에게서 휴대전화를 받아 들더니 못마땅한 목소리로 나무랐다.“나율아,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권나율은 입술을 삐죽이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의자에서 내려와 냅다 달아나며 말했다.“증조할머니, 저 다 먹었어요! 경호원 삼촌한테 학교 데려다 달라고 할게요!”권나율은 기분이 상한 나머지 정채윤과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얘가 정말!”박여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수화기 너머로 그 말을 들은 정채윤이 말했다.“할머니, 나율이 부르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할머니, 본가에 계셨던 것 아니에요? 갑자기 우리 집에는 어쩐 일이세요?”박여정은 멀어지는 권나율에게 몇 마디 더 당부하고 나서야 다시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어젯밤에 왔어. 너희 식구 얼굴이나 볼까 해서 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들어오더라고. 예준이한테 전화해 보고서야 네가 다쳐서 입원한 걸 알았지.”정채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박여정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채윤아, 할머니한테 솔직하게 말해 봐. 혹시 예준이가 너 괴롭힌 거 아니지? 그 자식이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으면 말만 해. 내가 다리를 분질러 놓을 테니까!”아무래도 박여정은 권예준이 정채윤에게 손찌검이라도 한 게 아닌지 의심하는 모양이었다.정채윤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할머니, 괜한 걱정하지 마세요.”“그런 게 아니라면 다행이고. 그래도 그놈이 양심은 있는지 어젯밤에는 너랑 같이 있어 주겠다고 하더라.”그 말을 들은 정채윤이 잠시 멈칫했다.“나율이 아빠, 어젯밤에 집에 안 들어갔어요?”“안 들어왔지. 병원에서 너랑 같이 있겠다고 했는데?”정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권예준은 어젯밤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박여정에게는 자신을 간호하느라 병원에 남겠다고 해 놓고, 정작 병원을 떠난 뒤에는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어디에서 밤을 보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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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정채윤이 병원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SUV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와 빈자리에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고 엄준후가 내렸다. 한 손에는 보온 도시락을 든 채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조금 긁힌 것뿐이지 크게 다친 것도 아니라니까요. 채윤이도 아프다는 소리 한마디 안 하는데 할아버지는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수화기 너머에서 엄석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엄준후! 네가 예전에 계원시에 있을 때 정씨 가문에서 널 얼마나 애지중지 보살펴 줬는데! 채윤이가 다쳐서 입원까지 했다는데 네가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해? 이놈아, 양심을 어디다 팔아먹었어?”엄석현은 화가 풀리지 않는지 계속해서 몰아붙였다.“내가 어젯밤에 다른 사람을 통해 채윤이가 사건에 휘말려 경찰서까지 갔다는 얘기를 안 들었으면, 계속 나한테 숨길 생각이었지?”엄준후는 팔꿈치로 차 문을 밀어 닫았다.“어제 경찰서까지 가서 진술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고 병원에도 데려다줬어요. 됐어요, 저도 할 일 많아요. 채윤이까지 계속 챙길 여유 없으니까 그렇게 걱정되시면 사람이라도 보내세요.”“너 이 자식...”엄준후는 더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그러고는 보온 도시락을 든 채 병동으로 향했다.병실 앞에 도착한 엄준후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문 앞에서 한동안 서 있던 그는 이내 손을 들어 가볍게 노크한 뒤 문손잡이를 눌렀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병실은 텅 비어 있었다.엄준후의 표정이 굳었다.마침 복도를 지나가는 간호사가 보이자 곧바로 불러 세웠다.“저기요. 혹시 이 병실에 있던 환자분 어디 가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간호사는 병실 번호를 확인하고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대답했다.“아, 그분은 퇴원 수속 마치고 가셨어요.”“퇴원했다고요?”엄준후가 미간을 찌푸렸다.정채윤은 퇴원한다는 말을 따로 하지 않았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정채윤에게서 온 거라곤 엄준후가 돌려보냈던 돈과 짤막한 감사 인사가 전부였다.그 뒤로는 문자 한 통 없었다.“네. 조금 전에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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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안하린은 정채윤을 발견하지 못한 채 손을 들어 권예준의 넥타이를 가지런히 정리해 주었다.“이 옷 원단 괜찮네. 다음에 한 벌 더 맞춰서 집에 갖다 놓을게.”“그렇게 해 주면 나야 좋지.”권예준의 대답에 안하린이 웃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정채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두 사람... 같이 살고 있었던 건가?’어쩌면 최근의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동안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함께 지내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그 생각이 미치자, 가슴 한구석이 턱 막히는 듯했다.지난 몇 년 동안 정채윤은 집안일과 육아에 매달려 살았다.권나율을 돌보고 집을 지키며 어떻게든 결혼 생활을 이어 가려고 애썼다.그런데 그 시간 동안 권예준은 밖에서 안하린과 자신만의 생활을 꾸려 왔던 모양이었다.‘호텔에서 몇 번 만난 정도가 아니었어. 두 사람한테는 따로 함께 지내는 집까지 있었던 거야.’정채윤은 손에 든 가방끈을 세게 움켜쥐었다.잘못된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새삼 아픈 건 아니었다.다만 허탈했다.자신이 그토록 지키려고 애썼던 결혼이 애초에 혼자만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권예준은 정채윤이 싫어졌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정채윤은 마음이 떠난 사람을 붙잡고 어떻게든 매달릴 사람이 아니었다.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면 얼마든지 놓아줄 수 있었다.그런데 권예준은 그러지 않았다.아내와 딸이 있는 집을 그대로 둔 채, 밖에서는 안하린과 또 다른 삶을 이어 왔다.그 사실이 사랑이 식었다는 것보다 훨씬 비참했다.정채윤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한동안 들끓던 감정을 가라앉힌 뒤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봤다.그제야 안하린도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정채윤을 발견한 순간 얼굴에 번져 있던 웃음이 살짝 옅어졌다.사실 안하린은 어젯밤 권예준이 정채윤을 찾아간 일이 못마땅했다.두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얽히는 것 자체가 싫었다.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건 권예준이 정채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어젯밤에도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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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정채윤은 안하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오전 내내 디자인 시안 작업에 몰두했다.점심시간이 되자 옆자리 동료인 문도연이 함께 식사하자고 권했지만 정채윤은 정중히 사양했다.“저는 점심시간에 볼일이 있어서 집에 좀 다녀오려고요.”“아, 그러세요? 알겠습니다.”“네.”문도연이 먼저 자리를 뜨자 정채윤도 책상을 간단히 정리하고 가방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서은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엄마, 나 점심에 일이 좀 있어서 병원에는 못 갈 것 같아요. 음식 몇 가지 주문해 놨으니까 조금 있으면 배달 갈 거예요. 아빠랑 같이 드세요.][그리고 아빠한테 생일날 뭐 드시고 싶은지도 한번 물어봐 줘요. 식당 미리 예약해 둘게요.]서은영에게서는 곧바로 답장이 왔다.[그래. 우리는 별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시간 나면 집에 가서 나율이나 잘 챙겨.][생일날 어느 식당으로 갈지는... 아빠는 어디든 괜찮다고 하실 거야. 나율이 입맛에 맞춰서 정하면 돼.]정채윤은 한동안 말없이 화면을 바라봤다.‘아빠 생신인데도 부모님은 여전히 나율이부터 생각하시네...’정작 권나율은 그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마음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해졌다.정채윤은 잠시 망설이다 짧게 답장을 보냈다.[알았어요.]...정채윤이 차를 몰고 이든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낮 열두 시 반이었다.권나율은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권예준도 집에 없는 상태였다. 별장에는 박여정만 있었다.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박여정이 직접 밖으로 마중을 나왔다.“왔어?”정채윤은 차에서 내려 박여정에게 다가갔다.“네. 밖에 더운데 얼른 들어가세요.”“뭘, 이 정도는 더운 것도 아니야.”박여정은 웃으며 정채윤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차 뒤쪽을 살피며 물었다.“예준이는? 같이 안 왔어?”정채윤은 고개를 저었다.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박여정이 당장 화부터 낼 게 뻔했다.“안성 그룹에서 남진 그룹까지 거리가 꽤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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