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다정한 지옥 / Chapter 21 - Chapter 30

All Chapters of 다정한 지옥: Chapter 21 - Chapter 30

76 Chapters

21화

밤공기가 제법 시원했다. 이재는 잠깐 서서 숨을 들이마셨다.많이 마신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 빨리 마신 탓인지 머리는 멀쩡한데 기분만 평소보다 두 박자쯤 앞서 있었다. 괜히 걷고 싶고, 별것도 아닌 게 조금 웃겼다.아. 나 살짝 취했네.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사실이었다. 이재는 택시 앱을 켜 배차를 요청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록 자신을 받아주는 택시는 없었다. 근방 회사들이 죄다 오늘 회식이라도 한 건지 도로 위에는 빈 차보다 예약 표시등을 켠 택시가 더 많았다.다시 화면을 봤지만 여전히 배차 중이었다. 이재는 눈앞을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살짝 노려봤다. 저건 또 누구를 그렇게 성실하게 데리러 가는지.“됐다.”괜히 심통이 난 이재는 호출을 취소했다. 조금 걸어가면 편의점이 있었다.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먹고 다시 부를 생각으로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검은 차 한 대가 속도를 늦추며 앞을 지나갔다. 몇 미터쯤 간 차의 브레이크등이 켜졌다. 곧 차가 천천히 후진해 이재 앞에 멈췄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갔다.“윤이재 씨.”이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어?”운전석의 얼굴을 확인하자 저도 모르게 몸이 창문 쪽으로 조금 기울었다.“강태혁 씨……인가?”태혁의 시선이 이재에게 멈췄다. 평소에는 자신을 보는 순간부터 어딘가 단단해지던 여자였다. 말투도, 표정도, 눈빛도 늘 한 겹씩 걸쳐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게 조금 느슨했다.발그레해진 뺨이며 반 박자 느린 눈까지 낯설었다. 태혁은 잠깐 이재를 바라보다 물었다.“술 마셨어요?”“어떻게 알았어요?”“평소보다 기분 좋아 보이는데.”“저 원래도 기분 좋은 사람인데요.”“그런가.”“네.”태혁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오늘 처음 알았네.”이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방금 저 놀린 거예요?”“윤이재 씨가 취해서 그렇게 받아들인 거예요.”“저 안 취했어요.”태혁이 앞을 보며 짧게 대꾸했다.“아, 안 취했구나.”분명 웃지는 않았다. 그런데 더 기분 나빴다. 이재가 혼잣말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

22화

잠시 뒤 이재가 컵홀더의 빈 커피 컵을 발견했다.“근데 야근했으면 저녁 안 먹었겠네요?”“아직.”“배 안고파요?”“네.”이재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아까 태워준 비용 달랬죠.”“그랬죠.”“그럼 내가 밥 살게요.”태혁이 옆을 봤다.“뭐 사줄 건데요.”“우리 집 앞에 맛있는 데 있어요.”***차가 멈춘 곳은 이재의 오피스텔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설렁탕집이었다. 간판을 올려다보던 태혁이 말했다.“조금 아저씨 취향이네요.”이재가 바로 돌아봤다.“형사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왜요.”“아까 차 봤잖아요.”태혁이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이재가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저 미국에 있을 때도 설렁탕 자주 먹었어요.”“의외네요.”“왜요. 저 한식파예요.”자리에 앉은 이재가 메뉴판을 내려놓았다.“물론 거기서는 여기 세 배 가격이었지만.”주문한 설렁탕이 나오고 나서야 태혁이 물었다.“많이 그리웠겠네요.”이재가 숟가락을 들다 멈췄다.“설렁탕이요?”“한국.”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이재는 잠깐 국물을 바라봤다.“……그립기도 했고.”김이 천천히 올라왔다.“오기 싫기도 했고요.”태혁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게 이재에게는 조금 고마웠다.“지금은요?”이재가 생각하다 국물을 한 숟갈 먹었다.“아직 모르겠어요.”그리고 조금 웃었다.“그래도 설렁탕은 여기가 낫네요.”태혁의 입가가 살짝 풀렸다.“그럼 잘 왔네요.”“그러네요.”별것 아닌 대화였다. 그런데 이재는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두 사람은 천천히 식사를 이어갔다. 이재가 먼저 물었다.“주말에는 뭐 해요?”“갑자기?”“그냥요.”“일하거나, 운동하거나.”“그게 끝?”“대충.”“취미는요?”“운동.”“그건 방금 말했잖아요."태혁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이재를 봤다.“뭘 그렇게 캐묻습니까.”“대화하잖아요.”“나한테 관심 있어요?”이재가 어이없는 얼굴로 웃었다.“뭐래.”“아니면 말고.”“사람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

23화

다음 날 아침. 태혁은 울리는 휴대폰에 눈을 떴다. 잠든 지 세 시간이 조금 넘었다. 박준호였다.태혁은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말해.”―팀장님. 성림동입니다.남아 있던 잠이 빠르게 달아났다. 태혁이 상체를 일으켰다.“어디.”준호가 주소를 불렀다.―주택에서 신고 들어왔습니다.“침입?”전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그 짧은 침묵이면 충분했다.―이번에는 사람이 죽었습니다.태혁은 침대에서 내려왔다.“현장 건드리지 마.”옷장을 열어 재킷을 꺼냈다.“지금 갈게.”통화를 끊었다. 십 년 전에도 세 번째 집에서 사람이 죽었다. 이번에도. 세 번째였다.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 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 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 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

24화

카메라 위치를 미리 파악한 움직임이었다. 얼굴이 잡힐 각도에서는 고개를 숙였고, 걸음은 이상할 만큼 일정했다.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나온 인간의 뒷모습은 아니었다.“차량은?”수빈이 고개를 저었다.“아직입니다. 골목으로는 걸어 들어왔어요.”“들어오기 전 동선 끝까지 따.”“네.”태혁이 태블릿을 돌려주며 말했다.“피해자 세 명 공통점도 처음부터 다시 봐. 직장, 금융, 병원, 학교, 가족관계까지.”“알겠습니다.”“사소한 것도 빼지 말고.”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혁은 장갑을 끼며 식탁 쪽으로 걸었다. 범인은 세 시간 가까이 이 집에 있었다. 사람 하나를 죽이는 데 세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그 전에 무언가를 했다는 뜻이었다. 집을 봤거나. 사람을 봤거나. 아니면...확인했거나.“강 팀장님.”감식반 직원이 불렀다.“이것 좀 보시죠.”식탁 한쪽에 작은 증거물 표지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카드 한 장이 있었다. 태혁은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내려다봤다. 오래된 체크카드였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디자인에 잔흠집이 많았고, 유효기간도 한참 전에 끝나 있었다.“피해자 겁니까?”“아닌 것 같습니다. 지갑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감식반 직원이 식탁을 가리켰다.“여기 놓여 있었습니다.”놓여 있었다. 태혁의 시선이 식탁 위를 훑었다. 물컵 하나. 휴대폰.그리고 그 사이에 카드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떨어진 물건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얌전한 모양이었다. 준호가 옆으로 다가왔다.“명의부터 확인해야겠네요.”태혁은 카드 아래쪽을 보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영문으로 새겨진 이름.JINWOO SEO.서진우.순간 주변 소리가 한 겹 멀어졌다. 십 년 전 수도 없이 읽었던 이름이었다.수사 기록의 첫 장. 수배 전단. 통신 내역. 그리고 끝내 종결하지 못한 추적 보고서까지.서진우. 스물넷.성림동 연쇄살인사건 피의자.준호도 곧 이름을 확인했다.“……미친.”옆에 있던 수빈의 표정도 굳었다.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십 년 전 대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

25화

오전 아홉 시가 가까워질 무렵 카드 조회 결과가 나왔다.“본인 명의 맞습니다.”수빈이 출력물을 내밀었다.“서진우 명의로 실제 발급됐던 체크카드예요. 유효기간은 사건 발생 전에 끝났고, 이후 재발급 기록은 없습니다.”“분실 신고.”“없고요.”“계좌는?”“사건 이후 장기 미사용 상태였다가 정리됐습니다.”태혁이 서류를 넘겼다.“피해자하고 접점은?”“현재까지 없습니다.”준호가 책상 옆에 서서 출력물을 내려다봤다.“그럼 카드 자체는 진짜네요.”“어.”“누가 가지고 있었든.”태혁이 고개를 들었다.“거기까지만.”준호가 입을 다물었다.“지금 확인된 건 서진우 명의로 실제 발급됐던 카드라는 것까지야. 그 이상 가정하지 마.”“네.”“십 년 전 사고 자료 다시 꺼내.”준호가 눈을 들었다.“차량 인양 기록부터 수색 범위, 당시 목격자, 병원 내원 기록까지 전부.”“생존 가능성 다시 보시게요?”태혁이 서류를 덮었다.“봐야지.”준호는 더 묻지 않았다. 태혁이 경계하는 건 가능성 자체보다 확인하지 않은 채 지워버린 가능성이었다. 십 년 전에는 결국 시신을 찾지 못했다. 그 사실이 이제 와서 이렇게 목을 물었다.“팀장님.”수빈이 조심스럽게 불렀다.“윤이재 씨한테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태혁의 손이 멈췄다.알려야 했다. 이번에는 사람이 죽었다. 현장에서는 서진우의 물건까지 나왔다.이재가 몰라도 되는 정보라고 판단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그런데 전화기를 집어 드는 데 평소보다 한 박자 오래 걸렸다.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다음에는 비싼 걸 얻어먹겠다는 얘기를 했다. 주말에 뭐 하느냐는 질문도 받았다. 평범한 금요일 밤이었다. 그런데 다시 사건이었다. 태혁은 휴대폰을 들었다.어쩌겠나.이게 자신과 윤이재 사이에 처음부터 놓여 있던 것이었다.***토요일 오전 열 시. 이재는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목이 마르다는 거였다.두 번째는...어제 술을 왜 그렇게 빨리 마셨지.그리고 세 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

26화

초인종이 울린 건 삼십 분쯤 뒤였다. 이재는 인터폰 화면부터 확인했다. 검은 셔츠 위에 얇은 재킷을 걸친 태혁이 서 있었다. 혼자였다.문을 열어주고도 이재는 현관 앞에서 잠깐 멈췄다.검침원. 현관문. 낯선 남자.하필 오늘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좋지 않은 연상이었다.곧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들렸다. 문이 열리고 태혁이 걸어왔다.그를 보는 순간 이재의 어깨에서 아주 조금 힘이 빠졌다. 그 사실은 모른 척하기로 했다.“들어와요.”태혁이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다가 집 안을 한번 훑었다. 이재가 바로 눈치챘다.“왜요.”“뭐가요.”“지금 집 봤잖아요.”“봤죠.”“형사라서?”태혁은 잠깐 현관 잠금장치를 바라봤다.“오늘은 좀.”이재는 그 말을 듣고 괜히 도어락 쪽을 한번 봤다.“커피 마실래요?”“괜찮아요.”“저는 마실 건데.”“그럼 주세요.”이재가 그를 한번 봤다.“아무거나요?”“네.”“취향 없어요?”“커피에까지 있어야 합니까?”역시 강태혁이었다. 사람 긴장시키는 것도 잘하고, 풀어주는 건 본인도 모르게 했다. 이재는 더 묻지 않고 주방으로 갔다. 잠시 뒤 두 사람은 거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태혁은 커피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얇은 서류봉투를 꺼냈다. 이재의 시선이 거기에 붙었다.“그게 보여줄 거예요?”“네.”태혁은 바로 건네지 않았다.“현장 사진이 몇 장 들어 있어요.”이재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시신 사진은 없습니다.”그제야 이재가 숨을 조금 내쉬었다.“보여줘요.”태혁은 잠깐 그녀를 봤다.“확실해요?”“제가 결정할게요.”익숙한 말이었다. 태혁의 시선이 아주 잠깐 멈췄다가 내려갔다.“그래요.”이번에는 막지 않았다. 봉투가 이재에게 넘어왔다.***첫 번째 사진은 거실이었다. 두 번째는 현관. 세 번째는 가족사진이 놓인 거실장. 이재의 손이 멈췄다.“또 가족사진을 봤어요?”“네.”“앞의 두 집처럼?”“네.”사진 속 거실은 낯설었다. 그런데 하는 짓은 낯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

27화

태혁은 부정하지 않았다.“정황상 생존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습니다.”“낮은 거랑 없는 거랑은 다르잖아요.”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왜 아무도 저한테 말 안 했어요?”태혁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당시 열여덟 살이던 이재에게 어디까지 전달됐는지 자신은 몰랐다. 담당 수사관은 따로 있었고, 보호자였던 윤정호를 통해 전달된 내용도 많았다.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재는 몰랐다. 십 년 동안.“그럼 살아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태혁은 곧바로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그게 제일 무서웠다.“가능성을 다시 확인하고 있어요.”“살아 있을 확률이 얼마나 돼요?”“지금은 말 못 합니다.”“모르는 거예요?”“네.”이재가 입을 다물었다. 사진 위에 박힌 이름이 아까와는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서진우. 죽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었다.어쩌면, 십 년 동안 살아 있던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문득 아주 오래된 목소리가 들렸다.쾅.문이 흔들렸다.쾅, 쾅.목재가 갈라지는 소리.열여덟의 이재는 드레스룸 안에서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울면 안 됐다.숨소리도 내면 안 됐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자가 있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 문을 걷어차던 소리가 멈췄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시 올게.이재가 숨을 들이켰다. 거실이 돌아왔다. 햇빛, 커피, 벽에 걸린 시계. 그리고 맞은편의 강태혁.“윤이재 씨.”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나 봐요.”낮은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들었다. 태혁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이재가 입술을 한번 눌렀다.“그 사람이.”목소리가 생각보다 멀쩡하게 나왔다.“그때 저한테 다시 온다고 했어요.”“알아요.”태혁은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진술서에도 있었다. 열여덟의 윤이재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했다. 다시 온다고 했어요. 그 사람이 다시 온다고 했어요. 그리고 강태혁은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했다. 안 옵니다. 우리가 잡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

28화

태혁은 정말 남았다. 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 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차량은?”태혁이 낮게 물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더 차가웠다. 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 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피해자 금융 기록은?”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 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 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 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지금 보니 꽤…….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뭘 그렇게 봐요.”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 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뭐가요?”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 시선이 정확하게 마주쳤다.“아니면 말고.”그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

29화

설거지를 거의 끝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응, 아빠.”―오늘 집으로 들어와라.인사도 없었다. 평소보다 단단한 목소리에 이재가 싱크대 물을 잠갔다.“왜요.”―왜긴 왜야.정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성림동에서 사람이 죽었어. 십 년 전 사건이랑 비슷하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네가 지금 혼자 있을 때야?“경찰에서도 연락 왔어요.”―알아. 그러니까 들어와.“저 괜찮아요.”―안 괜찮아.대답이 단호했다.―네가 괜찮다고 할 상황이 아니야. 당분간 혼자 있으면 안 되겠다. 사람 보낼 테니까 준비해.“아빠.”―이번에는 고집부리지 마.평소에는 이재의 뜻을 웬만하면 꺾지 않는 아버지였다. 그래서 저 말투가 더 낯설었다. 이재는 거실 쪽을 한번 봤다.“나 혼자 아니에요.”정호가 잠깐 말을 멈췄다.―그럼. 누구랑 있는데.“친구요.”말하고 나니 묘했다. 강태혁을 친구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누구.이재가 피식 웃었다.“있어요. 아빠가 내 친구를 다 알아?”―친구 나오는 시간에 맞춰 사람 보내마. 같이 내려와.이재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그게... 친구가 오늘 밤까지 같이 있기로 해서...”식탁 쪽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이재는 괜히 그쪽을 보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의 정호도 조용했다.―……남자냐?“아빠.”이재가 미간을 눌렀다.“나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어요.”―지금 사생활 따질 때냐.“그 친구가 같이 있기로 했고 경찰에서도 보안인력 붙여준다고 했어요.”정호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우리 쪽에서 사람은 붙일 거다.이쯤 되면 더 버텨봐야 아버지가 이길 게 뻔했다. 이재가 순순히 물러났다.“알겠어요.”―오늘은 혼자 있지 말고.“네.”―내일 다시 전화하마.통화를 끊었다. 이재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태혁이 보고 있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왜요.”“내가 친구입니까?”역시 들었나보다. 이재는 태연한 척 식탁으로 돌아왔다.“아빠한테 형사랑 집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

30화

대답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갔나.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 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 다행이다. 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어…….”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조심해요.”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 가까웠다.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 시선이 마주쳤다. 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다.눈. 코. 입술. 태혁의 시선도 이재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몇 초쯤 그렇게 있었을까. 태혁이 먼저 손을 뗐다.“덜 깼네.”그제야 이재도 한 발 물러났다.“……어디 있었어요?”“주방에.”“가버린 줄 알았어요.”태혁의 눈이 이재에게 잠시 머물렀다.“말도 없이 가는 나쁜 놈 아닙니다.”“…….”왜 저런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이재는 괜히 먼저 거실로 돌아섰다.***이재는 소파로 돌아가 떨어져 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나 덮어준 거예요?”“추워 보여서.”“내 방에 담요 있는데.”“집주인 허락도 없이 어떻게 방에 들어갑니까.”“깨워서 물어보지.”태혁이 이재를 한번 봤다.“그렇게 곤히 자는데 어떻게 깨웁니까.”이재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 다시 소파에 앉아 재킷을 무릎 위에 올렸다. 태혁의 시선이 잠깐 그쪽으로 향했다가 돌아갔다. 이재는 소파에 몸을 푹 묻었다.“낮잠이 이렇게 개운한 거였구나.”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태혁은 별말 없이 서류를 넘겼다.“저 이상한 잠버릇 같은 건 없었죠?”이번에는 태혁의 손이 멈췄다. 잠깐 생각하는 얼굴이었다.“있었는데.”이재의 눈이 커졌다.“뭔데요?”“말 안 할 겁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
PREV
1234568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