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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다정한 지옥: Chapter 31 - Chapter 40

76 Chapters

31화

엘리베이터 숫자가 하나씩 내려갔다. 태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피곤했다. 새벽부터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그런데 머릿속에 남은 건 사건 현장이 아니었다. 소파에서 잠든 윤이재였다.처음에는 자는 줄 몰랐다. 한동안 조용하길래 고개를 들었더니 휴대폰을 느슨하게 쥔 채 잠들어 있었다.몸을 소파 한쪽에 작게 웅크린 채였다. 가느다란 발목이 소파 끝에 반쯤 걸쳐 있었고, 긴 검은 머리카락이 쿠션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태혁은 자기도 모르게 한동안 시선을 두었다.평소의 이재는 눈부터 선명했다.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맑은 눈동자에 그대로 비쳤다. 화가 나면 서늘해졌고, 당황하면 금세 물기를 머금었다. 그래서 얼굴을 볼 때면 늘 눈이 먼저 들어왔다.잠든 지금은 그 눈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들이 보였다. 오후의 빛을 받은 피부는 희다 못해 옅은 빛이 비치는 듯했고,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아래로 가느다란 그림자가 졌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을 타고 내려와 붉은 입술 가까이에 걸려 있었다.그리고 오른쪽 눈 아래, 작은 점 하나. 하나하나 떼어놓고 볼 이유도 없는 것들이 이상할 만큼 눈에 들어왔다. 태혁은 소파 등받이에 걸어둔 재킷을 집었다.깨우지 않게 천천히 몸을 숙여 재킷을 덮었다. 가까워지자 이재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 잠에서 깬 줄 알고 태혁의 움직임이 멈췄지만, 이재는 다시 고른 숨을 내쉬었다.태혁은 잠깐 그대로 있었다. 십 년 전의 얼굴이 겹쳐질 법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러지 않았다.열여덟 살 때의 윤이재는 늘 젖은 눈을 하고 있었다.겁을 먹고도 울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유난히 크고 맑아 보이던 눈이었다. 그때는 그 눈이 자신을 따라오는 이유를 알았다. 무서우니까. 자신이 그나마 안전한 사람이었으니까.그런데 지금 떠오르는 얼굴은 달랐다. 잠에서 깨어 자신을 올려다보던 얼굴. 잠기운이 남아 물을 머금은 듯 느리게 깜빡이던 눈. 허리를 붙잡았을 때 한동안 피하지 않던 시선.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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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비싼 식당을 찾으면 되는 건데 왜 하필 데이트 맛집을 검색하고 있는지는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 경찰이었다.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 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 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 설마 저건가. 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답장은 금방 왔다.[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네네.]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 오늘 저녁 일곱 시. 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그건 안 돼.]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 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 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 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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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태혁은 사진을 다시 내려다봤다. 증거보다 먼저 결론을 내리는 건 가장 멍청한 짓이었다.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태혁은 무심코 화면을 확인했다.윤이재였다.[늦지 마요.]그 아래 식당 위치가 하나 첨부돼 있었다.태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 시 십 분. 준호가 보고 있던 서류 위로 태혁의 손이 올라왔다.“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네?”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태혁은 이미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일요일이잖아. 너도 좀 쉬어라.”준호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이상했다. 오늘 강태혁은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일요일에 사람 불러내 놓고 해가 지기도 전에 먼저 들어가라는 것도 그랬지만, 가만 보니 아침부터 묘하게 달랐다.셔츠는 평소보다 반듯했고, 머리도 평소처럼 대충 손으로 넘긴 모양새가 아니었다. 준호가 태혁을 위아래로 한번 훑었다. 그러다 코끝에 희미하게 걸리는 향에 눈을 가늘게 떴다.“팀장님.”“왜.”“향수 뿌리셨어요?”태혁의 미간이 좁아졌다.“아닌데.”“아니긴요.”준호가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형사를 속입니까?”“뭐 하는 거야.”“잠깐만 있어 봐요.”준호가 정말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태혁이 질색하며 한 발 물러났다.“너 미쳤냐?”“맞는데.”“뭐가 맞아.”“향수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정말 별생각 없이 뿌린 거였다. 평소 거의 손대지 않던 병이 세면대 위에 보여서. 한 번.딱 한 번 뿌렸다. 그게 뭐라고.“가십니까?”준호가 묘하게 웃는 얼굴로 물었다.“어.”태혁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빨리 들어가라.”“네.”더 대꾸하지 않고 태혁이 나갔다. 문이 닫혔다. 준호는 한동안 그쪽을 바라봤다.여섯 시 십오 분, 향수, 단정한 머리. 일요일이니까 쉬라는 강태혁.준호가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와.”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저 인간도 데이트라는 걸 하는구나.***옷장 문을 연 지 한참인데 이재는 아직 아무것도 고르지 못했다. 손은 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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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클로이가 피식 웃었다.“That's the point.”“그러니까 그거 입어.”“Why?”"왜?"“Girl, if you're waking me up at two in the morning to ask, you obviously want to try.”“야, 새벽 두 시에 나 깨워서 물어볼 정도면 너도 작정하고 싶은 거 아니야?”할말이 없었다. 클로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Hair down. My earrings.”“머리 풀고. 내가 준 귀걸이 하고.”“Anything else, Mom?”“또 뭐 없어, 엄마?”“Yeah. Admit it's a date.”“응. 데이트인 거 인정해.”“Good night.”“잘 자.”“Send me a picture!”“사진 보내!”이재는 통화를 끊었다. 잠깐 조용해진 방에서 휴대폰을 내려다봤다.진짜 데이트 아닌데...이재는 결국 2번 옷을 집었다.검은 원피스였다. 옷걸이에 걸려 있을 때는 조금 과해 보였는데 막상 입고 나니 생각보다 더 그랬다. 매끈한 검은 천이 가느다란 어깨에서 허리까지 군더더기 없이 내려오다가 잘록한 곳에서 한 번 부드럽게 모였다. 걸음을 옮기면 무릎 아래로 떨어진 치맛자락이 느리게 따라왔다.노출이 많은 옷도 아니었다. 오히려 목선도, 길이도 단정했다. 그런데 평소 입던 옷보다 몸의 선이 훨씬 또렷했다. 이재는 거울 속 자신을 보다가 괜히 허리께를 한 번 쓸어내렸다.분명 예뻤다. 그래서 문제였다.“……그냥 밥인데.”그렇다고 벗지는 않았다.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시작했다. 피부는 얇게 정리하고, 눈매는 원래 선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만 또렷하게 잡았다. 립을 하나 골라 발랐다가 너무 진한 것 같아 닦아냈고, 결국 평소보다 조금 혈색이 도는 색으로 다시 골랐다.거울 속 얼굴을 한참 보다가 스스로 어이가 없어졌다.립을 두 번이나 바꿨다. 윤이재가.남자랑 밥 한 끼 먹겠다고.“미쳤나 봐.”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귀걸이까지 했다. 클로이가 몇 년 전 생일에 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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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태혁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아니요.”한 박자 늦었다. 늘 먼저 보고, 먼저 판단하고, 먼저 움직이던 남자가. 아주 드물게.***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 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 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 메뉴판이 놓였다. 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여기 괜찮죠?”“네.”“메뉴는요?”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 이재가 눈을 들었다. 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아뇨.”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좋은데.”“근데 왜 안 봐요?”“보고 있었습니다.”“나를 보고 있었잖아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재가 웃었다.“뭐 먹고 싶은데요?”“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내가 사니까?”“그건 아니고.”“그럼?”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태혁은 물잔만 들었다. 뭐야. 아까부터.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 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강태혁 씨.”“네.”“향수 뿌렸어요?”“네.”대답이 너무 순순했다.“왜요?”태혁이 눈을 들었다.“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아니, 그런 건 아닌데.”“그럼 됐네요.”“그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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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와인은 생각보다 빨리 줄었다. 접시가 몇 번 바뀌는 동안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흘렀다.“영화 좋아한다고 했죠.”태혁이 물었다.“네. 혼자 보는 거 좋아해요.”“왜 혼자 봅니까.”“편하잖아요. 내가 보고 싶은 거 보고, 끝나면 바로 집에 가도 되고.”“뭘 주로 보는데요.”“로맨스.”“의외네요.”“왜요?”“그런 거 안 좋아할 것 같아서.”이재가 웃었다.“나도 좋아해요. 로맨스.”“왜요.”“음…….”이재는 잠깐 생각하다 와인잔을 기울였다.“인생에 로맨스가 없으니까?”태혁이 잔을 내려놓았다.“지금도?”이재가 멈췄다. 눈이 마주쳤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강태혁은 꼭 저랬다.별것 아닌 것처럼 말해놓고 사람만 곤란하게 만들었다.“……오늘은 좀 있네요.”태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다행이네.”이재는 잠깐 그를 봤다. 괜히 그 한마디만 유난히 가까이 들렸다.“강태혁 씨도 봐요?”“뭘요.”“로맨스 영화.”“봅니다.”“진짜?”“왜 그렇게 놀랍습니까.”“안 그렇게 생겼으니까.”“로맨스 영화 보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까.”“그건 아닌데…… 강태혁 씨는 안 어울리기는 해요.”태혁이 피식 웃었다.“편견 심하네요.”“어떤 거 좋아해요?”“결말 좋은 거.”“해피엔딩?”“네.”“오. 진짜 안 어울려.”“윤이재 씨는요?”“나도 해피엔딩.”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어울리네요.”“왜요?”태혁이 아주 잠깐 이재를 봤다.“그렇게 끝났으면 좋겠으니까.”무슨 뜻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그럼 영화 취향은 맞네.”“그러네요.”“하나는 찾았다.”“뭘요.”“같이 할 수 있는 거.”아, 나 취했나. 뭘 같이 해.이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와인을 마셨다. 태혁은 그런 이재를 잠깐 바라보더니 그냥 웃었다.그게 더 신경 쓰였다.***와인이 반쯤 비었을 무렵 이재가 물었다.“요리는 해요?”“네.”“잘해요?”“꽤.”“진짜?”태혁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왜 못 믿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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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식당을 나왔을 때는 열한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늦은 밤의 찬 기운이 맨살로 드러난 어깨를 훑고 지나가자 이재가 작게 몸을 웅크렸다.옆에서 걷던 태혁이 걸음을 늦췄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재킷을 벗었다.“괜찮은데.”묵직한 재킷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아직 남아 있는 체온과 함께 익숙한 향이 훅 끼쳐왔다.어제 자신을 덮고 있던 바로 그 냄새였다.이재는 저도 모르게 숨을 한번 더 들이켰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남의 옷 냄새를 이렇게 열심히 맡고 있을 일인가.괜히 깃을 여미며 중얼거렸다.“……고마워요.”“이제 좀 낫죠.”“네.”태혁은 그걸로 됐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이재는 재킷 깃을 쥔 채 그 옆으로 따라붙었다.술기운이 사라졌는데 오히려 식당에서 있었던 일들이 지나치게 또렷했다.이재는 걷다가 괜히 손가락을 한번 접었다 폈다. 아무것도 닿아 있지 않은 손바닥이 조금 전보다 허전했다.“택시 부를까요?”태혁이 휴대폰을 꺼냈다.“벌써요?”그의 손이 멈췄다. 이재도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벌써요?참 투명하기도 하지.태혁이 휴대폰에서 눈을 들어 이재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침묵이 괜히 민망했다.“더 있다 가고 싶어요?”“그런 뜻은 아니고.”태혁은 잠깐 이재를 바라봤다.“나는 괜찮습니다.”뭐가 괜찮다는 걸까.늦어도 괜찮다는 건지, 더 있어도 괜찮다는 건지. 아니면 자기도 아직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건지.이재는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길 건너편 건물 위로 멀티플렉스 간판이 환하게 떠 있었다.“영화 볼래요?”태혁의 시선이 간판으로 향했다. 잠시 바라보던 그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그러죠.”생각보다 대답이 빨랐다.이재가 슬쩍 그를 봤다.“좀 고민할 줄 알았는데.”태혁이 먼저 길 건너편으로 걸음을 옮겼다.“나도 아쉬워서.”이재의 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아쉽다고 했다.강태혁이.두어 걸음 앞서간 태혁이 뒤를 돌아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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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상영관 안에 불이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는 자연스러웠던 것들이 갑자기 너무 잘 보였다. 특히, 아직 맞잡고 있는 손이 그랬다.앞쪽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자 그제야 깍지가 느슨하게 풀렸다.이재는 괜히 남은 탄산수를 집어 들었다.탄산이 다 빠져 밍밍했다. “맛없어.”옆에서 태혁이 웃었다.“그걸 이제 마시니까 그렇죠.”그게 누구 때문인데...하지만 이재는 말하지 않았다. 오늘은 입 밖으로 내면 지는 말이 너무 많았다.***극장 밖으로 나오자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늦은 시간의 영화관은 한산했다. 대부분의 매장은 불이 꺼져 있었고, 마지막 상영을 마친 사람들이 띄엄띄엄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갔다.이재는 걸으면서 어깨에 걸친 재킷을 벗으려 했다.“이제 줄게요.”태혁이 옷깃을 도로 잡아주었다.“입고 있어요.”“안 추워요?”“안 추워요.”“나 때문에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그럼 책임져요.”이재의 손이 멈췄다.“허.”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정작 그런 말을 한 태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섰다.이재는 결국 재킷을 다시 여몄다.옷깃에서 향이 올라왔다.그게 싫지는 않았다.***밖으로 나오자 태혁이 택시를 호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차의 뒷좌석에 나란히 올라탔다.태혁이 기사에게 이재의 집 주소를 말했다. 꼭 자주 드나들던 사람처럼 너무 자연스러웠다.택시가 출발했다. 늦은 밤의 서울이 창밖으로 천천히 밀려났다. 말없이 흘러가던 차 안으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섞였다.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이재가 미국에서부터 좋아했던 익숙한 노래였다.당신도 스윽 훑고 가셔요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머물다 가셔요이재는 창밖을 보던 시선을 잠깐 멈췄다. 평소 같았으면 별생각 없이 흘려들었을 노랫말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차가 커브를 돌았다. 몸이 옆으로 기울며 어깨가 태혁의 팔에 가볍게 닿았다.이재는 창가에 기댄 채 바깥을 바라봤다. 검은 유리 위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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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문이 닫혔다.태혁은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손에는 조금 전까지 이재가 입고 있던 재킷이 들려 있었다.몇 초쯤 지났을까.태혁이 한 손으로 입가를 쓸었다.짧은 입맞춤이었다.조금만 더 닿아 있었다면 가볍게 입술만 맞대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었다.그래서 들어가라고 했다.태혁은 고개를 숙였다.입가에 짧은 웃음이 스쳤다.“……큰일 났네.”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기다리는 동안 재킷을 팔에 걸치려다 손이 멈췄다. 익숙한 향수 냄새 사이로 희미하게 다른 향이 섞여 있었다.윤이재에게서 나던 향이었다.몇 시간 동안 입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태혁은 잠깐 재킷을 내려다보다 팔에 걸쳤다.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조금 전까지 이재와 나란히 서있던 공간이었다. 이번에는 혼자였지만.태혁은 내려가는 숫자를 바라봤다.고작 몇 분 전까지 함께였던 사람이었는데. 그 빈자리가 이상할 만큼 크게 느껴졌다.1층에 도착했다.문이 열렸는데도 태혁은 반 박자 늦게 움직였다.***태혁은 택시를 호출했다. 그리고 윤이재와의 메시지 창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대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딱히 보낼 말은 없었다.현관문까지 들어가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왔으니까.태혁은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메시지 창을 오래도록 내려다봤다.그러다, 헛웃음이 샜다.내가 왜 이러고 있나.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화면을 보고 있었다.택시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뜨고서야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새벽 한 시가 가까운 도로는 한산했다.태혁은 택시 뒷좌석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봤다.평소라면 제일 머리가 복잡할 시간이었다.놓친 진술.맞지 않는 기록.내일 다시 확인해야 할 것들.하루 종일 들여다본 사건을 집에 가는 동안 한 번 더 정리하는 게 습관이었다.그런데 오늘은 그게 잘되지 않았다.신호가 바뀌었다.택시가 천천히 출발했다.태혁은 창밖으로 흘러가는 불빛을 보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조금 전, 자신을 피하지 않던 이재의 눈이 떠올랐다. 태혁은 손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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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다음 날 아침.강력팀 사무실은 태혁이 도착하기 전부터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밤사이 들어온 회신 자료가 책상마다 쌓여 있었고, 벽면 보드에는 세 번째 사건을 중심으로 새로 출력한 사진과 동선이 빼곡하게 붙었다.태혁은 들어오자마자 재킷을 의자에 걸었다.“새로 나온 거.”준호가 기다렸다는 듯 파일을 들고 따라붙었다.“피해자 최근 통화내역이랑 출입기록 다시 받았습니다. 주변 CCTV는 새벽에 추가 확보했고요. 수빈 씨가 지금 시간대별로 붙이고 있습니다.”“차량은.”“두 대 더 추렸는데 하나는 배달 차량 확인됐고, 하나는 번호판이 안 잡힙니다. 영상 복원 맡겼습니다.”태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서류를 받아 넘겼다.“십 년 전 사건하고 피해자 접점은?”“아직 없습니다. 직장, 학교, 가족까지 돌렸는데 겹치는 사람 없어요.”“계속 봐.”“네.”준호가 다음 장을 넘겼다.“그리고 서진우 쪽은 말씀하신 대로 다시 돌리고 있습니다.”태혁이 서류를 넘겼다.“생활 반응은.”“본인 명의로 잡히는 건 없습니다. 금융, 통신, 출입국, 건강보험까지요.”“그걸로 끝내지 말고.”“예.”“신원 바꿨을 가능성까지 열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타인 명의로 살고 있을 가능성이요?”“살아 있다면 십 년이야.”태혁이 서류를 덮었다.“사람이 십 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살 수는 없어.”준호가 바로 메모했다.“신원불명자 지문 대조 다시 돌리고, 교정시설 수감자도 확인해.”“전국으로요?”“어.”“알겠습니다.”“보호시설 쪽도 보고. 서진우 지문 남아 있지?”“네. 십 년 전 사건 자료에 있습니다.”“대조해.”준호가 빠르게 받아 적었다.“개명자 중에 생년월일이나 연고지 겹치는 사람도 추리고.”“예.”준호가 다음 자료를 내밀었다.“CCTV는 점심 전까지 복원 결과 나온답니다.”태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가 돌아서려다 태혁을 한번 훑어봤다.“근데 팀장님.”“왜.”“오늘 뭔가 좀 달라지신 것 같은데.”태혁이 서류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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