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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다정한 지옥: Chapter 41 - Chapter 50

76 Chapters

41화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어서 첫 번째 회신이 들어왔다. 수빈이 통화 내용을 정리한 메모를 들고 태혁의 자리로 왔다.“서진우 누나랑 통화했습니다.”태혁이 고개를 들었다.“뭐래.”“걸음걸이에 특별한 특징은 없었대요. 다리를 크게 다친 적도 기억나는 건 없고요.”“다른 사람들은.”“당시 대학 동기 두 명까지 확인했는데 비슷합니다. 한 명은 워낙 오래돼서 기억 안 난다고 했고요.”태혁이 메모를 받아 들었다.예상했던 답이었다.십 년 전 알고 지낸 사람의 걸음걸이를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계속 확인해.”“네.”“지문 대조는.”“아직 돌고 있습니다. 교정시설 쪽은 오늘 안으로 받을 수 있을 것 같고요.”태혁은 메모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오면 바로 붙여.”“네.”수빈이 돌아갔다.태혁의 시선이 모니터 한쪽에 띄워둔 CCTV 화면으로 향했다.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화면 한가운데 멈춰 있었다. 키는 서진우와 비슷했다. 체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걸음걸이는 확인되지 않았고,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서진우라는 증거도, 아니라는 증거도 없었다.태혁은 화면을 닫았다.***퇴근 시간을 십 분쯤 넘겨 이재는 노트북을 덮었다.“다은 씨, 퇴근 안 해요?”“합니다. 지금 합니다.”대답과 동시에 다은이 가방을 집어 들었다.이재가 웃었다.“아까는 오늘 못 갈 것 같다면서요.”“퇴근은 의지의 문제니까요.”“숫자는요?”“대리님 덕분에 살았습니다.”당당한 대답이었다.이재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사람은 나란히 사무실을 나왔다.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익숙해진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낮에도 몇 번 마주쳤던 보안팀 직원이었다. 정확히는 보안팀 직원으로 위장한 경호원.이재가 나타나자 남자는 자연스럽게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이쪽을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다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대리님, 약속 있으세요?”“아니요.”“그럼 같이 저녁 드실래요?”이재가 잠깐 고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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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금요일 저녁 일곱 시.이재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익숙한 향을 맡았다. 지난번과 같은 향수였다. 그날은 한참 뒤에야 향수를 뿌렸다는 걸 알았는데, 이번에는 문이 닫히기도 전에 알았다.“우리 어디 가요?”“밥 먹으러.”“그건 알아요.”태혁은 운전 중이었다. 검은 셔츠에 어두운 재킷. 지난번보다 특별히 차려입은 것도 아닌데 괜히 자꾸 눈이 갔다.“어디서 먹냐니까요.”“거의 다 왔습니다.”“비밀이에요?”“아뇨.”“그럼 알려줘요.”태혁이 앞을 보며 말했다.“우리 집.”이재가 그를 쳐다봤다. 태혁은 여전히 도로만 보고 있었다.“……어디요?”“우리 집.”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재는 천천히 등을 시트에 붙였다.“잠깐만.”“네.”“오늘 밥 먹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맞아요.”“그런데 왜 집에 가요?”그제야 태혁이 잠깐 이쪽을 봤다.“해준다고 했잖아요. 직접.”아, 그랬었지. 첫 데이트 때 분명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당시에는 그저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는데, 태혁은 진심이었나보다.“진짜 해주려고요?”“싫습니까?”“아니. 그건 아니에요.”대답이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태혁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왜 웃어요?”“안 웃었습니다.”“웃었잖아요.”“기분 탓입니다.”이재는 다시 창밖을 봤다. 차창에 희미하게 비친 자신의 얼굴도 웃고 있었다.***태혁의 아파트 지하 주차장까지 검은 세단이 따라왔다. 차에서 내리던 이재가 뒤를 돌아봤다. 멀찍이 주차한 세단의 전조등이 꺼졌다. 이재가 그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저 사람들 오늘 고생하겠네요.”태혁이 차 문을 닫으며 물었다.“왜요.”“기다려야 되잖아요.”이재는 검은 세단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늦을 텐데.”이번에는 태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이 느껴져 이재가 고개를 돌렸다.“왜요?”“아뇨.”태혁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이재는 그제야 제가 한 말을 한번 되짚어봤다.늦을 텐데.……왜?괜히 귀가 뜨거워졌다.이재는 뒤늦게 그의 뒤를 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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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이재는 잠금장치를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태혁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조금 전까지는 열린 문 하나가 둘 사이에 있었다. 나가면 끝나는 저녁이었고, 태혁은 분명 자신을 데려다주려고 차 키까지 챙겼다.그런데 이제 문은 닫혔다.자기가 안 간다고 했다.태혁도 보내지 않기로 했다.그 사실을 새삼 깨닫자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태혁의 시선이 이재의 얼굴에 머물렀다.“윤이재 씨.”낮게 불린 이름에 이재가 대답했다.“네.”“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겁니다.”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이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그의 셔츠를 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기자 입술이 맞닿았다.이번에는 태혁도 더 묻지 않았다.허리를 감싼 팔이 단숨에 이재를 끌어당겼다. 등이 현관 벽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까보다 훨씬 깊어진 입맞춤에 이재가 숨을 들이켰다.향수 냄새가 가까웠다.차 안에서부터 계속 신경 쓰이던 향이었다.그런데 지금은 향수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셔츠에 밴 체온과 피부 냄새까지 뒤섞여 머리가 어지러웠다.이재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태혁의 손이 허리를 쓸었다. 손바닥이 얇은 옷감 위를 지나갈 때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입술이 잠시 떨어졌다.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숨이 엉켰다.태혁이 이재를 내려다봤다.평소와 똑같은 얼굴인데 눈만 달랐다.이재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셔츠 단추에 손을 올렸다.하나.그리고 하나 더.태혁이 그 손을 내려다봤다.“일부러 이러는 겁니까.”“뭘요.”대답하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세 번째 단추가 풀렸다.태혁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계속해요.”이재가 올려다봤다.“해도 돼요?”“이미 하고 있으면서 뭘 물어요.”웃음이 났다.그 순간 태혁이 다시 입을 맞췄다.이번에는 이재도 웃을 수 없었다.잡고 있던 셔츠가 손안에서 구겨졌다. 태혁의 손이 허리를 단단히 받친 채 움직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거실까지 와 있었다.무릎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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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한참 뒤에야 거실이 조용해졌다.이재는 소파에 누운 채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숨은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방금 전의 감각이 몸 어딘가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태혁도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이재의 옆으로 몸을 옮긴 채 소파 아래에 기대앉았다. 평소라면 흐트러질 일 없을 것 같던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내려와 있었다. 셔츠는 반쯤 풀려 있었고 호흡도 아직 조금 거칠었다.처음 보는 강태혁이었다.이재는 그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태혁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이재가 입을 열었다.“물.”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태혁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났다.잠시 뒤 주방에서 물을 가져온 그가 이재 옆에 앉았다.“일어날 수 있어요?”이재가 팔을 조금 움직여보다가 포기했다.“못 움직이겠어요.”태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아예?”이재는 잠깐 생각하다 솔직하게 대답했다.“응…….”태혁은 한 손으로 이재의 등을 받쳐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다른 손으로 잔을 들어 입술 가까이 기울였다.“천천히 마셔요.”이재는 태혁이 들고 있는 잔에 그대로 입을 댔다.몇 모금 삼키자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더?”이재가 고개를 저었다.태혁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괜찮아요?”“네.”“진짜?”이재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진짜.”태혁은 그제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재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작게 중얼거렸다.“씻고 싶어…….”태혁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요.”“못 움직인다니까요.”“그러니까.”태혁이 허리를 숙였다.한쪽 팔이 등 뒤로 들어오고 다른 팔은 무릎 아래를 받쳤다. 이재의 몸이 그대로 소파에서 들렸다.이재가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이렇게 간다고요?”“그럼 걸어갈래요?”이재는 잠깐 생각했다.“……아니요.”태혁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그럴 줄 알았어요.”이재는 대답 대신 그의 목에 감은 팔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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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네.”― 그래.예상보다 싱거운 대답이었다.이재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경호팀한테 들었어요?”― 네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야 하니까.“그건 아는데.”강태혁의 집이라는 것까지 보고받을 줄은 몰랐다.“아빠.”― 왜.“화났어요?”― 네가 스물여덟인데 외박했다고 내가 화를 내겠니.“……그럼 다행이고.”― 다만 들어갈 때 연락하겠다고 했으면 연락은 해.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그래서 이재는 더 가만히 듣게 됐다.“미안해요.”― 아침은 먹었고?“아직요.”― 먹어.“네.”― 이재야.“네?”― 아니다. 나중에 연락하마.통화가 끊겼다.이재는 귀에서 휴대전화를 떼고도 한동안 화면을 보고 있었다.화를 낸 것도 아니고, 강태혁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평소의 아버지라면 오히려 한두 마디쯤 더 했을 법한데.오늘은 말이 너무 없었다.“왜요.”옆에서 태혁이 물었다.“아니에요.”“아닌 얼굴인데.”이재가 그를 한번 쳐다봤다.***윤성호는 통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있었다.강태혁.그 이름을 속으로 한 번 되뇌었다.딸이 누구를 만나든 일일이 간섭할 나이는 지났다.알고 있었다.그런데도 썩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이재가 귀국한 뒤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워진 적이 있었던가.하필이면 그 상대가 강태혁이라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윤성호는 미간을 천천히 쓸었다.그러다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엎어놓았다.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아직 이재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주방에서는 버터와 달걀이 익는 냄새가 났다.이재는 식탁에 앉아 태혁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회색 후드에 같은 색 트레이닝 팬츠.익숙할 리 없는 모습인데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밥 한 끼 같이 먹는 데 이유가 필요했던 사이였다.그런데 지금은 그의 티셔츠를 입고, 그가 사다 놓은 슬리퍼를 신고, 그가 차리는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사람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빨리 줄어들기도 하나.이재가 괜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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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이재는 옷장을 열어둔 채 거울 앞에 서 있었다.첫 번째 옷은 너무 꾸민 것 같았다.두 번째는 너무 안 꾸민 것 같았다.결국 세 번째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겨우 마음에 들었다.귀걸이도 한 번 바꿨다.향수는 뿌렸다가 너무 진한가 싶어 손목으로 한번 문질렀다.그러다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어젯밤에는 강태혁과 잤다.아침에는 그의 옷을 입고 밥까지 먹었다.그런데 저녁에 또 만난다고 이러고 있었다.'오늘 저녁에 알려줄게요.'문제는 저 말이었다.이재는 립스틱을 한번 더 확인했다.대체 뭘 어떻게 알려주겠다는 건데.“……아, 몰라.”그런데 거울 속 얼굴은 웃고 있었다.휴대전화가 울렸다.강태혁이었다.이재는 기다렸다는 티가 날까 봐 한 번 울리고 나서 받았다.“네.”― 이재 씨, 혹시 준비했어요?이재의 시선이 거울 속 제 모습으로 향했다.“네. 왜요?”― 추가 CCTV가 하나 나왔어요. 범행 전 영상인데, 확인할 게 좀 많습니다.“아…….”말을 듣자마자 알았다.― 오늘 오래 걸릴 것 같아요.이재가 귀걸이를 만지던 손을 내렸다.“그러면 오늘은…….”― 미안해요.짧은 말이 먼저 돌아왔다.이재는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어쩔 수 없죠.”― 화났어요?“아뇨.”― 삐졌어요?대답이 반 박자 늦었다.“아뇨. 일인데요.”그쪽에서 잠깐 숨소리만 들렸다.이재가 먼저 말했다.“일하세요.”― 네.“끊을게요.”통화가 끝났다.거울 속에는 멀쩡하게 꾸민 윤이재가 그대로 서 있었다.이재는 화장대 서랍을 열어 클렌징 티슈를 꺼냈다.한 장을 뽑았다가 다시 넣었다.옷도 갈아입지 않았다.거실로 나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TV를 켜놓고 배달 앱을 열었다.뭘 먹고 싶은지도 모르겠어서 한참 내리기만 하다 껐다.휴대전화는 조용했다.화면이 켜질 때마다 시선이 먼저 갔지만 강태혁은 아니었다.일하는 중이겠지.알면서도 자꾸 확인하게 됐다.결국 이재는 휴대전화를 뒤집어놓았다.안 기다린다.누가 기다린다고.***수사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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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맞잡은 손에 엄지만 느리게 움직였다.이재가 기다리다 먼저 눈썹을 찌푸렸다.“왜요.”“고민 중입니다.”눈이 곧장 가늘어졌다.“뭐라고요?”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태혁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사귀는 사이 아니었어요?”“……뭐?”이재가 그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그걸 말도 안 하고 혼자 결정해요?”“아니었습니까?”“그게 아니라.”“그럼 맞네요.”“강태혁 씨.”“네.”태혁은 태연했다.이재만 괜히 열이 올랐다.“보통 이런 건 서로 말을 하고 정하는 거 아니에요?”“지금 하고 있잖아요.”“이건 통보잖아요.”“그럼 물어볼게요.”태혁이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은 채 이재를 바라봤다.조금 전까지 장난기가 남아 있던 눈이 그제야 가라앉았다.“나랑 사귈래요?”막상 제대로 물어오니 이재가 입을 다물었다.기다렸던 말인데.저렇게 똑바로 들으니 대답이 바로 안 나왔다.태혁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또 고민합니까?”“아니요.”이재는 괜히 턱을 조금 들었다.“받아줄게요. 태혁 씨 마음.”잠깐 정적이 흘렀다.태혁이 결국 실소했다.“왜 웃어요?”“아니.”그가 이재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누가 보면 내가 매달린 줄 알겠네.”“아니에요?”“윤이재 씨.”“네.”“좋네요.”태혁의 손가락이 맞잡은 손 안에서 움직였다.“윤이재 씨가 내 여자친구인 거.”말 한마디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놓고.정작 이재를 보는 눈은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이재는 괜히 입술을 한번 말아 물었다.그러다 문득 웃었다.“태혁아.”태혁의 눈썹이 꿈틀했다.이재는 모르는 척 한번 더 불렀다.“태혁아.”“남자친구랬지, 맞먹으랬습니까?”그게 재밌었다.“왜 이렇게 튕기실까.”이재가 몸을 조금 더 붙이며 웃었다.“우리 태혁이가.”“윤이재 씨.”태혁의 미간이 좁아졌다.이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우리 태혁이 화났어?”결국 태혁이 웃었다.이재가 그걸 보고 더 신이 나 입을 열려는 순간, 태혁의 손이 턱을 잡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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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전화는 결국 걸지 못했다.태혁은 휴대전화를 쥔 채 오래된 기사를 내려다봤다.지금 당장 이재에게 가고 싶은 것과 별개로 현장을 두고 움직일 수는 없었다.“최수빈.”“네.”“이 기사부터 확인해.”수빈이 태혁 옆으로 다가왔다.“원본인지, 어디서 구했는지. 지문하고 필적도.”“네.”“기사 내용은요?”준호가 물었다.태혁의 시선이 다시 종이 위로 떨어졌다.누렇게 바랜 지면.세림호텔.십 년 전 날짜.“그것도.”“뭐부터 볼까요?”“전부.”준호가 잠깐 그를 봤다.“이 기사랑 서진우가 관련 있습니까?”태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팀장님?”“있어.”준호의 표정이 달라졌다.“어떤 식으로요?”“돌아가서 얘기해.”태혁이 장갑 낀 손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통화 연결음이 길지 않았다.― 여보세요?조금 전까지 메시지를 주고받던 목소리였다.“지금 어디예요?”― 회사지, 어디겠어요.평소 같았으면 웃었을 대답이었다.태혁은 곧바로 물었다.“경호원들 아직 있죠?”짧은 침묵이 생겼다.― 네.이재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왜요?“계속 같이 있어요.”― 태혁 씨.“네.”― 또 터졌어요, 사건?태혁이 입을 다물었다.그 침묵이면 충분했던 모양이었다.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몇 번째예요?“네 번째.”이번에는 이재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태혁은 기사 위의 네 글자를 다시 내려다봤다.돌아왔다.“내가 갈게요.”― 여기로요?“네.”― 지금?“현장 정리되는 대로.”― 왜요?태혁은 잠깐 대답을 골랐다.“할 얘기가 있어요.”― 사건 때문에?“네.”다시 침묵이 흘렀다.― 알겠어요.“그때까지 경호원들하고 같이 있어요.”― 네.“나갈 일 있으면 전화하고.”― 네.“혼자 움직이지 말고.”― 네.“모르는 번호도 받지 말고.”― 태혁 씨.“왜요.”― 알았으니까 너무 걱정 마요.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 알아들었으니까.조금 전보다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태혁이 짧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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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차가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왔다.저녁 도로 위로 가로등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일정한 간격으로 들어오는 불빛이 앞유리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태혁의 옆얼굴도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라디오에서는 볼륨을 낮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이재는 조수석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봤다.신호에 걸릴 때마다 태혁의 손이 기어 옆으로 내려왔다.두 번째 신호에서 이재가 그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태혁은 쳐다보지 않았다.대신 손바닥을 뒤집어 손가락을 맞물렸다.신호가 바뀌자 손은 자연스럽게 떨어졌다.그뿐이었다.사건 얘기는 하지 않았다.이재도 묻지 않았다.곧 듣게 될 얘기를 조금 늦춰도 괜찮았다.집에 도착할 때까지만.***경호 인력은 평소처럼 복도와 건물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현관문이 닫혔다.이재가 구두를 벗으며 물었다.“이제 말해요.”태혁은 거실까지 들어온 뒤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늘 현장에서 나온 겁니다.”화면을 몇 번 움직여 이재에게 내밀었다.이재가 휴대전화를 받아 들었다.오래된 신문 기사였다.누렇게 바랜 종이.십 년 전 날짜.기사 제목을 읽던 눈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세림호텔.“……이게 왜.”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기사 여백 위로 볼펜 자국이 보였다.돌아왔다.손끝이 굳었다.순간, 쨍그랑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이재의 눈앞에 그날이 펼쳐졌다.십 년 전이었다.“엄마?”대답 대신 비명이 터졌다.짧고 날카로운 소리였다.곧이어 무언가 바닥으로 넘어지는 굉음이 났다.열여덟의 이재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엄마가 달려왔다.“이재야. 올라가.”“엄마, 왜 그래?”“빨리.”등을 미는 손이 젖어 있었다.이재는 그제야 자기 팔에 묻은 붉은 자국을 봤다.피였다.“엄마.”“올라가!”처음 듣는 고함이었다.몸이 먼저 움직였다.계단을 뛰어 올라갔다.등 뒤에서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엄마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이재가 돌아보려 했다.“보지 마!”엄마의 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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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일단 짐부터 싸요.”한참 뒤 태혁이 말했다.이재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네?”“필요한 거 다.”“왜요?”“우리 집으로 갑니다.”이재가 눈을 깜빡였다.“오늘만?”“아니요.”“그럼요?”“당분간.”이재가 몸을 바로 세웠다.“잠깐만요.”태혁은 이미 결정한 얼굴이었다.“밑에 아빠가 붙여놓은 경호팀 있어요.”“알아요.”“이 건물 보안도 좋고.”“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왜요.”“범인이 윤이재 씨를 목표로 하고 있을 가능성이 생겼으니까.”태혁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여기 주소를 모른다고 장담 못 합니다.”이재는 입을 다물었다.“지금까지 네 번이나 남의 집에 들어간 놈이에요.”그 말에는 반박하기 어려웠다.“여기보다 내가 있는 곳이 낫습니다.”이재가 잠깐 그를 바라봤다.그러다 다른 문제가 떠올랐다.“아빠가 알면 난리 날 텐데.”“아버님한테는 내가 말씀드릴게요.”“뭐라고요?”“안전 때문에 당분간 보호하고 있겠다고.”이재의 눈이 가늘어졌다.“어떤 형사가 안전 때문에 피해자를 자기 집에 데리고 있어요?”태혁이 잠깐 생각했다.“그건 그러네.”너무 순순한 인정이라 이재가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태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그럼 남자친구로서 데리고 있겠다고 하죠, 뭐.”“……그게 더 문제잖아요.”“왜요.”“우리 아빠한테 그 말을 하겠다고요?”“언젠가는 아셔야죠.”이재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맞는 말이었다.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알 필요는 없었다.“내가 강태혁 씨 집에 들어가서 안 나오면 경찰에 신고할지도 몰라요.”“그럼 설명 잘해야겠네요.”“누가요?”“내가.”태연했다.이재가 그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조금 전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감각이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태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캐리어 있어요?”이재도 따라 일어났다.“있어요.”“가죠.”“어디를요.”“짐 싸러.”이재가 한숨을 내쉬었다.“진짜 막무가내네.”태혁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싫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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