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고결한 주인님, 벌을 받으셔야지요: Chapter 51 - Chapter 60

79 Chapters

51화

연회 당일 밤.황도의 중심에 우뚝 솟은 황립 국립극장은 말 그대로 지상에 강림한 황금빛 궁전과도 같았다.거대한 백대리석 기둥들이 하늘을 떠받치듯 웅장하게 솟아 있었고, 높은 아치형 돔 천장 아래로는 수만 개의 수정 조각으로 깎아 만든 샹들리에들이 쏟아질 듯 찬란한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바닥에 깔린 진홍빛 융단 위로는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화려한 비단 드레스, 가슴팍에 영롱한 다이아몬드와 루비를 휘감은 귀부인들의 군무가 펼쳐졌다.제국의 권세를 자랑하는 귀족들은 각양각색의 깃털 부채 뒤로 은밀한 정략과 탐욕을 숨긴 채 샴페인 잔을 부딪쳤고, 극장 2층 회랑에서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왈츠 선율은 장내를 취하게 만들었다.그리고 홀의 가장 높은 단상 위.금빛 용포를 두른 제국의 지배자, 황제가 서늘한 눈빛으로 군중을 굽어보고 있었다.“칼릭스 폰 베른 백작, 그리고 세레나 폰 아르젠트 공녀 전하 입장이십니다!”시종장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거대한 국립극장의 화려한 소음을 단숨에 갈라버렸다.육중한 황금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 화려하게 흩어지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려들었다.찰나의 적막.화려했던 왈츠의 선율조차 무색하게 만들 만큼, 문가에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가장 먼저 사람들의 숨을 멎게 한 것은 세레나였다.칠흑 같은 밤하늘을 녹여낸 듯 짙푸른 미드나이트 블루의 실크 드레스. 허리선을 따라 은빛 실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아르젠트 가문의 장미 문양이 걸음마다 서늘한 은광을 번뜩였다. 가녀린 목덜미와 쇄골, 그리고 등이 깊게 파여 드러난 순백의 살결은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서 잔혹하리만치 눈부셨다.몰락하여 진흙탕에 처박혔다던 공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사교계의 숨통을 단숨에 틀어쥐는, 지독하게 오만하고 아름다운 여왕의 귀환이었다.그리고 그 여왕의 반 보 뒤편.황실을 지키는 흑철 근위대의 제복을 완벽히 갖춰 입은 칼릭스가 우뚝 서 있었다.제국 최고의 장수이자 소문난 살귀.단단하게 짜인 거대한 체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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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사내의 뜨겁게 달아오른 귓속말에, 세레나는 턱을 비스듬히 치켜들며 서늘한 미소를 흘렸다.“눈알을 뽑겠다니, 네 몫도 아닌 것에 욕심을 부리는구나.”여인의 차가운 손끝이 칼릭스의 단단한 목덜미를 타고 미끄러져 올라가, 귓바퀴 뒤편의 예민한 살갗을 손톱으로 지그시 내리눌렀다.순간, 사내의 거대한 어깨가 잘게 전율했다.“저들이 탐하는 것은 내 살갗이 아니라, 네놈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아르젠트의 권능이다. 주인의 곁에서 발정 난 개새끼처럼 숨을 헐떡이지 말고, 박자나 잘 맞추어라.”“발정이라뇨…… 마마께서 이리 잔인하게 살갗을 내보이며 소인을 시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사내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여인의 귓가를 끈적하게 파고들었다.왈츠의 선율이 한층 격정적으로 치솟아 오르는 순간, 칼릭스는 세레나의 허리를 부서져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제복 앞섶의 차가운 훈장들이 얇은 실크 드레스를 뚫고 여인의 가슴골을 짓누를 만큼 노골적인 밀착이었다.장내를 가득 메운 귀족들의 숨소리가 일제히 멎어 들었다.그것은 단순한 귀족들의 사교 왈츠가 아니었다.흑철 제복을 입은 제국 최고의 장수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단을 두른 여신이 펼치는, 숨 막히도록 잔혹하고 관능적인 군무.사내의 보폭은 거칠고 위압적이었으나, 여인의 우아한 턴은 그 흉포한 힘을 완벽하게 휘감아 굴복시키고 있었다.붉은 융단 위를 스치는 옷자락의 날림과 물결치는 은빛 자수.샹들리에 불빛 아래 번뜩이는 두 남녀의 형상에 샴페인 잔을 든 귀족들은 말조차 잊은 채 넋을 잃고 시선을 빼앗겼다.단상 위에 우뚝 선 황제의 금빛 시선마저, 사교계를 단숨에 장악해 버린 두 괴물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그러나 사람들의 넋을 뺀 시선 너머,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지독하리만치 은밀하고 배덕했다.칼릭스는 턴을 도는 찰나마다 세레나의 드러난 등골을 맨손으로 집요하게 쓸어 올렸다.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펄펄 끓는 체온이 여인의 척추를 타고 번개처럼 곤두박질쳤다.“하아…… 숨이 막힙니다, 마마.”사내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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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감히 수백 명의 눈이 지켜보는 무도회장에서 내 살갗을 주무르며 사심을 채워?”여인의 푸른 눈동자가 농밀한 분노로 일렁였다.“네 머릿속에는 복수도, 가문의 부활도 없이 오직 그 천박한 욕정뿐이더냐? 말해보아라, 칼릭스. 내가 살려낸 목숨이 그리도 가벼워 제 몸뚱이 하나 제어하지 못하는 게냐?”사내의 거친 숨결이 여인의 무릎을 뜨겁게 적셔 내렸다.칼릭스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굶주린 눈동자로 제 여신을 올려다보았다.오만하고 잔혹하게 군림하는 농밀한 여인의 자태.사내의 목구멍에서 낮고 거친 음성이 터져 나왔다.“여신같이 아름다우신 제 주인의 숨결을 맡고도 미치지 않는 개가 어디 있겠습니까.”칼릭스는 제 허벅지를 누르고 있는 여인의 발목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양손으로 쓸어 올리며 무릎에는 입술을 가져다 댔다.“벌을 주십시오, 마마.”사내의 목소리가 처절한 열락으로 젖어 들었다.“마마의 손길이라면…… 그 어떤 고통이라도 달게 삼키겠습니다.”사내의 발칙한 애원에 세레나의 붉은 입술이 농염하게 비틀렸다. 여인은 사내의 흑철 제복 허리춤에 채워진 가죽 벨트를 단숨에 풀어냈다.철컥, 버클 풀리는 서늘한 쇳소리와 함께 가죽 띠가 여인의 가느다란 손아귀에 감겨들었다.“고통을 달게 삼키겠다라…… 감히 주인의 자비를 시험하는구나.”짜악!밀실의 적막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사내의 단단한 어깨 위로 가차 없이 내리꽂혔다.제복을 뚫고 뼈마디까지 번지는 매서운 통증에도 칼릭스의 미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사내의 잿빛 머리칼 사이로 번뜩이는 금빛 눈동자에는, 고통 대신 주인의 손길에 닿았다는 황홀한 희열만이 타오르고 있었다.“하…… 윽.”사내는 뒤로 물러서기는커녕, 제 어깨를 내리친 가죽 벨트를 쥐고 있는 세레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더…… 더 거칠게 다루어 주십시오, 마마. 마마의 노여움이 풀릴 때까지 소인의 가죽을 찢으셔도 좋습니다.”사내의 맹목적인 열망에 세레나의 눈동자가 더욱 농염하게 물들었다. 여인은 가죽 벨트를 바닥으로 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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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서로의 혀를 옭아맨 채 거친 숨결을 삼키는 순간, 소파가 삐걱거리며 위태로운 비명을 내질렀다.칼릭스는 세레나의 가느다란 두 다리를 제 단단한 어깨 위로 깊숙이 걸쳐 올렸다.여인의 은밀한 안쪽이 무방비하게 활짝 벌어지자, 사내는 자비 없는 허리짓으로 흉포한 기둥을 뿌리 끝까지 박아 넣었다.“흐아앙……! 읏, 칼릭스……!”이 순간 만큼은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벌을 주듯 인정사정 없는 박음질이었다. 세레나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붉은 입술 사이로 찢어지는 듯한 교성이 터져 나왔다.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하복부 깊은 곳의 자궁구를 짓찧는 압도적인 무게감과 파열감.조금 전까지 오만하게 벌을 내리던 군주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여인은 사내의 거친 흑철 제복 앞섶을 쥐어뜯으며 사시나무 떨리듯 전신을 경련했다.퍽, 질척, 퍽!살과 살이 맹렬하게 맞부딪히는 음란한 소음이 밀실 안을 가득 채웠다. “하…… 윽, 마마…… 마마의 안이…… 소인을 부숴버릴 듯 조여옵니다……!”칼릭스는 핏발 선 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맹수처럼 낮게 소리쳤다. 제 주인의 뜨겁고 좁은 내벽이 사내의 성난 핏줄을 한 치의 틈도 없이 집어삼키며 물결치듯 요동치고 있었다.자신을 지배하던 여왕이 제 품 안에서 눈물과 땀에 젖어 허덕이는 자태. 그 지독한 정복감과 배덕감에 사내의 허리짓은 점차 이성을 잃고 광포하게 치달았다.사내는 부서져라 여인의 잘록한 골반을 움켜쥐고, 자신의 귀두에 닿는 가장 예민한 안쪽의 여린 살점을 집요하게 짓이기며 허리를 쳐올렸다.“아흣, 아……! 잠, 깐…… 하아앗!”세레나는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쾌락의 해일에 휩쓸려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쾌감을 이기지 못한 세레나가 사내의 땀에 젖은 넓은 등판을 사납게 긁어내렸다.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쾌감이 한계까지 조여들었다.“칼릭스, 흣…… 아……!”“소인을 보십시오, 마마. 온전히…… 저는 마마의 개입니다……!”사내가 마지막 힘을 다해 맹렬하게 허리를 짓눌러 박은 바로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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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세레나는 흑철 제복의 가죽 벨트를 다시 조여 매는 칼릭스를 거울 너머로 응시하며, 낮고 서늘한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몸을 풀었으니, 이제 본 무대로 나아갈 시간이다.”여인의 푸른 눈동자에서 잔혹한 살기가 번뜩였다.“가자, 칼릭스. 가서…… 그 늙은 황제 놈의 목줄을 죄어 가문의 깃발을 되찾아야지.”“마마님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칼릭스가 허리춤에 찬 흑철 대검의 자루를 힘있게 쥐며 고개를 숙였다.무거운 밀실의 문이 열리자, 차단되었던 무도회장의 화려한 오케스트라 선율과 수백 명의 웅성거림이 다시금 쏟아져 들어왔다.두 포식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제국의 지배자가 기다리는 황금빛 단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붉은 융단 위를 가로지르는 두 사람의 발걸음에 맞춰, 홀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고위 귀족들이 겁에 질린 듯 양옆으로 물러섰다.방금 전까지 밀실에서 서로의 숨결을 탐닉했던 흔적은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으나, 두 사람이 뿜어내는 기형적인 위압감은 장내를 서늘하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미드나이트 블루 드레스 자락을 스치는 은빛 장미 문양이 걸음마다 날카로운 은광을 번뜩였고, 그 뒤를 따르는 제국 최강의 살귀는 홀 전체를 짓누르는 살기를 거침없이 뿜어냈다.군중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은밀한 수군거림이 번져 나갔다.“……들었는가? 에드윈 2황자 전하께서 간밤에 북부의 위험한 골짜기로 도주하셨다는 소문이 파다해.”“황실 감사원에 사병 동원과 비리가 덜미를 잡혔다더군. 게다가 제국의 전쟁 영웅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세레나가 밀실로 향하기 전 교묘하게 흘려둔 은밀한 귓속말들이, 불과 한 시간 만에 사교계 전체를 집어삼키는 독버섯처럼 번져 나가 있었다.귀족들의 수군거림은 이미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여론이 되어 웅장한 돔 천장을 뒤흔들고 있었다.단상 위, 옥좌에 앉은 황제의 낯빛이 잿빛으로 썩어 들어갔다.황실의 치부를 은밀히 덮고 조용히 처리하려던 황제의 계산은, 장내를 가득 메운 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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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홀 안을 집어삼킨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옥좌의 팔걸이를 움켜쥔 황제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곤두섰다.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연회장 전체를 짓누르던 바로 그 찰나.“……하, 하하하하!”황제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난데없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연회장을 짓누르던 서슬 퍼런 살기를 비웃듯, 황제는 조금 전의 굳은 낯빛을 거짓말처럼 거두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참으로 가상한 충정이다! 역시 제국의 번영을 이끌어온 아르젠트의 후손이자, 북부를 평정한 전쟁 영웅답구나.”황제는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장내의 귀족들을 향해 느긋하게 손을 내저었다.“허나 오늘은 제국의 화합과 영광을 축복하는 축제의 밤이 아니더냐. 이리 경사스러운 날에 굳이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흐릴 이유는 없지. 그대들의 충절은 짐이 이미 깊이 헤아렸으니, 역적에 관한 이야기는 훗날 논하기로 하고 오늘은 마음껏 연회를 즐기도록 하라.”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려는 명백한 회피였다.사교계의 시선 앞에서 체면을 지키고, 아들의 반역을 은밀히 덮어둘 시간을 벌려는 속셈.순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칼릭스의 금빛 눈동자가 흉포하게 번뜩였다.사내는 당장이라도 옥좌로 쳐 올라가 늙은 황제의 목을 칠 듯 흑철 대검의 자루를 으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호병들의 눈동자도 함께 번뜩였다. 칼릭스의 살기와 경호병들의 긴장이 충돌하는 일촉측발의 상황이었다. 사내의 어깨가 살기로 진동하며 검을 뽑으려던 찰나였다.스륵.세레나의 가느다란 손길이 칼릭스의 단단한 어깨 위로 얹어졌다.여인의 손끝이 제복의 천 너머로 살점을 지그시 누르며, 맹수처럼 날뛰려던 사내의 기세를 단숨에 내리눌렀다.주인의 서늘한 손길에 칼릭스는 억누른 신음을 삼키며 거친 숨을 골랐다.세레나는 옥좌를 향해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완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폐하의 혜안이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어리석은 소인이 축제의 흥을 깨뜨릴 뻔하였으니 부디 혜량하여 주시옵소서.”여인은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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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새벽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황궁의 회랑은 고요하고 차가웠다.함께 온 다니엘 부관과 군사들은 바깥에서 대기하고 칼릭스와 세레나만 황궁의 서고로 향하는 길이었다. 어스름한 여명 속을 가르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대리석 바닥에 울려 퍼졌다.황궁 깊숙한 곳, 수백 년간 황실의 기밀과 금서들이 잠들어 있는 황실 서고의 로비.하늘에 닿을 듯 솟아오른 육중한 참나무 서가 사이로는 케케묵은 양피지 냄새와 서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발을 들이는 순간 숨통을 조여오는 무거운 적막. 서가 구석구석 드리운 짙은 그림자마다 보이지 않는 암살자의 시선이 숨어 있는 듯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졌다.그도 그럴 것이 황제의 근위병들은 보여지는 것일 뿐, 실제 경호원들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끼이익.서고 깊은 곳, 밀실의 문이 열리며 옥좌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어젯밤 연회장의 화려한 금빛 용포 대신 짙은 암갈색 가운을 걸친 늙은 황제였다. 피로와 불면으로 푹 꺼진 눈매였으나, 제국의 정점에 군림해 온 지배자 특유의 음산한 안광만큼은 여전히 살아 번뜩였다.황제가 메마른 손짓을 가볍게 휘두르자, 그림자처럼 황실 근위병들과 시종들이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일제히 서고 밖으로 물러났다.텅 빈 서고 안에 남은 것은 셋뿐이었다.황제의 날카로운 시선이 세레나의 곁에 그림자처럼 버티고 선 거대한 사내에게 닿았다.“베른 백작, 경도 밖으로 물러나라. 짐은 지금 아르젠트의 여식과 단둘이 나눌 이야기가 있다.”하지만 황제의 근엄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칼릭스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사내의 잿빛 머리칼 아래로 번뜩이는 금빛 눈동자에 사나운 맹수의 살기가 어렸다.칼릭스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황제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세레나의 차가운 손끝이 칼릭스의 굳은 팔뚝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칼릭스.”낮고 은밀한 주인의 음성이 사내의 귓가를 스쳤다.“문밖을 지키고 서 있거라.”칼릭스가 자리를 비킬 수 있도록 명분을 주는 명령이었다.그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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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침묵이 내려앉은 서고 안, 황제의 누렇게 뜬 손이 마침내 깃펜을 집어 들었다.사각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양피지 위로 짙은 먹물이 번져 나갔다. 아르젠트 공작위의 공식 복원과 북부 직할령의 온전한 반환. 한 때 역적이라 몰아 붙이던 가문의 부활은 황실의 권능을 깎아 먹을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황제에겐 다른 카드가 없었다. 한 가지 밖에는. 황제가 별안간 펜을 멈추어 섰다.깃펜을 내려놓은 황제가 냉정한 눈빛으로 세레나를 응시했다.“다만, 조건이 하나 있다.”세레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말씀하시지요, 폐하.”“에드윈의 숨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확실한 증좌를 가져와야만 이 칙서의 효력이 발생할 것이다. 놈의 목이든, 혹은 반역자의 수급에 걸맞은 명백한 증표든…… 직접 증명해 내야만 이 칙서가 효력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거라.”‘끝까지 제 안위와 체면만 챙기려는 비열한 영감탱이.’세레나는 속으로 차가운 조소를 삼켰다. 혹여 에드윈이 살아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 퇴로를 열어두고, 실패할 시 모든 책임을 아르젠트의 탓으로 돌리려는 늙은 여우의 간계였다.당장이라도 그 비열한 농간에 고함을 치고 싶었으나, 세레나는 오만한 미소 뒤로 살기를 감추었다.지금은 벼랑 끝에 몰린 황제의 체면을 살려주며 한 발 물러서는 것이 실리를 챙기는 길이었다.“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폐하. 폐하의 염려를 덜어드리는 것 또한 충성스러운 신하의 도리이니, 그 약조를 기꺼이 받들지요.”세레나의 순순한 대답에 황제는 그제야 안도 섞인 숨을 내쉬며 붉은 밀랍 위로 황실의 옥새를 내리찍었다.황제의 서명이 적힌 칙서를 품에 넣은 세레나가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서고를 빠져나왔다.문밖에는 정복을 입은 칼릭스가 마치 망부석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사내는 주인이 무사히 걸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흉포한 살기를 거두었다.두 사람은 황궁의 회랑을 가로질러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문이 닫히고 마차가 움직이며 두터운 암막 커튼이 드리워지자마자, 세레나는 품에서 칙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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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세레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사내의 잿빛 머리칼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귓바퀴를 향해 은밀하고 농밀한 숨결을 불어넣었다.“사지로 떠나기 전…… 오늘 밤은 네 주인의 곁에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여인의 요염한 목소리가 사내의 귓가를 뜨겁게 달구었다.“네 살결 구석구석에 내 흔적을 새겨넣을 것이다. 네놈이 살아서 돌아와야만 할 이유를, 똑똑히 각인시켜 줄 테니.”사내의 하복부가 순식간에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며, 마차 안의 공기가 숨 막히는 열기로 질척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덜컹거리는 바퀴 소리를 집어삼키듯, 칼릭스의 거친 숨소리가 좁은 마차 안을 가득 메웠다.사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무릎을 세워 세레나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하아…… 마마.”이성을 잃은 맹수의 금빛 눈동자가 번뜩이는 순간, 칼릭스의 뜨거운 입술이 여인의 붉은 입술을 거칠게 집어삼켰다.“흐으…… 읍……!”숨이 막힐 듯 몰아치는 거칠고 축축한 입맞춤.칼릭스의 굳은살 박인 거대한 손바닥이 얇은 비단 드레스 너머로 여인의 잘록한 허리와 둥근 둔부를 움켜쥐듯 더듬어 올렸다.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해지는 사내의 펄펄 끓는 체온이 여인의 살결을 데울 듯 파고들었다.사내의 거친 손끝이 드레스 앞섶을 스치며 부풀어 오른 가슴의 정점을 지그시 짓누르자, 세레나의 등줄기를 타고 짜릿한 전율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하아…… 아…….”짧지만 지독하게 농밀한 애무 끝에 입술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입가 사이로 투명한 은실이 길게 늘어졌다가 끊어졌다.세레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욕정으로 붉게 충혈된 사내의 뺨을 손끝으로 가볍게 톡, 쳤다.“참아라, 칼릭스. 저택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차를 부술 셈이냐.”“……마마께서 먼저 불을 지피셨으면서, 참으로 잔인하십니다.”칼릭스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키며 여인의 목덜미에 뜨겁게 달아오른 이마를 기댔다.그때,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더니 백작저의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마차 안의 끈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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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마마, 어찌 시녀들을 시키지 않으시고 친히…….”세레나는 대답 없이 느릿한 걸음으로 사내의 코앞까지 다가섰다.여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칼릭스의 턱 밑으로 뻗어, 굳게 잠긴 제복의 단추를 천천히 풀어냈다.단추가 풀릴 때마다 전장의 상흔이 새겨진 사내의 구릿빛 흉근과 단단하게 갈라진 복근이 뜨거운 수증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세레나는 사내의 어깨에서 셔츠를 벗겨 바닥으로 떨어뜨린 뒤, 타오르는 눈빛으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욕조로 들어가거라, 칼릭스.”여인의 붉은 입술이 고혹적인 호선을 그렸다.“미처 끝내지 못한 약속을…… 이제 지킬 시간이니.”주인의 나지막한 명령에 사내의 목울대가 힘겹게 오르내렸다.칼릭스는 군말 없이 남은 하의를 벗어 던지고 장미 향유가 떠다니는 뜨거운 욕조 안으로 거대한 몸을 담갔다.출렁, 묵직한 물소리와 함께 따뜻한 물이 대리석 바닥으로 넘쳐흘렀다.세레나는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얇은 백색 실크 가운 자락을 스스로 풀어 내렸다.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눈부신 나신이 수증기 속에서 온전히 드러나는 순간, 칼릭스의 금빛 눈동자가 빨갛게 불타올랐다. 여인은 사내의 시선을 당당하게 받아내며 물속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따뜻한 물결을 가르며 사내의 단단한 허벅지 위로 마주 앉은 세레나가, 물에 젖은 손으로 칼릭스의 넓은 가슴팍에 새겨진 깊은 칼자국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이 흉터들을 볼 때마다 생각하곤 했다.”세레나의 손끝이 사내의 심장 위를 지그시 눌렀다.“수많은 사지를 헤집고 다니며 피를 흘리던 이 무모한 짐승이, 행여 내 눈앞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숨이 끊어지면 어쩌나 하고.”“마마…….”“내일 새벽이면 너는 다시 그 지옥 같은 골짜기로 들어간다. 에드윈의 목을 따오는 것은 당연한 임무이나, 그보다 더 중요한 내 명령을 똑똑히 새겨라.”세레나는 사내의 젖은 잿빛 머리칼을 움켜쥐어 고개를 들게 했다.여인의 서늘한 벽안이 사내의 흔들리는 동공을 깊숙이 파고들었다.“상처 하나 입지 말고, 피 한 방울 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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