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고결한 주인님, 벌을 받으셔야지요: Chapter 71 - Chapter 79

79 Chapters

71화

“사제님은……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세레나의 서늘한 벽안이 미카엘의 얼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이토록 거친 손을 지니고, 피 냄새를 두려워하지 않는 눈빛을 하고 계시면서…… 어째서 이런 외진 성당의 사제로 계시는 겁니까.”그러나 미카엘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사제는 그저 입가에 엷고 쓸쓸한 호선을 그릴 뿐이었다. 침묵. 자신의 과거나 정체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조차 흘리지 않는 완벽한 방어벽이었다.“저는 그저 자매님의 기도를 들어주는 그릇일 뿐입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몸을 뉘이십시오.”미카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묵례를 올렸다.자신의 모든 패를 까발린 세레나와 달리, 사내는 짙은 안개 속으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콰아아앙—!같은 시각, 수백 리 떨어진 북부 마수 골짜기.성당의 고요함과는 정반대로, 이곳은 핏빛 비명이 메아리치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크아아악!”칼릭스의 흑철 대검이 거대한 호를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전갈의 두개골을 부수고 회전했던 검날이 짓쳐 들던 세 마리의 기형 독사 몸통을 단숨에 동강 내버렸다. 검은 핏물이 사내의 흑철 갑주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치이익, 치익!“큭……!”사내의 어깨 견갑 틈새로 튄 맹독의 산성액이 살갗을 파고들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살이 타들어 가는 극심한 고통이 뇌리를 찔렀으나, 칼릭스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금빛 눈동자를 더욱 흉포하게 번뜩이며 다가오는 독전갈의 집게발 밑으로 파고들었다.콰직!단검을 거꾸로 쥐어 전갈의 턱밑 연약한 살점에 쑤셔 박고, 사내는 대검의 손잡이 끝으로 놈의 관절을 짓이겨 꺾어버렸다.“주군! 뒤쪽입니다!”다니엘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암벽 틈새에서 또 다른 전갈 떼와 뱀 무리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셋, 넷, 다섯…… 결사대 기사들의 방패는 이미 독액에 녹아내려 너덜너덜해졌고, 바닥에 쌓인 마수의 시체만큼이나 부하들의 호흡도 위태롭게 가빠지고 있었다.“빌어먹을, 끝이 없군……!”칼릭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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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콰아아앙—!무너져 내린 암벽 파편과 자욱한 흙먼지 너머로 칼릭스의 육중한 신형이 우뚝 버텨 섰다.사내의 손에 쥐인 흑철 대검이 삭풍을 가르며 거대한 반월을 그렸다. 바위를 부수고 뛰쳐나오던 독전갈의 대가리가 박살 나며 검푸른 체액이 사방으로 비산했다.“뛰어라! 뒤를 돌아보지 마라!”칼릭스의 포효가 협곡의 암벽을 사납게 울렸다.다니엘과 살아남은 병사들은 사내가 피와 쇠로 가로막아낸 퇴로를 향해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러나 탈출구를 향해 질주하면서도 다니엘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뒤편의 주군을 향했다.사태는 절망적이었다.협곡의 갈라진 틈새마다 붉은 안광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지반이 무너져 내린 잔해를 뚫고, 쇠판보다 단단한 집게발과 비늘을 번뜩이는 뱀 떼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열 마리, 스무 마리, 쉰 마리…… 끝이 보이지 않는 마수의 해일이었다.칼릭스는 홀로 그 맹독의 아가리 한가운데 갇혀 있었다.사내의 대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서너 마리의 마수가 토막 나 허공으로 튀어 올랐으나, 빈자리는 배가 넘는 마수들로 즉각 메워졌다. 칼날을 휘두를 최소한의 궤적조차 주어지지 않는 포위망.‘안 돼……!’다니엘의 눈동자가 두려움과 경악으로 커졌다.거대한 독전갈 두 마리가 칼릭스의 양다리를 집게발로 틀어쥐며 바닥으로 끌어내렸고, 기형 독사 대여섯 마리가 사내의 흑철 갑주를 칭칭 감아 올리며 검을 쥔 오른팔을 옭아맸다.“크아아악—!”칼릭스가 팔근육을 폭발시키며 뱀의 대가리를 뜯어내려 했으나, 또 다른 거수가 사내의 어깨를 짓누르며 덮쳐들었다.다니엘이 마지막으로 목격한 칼릭스의 모습은, 수십 겹으로 엉겨 붙은 괴물들의 살덩어리에 파묻혀 대검조차 쳐들지 못한 채 바닥으로 짓눌리는 사내의 처절한 실루엣이었다.“주군—!”다니엘의 목구멍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사내는 고삐를 틀어쥐듯 검을 쥐고 홀로 주군을 향해 몸을 던지려 했다.“놓아라! 주군이 저곳에 계신다! 주군—!”“부관님! 안 됩니다!”“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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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저희 꼴을 좀 보십시오! 방패는 전부 녹아 사라졌고, 열다섯 명 중 멀쩡히 칼을 쥘 수 있는 놈은 서넛도 채 되지 않습니다! 해독제도 바닥났습니다! 이 꼴로 다시 기어 들어가는 건 구출이 아니라…… 그냥 다 같이 개죽음을 당하러 가는 짓입니다!”“닥쳐라!”다니엘이 검끝으로 기사의 목을 겨누며 포효했다.“주군께서 아직 저 안에 계시는데, 내 목숨 아깝자고 발을 빼란 말이냐?! 따라오기 싫은 놈들은 여기서 꺼져라! 나 혼자라도 들어갈 테니!”다니엘이 거침없이 협곡을 향해 발을 내딛던 바로 그 순간, 가장 연배가 깊은 베테랑 기사가 다니엘의 앞을 막아서며 거칠게 어깨를 틀어쥐었다.“혼자 들어가서 죽으면 그게 충성입니까?!”단단한 일갈에 다니엘의 발걸음이 멈칫했다.“주군께서 목숨을 걸고 우리를 살려 보내신 이유가 고작 부관님의 헛된 죽음을 보기 위해서였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몰살당하면, 북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황도에 누가 전합니까?”기사의 목소리에 서슬 퍼런 결기가 서려 있었다.“지금 당장 백작저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마께 이 참상을 알리고, 백작저에 대기 중인 정규 기사단 전체를 끌고 와야 합니다! 골짜기 전체를 통째로 불사르고 갱도를 갈아엎어서라도 주군을 찾아내야 한단 말입니다!”‘마마께…… 알린다.’그 한마디가 다니엘의 굳어버린 심장을 무겁게 내리쳤다.주군을 사지에 버려두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끔찍한 수치심이 온몸을 짓밟았다. 그 여인에게 무슨 낯으로 주군의 패배를 고할 것인가. 공녀의 그 무너져 내릴 절망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그러나 미련한 죽음보다는, 차라리 주인의 발치에 엎드려 목이 잘려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군사를 끌고 와서 칼릭스의 시신이라도 찾아가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으윽.”다니엘은 피가 배어 나오도록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꺾었다.검을 칼집에 거칠게 쑤셔 박은 사내가 말안장에 몸을 던졌다.“전원, 말을 타라.”다니엘의 목소리는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나온 것처럼 낮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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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세레나의 가슴 밑바닥이 지옥 끝으로 추락하는 듯한 통증이 덮쳐왔다. 손끝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며 전신이 얼어붙었다.지금 당장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마당으로 뛰쳐나가 사내의 이름을 부르짖고 싶었다. 그를 찾아 울부짖고 싶었다.하지만 세레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를 꽊 깨물며 흔들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집무실 중앙의 높은 공녀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가문의 복권을 코앞에 둔 아르젠트의 유일한 후계자.그 어떤 절망 앞에서도 나약함을 드러내선 안 되는 군주의 가면을 억지로 덮어썼다.턱을 치켜들고, 서늘한 벽안을 허공에 박아 넣은 채, 세레나는 옥죄어오는 심장을 부여잡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밖이 잠시 소란스럽더니 호위 병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마님! 부관 다니엘 기사가 마마님을 알현하고자 하옵니다!”“들라하라!”피비린내와 메스꺼운 탄내를 온몸에 뒤집어쓴 다니엘이 비틀거리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내의 흉갑은 산성액에 녹아 흉측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얼굴은 눈물과 핏자국으로 얼룩져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저벅, 털썩!다니엘은 세레나의 발치쪽 바닥으로 제 몸을 거칠게 내던지며 엎드렸다.이마를 바닥에 사정없이 찧는 둔탁한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마마……! 죽여주십시오……! 소인을 당장 참형에 처해 주십시오……!”피눈물을 흘리며 내지르는 다니엘의 울부짖음이 집무실 벽을 타고 처절하게 메아리쳤다.세레나는 깍지 낀 손을 미세하게 떨며, 얼음장 같은 차가운 눈으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칼릭스는? 그를 어디에 두고 네놈 혼자 기어 들어와 이 사단을 떠는 것이냐.”사내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가슴이 찢겨 나가는 통증에 숨이 턱 막혔다.다니엘은 피가 흐르는 이마를 바닥에 처박은 채, 목구멍에서 피를 토해내듯 말을 쥐어짰다.“골짜기 심연에서…… 놈들이 풀어놓은 맹독의 마수 떼에 포위당했습니다……! 놈들의 맹독 침에 방패가 모조리 녹아내리고, 부하들이 학살당하는 지옥이었습니다……!”“그래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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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세레나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마마……!”“거짓말이야……! 그놈이…… 감히 내 허락도 없이……!”세레나는 의자 팔걸이를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러나 사내의 이름을 부르짖으려던 찰나, 온몸의 신경이 사납게 비틀리며 걷잡을 수 없는 경련이 일어났다.손끝에서 시작된 격렬한 떨림이 팔과 어깨, 그리고 여인의 전신을 지배했다.피비린내 나는 참상이 뇌리를 난도질할 때마다 심장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산소가 들어오지 않는 목구멍을 쥐어뜯으며, 여인은 입을 벌린 채 거친 숨을 들이켰다.“컥…… 흑, 흐으……!”단단하게 쌓아 올렸던 얼음 여왕의 가면이 산산조각 났다.눈앞의 집무실 풍경이 피처럼 붉게 물들더니, 이내 칠흑 같은 암흑으로 뒤틀렸다.“마마……? 마마!”다니엘의 경악에 찬 비명이 아득하게 멀어졌다.털썩.세레나의 가녀린 몸이 중심을 잃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여인의 감겨진 눈가 너머로, 투명한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어서 의원을 데려와라. 마마님께서…… 마마님께서 쓰러지셨다, 어서!!”집무실 안은 의식을 잃은 여주인을 둘러싼 기사들의 비명과 소음으로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해버렸다.심연의 밑바닥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암흑.차가운 늪에 온몸이 잠긴 듯 숨이 막혀 왔다. 그 감각 속에서 부서진 기억의 파편들이 불길처럼 일렁였다.아르젠트 공작가가 멸문당하던 날.세레나와 그 가족들뿐만 아니라, 곁에서 시중을 들던 하인들과 끝까지 충성을 맹세했던 친위대의 장교들까지 모조리 사형에 처해졌다.그러나 공작가의 식솔 중 유일하게 목숨을 부지한 세레나는 노예 경매장으로 내던져졌다. 에드윈이 편법을 동원해 그녀를 경매장으로 밀어 넣은 탓이었다.퀴퀴한 곰팡내와 굶주린 귀족들의 추악한 시선, 목덜미를 짓누르는 차가운 쇠사슬의 감촉. 그 모든 것이 숨통을 조이던 순간, 붉은 피를 뒤집어쓴 거대한 사내가 철창을 부수고 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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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살점을 뜯기며 주인의 이름을 부르짖는 그 처절한 단말마가 세레나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발겼다.“칼릭스—!”세레나는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허파가 찢겨 나갈 듯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머리칼이 창백한 뺨에 엉겨 붙어 있었고, 초점 없는 푸른 눈동자는 공포로 짓무른 채 사납게 흔들렸다.“마마! 정신이 드셨습니까!”“의무관! 어서 의무관을 불러라!”침실 안이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시녀들이 눈물을 쏟아내며 달려들었고, 문밖에서 대기하던 다니엘과 의무관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세레나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목덜미를 꿰뚫린 채 제 이름을 부르짖던 사내의 끔찍한 절규가 귓전을 사납게 긁어대고 있었다. 환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지가 찢기면서도 주인의 곁으로 돌아오기 위해 죽음의 문턱을 붙잡고 발버둥 치는 사내의 피눈물 어린 비명이었다.살아있다.그 미련한 짐승은 아직 숨이 붙은 채 지옥 밑바닥에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스륵.세레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비단 이불을 걷어찼다.“마마! 안 됩니다! 아직 몸도 가누지 못하십니다!”시녀장이 사색이 되어 세레나의 어깨를 붙잡았으나, 세레나는 매서운 손길로 그녀를 뿌리쳤다.“비켜라.”“마마, 제발 진정하십시오! 사흘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계셨습니다. 이 상태로 거동하시면 목숨이 위험합니다!”문앞을 지키던 다니엘과 기사들까지 무릎을 꿇으며 앞을 가로막았다.세레나는 비틀거리는 다리로 바닥을 디뎠다. 다리에 힘을 주기 위해 입술을 깨물자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여인의 푸른 눈동자에 서슬 퍼런 광기가 번뜩였다.“내 사내가…… 그 멍청한 짐승이 살점을 뜯기며 울부짖고 있다.”세레나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차가운 침실의 공기를 얼려버렸다.“비키라고 했다. 내 앞을 막아서는 자는 그 누구든 목을 벨 것이다.”살을 에는 듯한 군주의 위압감에 기사들이 숨을 집어삼키며 길을 열었다.세레나는 맨발에 가까운 걸음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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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세레나의 갈라진 목소리가 성당의 적막을 떨며 갈랐다. 여인은 비틀거리며 제단을 짚고 일어섰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입술 새로 피 맛이 번져 났다.“당신이…… 그걸 어떻게 압니까. 황도의 정예 기사들이 전부 녹아내리고, 마수 떼에 사지가 짓눌려 파묻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당신이 대체 무슨 수로 사내의 생사를 안단 말입니까!”날카로운 불신과 발악에 가까운 추궁 속에서도 미카엘의 얼굴에는 한 점의 동요도 일지 않았다.사제는 말없이 몸을 돌려 제단 뒤편, 어두운 기둥 그늘 속으로 걸어갔다.화강암 벽면과 거의 구분이 가지 않던 낡은 석벽의 틈새를 그가 힘주어 밀어내자, 삐걱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만한 작은 참나무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미카엘이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따라오십시오.”세레나는 젖은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홀린 듯, 혹은 낭떠러지 끝에서 내밀어진 밧줄을 낚아채듯 혹여나 하는 심정으로 여인은 사제의 뒤를 쫓아 어두운 문지방을 넘었다.계단을 몇 걸음 내려서자 다섯 평 남짓한 비좁은 방이 나타났다.벽면의 틈새로 스며든 희미한 달빛과 작은 호롱불 하나만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제가 기거하는 누추한 처소입니다.”미카엘의 담담한 소개대로, 방 안은 지나치리만치 간소했다. 한구석에 놓인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 침대 하나, 그리고 원목 책상과 투박한 의자 한 개가 전부였다.하지만 세레나의 시선은 책상 한가운데에 고정되었다.서책더미 사이에 홀로 놓인 물건.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의 투명한 수정 구슬이었다. 구슬을 받치고 있는 것은 정교하게 깎아낸 은은한 비취빛의 옥 받침대였다. 낡고 소박한 방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옥 받침대와 수정 구슬 주위로는 기이할 정도로 맑고 신비로운 한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미카엘은 책상 앞의 낡은 의자를 조용히 뒤로 빼냈다.“앉으십시오.”세레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의자에 주저앉듯 몸을 뉘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사납게 요동쳤다.미카엘은 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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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오만하던 공녀의 기품은 온데간데 없었다. 여인은 수정 구슬에 비친 사내의 피투성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으며 짐승처럼 통곡했다.흘러내린 눈물이 옥 받침대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고, 세레나의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비좁은 방 안을 사납게 뒤흔들었다.비좁은 방 안을 가득 메우던 처절한 오열의 틈새로, 낮고 서늘한 음성이 파고들었다.“구하고 싶으십니까?”세레나는 숨을 턱 들이켜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짓무른 여인의 시선이 책상 너머에 우뚝 선 미카엘에게 닿는 바로 그 찰나였다.스르륵.피비린내 나는 마수 골짜기와 뱀 떼에 짓눌려 신음하던 사내의 참상이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수정 구슬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보랏빛 독무가 잔잔한 우윳빛 안개로 가라앉더니, 이내 맑고 투명한 유리알로 되돌아왔다.사내의 모습이 지워졌음에도, 세레나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지옥의 잔상이 핏빛으로 낙인찍혀 있었다.“……그를 구할 방도가, 있단 말씀이십니까?”여인의 떨리는 음성이 방 안의 공기를 기묘하게 흔들었다.단순한 의문이 아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자의 처절함과, 만에 하나 거짓일 경우 상대의 목을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한 서슬 퍼런 살기가 뒤엉킨 목소리였다.미카엘은 즉답을 내놓지 않았다.사제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방 한구석에 놓인 낡은 나무 침대로 걸어갔다. 삐걱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사내의 어깨 위로 희미한 달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았다.사제는 제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바닥을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처음부터 이런 외진 곳의 버려진 사제였던 것은 아닙니다.”담담한 고백이었다.“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저는 제국 대성당에서 가장 앞날이 촉망받던 젊은 사제였습니다. 고위 성직자들의 총애를 받았고, 교단의 요직을 거쳐 주교의 자리까지 오를 것이라 모두가 의심치 않았지요.”미카엘의 입가에 엷고 메마른 자조가 스쳤다.“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제게 기이한 능력이 임했습니다.”세레나의 푸른 눈동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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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주교는 저를 보호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지위와 안위를 위협하는 괴물을 교단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저는 하룻밤 사이에 모든 직위를 박탈당한 채, 신도들의 발길조차 닿지 않는 이 버려진 외곽 성당으로 쫓겨났습니다.”모든 패를 털어놓은 미카엘은 침대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사내의 깊은 회색 눈동자가, 촛불 아래서 눈물에 젖은 채 번뜩이는 세레나의 벽안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방 안에는 침착하면서도 숨 막히는 침묵만이 감돌았다.세레나는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배어 나왔으나, 그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사내의 과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교단에서 버림받은 파계승이든, 이단으로 몰린 괴물이든 상관없었다. 오직 하나,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의 진실뿐이었다.세레나는 책상을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눈물 자국이 선명한 여인의 뺨 위로, 다시금 얼음 여왕의 서슬 퍼런 집착과 광기가 타올랐다.“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신부님.”여인의 갈라진 음성이 어둠 속을 날카롭게 베어 물었다.“과연 지금…… 당신의 그 저주받은 눈에, 그 사내를 사지에서 건져 올릴 방도가 떠오른단 말씀이십니까?”미카엘은 즉시 입을 열지 않았다.호롱불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침대 머리맡에 길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사제의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서늘한 정적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거친 손가락을 맞물린 채 고뇌에 잠겨 있던 그가, 마침내 침묵을 찢고 짓씹듯 말을 토해냈다.“……저와 함께, 의식을 치르셔야 합니다.”세레나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굳어졌다.“의식이라니. 어떤 의식을 말하는 것입니까.”“제 안의 흉을 보고 길을 찾는 눈, 미래를 꿰뚫어 보는 이 저주받은 숨결을…… 자매님께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제 피와 성력의 근원을 당신의 육신에 강제로 심어 넣는 의식입니다.”미카엘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기묘한 열기와 비장함이 엉겨 붙었다. 사제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차가운 진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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