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우리 사이에 이름은 없다.: Chapter 61 - Chapter 70

79 Chapters

61화. 너도 하면 되잖아

전화가 울린 건 메시지를 보낸 지 채 십 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장혁은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박승철.무시.끊겼다.다시 울렸다.무시.세 번째.“아, 씨발.”결국 받았다.“왜.”—야! 너 방금 뭐라고 했냐?“뭘.”—사진 더 보내달라며!“그래서?”수화기 너머로 승철이 호들갑을 떨었다.—미친 새끼. 드디어 사람답게 살려고?“끊는다.”—잠깐! 이번 주 토요일 어때?장혁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예전 같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싫어.귀찮아.둘 중 하나였을 테니까.“……그래.”—뭐?“한다고.”—진짜?“안 해.”—아니! 해! 씨발, 해!장혁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잠시 후 사진과 함께 프로필이 날아왔다.윤하진. 서른한 살.시청 문화관광과.장혁은 사진을 한 번 보고 화면을 껐다.괜찮아 보였다.그게 전부였다.다음 날 점심.세 사람 단톡방이 요란하게 울렸다.[경축][장혁 드디어 소개팅함]장혁이 바로 답했다.[박승철 뒤진다]그리고—[????????]로로였다.[진짜?ㅋㅋㅋㅋㅋㅋ][헐][야 누구야][예뻐?]장혁의 손가락이 멈췄다.[왜.][궁금하니까][우리 혁이가 여자 만난다는데 봐야지ㅋㅋ]우리 혁이.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말이 오늘따라 거슬렸다.곧 승철이 신나서 끼어들었다.[사진 있음][보내봐ㅋㅋㅋ][박승철 보내면 죽인다][왜ㅋㅋㅋㅋ]잠시 뒤 로로에게 개인 메시지가 왔다.[사진 받음]장혁이 미간을 찌푸렸다.[그 새끼 진짜 죽인다][근데 예쁨][니가 왜 평가해][예쁘니까 예쁘다 하지]그리고 바로—[야 잘해봐ㅋㅋ]장혁은 화면을 한동안 내려다봤다.기분이 더러웠다.이유는 너무 잘 알아서 더 더러웠다.결국 장혁이 전화를 걸었다.—왜?“너 진짜 아무렇지도 않냐?”—뭐가?진짜 모르는 목소리였다.“내가 여자 만나는 거.”—어.“……상관없어?”잠시 침묵.그리고 로로가 웃었다.—당연하지.“…….”—내가 네 여친도 아닌데?장혁은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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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상관없는 사이

[좋은 아침이에요 :)]아침 일곱 시 사십 분.장혁은 침대 위에서 휴대폰을 내려다봤다.윤하진.어제 소개팅 이후로 몇 번 메시지를 주고받았다.[네. 좋은 아침입니다.]답장을 보내자마자 다른 알림이 올라왔다.[야]한로로.장혁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왜.][이번 주 언제 됨][목요일.][콜][퇴근하고 감]그뿐이었다.장혁은 두 개의 채팅창을 번갈아 봤다.분리하면 된다.로로가 그렇게 말했다.연애는 연애대로.친구는 친구대로.몸은 몸대로.말로는 쉬웠다.목요일 저녁.마지막 손님이 나간 건 여덟 시 십 분이었다.딸랑—“야.”로로가 편의점 봉투를 흔들며 들어왔다.“왜 이렇게 늦게 끝나.”“예약 있다 했잖아.”“배고파.”“밥 안 먹었어?”“먹었지.”“근데?”“또 배고파.”“돼지.”“사십 킬로한테 할 말이냐?”로로가 작업대 앞에 앉아 삼각김밥을 뜯었다.장혁은 맞은편에 기대섰다.“야.”“왜.”“하진 씨랑 언제 또 만나?”장혁의 눈썹이 꿈틀했다.“너 왜 이렇게 관심 많아.”“친구 연애사업이 궁금하잖아.”“내가 너랑 기태 연애하는 거 그렇게 물어보냐?”“물어보잖아.”“내가 언제.”“가끔.”로로가 우유를 마셨다.“그래서 언제?”“토요일.”“오.”그 짧은 감탄에 장혁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좋냐?”“뭐가?”“내가 여자 만나는 게.”“싫을 이유가 있어?”즉답이었다.장혁은 혀끝으로 볼 안쪽을 눌렀다.“서운이랑 헤어지고 계속 혼자였잖아.”로로가 웃었다.“좋은 사람 만나면 좋지.”“…….”“이번엔 오래 가고.”장혁이 테이블 위에 있던 물병을 집었다.뚜껑을 여는 손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빠각.“야.”로로가 쳐다봤다.“너 뚜껑이랑 싸우냐?”장혁은 대답 없이 물을 마셨다.“근데.”로로가 턱을 괴었다.“하진 씨랑 진짜 만나게 되면 말해.”“왜.”“우리도 규칙 좀 바꿔야 하나?”장혁의 시선이 로로에게 꽂혔다.“뭘.”“애인 생기면 이런 거 계속해도 되는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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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두 번째 데이트

토요일 오후 세 시.장혁은 거울 앞에 서 있었다.검은 티셔츠.검은 바지.검은 재킷.잠시 내려다보다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우웅—휴대폰이 울렸다.[한로로][야]장혁은 신발을 신으며 답했다.[왜.][오늘 하진 씨 만나지?]손이 멈췄다.[어.]곧바로 답장이 왔다.[뭐 입음]장혁의 미간이 구겨졌다.[뭔 상관.][소개팅 애프터 가는데 또 시커멓게 입었지]장혁이 자기 옷을 내려다봤다.[닥쳐.][맞네ㅋㅋㅋㅋㅋ][사진 보내봐][싫어.]이번에는 전화가 걸려왔다.장혁은 한숨을 쉬며 받았다.“왜.”—야, 사진.“미쳤냐?”—봐준다니까.“안 봐줘도 돼.”—하진 씨한테 예의가 있지. 맨날 장례식장처럼 입고 다니면 어떡해.“내 옷이 어때서.”—넌 얼굴이 이미 무서워서 옷이라도 밝아야 돼.“끊는다.”—야야야, 잠깐!장혁이 정말 전화를 끊었다.잠시 뒤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남자용 베이지색 재킷.[이런 거 하나 사][싫어.][존나 잘 어울릴 것 같은데][네 남친이나 입혀.][기태 이런 거 있음ㅋㅋ]장혁의 손가락이 멈췄다.괜히 물어봤다.[안 궁금함.]휴대폰을 주머니에 처박았다.“씨발.”“장혁 씨.”하진이 먼저 와 있었다.청바지에 얇은 니트.지난번보다 훨씬 편한 차림이었다.“오래 기다렸어요?”“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하진이 장혁을 위아래로 훑어봤다.“역시 오늘도 검은색이네요.”장혁이 멈칫했다.“……이상합니까?”“아뇨.”하진이 웃었다.“잘 어울리는데요?”순간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맨날 장례식장처럼 입고 다니면 어떡해.장혁이 헛웃음을 흘렸다.“왜 웃어요?”“아닙니다.”“뭔데요. 궁금하게.”“친구가 똑같은 옷 보고 욕해서요.”“여자분?”장혁의 시선이 하진에게 향했다.“네.”“엄청 친한가 봐요.”“오래됐습니다.”“얼마나요?”“이십 년.”하진의 눈이 커졌다.“와. 거의 가족이네요.”장혁은 대답하지 않았다.가족.친구.그런 이름은 많았다.정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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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보여주고 싶은 마음

월요일 오전.장혁은 예약표를 확인하다 휴대폰을 집었다.윤하진과의 채팅방.[이번 주 수요일 저녁 괜찮아요?]토요일 헤어지면서 다음에는 자신이 먼저 연락하겠다고 했다.그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었다.장혁은 별생각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잠시 후.[좋아요 :)][이번엔 제가 맛있는 거 살게요!]장혁이 답장을 보내려는데—딸랑.“왔냐?”승철이었다.“월요일 아침부터 뭐 하러 왔어.”“민원인한테 처맞기 전에 커피나 마시려고.”“출근이나 해.”승철은 장혁 앞에 앉더니 휴대폰 화면을 힐끗 봤다.“하진 씨?”장혁이 바로 화면을 껐다.“보지 마.”“미친 새끼. 진짜 연락하네?”“한다니까.”“네가 먼저?”“어.”승철의 얼굴에 감격이 번졌다.“장하다.”“뒤진다.”“로로 알면 좋아하겠네.”장혁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걔 얘기가 왜 나와.”“걔가 제일 신났잖아.”“…….”“어제도 나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더라. 잘됐냐고.”장혁이 커피잔을 내려놨다.탁.“걔는 할 일이 없냐?”“왜 나한테 지랄인데?”“시끄러워.”승철이 눈을 가늘게 떴다.“너 왜 로로가 하진 씨 물어보면 맨날 성질내냐?”“안 내.”“지금도 내잖아.”“출근 안 해?”“간다, 씨발.”승철이 일어나며 중얼거렸다.“하여튼 둘 다 지랄 맞아.”문이 닫혔다.장혁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하진의 채팅방을 열었다가—이번에는 로로의 채팅방을 열었다.마지막 메시지.[이번엔 진짜 연애하겠는데?][좋은 사람 만나면 좋은 거지][너 내 친구잖아]장혁이 혀끝으로 볼 안쪽을 눌렀다.그러다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쳤다.[야.]답장은 금방 왔다.[왜][나 수요일 하진이 만나.]잠시 뒤[오ㅋㅋㅋ][또?]장혁의 손가락이 멈췄다.또?고작 한 글자인데.심장이 먼저 반응했다.[왜.][뭐가][왜 또냐고.][벌써 세 번째잖아ㅋㅋ][그래서.]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뭐가 그래서야][잘되고 있네ㅋㅋ]장혁의 표정이 굳었다.그 ‘또’가 아니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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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네가 먼저 말했잖아

목요일 저녁 여덟 시 십 분.타투샵 문이 열렸다.딸랑—“배고파.”장혁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밥집 아니야.”“알아.”로로가 편의점 봉투를 카운터 위에 올렸다.“그래서 사 왔잖아.”“냄새나는 거 먹지 마.”“김밥이 무슨 냄새가 나.”“네가 나.“뒤질래?”장혁은 예약 정리를 마저 했다.로로는 익숙하게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야, 내 탄산수 어디 갔어?”“네 게 왜 여기 있어.”“내가 사다 놨잖아.”“내가 먹었어.”“미친놈.”“다시 사놔.”“네가 먹었는데 왜 내가 사.”장혁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너무 평소 같았다.어제 자신이 다른 여자와 손을 잡았다고 말했는데도.오늘도 한로로는 똑같았다.“왜.”로로가 김밥을 우물거리며 물었다.“뭘 봐.”“……아무것도.”“존나 이상하네.”로로는 어깨를 으쓱하고 소파로 갔다.“근데.”잠시 후 로로가 입을 열었다.“하진 씨랑 진짜 잘돼가?”장혁의 손이 멈췄다.“왜.”“궁금해서.”“뭐가 궁금한데.”“그냥. 세 번 만났고 손도 잡았다며.”장혁이 장갑을 쓰레기통에 던졌다.“그게 왜.”“연애할 것 같냐고.”“몰라.”“하진 씨는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네가 어떻게 알아.”“사진 보면 알지.”로로가 휴대폰을 들었다.어제 승철이 보내준 사진이 아직 있었다.“봐봐. 완전 좋아하는 표정이잖아.”장혁은 보지 않았다.“사진 좀 그만 봐.”“왜.”“남의 사진을 뭘 그렇게 봐.”“잘 어울리니까 보지.탁장혁이 펜을 내려놨다조금 세게로로가 눈을 들었다.“왜 화내?”“안 냈어.”“냈는데?”“안 냈다고.“성격 존나 더러워.”로로는 다시 화면을 내려다봤다.“하진 씨 아깝다.”“……뭐?”“성격도 좋아 보이던데 너 같은 걸 왜 만나냐.”장혁의 눈썹이 꿈틀했다.“그렇게 좋으면 네가 만나.”“난 기태 있거든?"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온 이름.장혁은 입을 다물었다.로로는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야.”“왜.”“오늘 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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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이름 있는 사이

토요일 오후.장혁은 하진과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이번이 네 번째였다.소개팅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만났고, 그렇다고 연인이라고 하기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진이 빨대를 빙빙 돌리다 입을 열었다.“장혁 씨.”“네.”“우리 지금 뭐예요?”장혁의 눈이 들렸다.“네?”“계속 소개팅하는 거예요?”하진이 웃었다.“소개팅을 네 번 하는 사람도 있나 싶어서.”장혁은 대답하지 못했다.하진이 먼저 손을 내저었다.“부담 주려는 건 아니에요.”“…….”“그냥 저는 장혁 씨 계속 만나고 싶거든요.”솔직한 말이었다.“장혁 씨도 그러면 좋겠고.”장혁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좋은 여자였다.같이 있어도 불편하지 않았고, 웃는 얼굴도 좋았다.무엇보다—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장혁은 문득 로로를 떠올렸다.좋은 사람 만나면 좋은 거지.너 내 친구잖아.잘해봐.그 말들이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장혁이 입을 열었다.“그럼.”하진이 기다렸다.“만나는 걸로 하죠.”하진의 눈이 커졌다.“진짜요?”“네.”“저 지금 고백받은 거예요?”“그렇게 되는 겁니까?”“아니, 이 사람 진짜.”하진이 웃음을 터뜨렸다.장혁도 희미하게 웃었다.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한로로][야][오늘?]장혁은 화면을 내려다봤다.평소라면—몇 시.어디로.그게 전부였을 메시지.장혁은 맞은편의 하진을 봤다.그리고 답했다.[안 돼.]답장은 바로 왔다.[왜]장혁의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하진이 만나.][아ㅋㅋㅋㅋ][데이트중?][ㅇㅇ.]잠시 뒤.[오케이ㅋㅋ][잘해]장혁은 화면을 껐다.역시나였다.“누구예요?”하진이 물었다.“친구요.”“그 이십 년 친구?”“네.”“로로 씨?”장혁은 잠깐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진짜 한번 보고 싶다.”장혁은 대답 대신 커피를 마셨다.오늘부터 자신과 하진은—친구도.소개팅 상대도 아닌.연인이었다.이름이 생겼다.[잘해]메시지를 보내고 로로는 휴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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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원래 내 자리도 아닌데

한 달이 지났다.그동안 장혁과 하진은 제법 연인 같아졌고—로로와 장혁은 한 번도 자지 않았다.[오늘?][안 돼. 하진이 만나.][금요일은?][약속 있어.]처음엔 로로도 웃었다.[ㅋㅋㅋ 연애하더니 바쁘네]그 뒤로는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장혁에게 여자친구가 생겼으니 당연한 일이었다.대신 로로와 기태 사이에는 싸움이 잦아졌다.이유는 늘 같았다.결혼.“나는 그냥 너랑 가족이 되고 싶다는 거야.”“지금도 가족 같은 거잖아.”“같은 거 말고.”“또 그 얘기야?”처음엔 대화였고, 두 번째는 언쟁이었다.세 번째부터는 서로 먼저 입을 닫았다.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헤어지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그런데 기태가 결혼을 말할수록 로로는 숨이 막혔고, 로로가 피할수록 기태는 상처받았다.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금요일 저녁.[혁이네 갈 건데 올래?]승철의 연락에 로로는 별생각 없이 따라나섰다.기태는 야근이었다.한 달 만의 타투샵.딸랑—“야, 배고—”로로의 말이 멈췄다.카운터 안에 여자가 서 있었다.윤하진.“어? 로로 씨죠?”하진이 먼저 환하게 웃었다.“저 진짜 한번 보고 싶었어요.”“아…… 저도요.”“얘기 많이 들었거든요.”로로가 장혁을 쳐다봤다.“내 욕했냐?”“할 게 한두 개냐.”“뒤질래?”승철이 혀를 찼다.“만나자마자 지랄이네.”하진이 웃음을 터뜨렸다.“진짜 둘이 이렇게 말하는구나.”“뭐래요?”“오빠가 로로 씨 만나면 욕부터 한다고.”오빠.로로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한 달이면 저렇게 부르는구나.“뭐 드실래요?”하진이 물었다.“전 탄산수요.”“아, 그거 있어요.”하진이 자연스럽게 냉장고를 열었다.그리고 익숙하게 병 하나를 꺼냈다.“이거 맞죠?”로로가 늘 마시던 탄산수였다.“……네.”“오빠가 로로 씨 오면 이거 마신다고 사두더라고요.”하진에게 병을 받아드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장혁이 자기 탄산수를 사놓는 건 늘 있던 일이었다.그런데—하진이 그걸 알고 있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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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끝내자

토요일 오후.바다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오빠, 여기 봐봐.”장혁이 고개를 돌리자 하진이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찰칵.“뭐 해.”“사진.”“지워.”“싫어요.”하진이 웃으며 장혁의 팔에 매달렸다.장혁은 떼어내지 않았다.한 달.하진과 연애를 시작한 뒤 많은 게 달라졌다.주말이면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았고, 퇴근 후 함께 저녁을 먹었다.타투샵에 하진의 물건도 하나둘 생겼다.칫솔 하나.머리끈 하나.작은 핸드크림 하나.장혁은 그 변화를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좋다.”하진이 바다를 보며 말했다.“뭐가.”“그냥.”그리고 장혁을 올려다봤다.“오빠랑 온 거.”장혁은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 머리를 쓰다듬었다.하진이 웃었다.좋은 여자였다.그래서 더 이상 어중간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그날 밤.두 사람은 같은 숙소에서 밤을 보냈다.며칠 뒤.로로의 휴대폰이 울렸다.[장혁]로로의 손이 멈췄다.장혁이 먼저 연락한 건 오랜만이었다.[오늘 시간 돼?]로로는 화면을 한참 봤다.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왜][가게 와.]예전 같으면 굳이 이유를 묻지도 않았을 말.그런데 한 달 동안 한 번도 없었다.[몇 시][8시.][ㅇㅋ]휴대폰을 내려놓는데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왜 좋은지는 생각하지 않았다.“나 왔다.”딸랑—타투샵은 조용했다.하진은 없었다.승철도 없었다.장혁 혼자였다.로로가 소파에 가방을 던졌다.“뭐야. 하진 씨는?”“집.”“오늘 데이트 안 함?”“안 해.”“웬일이래.”로로는 냉장고를 열었다.자기 탄산수를 꺼내려다 멈췄다.하진이 건네주던 모습이 떠올랐다.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다른 물을 집었다.“그래서 왜 불렀어?”장혁이 담배를 만지작거리다 내려놓았다.“할 말 있어서.”“뭔데.”장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로로가 눈썹을 찌푸렸다.“뭐야. 무섭게.”“우리.”“응.”“이거 그만하자.”로로의 표정이 멈췄다.“……뭐?”“그만하자고.”그제야 무슨 뜻인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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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왜 다들 나한테 그래

장혁과 관계를 끝낸 지 이틀.로로는 멀쩡했다.적어도 겉으로는.“팀장님, 이거 최종 샘플이에요.”“여기 줘봐.”민지가 건넨 샘플을 받아 든 로로는 확대경을 당겼다.“체인 연결부 다시 잡아. 이대로 양산 들어가면 끊어져.”“네.”“표면도 한 번 더 확인하고.”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일도 했고.밥도 먹었고.기태와 같이 출근했다.그런데 틈만 생기면 자꾸 한 문장이 떠올랐다.하진이랑 잤어.로로가 미간을 찌푸렸다.“씨발.”“네?”민지가 놀라 돌아봤다.“아니야. 나한테 한 말이야.”“……요즘 혼잣말이 좀 험해지셨어요.”“원래 험했어.”로로는 다시 샘플을 들여다봤다.장혁이 하진과 잔 게 뭐.연인인데 당연했다.자기도 기태와 잤다.그런데 정작 걸리는 건 그다음 말이었다.하진이한테 미안해.그래서 끝내자고 했다.한 달 만난 여자에게 미안해서—자기와의 관계를 끝냈다.“……존나 웃기네.”이번에는 민지가 못 들은 척했다.퇴근 후.로로가 집에 들어서자 기태가 주방에서 국을 데우고 있었다.“왔어?”“응.”“씻어. 밥 먹자.”“웬일로 네가 차렸어?”“반찬은 어머니가 주신 거야.”“역시.”“야.”로로가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며칠 만에 집 안 분위기가 조금 괜찮았다.두 사람은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이거 맛있다.”“어머니가 네가 좋아한다고 싸주신 거야.”“진짜?”“응. 그리고 이번 주말에 시간 되면 같이 오라시던데.”로로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면 되지.”“토요일?”“응.”기태가 잠깐 머뭇거렸다.“근데 어머니가 또 물어보시더라.”“뭘?”“우리 결혼 언제 할 거냐고.”로로의 젓가락이 멈췄다.기태가 바로 덧붙였다.“내가 아무것도 정해진 거 없다고 했어.”“……응.”“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로로는 다시 밥을 먹으려 했다.그런데 기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근데 로로야.”그 한마디만으로 알 것 같았다.“왜.”“나도 계속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고만 말하기는 좀 그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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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예전처럼

다음 날 밤.로로는 타투샵 건너편에 서 있었다.왜 왔는지는 자신도 몰랐다.어젯밤 기태와 싸웠고.장혁에게 전화하려다 말았고.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더러웠다.그래서 퇴근하고 무작정 여기까지 왔다.그런데 들어가지는 못했다.유리창 너머로 하진이 보였으니까.장혁도 있었다.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하진이 계속 웃었다.로로는 괜히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내가 왜 숨어 있어.’들어가면 된다.친구 가게인데.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십 분쯤 지났을까.문이 열렸다.하진이 먼저 나왔다.“들어가요. 추워.”“택시 올 때까지 있을게.”장혁이었다.잠시 후 택시가 도착했고 하진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전화할게요, 오빠.”“집 가서 해.”하진이 차에 올라탔다.장혁은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로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봤다.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나와.]곧 답장이 왔다.[어디.][앞.]장혁이 고개를 들었다.도로 건너편의 로로를 발견한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언제 왔어.”“좀 됐어.”“그럼 들어오지.”“하진 씨 있잖아.”장혁이 로로를 한번 쳐다봤다.“있으면 못 들어와?”“그런 건 아니고.”로로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장혁이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꺼내 건넸다.여전히 자기 것이 있었다.그게 또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렸다.“기태랑 싸웠어.”장혁의 손이 잠시 멈췄다.“왜.”“결혼.”“또?”“응.”로로가 물병을 굴렸다.“이번엔 부모님 만나서 제대로 얘기하재.”“그래서.”“싫다고 했지.”“왜.”로로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내가 결혼 싫어하는 거 몰라?”“알아.”“근데 왜 물어.”장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러다 담담하게 말했다.“그냥 해.”“뭘?”“결혼.”로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뭐?”“기태 좋아하잖아.”“좋아하지.”“삼 년 만났고. 같이 살고. 헤어질 생각도 없다며.”“그래.”“그럼 하면 되잖아.”로로는 한동안 장혁을 쳐다봤다.“너까지 왜 지랄이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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