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Chapter 91 - Chapter 100

140 Chapters

제91화. 하루의 순서

일요일 아침, 태주는 봄이의 머리를 빗기다 두 번이나 고무줄을 떨어뜨렸다.“아빠 오늘 이상해.”“왜.”“땋은 데가 한쪽만 뚱뚱해.”거울을 보니 정말 그랬다. 태주는 묶은 머리를 풀었다. 봄이가 한숨을 쉬며 빗을 빼앗았다.“그냥 하나로 해. 할머니 집 늦겠어.”태주는 낮게 웃고 아이의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명자에게는 전날 전화를 해 두었다. 현장에 일이 생겼다는 말도, 회사 사람을 만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서연과 만나기로 했다고 했다.명자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봄이를 데려오라고 했다.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이 앞에서 싸우지는 않겠다는 뜻에 가까웠다.현관에서 봄이의 가방을 건네자 명자가 태주를 보지도 않고 물었다.“몇 시에 올 거냐.”“저녁 먹기 전에는 올게.”“어디 멀리 가?”“아니. 서연이 출발 준비 좀 돕고 밥 먹으려고.”명자의 손이 가방 끈에서 멈췄다.“그 애 만나러 간다는 말을 내 앞에서 그렇게 쉽게 하니?”“쉽게 하는 거 아니야. 거짓말 안 하기로 했어.”“누구하고.”“서연이한테도 말했어. 엄마한테 출장 간다고 둘러대고 만나러 가진 않겠다고.”명자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봄이가 신발을 벗고 먼저 거실로 들어갔다. 아이가 멀어진 뒤에야 명자가 목소리를 낮췄다.“내가 오늘 봄이를 보는 건 너희 둘 좋으라고 그러는 거 아니다.”“알아.”“애가 주말마다 아빠 사정 때문에 이 집 저 집 다니게 만들지 마.”“오늘은 내가 먼저 물었고, 봄이가 할머니랑 점심 먹고 싶다고 해서 온 거야. 다음에도 당연히 맡기지 않을게.”명자는 그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다만 문을 닫기 전, 6시는 넘기지 말라고 했다.서연은 원룸 바닥에 상자를 세 개 펼쳐 놓고 있었다. 여름옷, 업무 자료, 두고 갈 물건. 종이마다 검은 펜으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태주가 문턱에 서서 물었다.“내가 뭐 하면 돼?”“옷 접어 달라고 하면 이상할 것 같고.”“왜.”“형부한테 속옷까지 정리해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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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떠나는 사람의 자리

출발하는 날 아침, 서연은 알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방 한쪽에 세워 둔 여행가방은 어젯밤과 같은 모습이었다. 욕실에서 마지막으로 쓸 칫솔과 충전기만 넣으면 됐다. 서연은 냉장고에서 달걀 두 개와 우유를 꺼내 아침을 준비했다. 다 먹지 못한 것은 남겨 두지 않고 정리했다. 한동안 비울 냉장고 선반이 비었다.미경에게서 7시 40분에 메시지가 왔다.‘숙소 열쇠는 중개사무소에서. 매장 열쇠는 월요일에 건물주랑 인수.’서연은 확인했다고 답했다. 태주의 메시지는 없었다. 역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있으니 굳이 잠에서 깨우지 않은 모양이었다.등교 시간이 되기 전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봄이가 두 손으로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태주는 한 걸음 뒤에서 여행가방을 받으려고 손을 뻗다가 멈췄다.“내가 들까?”“현관 턱까지만요.”서연은 가방 손잡이를 넘겼다. 대신 메고 있던 노트북 가방은 그대로 두었다.봄이의 종이봉투 안에는 지우개 하나와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문구점에서 샀던 것과 같은 커다란 지우개였다.‘이모 일할 때 틀리면 지우세요.’받침 하나가 빠져 있었지만 고쳐 주지 않았다.“이모가 틀린 게 너무 많으면 어떡해?”“반으로 잘라서 써. 안 부서지게.”“그럼 봄이도 반 가져.”“나는 새 거 있어.”봄이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 것을 이미 챙겨 놓았으니 이것은 온전히 이모 몫이라는 얼굴이었다.태주는 봄이가 오늘 학교에 가기 전 원룸에 들르고 싶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지각하지 않게 바로 출발해야 했다. 서연은 아이를 오래 붙잡지 않았다.“가서 전화해도 돼?”봄이가 물었다.“응. 하고 싶은 날 해. 바쁘면 이모가 나중에 다시 할게.”“매일은 안 해도 돼?”“당연하지.”봄이는 안도한 듯 발끝으로 바닥을 한 번 긁었다. 기다리겠다는 말도, 빨리 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주 받아쓰기에서 백 점을 받을 거라고 했다.서연은 아이를 안았다가 먼저 놓았다. 태주가 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역으로 오기로 했다.혼자 남은 원룸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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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문을 여는 사람

월요일 오전 9시, 서연은 건물주에게서 매장 열쇠 두 개를 받았다.하나는 유리문, 하나는 뒤편 창고 열쇠였다. 열쇠마다 색이 다른 고무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서연은 인수 확인서에 흠집과 조명 불량을 적고 건물주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빈 매장에 발소리가 울렸다.“이틀이면 물건 다 들어옵니까?”“큰 진열장은 오늘 오후에 와요. 상품은 내일부터 나눠 들어오고요.”건물주는 불이 깜박이는 천장 쪽을 올려다보았다.“저건 전기 부르세요. 영수증 주면 정산하고.”지난번 팝업 때는 백화점 시설팀에 전화하면 됐다. 이번에는 누구에게 무엇을 맡길지부터 서연이 정해야 했다. 서연은 전기업체에 연락하고, 현지 직원 둘에게 창고 구역표를 보냈다.10시가 지나자 진열장 배송기사가 전화를 했다.“차가 골목으로 못 들어가는데요.”도면에는 화물차 진입 가능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연이 밖으로 나가 보니 맞은편 가게가 내놓은 적재물이 골목 절반을 막고 있었다. 기사와 가게 주인이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서연은 둘 사이에 끼어 사과부터 하지 않았다. 건물 관리인에게 전화해 적재 허용선을 확인하고, 기사에게는 한 블록 뒤 하역 공간으로 이동해 달라고 했다. 작은 물건은 손수레로 먼저 옮기고 큰 판은 관리인이 통로를 확보한 뒤 들였다.점심은 포장 김밥으로 때웠다. 사진을 보내려다 말았다. 태주는 현장 점심시간일 것이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남은 김밥을 먹으며, 오후에 직원들에게 알려 줄 반품 처리 순서를 다시 읽었다.오후 2시에는 첫 직원인 수진이 왔다. 생활용품 매장 경력은 없었지만 근처 옷가게에서 계산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서연은 반품 접수와 온라인 주문 연동부터 설명했다.“매장 손님 먼저 보고 온라인은 밀리면 본사에 넘기는 거 맞죠?”“네. 마감하고 혼자 다시 처리하는 방식은 안 해요. 넘길 시간 기준도 같이 정할게요.”서연은 자신이 미경에게 요구했던 조건을 직원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말로만 야간 업무를 막는 것이 아니라 오후 6시 이후 접수분이 자동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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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취소된 표

6월 마지막 주 토요일은 서연이 대전에 내려온 뒤 처음으로 둘이 함께 보내기로 한 휴무였다.태주는 열흘 전에 오전 열차를 예매했다. 명자에게도 미리 말했다.“서연이 보러 대전 다녀올게. 봄이는 오후 미술 수업 끝나면 내가 데리러 올 수 있어.”명자는 못마땅한 얼굴로 달력을 봤다.“그러면 왜 나한테 말해.”“혹시 열차가 늦으면 전화할 수 있다고 미리 말하는 거야. 안 되면 등록 돌봄 선생님께 부탁할 거고.”“그 애 때문에 내가 갑자기 애를 맡을 일은 없다는 거지?”“응. 어머니가 먼저 괜찮다고 한 날 아니면.”명자는 더 묻지 않았다. 태주는 봄이의 미술 가방에 물통과 앞치마를 넣어 두고, 금요일 밤 작은 여행 가방을 꺼냈다.***같은 시각, 서연은 매장 창고에서 젖은 종이 상자를 들어내고 있었다.장마가 시작되며 뒤편 배수구가 막혔다. 물이 매장 안까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창고 벽 아래가 젖었다. 건물주와 시설업체가 와서 배수구를 뚫었고, 서연과 직원들은 바닥에 둔 물건을 전부 선반 위로 옮겼다.수진이 젖은 바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내일은 제가 열게요. 팀장님 서울 가기로 했잖아요.”“내가 가는 게 아니고 사람이 내려와요.”“그럼 더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서연은 웃으려다 말았다. 일정을 바꾸지 않으려고 월요일부터 근무표를 세 번 확인했다. 그런데 다른 직원이 장염으로 주말 근무가 어렵다는 연락을 보내 왔다. 수진 혼자 개점부터 마감까지 맡길 수는 없었다.서연은 태주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밤 10시가 되기 전이었다.“내일 오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서연은 이유를 길게 늘어놓기 전에 먼저 말했다.“미안해요. 직원 1명이 아파서 수진 씨 혼자 종일 일해야 해. 내가 남는 게 맞아.”“응.”“표 취소해요.”“응.”태주의 대답이 짧았다. 서연은 창고 밖으로 나와 불이 꺼진 매장 계산대에 기대었다.“서운해요?”“서운하지.”그가 바로 말했다.“많이.”가슴이 내려앉으면서도 이상하게 숨은 쉬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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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약속하고 온 사람

태주가 대전행 표를 다시 산 것은 7월 셋째 주였다.이번에는 토요일 오후에 내려와 일요일 첫 열차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봄이는 토요일 오후 미술 수업을 마친 뒤 등록 돌봄 선생님과 저녁을 먹고, 태주가 밤에 없는 날은 명자 집에서 자기로 했다.태주는 명자에게 사흘 전에 말했다.“토요일 오후에 대전 갈 거야. 봄이는 돌봄 선생님이 8시까지 봐 주시고, 어머니가 괜찮으면 그 뒤에 재워 줘.”명자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안 괜찮다고 하면?”“선생님 야간 연장 가능한지 먼저 확인해 뒀어. 아침 첫차 타면 내가 7시 30분까지 와.”“그 애 보러 하룻밤을 비우겠다고?”“응.”“이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네.”태주는 얼굴을 굳혔지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부끄럽지 않다는 말은 안 했어. 숨기지 않겠다는 거야.”명자는 봄이 방 쪽을 보았다. 아이는 책상에 앉아 색종이를 자르고 있었다.“애한테는 뭐라고 했니.”“이모 만나고 온다고 했어. 봄이한테 허락 맡지는 않았고, 자기가 싫다고 말해도 아빠가 정할 일이라고 설명했어.”“그게 자랑이야?”“아니. 내가 정한 일을 애한테 떠넘길 수는 없다는 말이야.”명자는 오래 침묵했다. 결국 토요일 밤은 데려오라고 했다. 대신 일요일 아침 9시까지 데려가라고 했다. 태주는 7시 30분에 돌아오겠다고 다시 확인했다.***토요일 오후, 태주가 매장에 도착했을 때 서연은 손님 앞에서 수납장 조립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그는 유리문 밖에서 잠시 기다렸다. 서연이 계산을 마친 뒤에야 들어갔다.“어서 오세요.”서연이 직원 앞에서 먼저 인사했다.태주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구경 좀 해도 됩니까?”“천천히 보세요.”수진은 그를 일반 손님처럼 보다가 서연이 물 한 병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서연은 소개를 피하지 않았다.“수진 씨, 제 남자 친구예요. 수도권에서 왔어요.”형부라는 설명도, 가족 관계도 덧붙이지 않았다. 수진은 잠깐 놀랐다가 꾸벅 인사했다.“멀리서 오셨네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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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멈춰 있는 동안

8월 둘째 토요일, 정숙과 동식이 대전 매장 앞에 나타났다.연락은 도착 10분 전에 왔다. 서연은 계산대에서 메시지를 읽고 밖을 보았다. 어머니는 종이 가방 두 개를 들고 있었고 아버지는 접이식 손수레를 끌고 있었다.매장 안으로 들어온 정숙은 수진에게 먼저 인사했다.“서연이 엄마예요.”수진이 반갑게 의자를 내주었다. 정숙은 딸이 일하는 모습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서연이 반품된 이불의 지퍼를 확인하고 손님에게 교환 날짜를 설명하는 동안,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진열대를 둘러봤다.점심 교대 시간이 되자 세 사람은 근처 식당으로 갔다.종이 가방에는 열무김치와 멸치볶음이 들어 있었다. 접이식 손수레에는 작은 선풍기가 묶여 있었다.“숙소에 에어컨 있다니까.”“잘 때 계속 틀면 목 아프잖아.”정숙이 반찬통 뚜껑을 다시 눌렀다. 서연은 고맙다고 했다. 부모 집에서 자기 물건을 내보낸 손과 반찬을 싼 손이 같은 손이었다.동식이 물을 따르며 물었다.“그 사람 아직 만나냐.”수저를 놓던 정숙의 손이 굳었다. 서연은 식당 안을 한번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응.”“여기까지 왔다 갔어?”“한 번.”“애는 누가 보고.”“등록 돌봄 선생님이랑 명자 어머니가 봤어. 거짓말하고 맡긴 거 아니야.”“그게 잘했다는 말로 들리니?”동식의 목소리가 커지자 정숙이 팔을 잡았다. 그는 입을 다물었지만 얼굴은 붉었다.“아빠, 나 일하는 데까지 와서 싸우지는 말자.”“그러니까 밖에 나왔잖아.”“나 보러 온 거야, 헤어지게 하러 온 거야?”정숙이 고개를 숙였다.“둘 다야.”짧은 대답이 더 아팠다. 정숙은 딸의 매장이 궁금했고, 밥은 제대로 먹는지 걱정했고, 태주와의 관계는 끝내고 싶었다. 어느 마음도 거짓이 아니었다.“네가 여기서 잘 지낸다는 건 봤어. 일도 잘하고.”정숙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더 묻는 거야. 꼭 그 사람이어야 하니? 네가 혼자서도 이렇게 사는데.”“혼자 못 살아서 만나는 거 아니야.”“알아. 이제 알아서 더 무서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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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보내지 않은 사진

연락을 멈춘 첫 주에는 휴대전화가 자꾸 울리는 것 같았다.서연은 계산대 아래에서 진동을 느끼고 주머니를 확인했다. 화면에는 배송 기사와 본사 메시지만 떠 있었다. 태주의 이름은 없었다.그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자주 확인했다.8월 말, 매장에는 가을 침구가 들어왔다. 여름 상품을 뒤로 옮기고 진열장을 바꾸는 데 이틀이 걸렸다. 수진은 새로 들어온 직원에게 반품 접수 방법을 가르쳤고, 서연은 옆에서 틀린 부분만 고쳤다.“팀장님 없어도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수진이 말했다.“그 말 들으려고 가르친 거예요.”“섭섭하지 않아요?”“내가 계속 다 해야 하면 그게 더 무섭죠.”서연은 웃으며 재고표를 넘겼다. 지난 석 달간 반품률이 높은 품목 옆에 원인을 적었다. 포장 문제, 색상 오인, 설명 부족. 같은 사유가 여러 번 나온 줄에는 표시를 남겼다. 수진에게 넘기기 전에 사진도 찾아 붙여야 했다.퇴근 뒤에는 숙소 근처 수영장에 등록했다. 첫날은 물에 얼굴을 넣는 것도 어려웠다. 자유형을 배우러 간 것이 아니라 온종일 서 있던 다리를 풀러 간 거라고 변명했지만, 강사는 호흡부터 다시 시켰다.서연은 수영모를 쓴 자기 모습을 거울로 찍었다. 태주에게 보내면 분명 웃을 사진이었다.사진을 지우지 않고 자기 폴더에 넣었다.넣은 수영모 사진이 공유 버튼 앞에서 멈췄다. 멈춘 버튼이 보내지 않은 사진이었다.설명도 필요 없는 사진이었다. 이거 봐, 하고 보내면 그가 웃어 줄 것 같았다. 서연은 공유 버튼을 닫고 수영모를 벗었다. 젖은 머리에서 물이 떨어져도 한동안 수건을 들지 않았다.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부재중 전화가 하나 있었다. 모르는 번호라 다시 걸었더니 매장 고객이었다. 서연은 영업시간이 끝났다고 안내하고 다음 날 수진이 확인할 수 있도록 메모를 남겼다. 예전 같으면 숙소에 돌아가 주문서까지 열었을 일이었다.휴대전화를 엎어 둔 채 혼자 저녁을 먹었다. 외롭다고 해서 다시 일을 끌어오지는 않았다.수도권에서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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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마지막 영업일

11월 마지막 주에는 매장보다 창고가 더 바빴다.팔 수 있는 상품, 본사로 돌려보낼 상품, 흠집이 나 할인할 상품을 나누자 바닥에 색 테이프 선이 생겼다. 서연은 수진과 한 줄씩 재고를 확인했다.“빨래 바구니 회색, 12개.”“11개인데요.”“전산은 12개야.”세 사람은 진열장 아래와 상담 책상 뒤까지 찾았다. 빠진 1개는 고객에게 교환용 새 상품을 내주면서 출고 등록을 빠뜨린 것이었다. 수진이 기록을 찾아내자 서연은 전산 수량을 고쳤다.“제가 처음 접수했네요.”수진이 입술을 깨물었다.“지금 찾았으면 됐어요. 다음 매장에서는 교환 출고 확인도 먼저 넣고.”“다음 매장도 있어요?”본사는 시험매장을 상설점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 계속 둘지, 수도권 외곽으로 옮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미경은 서연에게 본사로 돌아와 운영 매뉴얼을 만들자고 했다.“팀장님은 서울 가면 다시 안 와요?”“와야 하면 오죠. 그런데 여기서 계속 일하는 건 아니에요.”수진은 아쉬운 얼굴로 재고표를 접었다. 서연은 대신 자기 업무를 모두 넘길 수 있는 인수인계 파일을 보여 주었다. 직원 연락망, 건물주 번호, 반품이 잦은 상품, 상담 예약표. 누군가 혼자 알아야 굴러가는 가게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마지막 영업일 오후에는 단골 손님 몇 명이 인사하러 왔다. 작은 화분을 준 사람도 있었다. 서연은 손님들이 돈을 들여 선물을 사 오는 것은 사양했지만, 손님이 집에서 나눠 심었다는 다육이는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저녁 7시, 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 유리문에 영업 종료 안내를 붙였다.수진은 계산대 밑에서 종이 케이크 상자를 꺼냈다. 새로 들어온 직원이 숫자 초 대신 작은 집 모양 초를 꽂았다.“가게 잘 지키고 서울 가라는 뜻이에요.”“불날 것 같은 집인데.”“그러니까 빨리 끄세요.”세 사람은 웃으며 촛불을 껐다. 서연은 케이크를 나누고 마지막 정산을 마쳤다. 직원들이 먼저 나간 뒤 혼자 불을 끄고 열쇠를 두 번 확인했다.***숙소에는 정리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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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돌아온 방

서연은 12월 첫날 오후에 매장 열쇠를 반납했다.건물주는 유리문 열쇠와 창고 열쇠를 하나씩 확인하고 인수증에 서명했다. 빈 매장에는 테이프 자국과 진열장이 있던 자리의 먼지만 남았다.수진은 마지막까지 역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서연은 매장 앞에서 헤어졌다.“상설점 정해지면 연락할게요.”“팀장님이 다시 와요?”“어디에 열리느냐에 따라 다르죠. 그래도 업무로는 계속 볼 거예요.”수진은 울지 않고 웃었다. 서연도 그러했다. 기차가 출발한 뒤에야 종이봉투에 넣어 준 간식을 열어 보았다. 집 모양 초가 작은 지퍼백에 들어 있었다.수도권 원룸 문을 열자 오래 닫힌 집 냄새가 났다. 미리 부탁한 대로 민아가 보일러를 한 번 돌려 놓았지만 바닥은 차가웠다.짐을 풀기 전에 창문부터 열었다. 대전 숙소에서 가져온 선풍기와 반찬통을 싱크대 옆에 놓았다. 겨울 이불을 맡겼던 세탁소 보관표는 지갑에서 꺼내 냉장고에 붙였다.자기가 떠나기 전과 같은 물건들 사이에서 달라진 사람처럼 서 있었다.***다음 날 본사에 출근하자 미경이 서연 자리 옆에 새 의자를 하나 붙여 놓았다. 운영 매뉴얼 회의에 쓸 자리였다.“직급은 연말 평가 뒤에 이야기하고, 일단 네가 만든 인수인계부터 기준으로 삼자.”“현지 직원 의견도 받아야 해요.”“화상으로 불러.”서연은 대전에서 가져온 기록을 열었다. 잘 팔린 품목보다 반품 사유부터 정리했다. 야간 문의 자동 이관과 교대 휴무 기준도 첫 장에 넣었다.일주일은 빠르게 갔다.***금요일 저녁, 정숙에게 전화가 왔다.“이번 주말에 올 거니?”서연은 잠시 망설였다.“가도 돼?”“네 집인데 그걸 왜 물어.”부모 집에서 짐을 내보낸 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서연은 토요일 점심에 가겠다고 했다.반찬통을 담아 온 여행가방을 현관에 세웠다. 식탁에는 갈비찜과 잡채가 올라와 있었다. 동식은 텔레비전 소리를 줄이지 않았고, 정숙은 밥이 식는다며 서연을 먼저 앉혔다.처음 30분은 대전 이야기만 했다. 매장 크기, 직원 수, 숙소 난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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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끝낸 뒤에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서연은 소담살림의 첫 운영 매뉴얼을 완성했다. 대전에서 직접 겪은 배송 오류와 반품 사례, 직원 교대 기준이 한 권에 들어갔다. 미경은 표지를 넘기며 말했다.“이제 새 매장 열 때 네가 사람부터 가르쳐.”“매장 위치는 정해졌어요?”“수도권 외곽 두 군데 보고 있어. 대전 직원들도 원하면 지원받고.”서연은 수진에게 먼저 공고를 보냈다. 개인 안부보다 업무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수진은 곧바로 올라가고 싶다고 답했다.대전에서 돌아온 지 다섯 달이었다.그동안 태주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태주도 연락하지 않았다. 번호를 지우지 않았다는 사실만 가끔 확인했다.봄이는 2학년이 됐다. 새 담임과 돌봄교실 시간표는 태주와 명자가 정리했다. 서연은 입학 때처럼 학교 서류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아이와의 연락도 한동안 없었다.3월 말, 봄이에게서 우편이 왔다. 작은 봉투 안에 지난겨울 그린 눈사람과 가게 그림이 접혀 있었다.‘이모한테 보내는 거 맞아요. 아빠 말은 안 썼어요.’서연은 그림을 책상 옆에 붙였다. 답장에는 자기 회사 책상과 새로 만든 매뉴얼 표지를 그렸다. 태주 이름은 쓰지 않았다.두 사람의 이별과 이모와 조카의 관계를 섞지 않으려는 서툰 약속이었다.4월에는 본사 교육을 세 번 진행했다. 첫 교육에서 직원들은 반품 기준이 너무 복잡하다고 불평했다. 서연은 대전에서 실제로 틀렸던 주문 사진을 보여 주고, 규정을 줄일 수 있는 항목과 꼭 남겨야 하는 항목을 나눴다.교육이 끝난 날 미경은 팀장 수당이 반영된 급여 명세서를 건넸다. 서연은 부모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정숙은 기뻐했고 동식은 회사가 사람을 부려 먹는 것 아니냐며 근무시간부터 물었다.가족은 다시 그런 안부를 주고받았다. 태주 이름이 나오지 않을 때만 평온한 방식이었다.어느 금요일에는 민아와 늦게까지 영화를 봤다. 민아는 소개팅을 권하지도, 태주에게 연락하라고 재촉하지도 않았다.“너 요즘 괜찮아?”“사는 건 괜찮아.”“그거 말고.”서연은 대답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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