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Chapter 81 - Chapter 90

140 Chapters

제81화. 처제가 아니라

태주는 봄이를 문화센터 미술 교실 앞까지 데려다줬다.“12시에 이 앞에서 만나.”“아빠 늦으면?”“선생님 옆에서 기다리고, 혼자 나가지 않기.”봄이는 가방 안쪽의 인계 카드를 두드려 보였다.“나 이제 알아.”“그래도 아빠가 또 말할 거야.”교사가 아이를 안으로 들인 뒤 태주는 복도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33분이었다. 그는 서연에게 ‘들어갔어’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계단을 내려갔다.명자는 약속보다 먼저 식당에 와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물도 마시지 않은 채 서연을 바라봤다.“둘이 무슨 사고라도 쳤니?”태주가 의자를 빼며 대답했다.“제가 말씀드릴게요.”“서연이 빚보증이라도 섰어? 네가 갚아 주려고?”“그런 일 아니에요.”“그럼 앉아. 사람 세워 놓고 뭐 하는 짓이야.”서연은 명자 맞은편에 앉았다. 태주는 두 사람 사이 옆자리를 골랐다. 주문하러 온 직원에게 식사를 부탁한 뒤, 직원이 자리를 비킬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어머니.”“뜸 들이지 말고 말해.”태주는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폈다.“저 서연이하고 만나고 있습니다.”명자는 알아듣지 못한 사람처럼 눈만 깜빡였다.“자주 본다는 소리야?”“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나고 있어요.”의자 끄는 소리가 옆 테이블에서 났다. 명자는 그쪽을 보다가 다시 아들을 향했다.“네 처제잖아.”“알아요.”“서희 동생이야.”“압니다.”“그걸 아는 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해?”명자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손바닥이 태주의 뺨을 때리는 소리가 작지 않았다. 테이블의 물이 흔들렸다. 서연이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가 태주의 손짓에 멈췄다.“제가 먼저 좋아한다고 했어요.”“누가 먼저였는지가 중요해?”“서연이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둘 다 미쳤어. 서희 보내고 얼마나 됐다고.”명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화를 내던 얼굴이 금세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내가 그 집에 서연이 들일 때 뭐라고 했니. 잠깐 도와주는 거라고 했지? 서희 자리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서연이 손을 무릎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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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언니의 동생

토요일 저녁, 명자에게서 태주에게 전화가 왔다.“내일 정숙이네 간다며.”태주는 봄이가 색연필을 정리하는 것을 보며 베란다로 나갔다.“네.”“봄이는 나한테 데려다 놔. 어른들 싸우는 데 끼우지 말고.”“괜찮으시겠어요?”“너 보기 싫은 거하고 봄이를 보는 건 다른 일이야.”명자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만 맡겠다고 했다. 저녁은 태주가 직접 먹이라는 말도 덧붙였다.***다음 날 2시가 조금 넘어 태주와 서연은 정숙의 집 앞에 섰다. 서연이 초인종을 누르려다 손을 내렸다.“내가 할게.”태주가 누르자 안에서 동식의 발소리가 났다.“왔냐.”동식은 태주에게도 서연에게도 웃지 않았다. 거실 탁자에는 깎아 둔 사과와 보리차가 있었지만 포크는 두 개뿐이었다. 정숙은 소파 끝에 앉아 손수건만 접었다 폈다 했다.“말해 봐.”서연이 입을 열기 전 태주가 먼저 말했다.“어머니, 아버님. 저 서연이와 만나고 있습니다.”정숙의 손에서 손수건이 떨어졌다.“무슨 뜻이야?”“서연이를 좋아합니다.”“우리 서연이를?”“네.”정숙은 딸을 바라봤다.“너도?”서연은 도망치듯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응. 나도 좋아해.”정숙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동식은 안경을 벗어 탁자에 놓았다.“언제부터냐.”“서로 말한 건 지난해 연말입니다.”“처음부터였어?”정숙이 갑자기 물었다.“언니 장례 치를 때부터 태주 씨 좋아했니? 그래서 봄이 핑계 대고 그 집에 들어간 거야?”“아니야.”서연의 대답이 처음으로 빨라졌다.“처음부터 언니 자리를 보고 들어간 건 아니야. 봄이가 걱정됐고 형부 혼자 감당 못 하는 게 보여서 들어간 건 맞아.”“그럼 언제부터인데?”“같이 살면서 마음이 생겼어. 그걸 막지 못하고 선을 넘은 적도 있어. 그래서 계속 그 집에 있을 수 없어서 나온 거야.”“그게 더 낫다는 말이야?”“낫다고 하는 게 아니야. 잘못한 일을 줄이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왜 들어갔는지까지 거짓으로 만들지는 말아 줘.”정숙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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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세 번째 연락처

월요일 아침, 가족 대화방은 조용했다.평소 같으면 태주가 올렸을 봄이의 등교 사진도 없었고, 명자의 ‘잘 갔니’도 올라오지 않았다. 서연은 대화방을 열었다 닫고 회사 엘리베이터에 탔다.9시가 지나 태주에게 개인 메시지가 왔다.‘봄이가 학교 잘 들어갔어. 어제는 잘 잤어?’‘응. 출근했어요.’서연은 답장을 보내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가족 방에 사진이 없다고 아이의 아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점심에는 민아가 회사 근처로 왔다. 서연이 국밥을 반도 먹지 못하자 민아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말했구나.”서연이 놀라 쳐다봤다.“네가 지난주부터 토요일 날짜만 들여다봤잖아.”“양쪽 집에 다 말했어.”“반응은 묻지 않아도 알겠네.”서연은 정숙에게 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털어놨다. 민아는 잘됐다는 말도, 그래도 버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네 편은 들어줄게. 그런데 네가 다 맞다고는 못 해 줘.”“알아.”“밥은 먹어. 죄책감 있다고 굶는 건 아무 도움 안 돼.”민아가 수육 한 점을 서연의 접시에 놓았다. 서연은 억지로라도 씹어 삼켰다.“태주 씨가 뭐래?”“집까지 같이 들어가자고 안 했어. 엄마가 오지 말랬다고 자기가 대신 가족이 돼 주겠다는 말도 안 했고.”“그건 잘했네.”“잘한 거 맞지?”“응. 지금 빈자리 생겼다고 바로 채우면 나중에 서로 원망해.”민아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서연을 똑바로 봤다.“네가 계속 만나는 한 집에서도 쉽게 풀리진 않을 거야. 그래도 태주 씨가 시켜서 여기까지 온 것처럼 굴진 마. 너도 좋아서 만난 거라며. 엄마한테 그 말은 해야지.”“나도 엄마한테 내가 선택했다고 했어.”“그럼 그 말 끝까지 책임져. 헤어지게 되더라도 엄마가 시켜서가 아니라 네가 결정하고.”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아의 말은 응원보다 무거웠지만 지금은 그 편이 나았다.***같은 시각, 명자는 태주에게 학교 응급 연락망 이야기를 꺼냈다.“서연이 번호 빼.”“갑자기 왜요?”“왜긴 왜야. 이제 걔를 무슨 자격으로 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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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엄마가 되는 건 아니야

“이모 번호가 없어진 건 이모가 봄이를 싫어해서가 아니야.”태주는 신청서를 옆으로 밀었다.“그럼 할머니가 빼라고 했어?”아이의 질문은 정확했다. 태주는 명자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거짓말하지 않을 말을 골랐다.“할머니가 먼저 말한 건 맞아. 아빠하고 이모 사이에 할머니가 속상해하는 일이 생겼거든.”“무슨 일?”“이모하고 같이 이야기해도 될까?”봄이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이모도 화났어?”“봄이한테 화난 사람은 없어.”“그럼 내일 와.”“아빠가 먼저 물어볼게.”태주는 그 자리에서 서연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봄이가 받아쓰기 숙제를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메시지를 보냈다. 서연은 한참 뒤 ‘봄이가 괜찮다면 갈게요’라고 답했다.***다음 날 저녁, 서연은 빈손으로 804호에 왔다. 딸기나 문구류를 사 오면 아이의 대답을 달래려는 것처럼 보일까 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봄이는 거실 바닥에 앉아 색종이를 자르고 있었다.“왔어?”“응. 아빠가 같이 얘기하자고 했어.”서연은 아이 옆에 바로 앉지 않고 소파 끝에 앉았다. 태주도 서연과 거리를 두고 맞은편 의자를 골랐다. 서희의 사진이 있는 집에서는 정해 둔 선을 그대로 지켰다.태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빠가 이모를 좋아해.”봄이는 가위질을 멈췄다.“나도 좋아하는데.”“봄이가 이모 좋아하는 거하고 조금 다른 마음이야. 어른이 다른 어른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결혼하는 마음?”서연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태주는 서둘러 그렇다고 하지 않았다.“지금 결혼한다는 얘기는 아니야. 서로 좋아해서 만나고 있다는 얘기야.”봄이는 서연을 쳐다봤다.“이모도 아빠 좋아해?”“응.”서연은 작게 말하지 않았다.“좋아해.”“왜?”“아빠라서가 아니라 강태주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됐어.”“아빠 이름이 강태주인 건 나도 알아.”엉뚱한 대답에 누구도 웃지 못했다.봄이는 잘라 놓은 색종이를 한 장씩 포갰다.“엄마는?”태주가 무릎 위의 손을 고쳐 잡았다.“아빠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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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식기 전에

버스가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서연의 가방 안에서 열쇠가 부딪쳤다. 봄이의 집 열쇠를 돌려준 뒤에도 소리는 비슷했다. 원룸 열쇠에 작은 금속 고리가 두 개나 달려 있어서였다.서연은 손을 넣어 그것들을 쥐었다. 봄이가 자고 가지 말라고 했던 목소리가 자꾸 귀에 남았다. 애초에 자고 갈 생각은 없었다는 말을 하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싶어서 입을 연 게 아니었으니까.원룸에 도착해 코트를 벗자 안감이 팔꿈치에 걸렸다. 서연은 팔을 빼내다 말고 침대 끝에 앉았다. 휴대전화에는 태주에게서 온 메시지가 있었다.‘잘 들어갔어?’‘응. 봄이는요?’‘씻고 누웠어.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할게.’아이가 한 말을 전부 옮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서연도 더 묻지 않았다. 싫다는 말을 몇 번 했는지, 자기가 나간 뒤 울었는지까지 알게 되면 내일 아침에도 그 얼굴만 생각할 것 같았다.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는데 회사 영수증 사이로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서희와 백화점 즉석 사진기에서 찍은 것이었다. 두 사람 다 앞머리를 잘못 잘라 핀으로 넘기고 있었다. 언니가 먼저 웃는 바람에 서연도 눈을 감아 버린 사진이었다.사진을 지갑에 도로 넣으려다 태주의 대화창을 열었다.‘작년에 얘기했던 영상들 있잖아요. 언니가 찍었던 겨울 영상, 봄이가 춤추던 거요. 다른 것도 있으면 나 보내 줄 수 있어요?’답은 조금 늦게 왔다.‘컴퓨터에서 찾아서 보낼게.’서연은 그사이 밥솥을 열었다. 어제 남은 밥이 누렇게 말라 있었다. 보온을 끄고 그릇에 옮긴 뒤 물을 조금 부어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어머니가 보면 그것부터 나무랐을 것이다.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그러느냐고.정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길어질수록 취소 버튼에 손이 가까워졌다. 여덟 번째 소리가 울릴 무렵 어머니가 받았다.“왜.”“엄마.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월요일마다 보던 드라마의 재방송인지, 정숙이 늘 욕하던 남자 배우 목소리가 잠깐 컸다가 작아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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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두고 온 방

토요일 낮, 동식은 서연의 원룸 앞에 택배 상자 두 개를 내려놓았다. 편의점에서 구한 상자인지 한쪽에 생수 이름이 크게 찍혀 있었다.서연은 아버지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내려갔다가 상자부터 보았다.“이게 뭐야?”“네 것.”“그걸 왜 가져왔어.”“안 쓰는 거 방에 쌓아 두면 먼지만 나잖아.”서연은 작은 상자를 들었다. 테이프가 덜 붙은 틈으로 오래된 털실 목도리가 보였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뜨개질을 배우겠다고 덤볐다가 코를 빠뜨려 끝이 사선이 된 것이었다. 엄마가 그 위에 바늘을 꽂아 보관해 줬었다.동식이 큰 상자를 들어 계단을 올랐다. 서연은 뒤를 따르면서 아버지 운동화 뒤축이 많이 닳았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 사 드리고 싶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현관문을 열자 동식은 신발을 벗지 않은 채 상자만 안으로 밀었다.“들어와. 물이라도 마셔.”“됐다.”“여기까지 왔는데.”서연이 비키지 않자 아버지는 한숨을 쉬고 신발을 벗었다. 좁은 방 안을 한 번 둘러본 뒤 식탁 의자에 앉았다. 평소에는 보일러가 잘 돌아가느냐, 방범창이 흔들리지 않느냐부터 묻던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서연은 컵을 씻었다. 물기를 닦다가 컵 밑의 무늬가 벗겨진 걸 발견했다. 자꾸 그런 것만 눈에 들어왔다.상자에는 졸업 앨범과 자격증 교재, 여름 이불 한 채가 들어 있었다. 모두 부모 집 작은방에 두고 온 물건이었다. 서연은 이불 사이에 끼워진 남색 잠옷을 꺼냈다.“이건 쓰는 건데.”“…….”“집에 가면 입잖아. 지난 설에도 입었어.”동식이 물컵을 만지작거렸다.“엄마가 정리하다가 같이 넣었겠지.”“엄마가 넣었어?”아버지는 대답 대신 물을 마셨다. 서연은 잠옷을 펼쳤다. 세탁한 냄새가 났다. 겨드랑이 쪽 해진 부분을 흰 실로 촘촘히 꿰매 놓은 것도 보였다.“방을 없앤 거야?”서연은 잠옷을 가슴에 댔다. 꿰맨 겨드랑이 쪽이 손끝에 걸렸다.“못 오게 할 거면서 이건 왜 꿰맸어.”동식은 컵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엄마한테 물어보면 뭐라고 해? 이제 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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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잡고 있던 손

태주는 서연을 보자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서연이 약속보다 늦은 것은 아니었다. 토요일 오전 11시 20분, 두 사람이 고른 식당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다.“몇 시까지예요?”“11시 50분에 출발하면 돼. 봄이 미술 수업 끝나기 전에.”“그럼 30분밖에 없네.”서연은 웃으며 말하려다 실패했다. 태주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둘이 맞출 수 있는 시간이 이번 주에는 그것뿐이었다. 서연은 오후에 상품 촬영이 있었고, 태주는 일요일 현장 인계 때문에 토요일 오후를 봄이와 보내기로 했다.“빨리 나오는 거 먹자.”“우리가 무슨 점심 교대조 같아요.”“나는 교대라도 네 얼굴 보니까 좋은데.”태주가 서연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 들었다. 서연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식당 유리문에 반사된 자기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엄마와 아버지에게 거절당한 지 보름 가까이 지난 뒤에도 이런 말 한마디에 웃는 것이 조금 서러웠다.가게 앞 의자에는 햇볕이 들어왔다. 둘이 나란히 앉자 태주가 물었다.“방은 좀 정리했어?”전날 통화에서 서연은 상자 때문에 방이 좁아졌다고만 말했다. 아버지가 가져왔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었다.“아빠가 온 거예요. 지난주에.”태주의 손이 가방 끈에서 멈췄다.“집에 두고 온 내 물건, 다 갖다주셨어요. 잠옷까지.”“왜 그때 말 안 했어.”“말하면 나 안고 싶을까 봐.”“…….”“그러면 내가 안 놔줄 것 같아서.”서연은 발끝으로 의자 아래 작은 돌을 밀었다. 태주가 자기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따뜻하고 손가락 마디는 거칠었다. 서연은 그 손을 뒤집어 손금 옆의 희미한 상처를 만졌다.“또 긁혔네.”“포장재 뜯다가. 거의 다 나았어.”“뭐 좀 하고 해요.”“장갑 끼라고?”“응.”태주는 알겠다고 하고 손을 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연도 잡은 손을 자기 무릎 위에 놓았다. 누가 보면 흔한 연인처럼 보일 것이었다. 한 사람이 상대의 손등을 만지고, 다른 한 사람이 그 얼굴을 보는 흔한 토요일이었다.“태주 씨?”서연보다 태주가 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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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이모랑만

그날 두 사람은 결국 식당에 들어갔다. 국수는 금방 나왔고 태주는 11시 50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연도 국물을 남긴 채 가방을 들었다. 봄이의 하원과 오후 촬영은 모두 제시간에 끝났다.그다음 주에도 봄이에게서는 전화가 없었다.서연은 문구점 약속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봄이가 입학하면 가자던 말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 동안 그 약속으로 문을 두드리고 싶지 않았다.***4월 마지막 주 목요일, 퇴근하려고 컴퓨터를 끄는데 전화가 왔다. 태주의 이름이 떠서 받았더니 한동안 숨소리만 들렸다.“봄이야?”“응.”서연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저녁 먹었어?”“먹었어. 이모는?”“아직. 이제 퇴근해.”봄이는 알겠다고 하고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플라스틱 같은 것을 손톱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왜? 무슨 일 있어?”“지우개 다 썼어.”“벌써?”“친구들이랑 반씩 바꾸고 또 바꿔서. 이제 손톱만 해.”서연은 웃을 뻔했다. 얼른 웃어 주면 아이도 편해질 것 같았지만, 봄이가 진지해서 기다렸다.“문구점 가기로 했잖아.”“응. 기억해.”“이번 토요일에도 돼?”서연은 달력을 확인했다. 오전 업무가 없는 날이었다.“미술 끝나고 점심 먹은 다음에 어때?”“아빠 말고 이모랑만.”“그래. 둘이 가자.”봄이는 태주에게도 그렇게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서연은 아이가 쓰던 수화기 너머로 짧게 시간을 확인했다. 태주는 미술 하원과 점심을 맡고 2시에 문구점 앞에서 인계하겠다고 했다.***토요일에는 바람이 셌다. 서연은 문구점 처마 아래에서 봄이를 기다렸다. 태주가 아이 손을 잡고 오는 모습이 보이자 가방 끈을 고쳐 멨다.봄이는 서연에게 달려오지 않았다. 가까이 와서 손을 놓고 아빠에게 가방을 받아 들었다.“1시간 뒤에 여기서 보자.”태주가 아이에게 말했다.“늦지 마.”“응. 안 늦어.”봄이는 태주가 돌아서는 것을 보고 문구점으로 들어갔다. 서연은 따라가다 인사하려고 잠깐 돌아봤다. 태주도 보고 있었다. 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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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내 이름으로

5월 둘째 주 월요일, 소담살림 회의실 책상에 서연의 대전 보고서가 놓였다. 표지가 접히고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미경은 그 위에 새 계약 조건표를 겹쳐 놓았다.“팝업 했던 백화점 말고, 근처 상가야. 6개월만 운영해 보자는 거야.”서연은 첫 장을 넘겼다. 여름 침구와 수납용품을 직접 만져 보고 주문할 수 있는 시험 매장이었다. 온라인 판매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품목들이 목록에 들어 있었다.운영 책임자 칸에 자기 이름이 있었다.“확정된 건 아니죠?”“네가 한다고 해야 확정하지. 이름은 제안서라 써 둔 거고.”미경이 서연 쪽으로 펜을 밀었다.“좋은 말만 하진 않을게. 지난번엔 한 달 매출 잘 나오면 됐지만 이번엔 반품하고 재구매까지 봐야 해. 사람도 네가 가르쳐야 하고.”“개점은요?”“6월 초. 준비하러 가는 건 5월 말. 일단 11월 말까지.”서연은 달력을 열었다. 태주와 봄이, 부모 집 일정이 적힌 개인 달력 대신 회사 업무 달력을 띄웠다. 이미 잡힌 촬영과 발주 날짜 사이에 빈 주가 몇 개 있었다.“본사 고객문의는 누가 맡아요?”“교대해서 받아야지.”“그게 제일 먼저 정해져야 할 것 같은데요. 현장 마감하고 밤에 다시 문의 받는 건 못 해요.”미경이 팔짱을 꼈다. 잠깐의 침묵에 서연은 말을 거둬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지난번 대전에서 포장 주문이 몰렸던 토요일이 떠올랐다. 그때 인수인계를 해 둔 덕에 틀어진 배송을 당일 수습할 수 있었다.“맞아. 그건 따로 써 놓자.”미경이 조건표 여백에 본사 업무 분리라고 적었다.서연은 숙소와 주말 교대도 물었다. 6개월치 월세를 개인 카드로 먼저 내라는 조건은 없었다. 회사가 숙소를 마련하고, 주말에 일한 시간만큼 평일에 쉬는 방안이었다. 다만 현지 직원 채용이 늦어지면 첫달에는 쉬는 날을 제대로 잡기 어려울 수 있었다.“그럼 채용 전에 출발 확정은 못 하겠어요.”미경이 서연을 봤다.“많이 야무져졌네.”“한번 해 봤잖아요.”서연은 웃지 않고 조건표에 줄을 그었다. 배우겠다는 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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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멀어지는 날짜

태주는 제안서를 출력해 가져왔다. 서연이 보낸 사진 한 장이 전부였는데, 빈 여백에 작은 글씨로 몇 가지가 적혀 있었다.점심 식당에서 주문을 마치자 태주가 종이를 접었다.“가고 싶어?”서연은 물컵을 양손으로 쥐었다.“응. 해 보고 싶어요.”“그럼 해야지.”빨리 나온 답에 오히려 할 말이 막혔다. 서연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은 얼굴이라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진짜 그렇게 생각해요?”“네가 해 보고 싶다고 하잖아.”“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하지 말고.”태주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모서리가 젖은 물컵 자국에 닿았다.“싫어.”서연의 어깨가 굳었다.“6개월 동안 얼굴 보기 어려워지는 거. 그건 싫어.”태주는 손가락으로 젖은 부분을 누르다가 종이를 옆으로 옮겼다.“어제 사진 받고 날짜부터 세어 봤어. 네 쉬는 날은 평일이고 나는 그때 현장에 있을 거고. 주말에 간다고 해도 봄이 일정부터 맞춰야 하고.”“나도 알고 있어요.”“머리로 아는 거하고 싫은 건 다른가 봐.”서연은 그제야 컵을 놓았다. 태주가 계속 괜찮다고만 하면, 자기 혼자 두 사람 사이에서 걸어 나가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나 여기 있으면 가끔 내가 없어져요.”“무슨 말이야.”“누가 화났는지 먼저 확인하고, 전화해도 되는지 생각하고. 오늘 태주 씨 만나는 게 누군가한테 들키면 어떻게 설명할지 그것부터 준비해요. 일하러 가는 날보다 그냥 쉬는 날이 더 힘들어.”그는 고개를 숙였다. 서연은 서둘러 덧붙였다.“그 사람들 없는 데 가서 태주 씨 잊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일하고 싶어. 내가 선택해서 제대로 해 보고 싶어요.”“나도 네가 잘됐으면 좋겠어.”“알아요.”“그런데 잘되면 네가 더 멀리 갈 것 같아서 겁나.”음식이 나와 대화가 잠깐 끊겼다. 태주는 뜨거운 뚝배기를 서연 앞에서 조금 밀어 줬다. 손잡이에 묻은 국물을 휴지로 닦다가 스스로 손을 멈췄다.“별거 다 신경 쓰지.”“그건 좋아요.”서연이 그의 손등을 잠깐 만졌다.만진 손등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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