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Chapter 111 - Chapter 120

140 Chapters

제111화. 이름이 붙은 엄마

세 사람은 1월에만 집을 여덟 군데 보았다.첫 번째 집은 봄이의 학교와 가까웠지만 방이 두 개였다. 중개인은 거실 한쪽에 책상을 놓으면 된다고 했고, 봄이는 현관을 나오자마자 고개를 저었다.“그럼 이모는 거실에서 일해?”“그렇게 되네.”“아빠 방은?”태주가 잠깐 멈췄다.“아빠하고 이모는 같이 쓰지.”봄이가 얼굴을 찌푸렸다.“그건 좀 이상해.”서연이 웃음을 참으며 부동산 전단지에 엑스표를 쳤다.두 번째 집은 방이 세 개였지만 학교까지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세 번째 집은 넓었지만 서연 회사까지 1시간이 넘게 걸렸다.“이모 회사 멀어도 아빠가 데려다주면 되잖아.”“아빠도 현장 가야 해.”“그럼 차 두 대 사.”“집 사면 차 살 돈 없어.”태주가 부동산 앱의 숫자를 보여 주자 봄이는 0을 세다가 포기했다.집을 볼 때마다 세 사람의 조건이 하나씩 늘었다. 봄이의 학교를 바꾸지 않을 것, 서연과 태주의 출근이 한쪽에게만 몰리지 않을 것, 봄이 방의 문이 있을 것, 셋 중 누구도 거실을 잠자는 방으로 쓰지 않을 것.“내 책상은 창문 옆.”“그건 집 보고 정해.”“이모 책상도 있어야 해?”“응. 재택하는 날 쓰게.”“아빠는?”“나는 식탁 써도 돼.”“그럼 아빠만 문 없는 방이네.”봄이는 그게 조금 마음에 드는 듯 웃었다.네 번째 주 토요일, 해솔동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오래된 아파트를 보러 갔다. 새 아파트는 아니었지만 방 세 개에 작은 붙박이 책상이 있었고, 봄이의 학교까지 마을버스로 15분이었다.중개인이 제일 작은방 문을 열며 말했다.“여기는 어머니 서재로 쓰시면 되겠네요.”봄이가 즉시 고쳤다.“우리 이모예요.”중개인은 당황해 웃었다.“아, 이모님이시구나. 제가 엄마인 줄 알고.”서연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서재는 제가 쓰고, 큰 방은 봄이 방으로 보면 될까요?”“아이 방을 제일 크게 주시려고요?”“짐이 제일 많아요.”봄이가 자랑스럽게 가방을 고쳐 멨다.집을 다 본 뒤 중개인은 다른 손님을 맞으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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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각자의 몫

집을 정하기 전, 두 사람은 일요일 오후를 서연 원룸 식탁에서 보냈다.노트북 화면에는 태주의 대출 잔액과 804호 관리비, 봄이의 월별 교육비가 적혀 있었다. 옆 칸에는 서연의 원룸 보증금과 적금, 부모에게 빌려준 돈, 매달 나가는 보험료가 있었다.“부모님한테 빌려준 건 언제 받아?”“받을 생각 없이 준 거예요.”“그럼 빌려준 돈으로 쓰면 안 되지.”태주가 항목 이름을 ‘부모님 지원’으로 바꿨다.“왜 마음대로 바꿔요.”“못 받는 돈을 자산으로 계산하면 집 구할 때 틀리잖아.”“말이 너무 현실적이라 기분 나빠.”“결혼 얘기하다 싸우는 이유가 이런 거라며.”서연은 입을 내밀면서도 숫자를 지우지는 않았다.태주는 804호를 팔아 새 집을 사자는 계산을 가져오지 않았다. 봄이의 기억과 서희 물건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당장 매매를 서두르면 세 사람 모두 선택을 빼앗길 수 있었다.대신 첫 후보였던 구축 아파트를 2년간 임차하기로 했다. 서연의 원룸 보증금 일부와 태주의 저축을 합치되, 각자 석 달 생활비만큼은 개인 통장에 남겼다.원룸에는 1월 10일 전에 먼저 갱신하지 않을 뜻을 알렸다. 집주인과 보증금 반환 날짜를 맞추는 연락만 남겨 둔 상태였다. 서연은 그 자리에서 퇴거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갱신하지 않고 계약 만료일에 퇴거하겠습니다. 보증금 반환 일정 확인 부탁드립니다.’전송 버튼을 누른 뒤 손가락이 한동안 화면 위에 머물렀다.“아쉬워?”태주가 물었다.“응. 여기서 혼자 밥 먹는 법 다시 배웠잖아.”“원하면 더 살아도 돼.”“두 집 월세 낼 돈 있어요?”“없어.”“그럼 현실적으로 말해.”“아쉬워해도 된다고.”서연은 원룸 벽에 붙은 작은 못 자국을 보았다. 태주와 헤어진 겨울에 혼자 달력을 걸었던 자리였다.“이 집 나가는 게 태주 씨한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면 싫었어.”“새 집으로 같이 가는 거야.”“그래서 나갈 거예요.”집주인에게서는 20분 뒤 답이 왔다. 퇴거 점검일과 보증금 반환 예정 시간을 확인해 달라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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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비우지 않는 이사

3월 15일 아침, 서연은 원룸 바닥에 마지막으로 걸레를 밀었다.벽에 있던 달력을 떼자 작은 못 구멍이 남았다. 입주 때부터 있던 흠집과 자신이 만든 흠집을 사진으로 나눠 찍고 집주인에게 보냈다.“보증금 들어왔어?”태주가 빈 책상을 들고 물었다.“방금. 전액 확인했어요.”“다행이다.”“같이 따질 일은 없겠네.”서연은 마지막 상자에 노트북 충전기를 넣고 파란 매직으로 자기 이름을 썼다. 태주가 들려 하자 손을 막았다.“이건 내가 들게.”“무거워.”“내 물건이야.”“그럼 계단에서는 같이 들자.”둘은 상자 양쪽 손잡이를 하나씩 잡고 원룸을 나왔다. 구원받듯 떠나는 집도, 버려진 뒤 숨은 집도 아니었다. 혼자 살아 낸 시간을 접어 자기 손으로 들고 가는 집이었다.***804호에서는 봄이가 노란 상자를 현관에 줄 세우고 있었다. 태주의 검은 상자는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아빠는 왜 짐이 이것밖에 없어?”“옷이 별로 없잖아.”“엄마 물건은?”“오늘은 봄이가 고른 것만 가져가.”봄이는 거실 가족사진과 토끼 인형, 서희가 써 준 7살 전 생일 카드 몇 장을 자기 가방에 넣었다. 부부방 옷장과 흰 머그잔, 서희의 계절 옷은 그대로 두었다.작은 작업방에서 마지막 상자를 빼던 태주가 벽 쪽 갈색 상자 앞에 멈췄다. 해외 사고 뒤 두 번째로 도착했던 유류품 상자였다. 처음 돌려받은 지갑과 손크림은 열어 보았지만, 회사 견본이라고 안내받은 이 꾸러미는 아직 열지 않았다. 오래된 운송장이 누렇게 변했고 테이프는 처음 붙은 모양 그대로였다.“이건 안 가져가?”봄이가 물었다.태주는 테이프 가장자리에 손을 댔다가 놓았다.“엄마 출장 물건일 거야.”“안 열어 봤어?”“아직.”“왜?”“그때는 못 열었고, 나중에는 자꾸 미뤘어.”봄이는 상자 옆면의 알아볼 수 없는 외국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나중에 나랑 열어.”“그래.”서연은 문밖에서 그 대화를 들었다. 들어가 대신 열겠다고 하지 않았다. 상자는 804호 작은방에 그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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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행복을 믿은 날

새 집 냉장고에는 세 사람의 일정표가 붙었다.월요일과 수요일 하교 뒤 돌봄교실, 금요일은 명자, 화요일은 태주가 일찍 퇴근하고 목요일은 서연이 재택근무 뒤 저녁을 맡았다. 일정이 바뀌면 빈칸에 포스트잇을 붙였다.“아빠, 이번 주 목요일도 늦어?”“현장 마감이라 8시.”“그럼 이모랑 떡볶이 먹을 거야.”“저녁으로는 안 돼.”“아빠 없는 날인데 왜 아빠가 정해.”“냉동 만두도 먹으면 돼.”서연이 끼어들자 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서연 엄마가 된대.”아이는 집 안에서만 가끔 새 호칭을 썼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이모라고 했고, 어떤 날은 잠들기 전 한 번 엄마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횟수를 세지 않았다.입주 한 달 뒤, 태주와 서연은 결혼식 날짜를 정했다. 5월 마지막 토요일, 하객 50명이 들어가는 작은 예식장이었다.“너무 빠른가?”태주가 계약서를 보며 물었다.“우리 벌써 몇 년을 돌았는데.”“준비 기간은 두 달도 안 돼.”“드레스 입고 밥 먹는 데 뭘 1년씩 준비해요.”“내 정장은?”“입던 거.”“봄이가 나만 정장 입는 거 불공평하댔어.”“그러니까 새로 사지 마.”봄이는 꽃을 뿌리되 운동화를 신기로 했다. 흰 원피스도 한복도 싫다며 노란 카디건과 남색 치마를 골랐다.“꽃은 무슨 색?”“엄마가 좋아하던 주황색.”봄이가 말하자 서연은 대답 대신 꽃집 견본에 주황색 동그라미를 쳤다.초대장에는 양가 부모 이름을 넣지 않았다. 한서연과 강태주, 두 사람의 이름만 적었다. 참석하지 않는 사람의 체면을 빌리지도, 아직 아픈 사람에게 축복하는 문장을 대신 쓰게 하지도 않았다.드레스는 민아와 둘이 고르러 갔다. 태주는 봄이를 데리고 운동화를 사러 갔고, 서연은 친구 앞에서 처음으로 흰 드레스를 입었다.“생각보다 얌전한 거 고르네.”민아가 커튼 밖에서 말했다.“내가 언제 요란한 거 입었어.”“네 인생이 요란해서 드레스도 그럴 줄 알았지.”“맞을래?”서연은 웃으며 커튼을 열었다. 거울 속 흰색을 보는 순간 언니 장례식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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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열지 못했던 상자

태주는 등기 봉투를 바로 뜯지 못했다.식탁 위에는 저녁 설거지를 끝낸 물기가 남아 있었고, 봄이는 장난감 반지를 낀 손으로 공책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아빠, 편지 안 봐?”“봐야지.”태주는 봉투 가장자리에 손톱을 넣었다가 서연을 보았다.“봄이를 방에 보내고 볼까?”“숨기진 말고, 어려운 편지라 어른들이 먼저 읽는다고 해요.”서연은 봄이 앞에 앉았다.“엄마 사고 났던 데서 온 편지야. 이모랑 아빠가 먼저 읽고, 봄이가 알아야 하는 건 꼭 말해 줄게.”“나쁜 거야?”“아직 몰라.”모른다는 말을 그대로 들은 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더 묻지 않고 색연필 통을 안아 방으로 갔다. 방문은 닫지 않았다.봉투 안에는 원문 서류와 번역문, 연락처 확인 안내가 들어 있었다. 첫 장에는 기존 사망 기록과 병원 이송 기록 사이에 불일치가 발견됐다고 적혀 있었다.서연은 같은 문장을 세 번 읽었다.사고 당일 여러 부상자의 소지품과 이송표가 정리되는 과정에서 번호가 잘못 연결되었다. 한서희의 신분증이 들어 있던 업무 가방은 사망한 다른 탑승자의 기록에 붙었고, 그 번호가 초기 명단과 가족에게 전달된 서류에 반복해 사용됐다.반면 별도 구급차로 다른 지역 병원에 이송된 여성은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채 치료를 받았다. 오랫동안 의사소통이 어려웠고, 최근 상태가 나아진 뒤 자기 이름과 한국의 가족 정보를 말하기 시작했다.마지막 줄에서 서연의 손이 멈췄다.‘해당 생존자가 한서희 씨일 가능성이 높아 가족의 신원 확인을 요청합니다.’“가능성이… 높대요.”서연의 입가가 저절로 올라갔다. 살아 있다는 글자만 다시 찾았다. 언니가 살아 있다면 엄마에게 전화해야 했다. 언니 목소리를 한 번만 더 듣게 해 달라고 빌던 밤이 셀 수 없이 많았다.“형부, 언니가…….”웃으려던 얼굴로 태주를 보았다. 그가 서류 모서리를 짚은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함께 기뻐할 말을 찾던 서연의 손가락에서 반지가 번쩍였다. 서연은 손을 펴지도 접지도 못했다.태주는 대답하지 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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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화면 속의 언니

다음 날 오후, 약속한 시각보다 30분 먼저 노트북을 켰다.봄이는 의자를 화면 가까이 밀었다가 다시 뺐다. 얼굴이 너무 커 보인다며 아빠에게 물었지만, 태주도 얼마나 떨어져 앉아야 하는지 몰랐다. 서연이 카메라 각도를 조금 낮췄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잡혔다.탁자에는 생일 카드가 세워져 있었다. 봄이는 잠옷 대신 학교에 갈 때 입는 셔츠를 골랐다. 엄마가 자기 교복으로 착각할까 봐 명찰은 떼어 냈다.“우리 학교 교복 없다는 것도 말해 줘야 해.”“천천히 말하면 돼.”태주가 답했다. 정작 그의 무릎 위 손은 굳어 있었다.국내 담당자가 먼저 접속했다. 통역인이 인사를 하고 현지 병실로 화면을 전환했다. 잠시 비어 있던 의자 곁으로 휠체어가 들어왔다.여자는 사진 속 서희보다 훨씬 말랐다. 짧은 머리 아래 왼쪽 관자놀이에 흉터가 보였다. 카메라를 찾느라 눈썹을 올리는 버릇만은 그대로였다.태주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봄이는 서연의 옷자락을 쥐었다. 서연은 아이 손을 덮고 있다가 화면 속 여자가 입을 여는 것을 봤다.“서연아.”서연의 무릎이 꺾였다.“언니, 나 여기 있어.”동생이 화면 아래로 사라지자 서희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태주가 노트북을 낮춰 세우는 동안에도 서연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여기 있어. 나 안 가.”서희는 대답하려다가 숨을 골랐다. 옆에 있던 사람이 물컵을 받쳐 주었고 서연은 그 손만 쳐다봤다. 언니가 무얼 마시는지, 차가운 물은 괜찮은지 묻고 싶은데 목이 막혔다.“언니 맞지.”확인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언니가 다시 대답해 주었으면 했다.“응.”“진짜지.”서희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화면을 사이에 두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울었다.봄이는 노트북 테두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엄마, 내 말 들려?”서희가 아이를 보았다.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가 다물렸다.“봄아.”아이는 카드를 들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힘들면 글씨를 읽어 주겠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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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오지 않을 날

결혼식 취소는 전화 세 통이면 끝났다.예식장은 계약금을 일부 돌려줄 수 없다고 했고, 드레스숍은 최종 가봉 전이라 위약금만 계산했다. 꽃집은 주문한 주황색 꽃을 다른 행사로 돌리겠다고 했다.“날짜를 바꾸시는 게 아니라, 취소가 맞으실까요?”직원이 한 번 더 확인했다.“네.”“이유는 뭐라고 적을까요?”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언니가 살아 돌아와서요. 입 안에서 만든 문장은 기쁜 소식이었다. 그 기쁜 말로 자기 결혼식을 지워 달라고 해야 했다.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첫 음절을 내기도 전에 숨이 막혔다. 태주가 손을 내밀었지만 서연은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자기 이름도 들어간 계약이었다.“신청서만 먼저 보내 주세요. 제가…….”말이 끝나지 않았다. 태주가 이번에는 묻듯 손바닥을 폈다. 서연이 그 위에 전화기를 놓았다.“가족 사정입니다. 두 사람 다 취소에 동의합니다.”그가 통화를 마쳤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인 적도 없는데 동의한다는 문장이 귀에 남았다. 싫다고 할 수도 없었다. 살아 돌아올 언니를 두고 날짜만 늦춰 달라고 부탁하는 자신은 더 싫을 것 같았다.식탁 위에는 이미 인쇄된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 양가 부모 이름 대신 두 사람 이름만 넣은 종이였다. 태주가 비닐을 뜯어 상자에 담으려 하자 서연이 한 장을 빼 들었다.“이름은 참 똑바로 인쇄했네.”태주는 웃지 못했다.“몇 장 보냈어?”“회사 사람들하고 민아. 나머지는 주말에 주려고 했어요.”“취소 연락은 내가 해도 돼.”“내 회사 사람들은 내가 할게요.”서연은 사장에게 먼저 전화했다. 자세한 사정은 출근해서 말하겠다고 하자 미경은 휴가부터 필요한지 물었다. 서연은 오늘은 아니고 언니가 들어오는 날 하루가 필요할 것 같다고 답했다.미경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서연 씨. 지금 언니라고 했어?”“네. 언니가…… 살아 있었대요.”상대가 기뻐서 내지르는 소리를 듣자 서연도 웃었다. 그러다 금세 울었다. 미경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다가, 먼저 물을 마시고 다시 연락하라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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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엄마에게 가는 길

5월 18일 아침, 봄이는 학교에 가지 않고 공항으로 향했다.책상 위에 어젯밤 써 둔 쪽지는 엄마 두 글자에서 끝나 있었다. 예쁜 글씨로 쓰면 좋겠다는 할머니 말에 몇 번이나 다시 썼다가, 결국 가방에 넣지 않았다.“꽃은 살까?”서연이 물었다.“엄마 손에 뭐 있으면 나 못 안잖아.”봄이는 토끼 인형만 품에 안았다. 서연은 더 묻지 않고 아이의 외투를 챙겼다.첫 영상 통화를 한 뒤 이동할 수 있다는 답이 나오기까지 19일이 걸렸다. 태주는 먼저 현지에 가 있었고, 출국 전날 밤에야 도착 시각을 확정해 알려 왔다. 서연은 그때 회사에 휴가를 냈다.그 사이 현지 기관은 지문과 가족 DNA 대조로 신원을 확정했고, 국내에서는 잘못 등록된 사망 기록을 바로잡는 절차가 시작됐다. 병원 인계와 귀국 허가는 신원 확인이 끝난 뒤에야 진행됐다.태주가 없는 닷새 동안 서연은 804호의 냉장고를 비우고 침구를 빨았다. 욕실 발판과 문턱 앞에 놓인 물건도 옮겼다. 부부방 서랍은 열지 않았다. 서희가 돌아와 자기 손으로 확인할 몫까지 대신 정하고 싶지 않았다.정숙과 동식은 804호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정숙이 공항까지 나가겠다고 하다가 울음을 멈추지 못하자, 동식이 집에서 따뜻한 밥을 해 놓자고 했다. 태주는 귀가 동선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현지 설명을 미리 전했다.출발 전 정숙이 서연에게 전화했다.“목도리는 챙겼니?”“엄마, 이제 5월이야.”“비행기 안은 춥대.”“형부가 챙겨 갔어.”“그래. 그랬겠지.”정숙은 끊지 않고 한참 숨을 골랐다.“서연아.”“응.”“우리 딸 좀 데리고 와.”서연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가 방금 한 말 안에 자기도 들어 있는지 묻는 생각이 스쳐서, 그 생각을 한 자신에게 놀랐다.“같이 갈게.”공항 의자에 앉은 봄이는 물병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도착 안내가 바뀔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연은 아이를 앉히고도 자기는 의자 끝에만 걸터앉았다.“아빠는 몇 번 문으로 나와?”“저기.”“다른 데로 나가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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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돌아왔는데

서희가 돌아온 첫날, 네 사람은 한꺼번에 식탁에 앉지 못했다.서희가 방에서 잠든 사이 부모는 물러났다. 정숙은 자기가 남겠다며 작은방 이불을 찾았지만, 서희가 저녁에는 태주와 봄이하고만 있고 싶다고 말했다. 정숙은 서운해하다가도 딸이 고른 대로 해 주고 싶어 앞치마를 벗었다.서연도 가야 하나 싶어 외투를 들었다. 서희가 눈을 뜨고 그쪽을 봤다.“너도 먹고 가. 다 같이 먹어야지.”아무것도 모르는 목소리였다. 서연은 외투를 내려놓고 쌀을 씻었다.804호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 서연이 죽을 끓이는 동안 태주는 서희의 약 봉투와 병원에서 받은 안내문을 식탁에 늘어놓았다. 복용 시간은 아침과 저녁, 다음 주에는 국내 병원에서 상태를 다시 확인하기로 했다.“내가 먹을 약인데 왜 당신이 더 긴장해.”“당신 약 자주 빼먹었잖아.”“감기약이나 그랬지.”서희가 웃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사고 전 아침인 것처럼 오간 말 뒤에 3년이 매달려 있었다.봄이는 엄마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죽을 두 숟갈 먹고 서희의 손등을 만졌고, 물을 마시다가도 얼굴을 확인했다.“오늘 여기서 자도 돼?”“학교 준비물은 새 집에 있는데.”태주가 말하자 서희가 되물었다.“새 집?”숟가락이 그릇 안에서 기울었다.서연은 태주를 보지 않았다. 먼저 말하겠다고 한 사람이 말할 차례였다.“봄이 학교 근처에 집을 하나 더 얻었어.”“왜?”“서연이랑 봄이랑, 내가 같이 살려고.”서희의 시선이 천천히 동생에게 옮겨왔다. 서연은 변명부터 꺼내지 않았다.태주가 봄이에게 말했다.“오늘은 할머니 집에서 자자. 아빠가 엄마랑 해야 할 얘기가 있어.”“나도 들으면 안 돼?”“어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이야. 봄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고, 엄마랑 아빠가 정리해서 말해 줄게.”봄이를 데리러 온 명자가 손을 내밀었다. 봄이는 싫다고 했지만 끝내 그 손을 잡고 나갔다. 현관문이 닫힌 뒤에도 셋은 오래 자리를 바꾸지 못했다.태주는 장례 뒤부터 말했다. 서연이 한 달만 들어와 살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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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엄마가 모르는 것들

다음 날 아침, 봄이는 할머니 집에서 나오자마자 엄마에게 가겠다고 했다.태주는 804호 앞에서 아이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 명자는 현관으로 들어오지 않고 아들의 얼굴만 살폈다.“너 잠은 잤니?”“조금요.”“지금은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하지 마.”명자는 그 말만 남기고 내려갔다. 태주는 아이와 손을 씻고 부부방 문을 두드렸다. 서희는 이미 일어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엄마.”봄이가 다가가 얼굴부터 만졌다. 서희는 웃으며 그 손을 자기 볼에 붙였다.“밤에 잘 잤어?”“응. 엄마는?”“엄마도.”태주는 창문을 열러 갔다. 거짓말을 바로잡을 필요는 없었다.봄이는 가방에서 양말과 읽다 만 책을 꺼냈다. 늘 좋아하던 그림책을 찾으려 서희가 손을 뻗었지만 아이가 꺼낸 것은 두꺼운 과학 만화였다.“이런 거 읽어?”“친구들이 다 읽는데.”“어디까지 봤어?”“여기.”봄이가 접어 놓은 귀퉁이를 펴 주었다. 서희는 몇 장 읽다가 손가락을 책갈피처럼 끼웠다. 글자를 따라가려면 시간이 필요했지만 아이는 다음 그림까지 넘어가 설명하고 있었다.“잠깐만. 엄마가 아직 여기 못 봤어.”“아.”봄이가 서둘러 앞장을 넘겼다. 서희는 그 작은 당황을 보았다. 기다려야 하는 엄마를 처음 만난 아이였다.점심에는 달걀찜을 했다. 서희가 의자에 앉아 달걀을 풀고, 뜨거운 냄비는 태주가 옮겼다. 봄이는 반갑게 숟가락을 들었다가 큰 조각을 한쪽으로 밀었다.“왜, 안 익었어?”“너무 크면 미끌거려.”서희는 숟가락을 새로 들어 작은 조각으로 잘라 주었다. 사고 전에도 아이가 했던 말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물어보려는데 봄이가 먼저 아빠에게 김을 달라고 했다.“이모는 체에 한 번 내려.”주방이 조용해졌다. 봄이는 왜 말이 멎었는지 몰라 두 사람을 봤다.서희가 그릇을 조금 당겼다.“그럼 다음엔 엄마도 그렇게 해 볼게.”태주는 자기가 하겠다는 말을 삼켰다. 엄마가 딸에게 해 주겠다고 한 일까지 대신 끝내 줄 수는 없었다.***봄이는 학교가 있는 날에는 우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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