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Chapter 101 - Chapter 110

140 Chapters

제101화. 허락 말고 알림

태주의 답은 토요일 아침에 왔다.‘갈게.’두 글자를 확인한 뒤에도 서연은 옷을 세 번 갈아입었다. 특별해 보이는 원피스를 입었다가 벗고, 회사에 갈 때 입는 셔츠와 검은 바지를 골랐다.카페에는 2시 40분에 도착했다.지난해 3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보기로 한 자리와 같은 안쪽 자리였다. 서연은 일부러 다른 자리에 앉지 않았다. 같은 곳에서 다른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3시가 되기 5분 전 태주가 들어왔다.몇 달 사이 머리가 조금 짧아졌고 눈가가 야위어 있었다. 그는 서연을 보자 걸음을 늦췄다. 인사를 해야 할지 이름을 불러야 할지 망설이는 얼굴이었다.“앉아요.”서연이 먼저 말했다.태주는 맞은편에 앉았다. 주문한 커피가 나올 때까지 둘은 서로의 손만 보았다.“잘 지냈어?”“사는 건 잘 지냈어요.”“그 말 나도 할 수 있어.”태주가 잔을 잡다가 손을 놓았다.“얼굴 보니까 화도 나네.”“알아요.”“밥은 잘 먹었나, 아프진 않았나. 오면서 할 말이 그거밖에 생각 안 났는데.”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태주는 물을 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먼저 괜찮다고 해 버리면 못 한 말들이 또 남을 것 같았다.서연은 작게 웃었다. 다섯 달 전이라면 그 웃음 하나로 대화가 흐려졌을 것이다. 이번에는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나 다시 만나고 싶어요.”태주의 눈이 들렸다.“왜.”“왜 이제 와서 그러냐고요?”“이유 듣고 싶어.”“헤어지면 엄마 아빠하고 예전처럼 될 줄 알았어. 봄이도 편해질 거고, 태주 씨 어머니도 덜 아플 줄 알았어요.”“그래서.”“아무도 괜찮아지지 않았어. 엄마 아빠는 내가 끝냈는지만 확인했고, 봄이는 자기가 이모를 못 보는 이유를 또 생각했어. 나는 그냥 태주 씨 안 보고 일 잘하는 사람이 됐고.”“일 잘한 건 네가 한 거야.”“알아요. 그러니까 그걸 우리 헤어진 덕이라고도 안 할 거야.”서연은 커피잔 가장자리를 만졌다.“다시 만나면 전처럼 숨지 않을 거예요. 부모님 허락 기다리다가 또 떠나지도 않을 거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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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셋이 앉는 식탁

서연과 봄이가 다시 만난 것은 6월 첫 토요일이었다.태주는 약속 장소인 도서관 앞까지만 아이를 데려왔다. 봄이는 작은 가방을 메고 서연에게 걸어왔지만, 바로 안기지는 않았다.“안녕.”“안녕, 봄아.”서연도 팔을 벌리지 않았다. 봄이가 먼저 내민 봉투를 받았다. 토끼 스티커가 붙은 두 번째 그림이었다.“이거 우편으로 보내면 늦을 것 같아서.”“직접 줘서 더 좋네.”태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2시에 여기로 올게.”“아빠는 어디 가?”“근처 카페에서 일 좀 하려고.”“몰래 따라오지 마.”“안 따라가.”봄이는 확인하듯 아빠를 한 번 더 보고 서연 손은 잡지 않은 채 도서관으로 들어갔다.두 사람은 어린이 자료실에서 각자 책을 골랐다. 봄이는 새로 나온 과학 만화를 찾았고 서연은 옆 서가에서 수납 관련 책을 펼쳤다.“이모는 맨날 가게 생각해?”“요즘은 가게 여는 사람들 가르치는 생각.”“선생님 됐어?”“회사에서만.”봄이는 책을 한 권 더 골랐다.“아빠 다시 만나는 거 좋아?”질문은 책장 사이에서 갑자기 나왔다. 서연은 주위를 보고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응.”“나는 아직 이상해.”“그럴 수 있어.”“엄마 사진 있는데 이모랑 손잡는 것도 이상하고.”“응.”“근데 아빠가 안 웃는 것도 싫었어.”서연은 아이가 꼭 끌어안은 책에서 눈을 떼고 봄이를 보았다.“아빠 웃게 해 주려고 싫은 걸 참을 필요는 없어. 이모 앞에서도 싫은 건 말해도 돼.”“이모가 속상해도?”“응. 이모가 속상해도.”봄이는 잠깐 생각하다 책을 품에 안았다.“그럼 나는 이모가 보고 싶었다고만 해도 돼?”“맞아.”“아빠랑 만나는 게 좋은 건 아니야.”“알았어. 그것도 기억할게.”아이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봄이는 그제야 서연 손가락 두 개를 잡았다. 자료실에서는 뛰면 안 된다며 천천히 걸었다.2시가 되자 태주가 약속한 자리로 왔다. 봄이는 빌린 책을 보여 주었고, 서연은 책 말고는 따로 고른 게 없다고 말했다.“내가 돈 줬는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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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

서연은 부모 집에 가기 사흘 전, 정숙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이번 주 일요일에 갈게.”“그래. 미역국 끓여 놓으마.”“나 혼자 아니야.”수화기 너머에서 수도꼭지 소리가 멎었다.“태주 씨도 같이 가.”“걔가 왜 우리 집에 와.”“엄마한테 허락받으러 오는 건 아니야. 다시 만나기로 했다고 문자만 보내고 얼굴 한 번 안 비추는 것도 비겁한 것 같아서.”“나는 볼 얼굴 없다.”“그럼 문 앞에서 돌려보내. 그래도 미리 말은 해야 할 것 같았어.”정숙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밥은 6시에 먹는다.”허락도 환영도 아닌 말이었다. 서연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을 태주에게 그대로 전했다.***일요일 오후, 태주는 과일 상자 하나를 들고 부모 집 골목에 섰다. 넥타이까지 맨 그를 보고 서연이 인상을 썼다.“회사 사람 만나러 왔어요?”“뭘 입어도 마음에 안 들 것 같아서 제일 덜 혼날 걸 입었어.”“그건 맞을지도.”“웃지 마. 나 지금 도망가고 싶으니까.”“나도 그래요.”서연은 그의 손에서 과일 상자를 잠깐 받아 들었다. 태주의 손바닥에는 현장에서 긁힌 얕은 상처가 있었다. 약을 발랐느냐고 묻는 대신 상자를 다시 돌려주며 손등을 한번 눌렀다.누른 손등이 넥타이보다 먼저 떨렸다. 떨린 손을 과일 상자가 가렸다.“그래도 들어가요.”초인종을 누르자 동식이 문을 열었다. 그는 태주를 보자마자 얼굴을 굳혔지만 비켜서기는 했다.“왔습니다, 아버님.”“아버님 소리는 하지 말게.”“네. 한 선생님.”동식은 그 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서연이 신발을 벗으며 낮게 말했다.“아빠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너는 가만있어.”거실에는 네 사람 몫 수저가 놓여 있었다. 정숙은 태주를 보지 않고 국 냄비만 식탁 가운데 두었다.“과일은 왜 사 왔어. 받아 먹고 좋다고 한 줄 알까 봐 겁난다.”“좋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말은 참 반듯하지.”서연이 의자를 빼자 태주가 옆에 앉았다. 둘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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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

봄이가 약속한 국수는 삼 주 뒤에야 먹게 되었다.“밖에서 먹을까?”서연이 묻자 봄이가 고개를 저었다.“아빠 잔치국수 잘해. 멸치 냄새는 많이 나는데 맛있어.”“칭찬 맞지?”태주가 뒤에서 물었다.“반은.”통화 화면 속 아이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토요일 점심, 804호에서 한 번 밥을 먹자는 건 봄이가 먼저 꺼낸 말이었다.서연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게 아파트에 도착했다. 현관 앞에서 습관처럼 가방 옆주머니를 만지다가 손을 멈췄다. 예전에 쓰던 열쇠는 오래전에 태주에게 돌려주었다.초인종을 누르자 봄이가 안에서 소리쳤다.“내가 열 거야!”문이 열리고 양파 냄새가 밀려 나왔다. 봄이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서연이 작은 종이봉투를 들어 보였다.“후식 사 왔어.”“뭔데?”“배.”“또 과일이야?”“싫으면 이모가 다 먹지.”“아니, 들어와.”봄이는 마지못한 척 봉투를 받아 들었다. 현관에는 서연이 신던 슬리퍼 대신 회색 손님용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 태주가 새것을 사 두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 집의 모든 빈자리에 자기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주방에서는 태주가 면을 삶고 있었다. 티셔츠 소매를 걷은 팔에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국물 간 좀 볼래?”“내가 오면 간 보라고 부른 거죠?”“봄이가 짜다고 해서.”“아빠는 맨날 짜.”서연은 깨끗한 작은 숟가락으로 국물을 맛봤다.“짜요.”“둘이 편먹었네.”“소금 편이 없는 거예요.”태주가 물을 더 붓는 사이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세 사람의 웃음이 동시에 끊겼다.문을 열고 들어온 명자가 반찬 가방을 든 채 서 있었다.“할머니!”봄이가 먼저 달려갔다. 명자는 아이 머리를 쓰다듬다가 주방 앞의 서연을 보았다. 시선이 서연의 손에 들린 숟가락과 식탁의 세 그릇을 차례로 훑었다.“오늘 온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제가 부탁했어요.”봄이가 말했다.명자의 얼굴이 더 굳었다. 서연은 숟가락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안녕하세요.”“그래.”명자는 짧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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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사진 밖으로 숨지 않는 법

소담살림의 첫 수도권 상설점 설명회는 10월 마지막 금요일에 열렸다.서연은 아침 7시에 빈 매장에 도착했다. 진열대 높이를 다시 재고, 가격표가 뒤집힌 바구니를 바로잡고, 새 직원들에게 반품 접수 화면을 한 번 더 보여 주었다.“한 팀장님, 벌써 세 번째예요.”수진이 웃으며 말했다.“세 번째에 안 물어보면 오픈하고 열 번 물어봐.”“대전에서는 제가 그랬죠?”“열두 번.”수진은 대전 매장에서 올라와 새 직원 교육을 맡았다. 예전처럼 서연 뒤에서 지시만 기다리지 않고 체크리스트를 나눠 주었다.오전 설명회가 시작되자 서연은 마이크를 잡았다. 동선이 꼬인 이유와 고친 방법, 아이를 안고 온 손님이 한 손으로도 집을 수 있는 상품 높이, 반품 때문에 화난 고객에게 먼저 확인할 세 가지를 설명했다.말을 마치자 오미경이 맨 뒤에서 박수를 쳤다.“본사 운영팀장 명함은 다음 주에 나와요. 오늘은 그냥 한서연 팀장이라고 소개했습니다.”“미리 말 좀 해 주시지.”“말했으면 어젯밤 잠 못 잤을걸요.”“지금도 손 떨려요.”서연은 마이크를 내려놓고 제 손을 봤다. 정말 손끝이 조금 떨렸다. 지난해 겨울 혼자 원룸에 돌아와 운영 매뉴얼 첫 장을 쓰던 밤이 떠올랐다. 그때 고쳐 쓴 반품 항목을 오늘도 세 번이나 설명했다. 이제는 수진이 새 직원의 질문을 받아 주고 있었다.점심 무렵 매장 문이 일반 손님에게 열렸다. 태주는 폐점 1시간 전에야 도착했다. 현장복 위에 검은 점퍼를 걸쳤고 손에는 꽃 대신 편의점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꽃집 문 닫았어요?”“꽃 놓을 데 없을 것 같아서.”봉투 안에는 목캔디와 작은 생수, 삼각김밥 두 개가 들어 있었다.“아침 먹었어?”“김밥.”“점심은.”서연이 대답하지 않자 태주가 삼각김밥 하나를 뜯어 손에 쥐여 주었다.“축하는 먹고 받아.”“이게 축하 선물이에요?”“저녁은 따로.”두 사람이 매장 뒤편에서 김밥을 나눠 먹는 모습을 수진이 발견했다.“팀장님, 오셨으면 저한테도 말씀하시지.”서연은 씹던 것을 삼켰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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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우리 집 욕은 여기까지

사진이 올라온 다음 날부터 정숙의 휴대전화는 자주 울렸다.처음에는 서연의 큰이모였다. 소담살림 계정을 어떻게 찾았는지 사진을 확대해 태주 얼굴까지 알아봤다.“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맨 끝에 강 서방 맞지?”정숙은 설거지하던 손을 닦고 베란다로 나갔다.“일 때문에 갔나 보지.”“서연이 회사에 강 서방이 무슨 일로 가. 둘이 다시 붙었다며?”“붙었다는 말이 뭐냐.”“죽은 언니 남편 만나는 게 붙은 거지, 그럼 뭐야. 네가 말렸어야지.”정숙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기도 며칠 전까지 같은 말을 했다. 그 침묵을 동의로 알아들은 큰이모가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서희 불쌍해서 어쩌니. 동생이 제 자리 들어갈 줄 알았으면 눈도 못 감았겠다.”정숙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만해.”“뭘 그만해. 집안 망신인데.”“우리 서연이가 언니 자리 탐낸 애는 아니야.”“그럼 지금 하는 건 뭔데?”정숙은 대답 대신 전화를 끊었다.그 뒤로도 사촌과 고모에게서 안부를 가장한 연락이 왔다. 정숙은 처음 두 통에는 변명했고, 세 번째부터는 대답하지 않았다.***일요일 오전에는 큰이모가 직접 찾아왔다. 과일 한 봉지를 들고 왔지만 목적은 안부가 아니었다.“서연이 좀 불러. 내가 정신 차리게 말할게.”“출근하느라 바쁜 애를 왜 불러.”“일요일인데 무슨 출근이야.”“매장 여는 일 한다잖아.”거실에서 신문을 보던 동식이 안경을 벗었다.“당신은 가만있어.”정숙이 먼저 말했다. 큰이모는 상 위에 휴대전화를 올려놓았다. 화면에는 회사 사진이 크게 떠 있었다.“얘가 좋아요까지 눌렀더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자기 회사 사진에 눌렀겠지.”“강 서방도 나왔잖아.”“사진 끝에 얼굴 반쪽 나온 게 뭐.”정숙은 자기가 태주를 두둔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서연이 빈 반찬통을 든 채 들어왔다. 지난번 식사 때 정숙이 싸 준 통이었다.“큰이모 왔어?”“너 잘 왔다.”큰이모가 손짓했다.“앉아 봐. 엄마 속 그만 썩이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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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김치 한 통의 거리

첫눈이 내린 토요일, 정숙은 서연에게 사진 한 장을 보냈다.현관 앞에 배추 상자가 여섯 개 쌓여 있었다.‘아빠 허리 아프다. 시간 되면 와라.’서연은 답장을 쓰다 태주를 보았다. 두 사람은 서연 원룸에서 늦은 아침을 먹는 중이었다. 태주가 토스트 끝을 접어 입에 넣으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김장한대요.”“오늘?”“엄마는 김장 날짜를 늘 당일에 알려.”“갈 거야?”“응. 태주 씨는 봄이를 데리러 가야죠.”“2시까지는 시간 있어.”서연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같이 가겠다고?”“빈손으로 다시 오겠다고 했잖아.”“김장 날 빈손으로 오는 사위가 제일 미움받는데.”“사위 아니라고 하셨으니까 괜찮겠지.”태주는 웃었지만 손은 벌써 점퍼를 찾고 있었다. 서연은 말리지 않았다. 부모의 마음을 얻으려고 일부러 힘든 일을 시킬 생각도 없었지만, 언제까지 식탁에만 앉아 반듯한 대답을 하게 할 수도 없었다.부모 집 현관에 들어서자 매운 양념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식은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절인 배추 물을 빼고 있었다.태주를 본 정숙이 고무장갑 낀 손을 들었다.“오늘 온다는 말 못 들었다.”“제가 같이 왔습니다.”“빈손이네.”“지난번에 빈손으로 오겠다고 해서요.”정숙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서연을 봤다.“말대답은 누가 가르쳤니?”“원래 저래.”동식이 낮게 헛기침했다.“왔으면 상자나 베란다로 옮기게.”태주는 넥타이 대신 낡은 후드티 차림이었다. 소매를 걷고 배추 상자를 들었다. 한 상자를 옮기자 동식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바꿨고, 두 번째를 놓으니 너무 벽에 붙였다고 다시 빼라 했다.서연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무채를 버무렸다.“아빠, 일부러 그러지?”“통풍돼야 해서 그래.”“베란다에서 무슨 통풍.”“너는 양념이나 해.”태주는 아무 말 없이 상자를 다시 옮겼다. 세 번째부터는 동식이 원하는 간격을 먼저 물었다.점심때가 되어 네 사람은 김이 나는 수육을 가운데 놓고 앉았다. 정숙은 태주 앞 접시에 고기를 따로 놓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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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세 사람이 살 집

서연의 원룸 계약 만료 안내문은 크리스마스 이틀 전에 왔다.‘계약 갱신 의사가 있는 경우 1월 10일까지 회신 바랍니다.’서연은 현관 신발장 위에 종이를 올려 두고 잊었다. 연말 매출 보고와 새해 직원 교육표를 만들다 보니 집에서는 씻고 자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크리스마스 당일 저녁, 태주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원룸에 왔다. 봄이는 명자와 공연을 보고 늦게 돌아오기로 한 날이었다.“딸기 케이크?”“네가 좋아하잖아.”“봄이가 없을 때 먹으면 혼나는데.”“봄이 건 따로 사서 어머니 댁에 보냈어.”태주는 신발을 벗다가 안내문을 발견했다.“계약 끝나?”“3월에. 갱신할 거예요.”“벌써 정했어?”“안 할 이유가 없으니까.”서연은 부엌으로 가 접시를 꺼냈다. 태주가 안내문을 들고 뒤따라왔다.“갱신하면 보증금 올라?”“조금. 월세는 그대로 두겠대요.”“그럼 2년 더 사는 거고?”“보통은.”태주가 말이 없자 서연이 돌아봤다.“왜요. 804호 들어오라고 하게?”“아니.”대답이 너무 빨라 서연이 접시를 내려놓았다.“그렇게 싫어요?”“그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게 싫어.”태주는 안내문을 식탁에 놓았다.“네가 처음 살았던 작은방도 있고, 서희 물건도 있고, 봄이 기억도 있어. 거기 빈칸에 네 짐 넣고 새 출발이라고 하고 싶지 않아.”“그럼 뭘 하고 싶은데요.”“새 집을 알아보고 싶어.”서연의 손이 멈췄다.“누구 집.”“우리 집.”“우리 둘?”“셋.”태주는 의자를 빼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준비한 말을 잊은 사람처럼 마른 입술을 한번 훑었다.“너하고 결혼하고 싶어.”냉장고 모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연은 그가 반지를 꺼내나 손부터 보았다. 주머니에 넣지도 못한 두 손이 식탁 모서리를 잡고 있었다.“이렇게 해요?”“원래는 밥 먹고 하려고 했는데.”“반지는?”“아직.”“꽃도 없고.”“케이크는 있어.”“그건 먹는 거고.”태주의 얼굴이 난감하게 구겨졌다. 서연은 웃음이 나려는 걸 참고 물었다.“봄이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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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세 가지 질문

서연은 다음 날 11시 정각에 804호 초인종을 눌렀다.문을 연 봄이는 잠옷 바지에 두꺼운 양말을 신고 있었다. 서연이 들고 온 케이크 상자를 보자 곧장 주방에서 접시를 꺼내 왔다. 어제 두 사람이 먹고 남긴 딸기 케이크였다.“이모, 이거 아빠랑 먹었어?”“한 조각씩.”“내 건 왜 이렇게 작아?”태주가 주방에서 대답했다.“똑같이 잘랐어.”“아빠가 큰 거 먹었을 것 같은데.”봄이는 접시를 들고 식탁으로 갔다. 두 어른이 평소보다 말이 없는 걸 금세 알아챘다.“왜 둘이 이상해?”“할 말이 있어.”태주가 봄이 맞은편에 앉았다. 서연은 아이 옆도, 태주 옆도 아닌 식탁 끝 의자를 골랐다.“아빠하고 이모가 결혼하려고 해.”봄이는 포크에 찍은 딸기를 내려놓았다.“언제?”“날짜는 아직 안 정했어.”“나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응. 결혼하고 싶은지는 아빠하고 이모가 먼저 정했어.”아이의 얼굴이 굳었다. 태주는 얼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봄이가 화를 내도 되는 시간을 그대로 두었다.“그럼 나한테 왜 말해.”“봄이 생활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어떤 게 싫고 무서운지 같이 얘기해야 해서.”“내가 싫다고 하면 안 할 거야?”서연이 대답했다.“싫다고 말하면 이유를 듣고 서두르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결혼할지 말지를 봄이가 혼자 결정하게 하진 않을게.”봄이는 입술을 내밀었다.“어른들은 맨날 내 마음 중요하다면서 자기들이 정해.”“그렇지. 말해 놓고 이러니까.”“이모는 우리 엄마 되는 거야?”서연은 잠깐 숨을 골랐다.“아빠랑 결혼한 사람이라고 말할 일은 있겠지. 그런데 봄이한테 엄마라고 부르라고 하진 않을 거야. 이모라고 불러도 돼.”“그럼 우리 엄마는?”“그대로 봄이 엄마야.”“사진도?”“그대로 둘 거야.”봄이는 자리에서 내려와 거실 벽의 가족사진 앞으로 갔다. 5살 생일에 서희가 봄이를 안고, 태주가 옆에서 우스운 고깔모자를 쓴 사진이었다.“새 집 가면 이것도 가져가?”“봄이가 가져가고 싶으면.”태주가 말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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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축하 없는 약혼

새해 첫 토요일, 서연과 태주는 부모 집부터 찾았다.그 주에 받은 법률 상담은 가족을 만나는 일보다 짧았다. 아내가 사망했어도 그 동생과 법률혼을 할 수 없다는 답이었다. 상담자는 서로 다른 질문을 하는 두 사람에게 같은 조항을 다시 보여 주었다.서연은 돌아오는 버스에서 태주에게 물었다.“식을 올려도 서류에 남편이라고 못 쓰는 거죠?”“응.”“언젠가는 될 거라고 약속하지 마요.”“그런 약속 안 해.”두 사람이 말해 온 결혼은 법률상 배우자가 되는 일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알아본 뒤에도 같은 뜻인 척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둘은 신고가 가능한 것처럼 알리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함께 살겠다는 약속을 하는 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 차이를 부모에게도 숨기지 않을 생각이었다.태주는 이번에도 빈손이었다. 정숙은 그걸 보며 입을 삐죽였지만 아무 말 없이 떡국을 네 그릇 놓았다.“봄이는?”“어머니 댁에 있습니다.”“같이 오지 그랬니.”지난번과 다른 말에 서연이 눈을 들었다. 정숙은 얼른 덧붙였다.“지난번엔 준비가 안 됐고. 오늘은 떡국 많이 끓였으니까 그런 거야.”“다음에는 먼저 물어볼게.”식사를 절반쯤 했을 때 태주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동식의 이마가 벌써 구겨졌다.“또 무슨 말인가.”“저희 결혼하려고 합니다.”정숙의 숟가락이 국그릇 안으로 떨어졌다. 맑은 국물이 식탁보에 튀었다.“누가 허락했는데.”“허락받았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신고도 못 한다는 걸 알면서 식부터 올린다고?”동식이 물었다.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법적으로 부부가 됐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같이 살겠다는 약속을 사람들 앞에서 하고 싶습니다.”“안 된다는 데도 이유가 있겠지. 그걸 부모 앞에서 잘했다고 말하러 왔나.”“잘했다고 해 달라는 말씀은 못 드립니다.”정숙은 태주가 아니라 서연에게 물었다.“봄이는 알아?”서연이 휴지를 뽑아 국물을 닦으며 답했다.“알아. 아직 좋다고 하진 않았어.”“애도 싫다는데 밀어붙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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