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Chapter 21 - Chapter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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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아침을 맡는 사람

목요일 아침, 태주와 서연은 봄이를 식탁 앞에 앉혀 놓고 달력을 펼쳤다.“이모가 5월 마지막 날까지 더 같이 있기로 했어.”태주가 먼저 말하자 봄이는 달력보다 서연을 봤다.“오늘 안 가?”“오늘도 있고, 다음 달까지 있을 거야. 화요일에는 이모 집에서 잘 때도 있고.”“왜?”“이모 집도 이모가 돌봐야 하니까.”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5월 31일의 동그라미를 손가락으로 눌렀다.“여기 되면 가?”“그날 다시 얘기할 거야.”서연은 갈 수도, 더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이는 입을 삐죽 내밀지 않았고 가지 말라고 매달리지도 않았다.“그럼 달력 안 버리면 돼.”봄이에게는 날짜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그 주 일요일 밤, 태주는 현장 단체방에 올라온 일정을 확인하고 곧바로 서연에게 말했다.“내일 6시 전에 나가야 해.”“월요일부터요?”“자재가 일찍 들어온대. 내가 받아야 해.”봄이의 유치원 문은 8시부터 열렸다. 서연이 등원시키면 회사까지 가는 시간이 빠듯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미경 언니한테 먼저 말해 볼게요. 10분 정도 늦게 시작하고 점심을 줄이면 돼요.”“안 되면 내가 다른 사람 찾을게.”“아직 안 된다고 안 했어요.”서연은 미경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월요일 한 번만이라면 오전 고객문의 인계를 바꾸고 8시 20분까지 출근해도 된다고 했다.“돼요.”태주는 알겠다고만 하지 않고 다음 날 준비부터 시작했다. 봄이가 입을 옷을 의자에 걸고, 가방 안쪽 지퍼에 알림장이 있는지 확인했다. 노란 물병에는 물을 받아 냉장고에 넣었다.“아침은 식빵이랑 달걀. 봄이는 잼 가장자리까지 바르면 안 먹어.”“알아요.”“머리는 낮게 묶어야 하고.”“그것도 알아요.”태주가 입을 다물었다. 서연은 웃음을 참으며 봄이의 여벌 손수건만 가방 앞주머니에 넣었다.***월요일 새벽,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서연이 눈을 떴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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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남겨 둔 저녁

목요일 오후 3시, 미경이 서연의 책상 옆에 주문서 뭉치를 내려놓았다.“봄 기획전 상품 하나가 빠졌어. 오늘 상세 페이지까지 올려야 내일 광고가 나가.”서연은 시계를 봤다. 4시에 퇴근해도 유치원에 도착하면 5시였다. 지금부터 새 사진을 골라 문구를 붙이려면 2시간은 더 필요했다.“제가 집에서 이어서 하면 안 돼요?”“원본 사진부터 여기서 같이 골라야 해. 오늘 7시까지 가능하겠어?”미경은 부탁하면서도 당연하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안 되면 자기가 남겠다고 했다.서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태주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태주가 미리 공유해 준 현장 일정을 먼저 확인했다. 오늘은 조기 출근일이 아니었고, 전날 들은 바로는 6시 전에 끝날 예정이었다.“확인하고 말씀드릴게요.”서연은 복도로 나가 태주에게 전화했다.“형부, 저 오늘 7시까지 남아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 내가 봄이를 데리러 갈게.”“현장은 괜찮으세요?”“5시 전에 나가면 돼. 유치원에는 내가 연락할게.”“저녁 재택은 안 해도 돼요. 오늘 사무실에서 다 끝낼 거예요.”“천천히 하고 와.”통화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서연은 미경에게 오늘 마치겠다고 말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5시가 가까워지자 습관처럼 가방을 챙길 뻔했다. 휴대전화에는 봄이가 태주 손을 잡고 유치원 현관을 나오는 사진이 와 있었다.하원했어.서연은 사진을 확대했다. 봄이는 노란 머리끈을 하고 한 손에는 가족 그림을 말아 쥐고 있었다.그림 또 가져갔어요?선생님이 이번 주까지 교실에 다시 붙여도 되냐고 물었대. 오늘은 자랑하려고 들고 나왔다가 다시 드렸고.아이의 하루가 자신 없이도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서연은 페이지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7시 10분, 마지막 문구를 등록했다. 미경은 수고했다며 택시비를 주려고 했지만 서연은 버스가 끊길 시간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대신 금요일 오전의 사진 정리 업무를 줄여 주기로 했다.804호에 도착한 시각은 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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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남들이 보기에는

금요일, 봄이는 가족 그림을 다시 들고 왔다.다시 교실 벽에 붙여 두었던 그림 모서리에는 투명 테이프 자국이 남았다. 봄이는 접히면 안 된다며 그림을 식탁에 펼쳐 놓고, 친구들이 엄마의 노란 원피스를 예쁘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이모는 왜 멀리 있냐고도 물었어.”서연의 손이 그림 위에서 멈췄다.“뭐라고 했어?”“종이 끝이라서 그런 거라고 했어.”아이에게는 그것이 전부였다. 서연은 그림을 새 투명 파일에 넣어 거실 서랍에 보관했다.저녁을 먹은 뒤에는 부모에게 영상 전화를 걸었다. 입주를 연장한 지 일주일이 넘도록 말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정숙은 화면에 봄이의 얼굴이 나오자 먼저 웃었다. 봄이는 유치원에서 받은 꽃 도장을 자랑했고, 동식은 안경을 벗어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우리 봄이는 이제 안 아프지?”“응. 죽은 싫어.”봄이가 자기 이야기를 다 한 뒤 방으로 가자 서연은 휴대전화를 식탁 컵에 기대 세웠다. 태주는 주방에서 설거지 중이었다.“엄마, 나 여기 조금 더 있기로 했어.”정숙의 표정이 달라졌다.“얼마나?”“5월 말까지. 그때 다시 얘기하기로 했고.”“봄이가 아직 많이 힘들어하니?”“그것도 있고, 형부 현장 일정이 겹쳐서 하원이 어려운 날이 있어.”동식이 화면 밖에서 헛기침했다.“처음엔 한 달이라고 하지 않았냐.”“그래서 지난주에 다시 얘기했어. 그냥 눌러앉은 거 아니야.”“네 원룸은?”“그대로 있어. 화요일에는 가서 자기도 하고.”서연은 비용과 개인시간까지 합의했다는 말을 차례로 설명했다. 말이 길어질수록 변명처럼 들렸다.정숙은 한참 듣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태주 씨 어머니도 아시니?”“아직 따로 말씀드리진 않았어.”“그 집 어른부터 알아야지.”“형부가 말씀드리겠지.”“서연아. 네가 잘못한다는 얘기가 아니야.”정숙이 한숨을 쉬었다.“그래도 남들이 보기에는 언니 죽고 한 달도 안 돼서 처제가 형부 집에 들어가 사는 거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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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다른 방법

토요일 오전, 서연은 작은 여행가방에 갈아입을 옷을 넣었다.이번 주말은 원룸에서 보내기로 했다. 민아와 점심을 먹고 미뤄 둔 미용실에도 갈 생각이었다.봄이는 현관에 앉아 서연의 운동화 끈을 만졌다.“내일 와?”“내일 저녁에.”“달력에 있어?”서연은 냉장고 주간표의 토요일과 일요일 칸을 보여 줬다. ‘이모 원룸’이라는 글씨와 일요일 저녁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여기까지 오면 와.”봄이는 일요일 칸을 손가락으로 짚고 일어났다.태주는 서연의 가방을 대신 들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어 주며 버스 도착 시간만 확인했다.들지 않은 가방 끈이 손바닥에 남았다. 남은 끈을 그가 만지지 않는 것이, 오늘 원룸으로 가는 일의 선이었다.“오늘 어머니께 말씀드릴 거야.”“제가 없는 데서요?”“내가 설명할 일이니까.”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부모와 통화한 뒤 생긴 묵직한 마음까지 가방에 넣은 기분이었다.원룸에 짐을 내려놓고 민아를 만났다. 민아는 서연의 머리부터 살폈다.“너 뿌리 좀 봐. 장례 치르고 한 번도 미용실 안 갔지?”“갈 정신이 있었겠냐.”“오늘은 내가 끌고 간다.”둘은 국수를 먹고 동네 미용실에 갔다. 서연은 길이를 자르지 않고 자란 부분만 정리했다. 거울 속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검은 옷을 입고 빈소에 앉아 있던 때와는 달랐다.민아는 계산대 옆에서 다음 달 전시회 표 두 장을 꺼냈다.“5월 둘째 토요일. 너 시간 뺀다며.”“주말 두 번은 내 일정 먼저 잡기로 했어.”“그럼 하나는 이거.”서연은 휴대전화 달력에 약속을 저장했다. 804호 냉장고가 아니라 자기 달력에 먼저 넣었다.“아직도 거기 있는 게 마음에 걸려?”서연의 질문에 민아는 잠깐 생각했다.“걱정은 되지. 근데 네가 생각 없이 들어가 있을 사람은 아니잖아.”“엄마는 남들이 이상하게 볼 수 있대.”“볼 수도 있겠지. 남들은 원래 남의 사정 반쯤만 듣고 나머지 반은 만들어 내니까.”민아는 서연의 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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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늦은 교실

목요일 아침, 봄이는 유치원 가방보다 작은 종이가방부터 챙겼다.안에는 여벌 양말과 색칠책, 오후에 먹을 작은 간식이 들어 있었다. 오늘은 평소 반이 끝난 뒤 소율이와 다른 교실에서 1시간 반쯤 더 지내 보기로 한 날이었다.“아빠가 해 지기 전에 와?”“응. 6시 30분 전에 갈 거야.”태주는 봄이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싫으면 선생님한테 말해. 아빠한테 바로 전화해 달라고.”“이모한테는?”“오늘 이모는 이모 집에 가는 날이야.”서연은 식탁 달력의 화살표를 보여 줬다. 원래 화요일에 가려 했지만 회사 마감 때문에 미뤄 둔 원룸 정리를 오늘 하기로 했다. 늦은 돌봄 체험과 일부러 겹친 것은 아니었다.“아빠가 사진 보내 주면 이모도 볼게. 잘 다녀와.”서연이 말하자 봄이는 종이가방 손잡이를 꼭 쥐고 현관을 나섰다.오후 4시, 서연은 유치원과 반대 방향 버스를 탔다. 5시가 지나도록 연락은 없었다. 좋은 신호라는 걸 알면서도 휴대전화를 몇 번이나 뒤집어 봤다.5시 40분쯤 태주의 문자가 왔다.지금 출발해. 선생님한테 확인했고 봄이가 잘 있대.조금 뒤 사진도 도착했다. 낯선 교실에서 봄이는 소율이와 종이컵 성을 쌓고 있었다. 처음에는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친구가 오고 나서는 놀이에 섞였다는 설명이 붙었다.서연은 사진을 오래 봤다. 아이가 괜찮다는 안도보다, 자기 없이도 태주가 약속한 시간에 데리러 가고 있다는 사실이 먼저 들어왔다.원룸에서 혼자 저녁을 먹는데 영상 속도 아닌 태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잘 있대.’ 고작 세 글자 뒤의 말투까지 기억났다.기억난 말투가 컵밥보다 먼저 목구멍을 막았다. 막힌 목을 물로 넘겼다. 넘긴 물 뒤로 늦은 교실의 크레파스 냄새가 상상됐다. 상상된 냄새를 따라 804로 가고 싶지 않아, 전시회 표를 한 번 더 만졌다.서연은 텔레비전을 켜지 않았다. 셔츠 하나를 다리고, 다음 주 전시회 표를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세웠다. 자기 저녁을 보내는 연습을 하는데도 다른 집의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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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봄이가 고른 하루

어린이날을 사흘 앞두고 태주는 봄이에게 세 가지를 물었다.놀이공원, 동물원, 아파트 앞 공원에서 열리는 어린이 행사.봄이는 한참 고민하다 세 번째를 골랐다.“줄 오래 안 서도 돼?”“행사에도 줄은 있을 수 있어.”“그럼 힘들면 집에 와도 돼?”“바로 앞이니까.”작년 어린이날에는 서희와 태주가 봄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갔다. 가족 태블릿에 회전목마 앞 사진이 남아 있었다. 봄이는 그 사진을 본 뒤 놀이공원에 가자고 했다가, 밤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싫다고 말을 바꿨다.태주는 다시 가자고 설득하지 않았다.***5월 5일 아침, 식탁 위에는 준비물이 세 무더기로 나뉘어 있었다.태주는 주먹밥과 물, 휴대용 물티슈를 챙겼다. 서연은 돗자리와 봄이의 얇은 겉옷, 여벌 양말을 가방에 넣었다. 명자는 과일과 작은 약과 봉지를 들고 9시에 도착했다.“공원 가는데 이삿짐을 싸 놨네.”명자가 가방들을 보고 혀를 찼다.“할머니 것도 많아.”봄이가 과일통을 가리키자 명자는 얼른 자기 가방에 넣었다.“이건 먹는 거라 짐이 아니야.”네 사람은 걸어서 공원으로 갔다. 명자의 걸음에 맞추자 평소 10분 거리도 20분 가까이 걸렸다. 봄이는 앞서 뛰지 않고 할머니 옆에서 손을 잡았다.공원 입구에는 종이 바람개비와 비눗방울 장난감이 매달려 있었다. 작은 무대에서는 어린이 노래가 흘러나왔고, 잔디 가장자리마다 체험 천막이 늘어서 있었다.봄이는 제일 먼저 얼굴에 그림을 그려 주는 줄에 섰다. 토끼와 나비 중에서 고민하다 파란 토끼를 골랐다.“귀도 파란색으로 해 주세요.”서연은 장례식장에서 파란 토끼 귀를 칠하던 아이를 떠올렸다. 지금의 봄이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웃고 있었다.그다음에는 태주와 나무 팽이를 만들었다. 태주가 사포로 모서리를 다듬고 봄이가 색을 칠했다. 서연은 명자와 그늘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지난번에는 미안했다.”명자가 갑자기 말했다.“뭐가요?”“네 방까지 들여다본 거.”서연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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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카네이션의 자리

금요일 아침, 봄이는 유치원 가방을 등에 멘 채 현관 앞에서 태주를 세웠다.“아빠, 오늘은 늦게 열어 봐야 돼.”봄이가 가방 앞주머니를 두 손으로 가렸다. 종이 끝이 비뚤게 튀어나와 있었지만 태주는 못 본 척 무릎을 굽혔다.“몇 시부터 열 수 있는데?”“저녁 먹고. 이모도 있을 때.”서연은 봄이의 노란 물병을 건네다가 멈췄다.“이모가 꼭 있어야 해?”“이모가 테이프 잘 붙이잖아.”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서연이 웃자 봄이도 따라 웃었다. 태주는 아이 손을 잡고 현관을 나서며 오늘 하원은 자기가 한다고 다시 말했다. 어린이날 뒤 현장이 잠잠해진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소담살림 사무실에는 어버이날 선물 문의가 오전 내내 쌓였다. 리본 색을 바꿔 달라는 요청, 오늘 발송하면 주말 전에 도착하느냐는 질문, 문구를 잘못 적었다는 전화가 이어졌다. 서연은 점심도 책상에서 김밥으로 때웠다.오후 3시쯤 휴대전화에 사진이 도착했다. 태주가 보낸 것이었다. 유치원 신발장 앞에 선 봄이가 품 안 가득 빨간 종이를 안고 있었다.‘숨기는 중.’서연은 답장 대신 입을 다문 얼굴 표시 하나를 보냈다. 예전 같으면 준비물이며 간식이며 더 물었을 텐데, 이제는 태주가 알아서 묻고 챙긴다는 걸 알았다.저녁에는 태주가 소고기뭇국을 데우고 서연이 달걀말이를 했다. 봄이는 밥을 평소보다 빨리 먹더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이제 열어도 돼.”가방에서 나온 것은 종이 카네이션 세 송이와 손바닥만 한 봉투들이었다. 꽃잎은 여러 번 접혀 두툼했고, 초록색 빨대가 줄기처럼 붙어 있었다. 봄이는 가장 큰 꽃을 태주에게 내밀었다.“아빠 거. 아빠는 아빠니까.”태주가 꽃을 받으며 목을 가다듬었다.“고맙습니다, 강봄 어린이.”“그리고 이건 할머니 거야. 두 개.”빨간 봉투에는 ‘할머니’, 분홍 봉투에는 ‘외할머니’라고 삐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봄이는 누구에게 어느 꽃을 줄지 헷갈리지 않으려고 뒷면에 명자와 정숙의 성까지 적어 두었다.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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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토요일의 옷

토요일 아침, 서연은 작은방 옷장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804호에 가져온 옷은 대부분 출근용 셔츠와 편한 바지였다. 원룸에서 미리 챙겨 온 연두색 원피스는 여행가방 맨 아래에 접혀 있었다. 작년 여름 민아와 세일 때 산 뒤 두 번밖에 입지 않은 옷이었다.서연은 원피스를 꺼냈다가 다시 접었다. 전시회에 갈 뿐인데 지나치게 차려입은 것 같았다. 그때 열린 문틈으로 봄이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 그거 입어.”“왜?”“잎사귀 색이야.”봄이는 정답을 정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결국 원피스를 입고 얇은 재킷을 걸쳤다. 거울 속에는 아이를 데리러 뛰기 좋은 옷을 먼저 고르던 사람이 아니라, 토요일 약속에 나가는 29살 여자가 서 있었다.거실에서 도서관 가방을 챙기던 태주가 현관 쪽을 보았다. 그의 시선은 잠깐 머물렀다가 곧 봄이의 물병으로 내려갔다.내려가기 전 시선이 원피스 깃에 한 박자 남았다. 남은 박자를 서연은 재킷 단추로 가렸다. 가린 단추가 보기 좋다, 와 겹쳤다.“비 온대. 우산 가져가.”“가방에 넣었어요.”“전시회 끝나고 저녁 먹는다고 했지?”“네. 늦어도 연락은 할게요.”“연락도 급한 일 있을 때만 해. 봄이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봄이도 손을 번쩍 들었다.“나는 도서관에서 공룡책 빌릴 거야. 이모는 그림 보고.”현관문이 닫히기 전 서연은 자기도 모르게 냉장고 달력을 확인했다. ‘서연 전시회’ 옆에는 태주의 글씨로 ‘봄이 도서관, 점심 아빠’가 적혀 있었다. 서연이 덧붙일 일은 없었다.민아는 지하철역 출구에서 서연을 보자 두 걸음 물러섰다.“이 옷 아직 있었네.”“너 기억해?”“내가 골랐잖아. 네가 형광등 아래서는 너무 밝다고 안 입던 거.”둘은 예약한 작은 사진전으로 걸어갔다. 전시는 오래된 동네의 부엌과 식탁을 찍은 사진들로 꾸며져 있었다. 벗겨진 찬장 문, 김이 밴 창문, 가족 수만큼 놓인 서로 다른 수저가 벽마다 걸렸다.서연은 세 사람이 앉을 만큼 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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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켜 둔 불

“목요일 저녁에 회식해요.”서연은 월요일 아침, 냉장고 달력에 먼저 적었다. 소담살림 어버이날 주문을 무사히 넘긴 기념으로 미경이 저녁을 사기로 했다. 평소라면 아이 하원 시간을 먼저 계산했겠지만, 목요일은 태주가 현장에서 일찍 나올 수 있는 날이었다.태주는 우유를 꺼내다 달력을 보았다.“몇 시쯤 끝나?”“정해진 건 없어요. 10시 전에는 나오려고요.”“나오려고 하지 말고 끝날 때 와. 목요일은 내가 하원해.”“저녁 재택 1시간은 금요일로 옮겨 놨어요.”“그럼 됐네.”태주는 더 묻지 않고 우유를 데웠다. 봄이는 식탁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달력에 작은 포도알을 그렸다.“회식은 포도 먹는 거야?”“아니. 회사 사람들이 같이 밥 먹는 거.”“그럼 이모도 늦은 교실이네.”서연은 웃으며 포도알 옆에 ‘회사 저녁’이라고 적었다.***목요일 오전부터 사무실은 뒤늦은 교환 요청으로 바빴다. 리본 색이 사진과 다르다는 고객, 주소를 잘못 썼다는 고객, 주말에 문을 닫는 가게로 배송됐다는 고객의 전화를 번갈아 받았다.오후 4시가 되자 미경이 손뼉을 쳤다.“오늘은 여기까지. 6시까지 오는 급한 전화는 내가 받을게. 다들 컴퓨터 꺼.”서연은 마지막 문의 기록을 저장하고 태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금 회사 나가요. 회식 장소 도착하면 한 번 연락할게요.’곧 답이 왔다.‘봄이를 데리고 나왔어. 전화 급하면 해.’사진도 설명도 없었다. 그 짧은 문장으로 충분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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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아빠 없는 밤

토요일 오전, 태주는 봄이의 가방에 딸기와 물을 넣었다. 정숙과 동식에게 가기로 한 날이었다.“서연아, 같이 안 가도 돼.”작은방에서 빨래를 개던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엄마가 저도 오라고 할 텐데요.”“네가 온다고 해야 오는 거지. 지난주에 하루 나갔다고 이번 주까지 다 반납할 필요 없어.”서연은 잠깐 생각하다 원룸에 들러 여름옷을 바꾸기로 했다. 태주와 봄이는 버스터미널로, 서연은 반대편 정류장으로 향했다.오후에 정숙에게서 사진이 왔다. 마당 평상에 앉은 동식과 봄이, 그 옆에서 사과를 깎는 태주가 찍혀 있었다. ‘약속대로 둘이 왔다. 걱정 말고 네 일 봐.’라는 글도 붙어 있었다.서연은 답장 대신 원룸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얇은 여름옷을 꺼내고 작은방에 가져갈 것과 원룸에 둘 것을 나눴다. 모든 옷을 옮기지는 않았다.저녁 7시가 넘어 태주와 봄이가 돌아왔다. 봄이는 외할아버지가 접어 준 종이학을 자랑했고, 태주는 정숙이 싸 준 열무김치 통을 냉장고 아래 칸에 넣었다.“엄마가 뭐라던가요?”“밥 더 먹으라더라.”“그것 말고요.”“서연이 원룸 없애는 것처럼 굴지 말라고. 그래서 그럴 일 없다고 했어.”태주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듯 말했다. 서연은 가져온 여름옷의 절반만 작은방 서랍에 넣었다.***월요일 오후, 태주에게 현장 일정이 하나 생겼다. 외곽 상가의 바닥 공사가 밤에만 가능해 화요일 저녁부터 수요일 새벽까지 현장에 있어야 했다. 먼 길을 새벽에 운전해 돌아오는 것보다 근처 숙소에서 두세 시간이라도 쉬고 오는 편이 안전했다.태주는 퇴근하자마자 냉장고 메모 앞에 섰다.“내일 늦은 돌봄 자리부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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