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Chapter 41 - Chapter 50

140 Chapters

제41화. 헤어진 사람

11월 첫째 화요일, 소담살림 회의실 문이 열리자 서연은 펜을 놓쳤다.바닥에 떨어진 펜이 테이블 다리를 치고 굴렀다. 협력사 직원들 사이에서 들어오던 남자가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웠다.“여기.”두 해 전까지 매일 듣던 목소리였다.서연은 펜을 받아 들고 남자의 명찰을 봤다.윤재민. 32세. 온유리빙 브랜드기획팀 팀장.“두 분, 아는 사이세요?”미경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서연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네. 예전에 알던 사이예요.”재민도 그 말에 맞춰 인사했다.“오랜만입니다.”회의는 겨울 침구 공동 기획전 이야기로 시작됐다. 서연은 화면에 띄운 판매 자료를 설명했고 재민은 납품 일정과 촬영 가능한 제품 수를 답했다. 그는 사적인 말을 섞지 않았다. 서연이 숫자를 잘못 읽었을 때도 아는 척 고쳐 주지 않고 다음 장에서 정확한 수치를 짚었다.그 덕분에 서연은 회의를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1시간 뒤 협력사 직원들이 먼저 나갔다. 서연이 노트북 선을 정리하는 동안 재민은 문 옆에서 기다렸다.“잠깐 이야기해도 돼?”“근무 중이야.”“알아. 회사 얘기 아니면 밖에서 할게.”“앞으로 회의 몇 번 더 있어?”“이번 달은 내가 담당이야. 불편하면 우리 팀 사람 바꿔 달라고 할 수 있어.”서연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예전의 재민은 결정을 미루는 사람이었다. 결혼식장을 알아볼 때도, 그의 부모가 신혼집 지역을 정했을 때도, 서연에게 일을 그만두라는 말이 나왔을 때도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기다리다가 약혼을 끝낸 쪽은 서연이었다.마지막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Read more

제42화. 세 번째 그릇

목요일 저녁 7시가 되기 3분 전, 윤재민은 회사 앞 카페 창가에 앉아 있었다.서연이 맞은편 의자를 당기자 그는 휴대전화 화면을 뒤집었다. 테이블에는 물 두 잔뿐이었다.“뭐 마실래?”“안 마셔도 돼. 30분이니까.”재민은 주문대로 30분 타이머라도 맞출 사람처럼 벽시계를 한 번 봤다.“그때 미안했어.”서연은 코트를 벗지 않았다.“뭐가?”“네가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했을 때, 난 네 말도 이해한다고만 했어. 정작 우리 부모님한테는 한 번도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고.”“이제는 말했어?”“응. 그땐 지방으로 가 놓고 부모님 탓을 했지. 서울로 다시 온 건 내가 지원한 거야.”“나 때문에?”“그렇게 말하면 또 네가 책임져야 할 것 같잖아. 회사에서 서울팀 맡으라고 했고 내가 지원했어. 네가 여기 있는 건 나중에 알았어.”재민은 준비한 변명 대신 사실을 짧게 놓았다.“사과는 받아 줄게.”그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고마워.”“그렇다고 우리가 다시 시작하는 건 아니야.”“알아.”“회사 일은 회사에서만 하고.”“그것도 알아.”재민은 잠시 물잔을 만지다가 물었다.“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말하는 건?”서연은 곧바로 거절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 하나 듣자고 나온 자리에서 앞으로의 결혼까지 결정할 수는 없었다.“오늘은 사과만 듣기로 했잖아.&rd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Read more

제43화. 달라진 사람

태주는 세 번째 그릇을 찬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아빠, 왜 이모 그릇 꺼냈어?”봄이가 돈가스에 소스를 찍으며 물었다.“세 개 꺼내던 게 습관돼서.”“이모 이제 여기 안 사는데.”“알아. 밥 먹어.”태주는 대답하고 자기 접시를 봤다. 서연이 떠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두 사람 몫만 차린 날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오늘만 손이 틀린 이유까지 따질 필요는 없었다.밤에 봄이를 재운 뒤 그는 휴대전화를 열었다. 서연과의 대화창에는 목요일에 주고받은 도서관 시간과 책 두 권에 관한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잘 들어갔어?’적어 둔 문장을 지웠다. 열쇠를 돌려준 날의 확인과 같은 문장이라 더 지웠다. 열쇠를 돌려준 날에도 하지 않은 확인이었다. 대신 주방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다음 주 화요일, 소담살림 겨울 침구 촬영을 2시간 앞두고 문제가 생겼다.온유리빙에서 보내기로 한 베이지색 이불 한 상자가 엉뚱한 물류센터로 갔다. 메인 화면에 들어갈 제품이라 빠지면 촬영 전체를 다시 잡아야 했다.“퀵으로 받아도 3시 넘는대.”미경이 운송장 화면을 보며 혀를 찼다.“스튜디오 4시까지인데.”서연은 촬영 순서를 바꾸려고 작가에게 전화했다. 그때 협업 단체방에 재민의 메시지가 올라왔다.‘오배송은 저희 쪽 확인 누락입니다. 전시실 동일 제품 확보했습니다. 제가 스튜디오로 가져가겠습니다. 도착 예상 13:40.’서연은 전화를 끊고 답했다.‘확인했습니다. 먼저 다른 색상부터 촬영하겠습니다.’1시 37분, 재민이 큰 상자를 안고 스튜디오에 들어왔다. 코트 어깨에 먼지가 묻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Read more

제44화. 차가운 방

금요일 저녁, 민아는 고기 한 점을 불판에 올리며 물었다.“그래서 전 약혼자가 다시 만나자고 했다고?”“두 번째 기회를 달라고 했어.”“그게 그 말이지. 넌 뭐랬는데?”“아직 아무 말 안 했어.”민아는 익은 고기를 서연의 접시에 놓았다.“그 사람, 예전에는 자기 엄마 말 한마디도 못 거절했다며.”“이번엔 달라진 것 같긴 해.”“한 번 상자 들고 왔다고?”“그것 때문만은 아니고.”서연은 촬영장에서 재민이 자기 팀의 실수를 처리한 일을 설명했다. 민아는 듣고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사람은 달라질 수 있지. 네가 다시 만나야 할 이유랑은 별개고.”“알아.”“그리고 형부 집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결혼부터 생각하지 마.”“결혼 생각 안 했어.”“네 얼굴이 계산 중이길래.”서연은 물컵을 들어 입을 가렸다. 민아는 더 캐묻지 않고 불판의 고기를 뒤집었다.밤 10시가 넘어 원룸에 돌아왔을 때 방 안은 이상할 만큼 차가웠다. 보일러 조절기에는 숫자가 켜져 있었지만 바닥에 온기가 없었다.서연은 싱크대 온수를 틀었다. 한참 기다려도 찬물만 나왔다.관리인에게 전화하자 주말 당직 번호를 알려 줬다. 당직 기사는 오늘 방문이 어렵고 토요일 오전에 점검할 수 있다고 했다.서연은 접수번호와 방문 시간을 문자로 받아 두었다. 전기장판은 이사할 때 가져오지 않아 얇은 이불 두 장뿐이었다.‘우리 집 와.’상황을 들은 민아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Read more

제45화. 잘 다녀오세요

일주일 미룬 도서관 약속 날, 봄이는 반납할 책 두 권을 가슴에 안고 서연을 기다렸다. “이모!” 자동문이 열리자 봄이가 뛰어왔다. 서연은 아이의 이마부터 짚었다. “콧물은?” “다 나았어.” “어제까지 조금 났어.” 뒤따라온 태주가 바로잡았다. “그럼 오래 있지 말고 책만 바꾸자.” 서연은 봄이의 가방을 대신 들지 않았다. 지난번 약속대로 봄이가 책을 직접 들고 반납기에 넣었다. 어린이실에서 새 책을 고르는 동안 태주는 창가 의자에 앉아 업무 전화를 받았다. 봄이는 공룡 책과 요리책을 번갈아 들고 고민했다. “둘 다 빌리면 안 돼?” “지난번 빌린 것도 두 권 다 읽었어?” “아빠한테 읽어 줬어.” “내가 읽어 줬지.” 통화를 끝낸 태주가 끼어들자 봄이는 입을 삐죽였다. “나도 제목 읽었어.” 결국 공룡 책 한 권과 짧은 동화 한 권을 골랐다. 대출은 태주가 했고, 서연은 반납 날짜를 봄이의 수첩에 적어 줬다. 도서관을 나온 셋은 근처 분식집에 들어갔다. 봄이는 안 매운 떡볶이를 주문했고 태주는 어묵 국물을 앞에 놓아 줬다. “내일은 할머니 집에서 점심 먹어.” 태주가 말하자 봄이가 어묵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아줌마 만나.” 서연의 젓가락이 멈췄다. 태주가 물컵을 봄이 쪽으로 밀었다. 밀린 물컵이 소개팅이라는 세 음절을 가렸다. 가린 음절이 떡볶이보다 맵게 남았다. “어머니가 아는 분 소개해 주신대.” “아.” “한 번 밥만 먹는 거야.” 그는 묻지도 않은 설명을 덧붙였다. “봄이는 어머니가 보시고. 2시간 정도.” “잘됐네요.” 서연은 떡볶이 접시를 봄이 쪽으로 돌렸다. “어떤 분이에요?” “신유경 씨. 서른넷이고 세무사래. 어머니 친구분 딸.” “괜찮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Read more

제46화. 한 번만 보는 자리

일요일 오전, 명자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804호에 왔다.“봄이 점심은 내가 먹일 테니 서두르지 마.”태주는 현관 거울 앞에서 셔츠 깃을 만졌다.“2시간 안에 옵니다.”“처음부터 시계 보고 앉아 있으면 상대도 알아.”“봄이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닙니다.”“그럼 누구 때문에 그래.”태주는 대답하지 않고 코트를 입었다. 봄이는 거실 바닥에서 색칠책을 펴 놓고 아빠를 올려다봤다.“아줌마 만나고 와?”“응. 점심만 먹고 올게.”“이모도 와?”“이모는 오늘 자기 일 있어.”봄이는 금세 다시 색칠책으로 고개를 숙였다. 태주는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나왔다.식당에는 신유경이 먼저 와 있었다. 짙은 회색 니트에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자였다. 태주가 다가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강태주 씨 맞으시죠?”“네. 늦지 않았습니까?”“저도 방금 왔어요.”둘은 명자가 미리 주문해 둔 점심 정식을 취소하고 먹고 싶은 메뉴를 다시 골랐다. 유경은 어머니들이 정한 것부터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 않으냐며 웃었다.“제 얘기는 어디까지 들으셨어요?”태주가 묻자 유경은 물잔을 내려놓았다.“아내분을 올해 잃으셨고, 여섯 살 딸이 있다는 것까지요. 건설회사에서 현장 관리하신다는 것도요.”“틀린 건 없습니다.”“저는 3년 전에 이혼했고 아이는 없어요. 그쪽도 들으셨죠?”“네.&rdquo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Read more

제47화. 한 달만

겨울 침구 기획전이 시작된 금요일, 첫날 주문량은 예상치보다 18% 높았다.소담살림 회의실에서 마지막 점검을 마친 뒤 미경이 박수를 쳤다.“이번 주는 수정 없이 끝내자. 주말에 전화하는 사람 벌금.”온유리빙 직원들도 웃으며 노트북을 닫았다. 재민은 반품 접수 담당 번호와 월요일 확인 사항만 공유했다.“긴급한 품질 문제 외에는 월요일에 대응하겠습니다.”“윤 팀장님도 주말에는 쉬세요.”미경이 말하자 재민은 서연을 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회의가 끝나고 협력사 직원들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재민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내려갔다. 서연에게 남으라는 눈짓도, 따로 기다리겠다는 문자도 없었다.서연은 자리로 돌아와 한 달간 주고받은 메일을 정리했다. 재민이 개인적인 문장을 쓴 것은 없었다. 오배송을 해결한 날에도, 첫날 주문 수치가 나온 오늘도 업무 밖으로 넘어오지 않았다.답을 미루는 동안 편했던 것은 사실이었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재민의 변화를 계속 시험하는 것도 공평하지 않았다.서연은 퇴근 버튼을 누르기 전에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저녁 먹었어?’답장은 한참 뒤에 왔다.‘아직. 회사 근처야.’‘국밥 괜찮으면 1시간 볼래?’재민은 전화를 걸지 않았다.‘괜찮아. 네 회사 앞으로 갈게.’두 사람은 화려한 식당 대신 골목 안 국밥집에 앉았다. 예전에 데이트할 때 자주 오던 곳은 아니었다. 서연은 순댓국, 재민은 돼지국밥을 주문했다.“기획전 잘 나와서 다행이다.”“네가 전시실 제품 안 가져왔으면 촬영 다시 했어야 해.”“그 얘기 또 고맙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Read more

제48화. 무슨 자격으로

토요일 오후, 서연은 804호 거실 바닥에 겨울 장식 상자를 펼쳤다.봄이가 지난주부터 같이 트리를 꺼내 달라고 졸랐고, 서연은 저녁 약속이 없는 날을 골라 오겠다고 했다.“이모, 이건 내가 걸 거야.”봄이는 금색 별 장식을 가슴에 안았다. 태주는 창고에서 꺼낸 작은 나무를 조립하고 전구 선을 풀었다.“작년에는 엄마가 여기다 걸었어.”봄이가 가운데 가지를 가리켰다.“기억나?”“사진에 있어.”태주는 휴대전화에서 지난해 사진을 찾아 보여 줬다. 서희가 트리 옆에 앉아 봄이의 머리에 금색 별을 올려놓고 있었다. 웃다가 눈을 감은 얼굴이었다.상자 바닥에는 서희가 종이점토로 만든 장식도 있었다. ‘봄이 3살’이라고 적힌 삐뚤한 글씨와 작은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었다. 태주는 그것을 가장 잘 보이는 앞쪽 가지에 걸었다. 서연은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엄마 눈 감았네.”“네 머리에 별 씌우다가 웃은 거야.”“올해는 아빠한테 할래.”봄이가 별을 들고 달려들자 태주는 고개를 숙였다. 서연은 둘의 사진을 찍어 서희 사진 다음 장에 남겼다.장식을 다 건 뒤 셋은 거실 불을 끄고 전구를 켰다. 봄이는 색이 바뀔 때마다 손뼉을 쳤다. 서연은 소파 끝에 앉아 지난해와 올해 사진을 차례로 넘겼다. 한 장이 다음 장을 없애지 않았다.저녁은 태주가 끓인 닭볶음탕이었다. 봄이가 밥을 다 먹고 방에서 색칠책을 가져오자 태주가 서연에게 물었다.“지난번 사람은 어떻게 됐어?”“누구요?”“전 약혼자.”서연은 물컵을 내려놓았다.“한 달만 다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Read more

제49화. 한 걸음 뒤에서

월요일 점심 무렵, 서연은 회사 탕비실에서 종이컵에 물을 받다가 태주의 이름이 뜬 화면을 보았다.‘토요일 일은 내가 잘못했어. 네가 누구를 만나는지 따져 물을 권리는 나한테 없어. 미안하다.’두 줄짜리 문자를 세 번 읽었다. 변명도, 재민에 대한 질문도 없었다.서연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답을 썼다.‘사과해 주셔서 고마워요. 저도 말이 세게 나간 건 죄송해요.’보내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져야 했다. 그런데 태주의 답은 한참 뒤에도 오지 않았다. 읽음 표시만 남았다.그날 저녁에는 봄이에게서 영상 통화가 왔다. 봄이는 앞니 빠진 자리를 혀로 건드리며 유치원에서 받아 온 글자 놀이 종이를 자랑했다.“이모, 나 별 열 개 중에 아홉 개야.”“하나는 왜 못 받았는데?”“‘겨울잠.’ 나는 ‘겨울참’이라고 썼어. 겨울은 진짜 참아야 되잖아. 추우니까.”서연이 웃자 화면 밖에서 태주의 웃음소리도 희미하게 났다. 평소 같으면 휴대전화를 넘겨받아 저녁은 먹었느냐고 물었을 사람이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보이지 않은 얼굴이 화면의 가장자리에만 숨었다. 숨은 얼굴이 한 걸음 뒤의 거리였다.“아빠는?”“설거지해. 아빠가 오늘은 내가 이모랑 오래 말해도 된대.”말은 다정했지만 이상했다. 태주가 통화 시간을 양보했다기보다 자신은 끼지 않겠다고 정한 것처럼 들렸다.통화가 끝난 뒤 서연은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봄이가 원하던 눈사람 모양 연필깎이가 회사 근처 문구점에 있었다. 곧바로 봄이의 음성 답장이 왔고, 태주는 엄지손가락 표시 하나만 보냈다.며칠 동안 비슷했다.봄이의 등원 준비나 주말 약속에 관해 꼭 필요한 연락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Read more

제50화. 지금의 우리

일요일 오후 3시, 서연은 시립미술관 매표소 앞에서 재민을 만났다.재민은 약속보다 10분 먼저 와 있었다. 예전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짙은 회색 코트에 운동화를 신었다. 손에는 종이 표 두 장만 들려 있었다.“꽃은 안 샀어.”“왜 만나자마자 보고부터 해?”“전에 네가 전시 보러 갈 때 꽃다발 들고 다니는 거 싫다고 했잖아.”서연은 웃다가 잠깐 멈췄다. 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종이 표만 들린 재민의 손을 보았다. 재민은 표 한 장을 건네고 먼저 전시장으로 들어갔다.사진전의 제목은 《남은 자리》였다. 식사가 끝난 식탁, 불 꺼진 세탁소, 한 사람의 신발만 놓인 현관 같은 사진이 이어졌다.서연은 오래된 아파트 부엌 사진 앞에 섰다. 싱크대 옆에 마른 행주 세 장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누가 빨았고 누가 걷을지 정해진 집 같았다.“이런 사진 좋아했나?”재민이 한 걸음 떨어져 물었다.“예전엔 안 좋아했지. 사람이 안 나오니까 심심하다고 했어.”“지금은?”“사람이 다 보이잖아. 안 나왔는데도.”재민은 사진 대신 서연을 보았다가 곧 시선을 돌렸다. 무엇을 떠올렸느냐고 묻지 않았다.다음 전시실에서는 초등학생쯤 된 아이가 아빠 손을 잡고 오디오 안내기를 눌렀다. 서연은 무심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봄이가 아침에 보낸 눈사람 그림이 알림 화면에 떠 있었다. 태주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급한 일 있어?”“아니. 조카가 그림을 보냈어.”“답해. 여기서 기다릴게.”서연은 전시장 구석으로 비켜 서서 눈사람에 목도리를 그려 넣은 사진을 칭찬했다. 봄이는 곧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Read more
PREV
1
...
34567
...
14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