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Chapter 51 - Chapter 60

140 Chapters

제51화. 필요할 때만

월요일 아침, 서연은 씻어 말린 국통 두 개를 쇼핑백에 넣었다. 발표회까지 열흘도 안 남았으니 퇴근길에 804호 경비실에 맡길 생각이었다.태주에게 시간을 묻는 대신 메시지만 보냈다.‘오늘 국통 경비실에 두고 갈게요. 봄이 눈사람 연필깎이도 같이요.’답은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왔다.‘발표회 날 받아도 돼. 일부러 오지 마.’일부러 오지 말라는 말이 배려라는 건 알았다. 쇼핑백보다 먼저 무거웠다. 원룸에서 해솔아파트까지는 버스를 갈아타야 했고, 월요일 퇴근길은 늘 막혔다.서연은 쇼핑백을 책상 아래 밀어 넣었다.‘그럴게요.’겨울 침구 기획전은 예상보다 주문이 길게 이어졌다. 오전 회의에서는 재고를 더 풀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서연은 반품률이 안정될 때까지 이틀만 보자고 했다. 일을 설명하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점심을 먹고 돌아오자 봄이에게서 음성 메시지가 와 있었다.“이모, 연필깎이 오늘 안 와도 돼. 내 연필 아직 뾰족해.”끝에서 태주가 “그런 말까지 안 해도 돼”라고 하는 소리가 작게 섞였다. 봄이는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자기가 들은 말을 자기 방식으로 정리한 모양이었다.서연은 웃는 얼굴을 붙여 답했다.“발표회 날 가져갈게. 그때까지 몽당연필 만들지 마.”봄이와의 약속은 달라지지 않았다. 태주가 거리를 둔다고 아이에게 먼저 다가갈 권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무엇을 하나 보내려 해도 그 집을 지나야 했다.***수요일 저녁에는 재민이 저녁 사진을 보냈다. 야근하면서 먹는 삼각김밥과 컵라면이었다.‘이런 것도 보고해야 하나 싶지만, 안 보내면 또 예전처럼 좋은 모습만 보여 주는 것 같아서.’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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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이모입니다

수요일 오후 1시 40분, 서연은 새봄유치원 강당 앞에서 태주를 만났다. 태주는 봄이의 외투와 물병이 든 가방을 들고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흔적이 셔츠 소매의 접힌 자국에 남았다. “회의는?” “오전으로 옮겼어요. 형부는요?” “반차 냈어.” 두 사람은 그 말만 나누고 나란히 강당으로 들어갔다. 태주는 셋째 줄 가운데에 잡아 둔 자리를 가리켰다. 서연과 좌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으려다가 뒤에서 들어오는 사람에게 길을 비켜 주느라 바로 옆에 앉았다. 서연은 가방에서 국통과 눈사람 연필깎이를 꺼냈다. “이건 끝나고 봄이에게 주세요.” “들고 오느라 무거웠겠다.” “통 두 개예요.” “그래도.” 태주가 쇼핑백을 자기 발밑에 놓았다. 며칠 만에 들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서연은 무대 커튼만 바라봤다. 발표회는 봄이네 반 아이들의 합창으로 시작했다. 봄이는 보라색 리본을 단단히 묶고 두 번째 줄 맨 끝에 섰다. 흰 타이츠 길이는 잘 맞았고 검은 실내화 이름표는 객석에서도 보일 만큼 컸다. 아이들은 노래보다 반 박자씩 빠르거나 늦었다. 봄이는 자기 차례가 아닌데도 입을 크게 벌렸고, 옆 친구가 동작을 잊자 손을 살짝 올려 방향을 알려 줬다. 첫 곡이 끝나자 태주는 촬영을 멈추고 화면을 확인했다. 무대가 기울어져 있자 다시 수평을 맞췄고,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표시가 뜨자 가방에서 보조 충전기를 꺼냈다. “그것도 챙겨 왔어요?” “지난 운동회 때 중간에 꺼졌거든.” 서연은 더 묻지 않았다. 태주가 짧은 충전선을 꽂고 다시 휴대전화를 들었다. 옆에서 봄이를 찾느라 화면을 조금씩 옮기는 손을 보니, 무대 위 아이가 또렷이 담기겠구나 싶었다. 서연은 웃다가 눈가를 눌렀다. 태주는 촬영 중인 휴대전화를 내리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울어?” “안 울어요.” “목소리가 그런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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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기대는 사람

토요일 오전, 태주는 봄이를 데리고 명자의 집에 갔다. 발표회 영상을 큰 화면으로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부탁 때문이었다.명자는 소파 가운데에 봄이를 앉히고 같은 영상을 세 번이나 돌려 봤다. 봄이가 박자를 놓친 장면에서는 웃었고, 옆 친구에게 동작을 알려 주는 장면에서는 눈가를 훔쳤다.“우리 봄이가 언제 이렇게 컸니.”“할머니, 나 내년에는 학교도 가.”“그러니까. 할머니보다 더 바빠지겠네.”태주는 주방에서 귤을 씻어 왔다. 명자는 영상을 멈추고 휴대전화 사진을 넘기다가 세 사람이 함께 찍힌 사진에 손을 멈췄다.“서연이도 왔구나.”“봄이가 오라고 했어요.”“잘했네. 정숙 씨는 아직 마음이 힘든 모양이고.”태주는 대답 대신 봄이에게 귤껍질을 토끼 귀처럼 벗겨 주었다. 사진 속 서연은 아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웃고 있었다. 명자는 오래 들여다보지 않고 다음 사진으로 넘겼다.점심 뒤 봄이가 작은방에서 낮잠든 사이, 명자가 보리차를 내왔다.“유경이한테는 내가 미안하다고 했다.”“왜 어머니가 미안해요. 제가 준비도 안 하고 나간 건데.”“내가 자꾸 만나 보라고 밀었잖니. 넌 마음도 없는데. 앉혀 놓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태주는 찻잔 가장자리를 만졌다.“유경 씨는 괜찮은 사람이었어요.”“괜찮은 사람이랑 살 수 있으면 세상에 이혼이 왜 있겠니.”명자는 마주 앉지 않고 식탁 끝의 마른 행주를 개었다.“겨울방학 일정은 정했니?”“돌봄교실 신청했어요. 제가 아침에 보내고, 화요일은 어머니가 지금처럼 데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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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넘지 않으려고

일요일 오후, 서연은 거래처 쇼룸 점검을 마치고 종로의 사무용 건물 앞에 섰다. 태주의 회사까지 걸어서 10분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오전이었다.가방에는 발표회 날 가져갔다가, 헤어질 때 건네지 못하고 도로 가져온 국통 두 개가 들어 있었다.서연은 태주에게 사진을 보냈다.‘근처에 왔어요. 회사에 계시면 통 맡기고 갈게요.’답은 곧 왔다.‘일하는 중이야. 1층으로 내려갈게.’태주는 안전모 없이 작업 점퍼만 입고 건물에서 나왔다. 주말 현장 보고를 정리하다 나온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일요일에도 일해요?”“연말 전에 끝낼 게 있어서. 너는?”“쇼룸 점검요. 이건 국통.”서연이 쇼핑백을 내밀자 태주가 받았다. 고작 몇 초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대로 건물 처마 밑에 서 있었다.“커피 한 잔 할래?”태주가 먼저 물었다.길 건너 카페는 자리가 거의 비어 있었다. 서연은 따뜻한 차를, 태주는 검은 커피를 주문했다. 각자 계산하려다 태주가 자기 카드를 먼저 내밀어 두 잔 값을 결제했다.“국통 갖다준 품값이야.”“봄이가 보낸 국이라면서요.”“후추는 내가 넣었어.”태주는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다 작은 통 하나를 꺼냈다. 뚜껑 모서리에 ‘서희’라고 희미하게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이건 네 원룸에 있던 거지?”“언니가 반찬 담아 줬던 통이에요. 제가 가져왔다가 지난번에 같이 보냈나 봐요.”“다시 가져갈래?”서연은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ldquo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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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일요일 밤, 서연은 재민의 메시지를 2시간 동안 열어 둔 채 답하지 못했다.‘이번 주 수요일 저녁 괜찮아?’약속을 잡는 데 오래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수요일은 야근도 없었고, 12월 27일까지 만나 보기로 한 한 달도 아직 일주일 남아 있었다.서연은 짧게 답했다.‘괜찮아. 저녁 먹자.’곧바로 장소가 왔다. 회사 근처, 전에 갔던 국밥집이었다. 특별한 날처럼 꾸미지 않은 선택이 고마웠다.***월요일 아침에는 태주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봄이가 발표회에서 받은 종이 메달을 목에 걸고 아침밥을 먹는 모습이었다.‘영상에서 이 장면 빠졌다고 보내 달래.’서연은 사진을 확대해 보고 웃었다.‘메달 차고 밥 먹으면 국물 묻는다고 전해 주세요.’태주의 답에는 오래간만에 한 줄이 더 붙었다.‘이미 묻었어. 닦다가 글자 번짐.’피하지 말라고 한 뒤 돌아온 첫 쓸데없는 말이었다. 서연은 웃는 얼굴을 붙였다가 지우고, ‘봄이답네요’라고만 보냈다.사라졌던 대화가 돌아오자 안심부터 되는 자신이 싫었다. 재민과 약속을 잡아 둔 채 다른 사람의 한 줄에 마음이 풀리는 일은 정직하지 않았다.***화요일 점심에는 민아가 서연의 도시락을 들여다보며 물었다.“내일 윤 팀장 만난다며. 표정은 왜 장례 치르러 가는 사람 같아?”“끝내려고.”민아의 젓가락이 멈췄다.“강 형부 때문이야?”서연은 대답 대신 식은 계란말이를 반으로 잘랐다.“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하지 않으려고 하는 말이 있다고 했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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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언니를 사랑한 채로

성탄 전날, 서연은 퇴근하자마자 부모님 집으로 갔다. 정숙은 전을 부치고 있었고 동식은 베란다에서 작은 전구를 꺼내 거실 창에 걸었다.“올해는 하지 말자더니.”서연이 외투를 벗으며 말하자 동식이 의자 위에서 대답했다.“봄이가 영상 통화할 때 반짝이는 거 보여 달랬어.”“아빠, 거기 말고 오른쪽이 더 처졌어.”“네 언니는 그냥 예쁘다고 했는데 넌 오자마자 잔소리냐.”언니라는 말에 세 사람의 손이 잠깐씩 멈췄다. 정숙은 뒤집개로 전을 한 번 더 눌렀고, 동식은 아무렇지 않은 척 전구 줄을 당겼다.서연은 의자 반대쪽을 잡았다.“언니는 아빠 떨어질까 봐 그랬지.”“너는 안 무섭고?”“지금도 무서우니까 빨리 내려와.”전구를 다 건 뒤 세 사람은 늦은 저녁을 먹었다. 식탁 가운데에는 서희가 좋아하던 동태전과 봄이에게 보낼 잡채가 놓였다. 정숙은 잡채를 반찬통에 나누어 담으며 태주가 내일 봄이를 데리고 올지 물었다.“아침에 자기들끼리 보내고 오후에 영상 통화만 한대. 봄이가 사람 많은 데 오래 있으면 아직 피곤해하잖아.”“그래. 애 아빠가 알아서 잘 정했겠지.”정숙은 아쉬운 얼굴로 잡채를 다시 뒤적였다. 반찬통 하나에 담기에는 넉넉한 양이었다. 더 오라고 하지는 않고, 식혀서 보내려는 듯 뚜껑을 옆에 내려놓았다.동식이 서연에게 소주잔을 내밀었다가 정숙의 눈치를 보고 다시 물병을 들었다.“재민이는 요즘도 만나냐?”서연은 젓가락으로 잡채를 한 번 뒤집었다.“끝냈어.”“왜?”정숙이 묻자 동식이 아내의 팔을 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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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12월 27일 저녁, 서연은 원룸 달력에 남아 있던 작은 동그라미를 검은 펜으로 지웠다. 원래라면 재민과 한 달을 계속 만날지 결정했을 날이었다.이미 나흘 전에 끝낸 약속인데도 날짜를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다.서연은 태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잠깐 통화할 수 있어요?’전화는 곧 걸려 왔다.“무슨 일 있어?”“봄이는요?”“어머니 집에서 자.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가.”서연은 안심했다. 아이가 없는 시간을 확인하는 일이 전에는 필요하지 않았다.“저, 재민이랑 끝냈어요.”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태주는 왜라고 묻지 않았다.“그 말은 형부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왜 내가 알아야 해?”차갑지 않은 질문이라 더 대답하기 어려웠다.“형부가 전에 하지 않으려고 한 말이 있었잖아요.”“서연아.”“전화로 할 얘기 아닌가 봐요.”태주는 한참 뒤 집 근처 카페가 아직 열려 있다고 했다. 서연은 외투를 다시 입었다. 누구도 만나자고 강요하지 않았는데, 둘 다 전화를 끊은 뒤 나갈 준비부터 했다.카페는 폐점까지 1시간도 남지 않아 손님이 없었다. 태주는 창가가 아닌 안쪽 자리를 골랐다. 서연은 맞은편에 앉아 장갑을 벗었다.“재민 씨가 또 뭐라고 했어?”“그 사람 잘못 아니에요.”“그럼 왜 끝냈는데.”“다른 데 마음이 걸린 채로 만나는 게 정직하지 않아서요.”태주의 턱이 굳었다.“나 때문이야?”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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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평소처럼

수요일 오후, 서연은 봄이와 미리 약속한 달력 만들기를 위해 804호에 갔다. 정기 돌봄도, 태주와 둘만 만나기 위해 만든 자리도 아니었다.봄이가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이모, 빨리 와. 아빠가 숫자 스티커를 거꾸로 샀어.”“거꾸로 된 숫자를 어떻게 사.”“칠이 없어. 일이 두 개야.”거실 바닥에는 색지와 스티커, 풀, 안전가위가 펼쳐져 있었다. 태주는 식탁에서 노트북으로 현장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었다.“왔어?”“네.”“저녁 먹고 가. 봄이랑 약속한 날이니까.”그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서연도 누구와 끝났는지, 왜 지난 일요일 전화를 했는지 꺼내지 않았다.봄이는 열두 장의 색지를 월별로 나누고 가족 생일에 별표를 붙였다. 엄마 생일에는 보라색 별을 골랐고, 아빠 생일에는 파란색, 자기 생일에는 금색을 붙였다.“이모 생일은 빨강.”“왜 나만 빨강이야?”“이모가 떡볶이 좋아하니까.”서연이 웃으며 숫자 스티커를 다시 세자 일은 두 개가 아니라 네 개였고 칠도 봉투 바닥에 붙어 있었다.태주는 통화를 하러 부부방으로 들어갔다. 닫히기 전 문틈으로 장롱 위 결혼앨범이 보였다. 서연은 고개를 돌려 풀 묻은 봄이의 손부터 닦아 줬다.“엄마 생일에는 뭐 써?”봄이가 물었다.“봄이가 하고 싶은 거.”“케이크 먹고 싶어.”“그럼 ‘엄마 생각하면서 케이크’라고 쓰자.”봄이는 삐뚤빼뚤하게 문장을 적었다. 글씨가 칸을 넘어가자 서연이 달력 모서리를 잡아 주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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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올해의 마지막 말

목요일 오후부터 소담살림 사무실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분위기가 돌았다. 미경은 5시가 되자 남은 주문표를 서랍에 넣고 직원들을 근처 식당으로 데려갔다.“오늘은 일 얘기 금지. 내년 매출 얘기도 금지.”미경이 잔을 들자 네 사람이 웃었다. 서연은 맥주를 반 잔만 받았다. 건배 뒤에는 보리차를 마셨다. 술에 기대 무슨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민아는 맞은편에 앉아 서연의 빈 잔을 한 번 보고는 묻지 않았다. 재민과 끝났다는 말은 이미 들었다. 이유를 묻다가 서연이 대답하지 못한 것도 알고 있었다.“새해 첫날엔 뭐 해?”“부모님 댁 가려고.”“낮에?”“응. 떡국 먹고 원룸으로 올 거야.”민아가 고기를 뒤집으며 낮게 말했다.“혼자 있는 게 벌 같으면 우리 집 와.”“벌로 있는 거 아니야.”“그럼 됐고.”그 말이 고마워 서연은 웃었다. 누구와 끝난 뒤의 빈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급히 메우지 않아도 됐다. 다만 빈자리가 아니라 이미 오래 있던 사람을 모르는 척할 수 없게 된 것이 문제였다.8시가 조금 넘어 회식이 끝났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진눈깨비가 가로등 밑을 비스듬히 흘렀다. 서연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어제 804호에서 돌아와 받은 ‘잘 자’가 마지막 대화였다.***태주의 집에서는 봄이가 거실 바닥에 새 달력을 펼쳐 놓고 있었다. 오늘 칸에는 금색 별을 세 개 붙였고, 자정까지 깨어 있겠다며 큰소리를 쳤다.“12시 되면 일곱 살 되는 거지?”“생일 지나야.”“학교 가면 일곱 살이라고 하잖아.&rdq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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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형부라는 이름

새해 첫날, 서연은 부모 집에서 떡국을 먹었다. 정숙은 한 살 더 먹었다며 웃었고 동식은 말없이 서연의 그릇에 고기를 더 얹었다. 서희가 쓰던 꽃무늬 대접은 찬장 안에 그대로 있었다.태주에게서는 낮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서연도 하지 않았다. 자정의 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너무 선명해서 낮의 가족들 앞에서는 꺼낼 수 없었다.밤에 봄이가 세뱃돈 봉투를 들고 찍은 사진이 왔다. 태주가 아니라 명자가 보낸 가족 대화방 사진이었다. 서연은 봄이에게만 답하고 휴대전화를 덮었다.토요일도 두 사람은 안부를 묻지 않았다. 보고 싶다는 말까지 해 놓고 만나지 않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조심이었다.***월요일 오후, 서연은 겨울 침구 촬영에 쓸 천 견본을 돌려주러 종로 거래처에 갔다. 일을 마치니 4시 40분이었다. 밖에는 아침부터 흐리던 하늘에서 굵은 눈송이가 내려오고 있었다.지하철역으로 가려면 태주의 회사가 있는 골목을 지나야 했다. 우연히 마주치지 않으려고 길을 바꿀 수도 있었다. 서연은 처마 아래 서서 한참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그리고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근처예요.’10초도 지나지 않아 답이 왔다.‘어디?’서연은 거래처 간판이 보이는 골목 사진을 찍었다. 핑계를 덧붙이지 않았다. 봄이의 물건도, 돌려줄 국통도 없었다.‘커피 마실래요?’이번 답은 조금 늦었다.‘응.’태주는 15분 뒤 검은 우산을 들고 나타났다. 우산 가장자리에 붙은 눈송이가 바람에 흩어졌다. 작업 점퍼 어깨에는 톱밥이 몇 조각 붙어 있었다. 서연을 발견한 그는 걸음을 늦췄다. 보고 싶었다고 말한 뒤 처음 마주 보는 얼굴이었다.“많이 기다렸어?”“아니요.”&ld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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